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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지은이 : 석 지영 옮긴이 : 송 영수 지은이 : 석 지영 옮긴이 : 송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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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지은이 : 석 지영 옮긴이 : 송 영수 지은이 : 석 지영 옮긴이 : 송 연수
펴낸곳 : (주)북하우스 제작자 : 이 필재 작성자 : 박기원

2 도 서 소 개 석 지영 / (주)북하우스 석 지영 교수의 즐기며 일하는 강력한 메시지 하버드 종신교수의 예술,
인생, 법의 철학 주 제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며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라.

3 책으로 들어가기 하고 싶은 일을 찾을 것. 일을 놀이처럼 즐길 것.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위험을 감수할 것.
적절한 시점에 하던 일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면서 스스로에게 상을 줄 것. 깊은 우정을 맺고 그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힘쓸 것, 크건 작건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 젊은이에게 조언자가 되어주고 스스로의 조언자도 구할 것. 다른 사람들을 가르침으로 배울 것. 즐길 것. (P.10)

4 01. 낮선 곳에서 뿌리내리기-1 1973년, 아버지가 내과 레지던트로 일하던 병원에서 나는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국 베링거 인겔하임 제약회사의 독일인 사장의 특별 비서관이었다. 1979년 여름, 내가 만 여섯 살, 내 동생이 만 네 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뉴욕으로 떠났다. 영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퀸즈 자메이카에 위치한 천주교 재단의 홀리 패밀리 초등학교에 1학년으로 들어갔다. 여섯 살 어린이의 경우, 언어를 관장하는 뇌는 유연하다. 이해할 수 없던 소리가 일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단어들이 모여 이해의 틀을 이루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의 모양새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5 01. 낮선 곳에서 뿌리내리기-2 미국에 온 지 2년이 채 안 되어 나는 영어로 생각하고 꿈을 꾸게 되었다.
이제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필요하면 소통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는 아직도 두려움과 고립의 장소였다. 나와 학교 사이에 놓인 틈은 더 이상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넘어서기 힘든 것이었다.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렵고 꺼려졌다. 매일의 학교생활에서 나는 내성적 성향 때문에 여전히 소극적 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남들 앞에 나서도 된다는 명확한 허락과 뚜렷한 길이 제시되는 경우마다, 나는 나서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6 01. 낮선 곳에서 뿌리내리기-3 책 읽기는 나의 포근한 피난처가 되었다. 책에 나오는 다른 이들의 생각과 느낌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그들이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책 읽기에 중독된 나는 매해 여름마다 도서관에서 한 더미씩 책을 대출하여 무아지경으로 읽어댔다. 하도 빨리 읽어 치워 이틀이 멀다 하고 새 책을 빌려와야 했다. 이를 닦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나는 마지못해 덮었던 소설책을 다시 펼치고 싶어 안달이 났다.

7 01. 낮선 곳에서 뿌리내리기-4 어머니는 딸들이 ‘다재다능’하기를 원했다.
어머니는 얌전하고 그리 엄하지 않은 동네 선생을 대체할 적절한 피아노 선생님을 찾아냈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피아노 학원을 하고 있는 랭 선생님이었다. 자리가 나지 않는다며 세 번이나 레슨 요청을 거절한 선생님은 어머니의 애걸과 설득에 못 이겨 나를 만나보기만 하겠다고 동의했다. 랭 선생님의 앞에서 나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쳤다. 내 실력은 별로였지만, 순전히 어머니의 집요함이 귀찮아서 랭 선생님은 나를 키워보겠다고 했다.

8 02. 고통과 탐색의 시간-1 미국의 수많은 한인들에게 한인교회는 영적이나 공동체적인 면에서 매우 깊이 있고 생생한 경험을 선사했고,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에 온 지 5년 후 우리 가족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어느 날, 로젠탈 선생님이 나를 불러 초등학교 졸업 후 진학할 학교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다. 수학과 영어, 그리고 에세이로 구성된 시험을 마쳤을 때 합격이라는 감이 왔다. 헌터스쿨에 입학하기 1년 전부터 나는 조용히 SAB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SAB의 연례 오디션에 어머니를 끌고 갔다. 딸이 오디션에 떨어져 발레 병에서 해방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9 02. 고통과 탐색의 시간-2 SAB 글리보프 여사는 내가 합격했으며 매일 SAB에서 방과 후 발레 수업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부모님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내 생명이 걸린 양 애걸했다. 대입 내신이 9학년부터 들어가니 그 전까지는 괜찮지 않느냐는 내 주장에 마음이 흔들린 부모님은 마침내 SAB의 등록을 허락했다. 9학년이 되면 반드시 그만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더 이상은 협상 불가능한, 최종 조건이었다. 내가 올라가게 된 상급반은 낮에 수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학교와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슬픔을 혼자서 속으로 삭였다. 오직 SAB의 친구들만이 나를 이해하며 같이 울었다.

10 02. 고통과 탐색의 시간-3 나는 계속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으나 깊은 열정이 있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 해 여름 끝 무렵 치러질 줄리아드 예비학교 입학시험에 나를 지원시키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나는 시와 소설, 미술, 극장 공연가 음악 등 내 마음을 빼앗고 공부를 방해했던 것들과 수업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연결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상위권 성적이 아니었고 꾸준히 공부하는 버릇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철학과 문학 시간에 활기를 띠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들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1 02. 고통과 탐색의 시간-4 여름이 끝나고 바로 대학 입시철이 시작되었다. 내 성적은 헌터스쿨의 최상위권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선생님들은 예일대에 지원해 보라고 나를 격려했다. 내가 가진 예술적 재능과 음악활동을 활용하면 예일대가 좋아할 만한 지원서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예일대에 조기지원 했다. 소식은 봄과 함께 왔다. 늦잠에 빠져 있던 어느 토요일 아침, 막내가 내 얼굴 위로 커다란 봉투를 흔들며 나를 깨웠다. 합격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예일은 내가 이 학교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2 03. 자유를 향하여-1 난 대학을 사랑했다. 부모님은 단순히 나를 대학에 보낸 게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를 자유롭게 놓아준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나는 다른 수많은 학생들처럼 경비를 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심지어는 무엇을 공부하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할 일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기 일쑤였고, 수업 시간에는 집중하지 못했고, 수업과제는 자주 게을리 했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예술과 관련된 철학적 궁금증이었다.

13 03. 자유를 향하여-2 예일대 마지막 해, 나는 감히 마셜 장학생에 지원했다. 마셜 장학금을 타면 수년간 전액지원을 받으며 영국에서 대학원 과정 공부를 할 수 있다. 나는 선발되었다. 마셜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할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나는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대학의 현대언어학과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나는 보들레르와 프루스트에 대한 저명한 학자인 말콤 보위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는 엄청난 행운을 누렸다. 말콤은 내게도 논문을 매일 조금씩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너무나 어렵게 글을 썼고, 아주 심하게 막힌 글길을 한 번에 뚫어버릴 정도의 글발은 가끔 가다 터지곤 했다. 말콤 덕택에 나는 매일의 글쓰기가 무대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14 03. 자유를 향하여-3 예일대의 마지막 학기를 마칠 무렵, 나는 미래의 남편을 만났다. 그의 부모님은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부모님은 그가 한인이 아니라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각자의 가족 사이에서 눈물지으며 싸우는 몇 년의 아픈 기간이 뒤따랐고, 우리는 어쨌든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1999년 가을 나는 하버드법대에 입학했다. 나는 법에 완전히 빠졌다. 강의실에 있으면 흥분으로 몸이 짜릿짜릿했다. 다만 예술과 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던 나는 법의 복잡한 자료분석적이고 수행적인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즐길 뿐 아니라, 법의 언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제약과 규칙을 즐길 수 있는 밑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하버드법대의 수업에서, 나는 매일 손을 들고 발언을 했다. 점차 내 목소리에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15 03. 자유를 향하여-4 불법행위법을 가르치는 모튼 호르위츠 교수는 내게 연구조교가 되어달라고 청했고, 나는 바로 받아 들였다. 1학년 때에 나는 또한 라니 기니어 교수의 연구조교직에 지원했다. 1학년의 마지막은 ‘하버드법률평론지’경쟁으로 마감했다. 편집자를 선발하기 위해 혹독한 7일간의 과정을 통해 560명의 학생 중 약 40명의 정예를 추려내는 대회였다. 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하버드법률평론지’의 편집자가 되었다. ‘하버드법률평론지’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 중 가장 근사한 일은, ‘하버드법률평론지’에서 가깝게 일한 이들 동료들이 나의 아주 좋은 친구들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16 03. 자유를 향하여-5 나는 연구와 글쓰기 작업에 대해 빌이 내게 준 조언을 내 글쓰기의 원칙으로 삼고, 내 학생들에게도 요구하고 있다. 말콤이 옥스퍼드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즉, 과하게 높은 기대를 품지 말고 규칙적으로 글을 쓸 것. 주제에 대해 다 알지 못하더라도 글을 쓰기 시작할 것. 확신이 서지 않는 단어라도 일단 써 보고, 내용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완전히 다시 쓸 것. 연구하고, 읽고 다시 쓸 것. 이 과정을 반복할 것. 글쓰기는 배움의 방법이지, 학습을 마친 마지막 단계에 하는 것이 아니었다.

17 03. 자유를 향하여-6 하버드법대를 졸업하던 날, 나의 스승 기니어가 내 귀에 속삭였다. 멀지 않은 장래에 내가 당신의 동료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졸업 후 나는 워싱턴 D.C. 연방순회항소법원의 해리 T. 에드워즈 판사의 법률서기로 근무 했다. 내가 상사로 모셨던 그 해 이후, 내 인생과 경력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나를 돌보고 베풀기 위해 그가 쏟은 노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에드워즈 판사를 위해서라면 나는 기차 앞에 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18 03. 자유를 향하여-7 맨해튼검찰청의 신임검사로서 내가 맡아 처리하고 관찰했던 가정폭력 사건들을 통해서, 나는 독특하게 발전중인 법 체제를 생생하게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경험을 겪은 후 나는 가정폭력 법률을 통한 ‘집’에 대한 국가의 통제증가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탐구하는 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논문 진도를 나가고 있으면서, 나는 2005년 가을학기를 목표로 법대 교수직에 지원할 계획을 세웠다. 나는 임신을 한 상태였고 내 임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출산 예정일이 두어 주 앞으로 다가왔다. 며칠 후면 교원면접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키보드를 치고 있는 도중에 노트북 컴퓨터에서 희미하게 똑딱, 하는 소리가 나더니 컴퓨터가 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켜지지 않았다.

19 03. 자유를 향하여-8 아가와 어머니, 그리고 유모와 함께 집에 머물며 나는 잃어버린 논문을 재 창조하기 위해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나는 4개월 동안 이 과정을 하루 종일 반복했다. 그 후 마침내 논문이 완성되었다. 나는 ‘예일법률저널’에 논문을 투고 했고, 출간을 허락 받았다. 가족 여행차 방문한 아르헨티나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 앞에서 휴대전화를 받았다. 하버드법대 학장 엘레나 케이건은 내가 교수진에 지명되었다고 했다. 2006년 7월, 나는 조교수로 하버드 교수진의 일원이 되었다.

20 04. 하버드에서-1 하버드에서 나는 형법과 가족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글쓰기 솜씨 또한 훌쩍 나아지기 시작했다.
연구와 글쓰기를 통해, 배우고 창조하는 일에 집중하며 나 자신을 단련하는데서 나는 환희를 맛보았다. 하버드 캠퍼스를 걷는 내 얼굴에는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 상황의 제약 없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공간과 자유를 주는 직장을 이 세상에서 찾은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나를 매료시키는 것들이 이끄는 대로 어디든 자유롭게 축복받은 것처럼 따라갈 수 있다고 느꼈다.

21 04. 하버드에서-2 2010년 가을, 하버드법대 선임교수들은 내가 조교수로 있던 4년 동안 쌓았던 학문적 성과를 근거로 내게 종신교수직을 주기로 투표했다. 그리고 나는 정교수 지위와 함께 종신교수로 승진했다. 나는 하버드대의 첫 번째 여성총장 드루 파우스트와 하버드법대의 두 번째 여성학장 마사 미노우 밑에서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었다. 나는 법대 교수진에 진출한 첫 번째 동아시아계 종신교수이자, 첫 번째 아시아 여성 교수, 그리고 첫 번째 한인교수다.

22 04. 하버드에서-3 올리버 웬델 홈즈2세는,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만큼 법 안에서 위대하게 살 수 있다.” 고 썼다. 내게 있어, 법률 개념에 대한 연구와 법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은 법 안에서 위대하게 살기를 갈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교가 우선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학교는 사람을 형성하며, 그 사람들은 제도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신체와 정신, 가치와 미학, 기술의 숙련과 혁신적인 도약, 지적 습관과 사회적 관습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라. 학교는 사회의 토대이며, 실천이고, 표준이며, 포부다.

23 04. 하버드에서-4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나는 학교 선생이다. 그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법대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학생들이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우리 법대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고의 방법이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본원칙들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게 만드는 논리적 사고의 습관이다. 내가 한국인 학생들에게 가장 자주하는 조언은, 무엇이든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건, 글쓰기건, 힘들더라도 노력해서 그런 것을 익힐 기회를 찾으라는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 또한 연습이 필요하다. 쉬워질 때까지, 아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여 하고 또 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24 04. 하버드에서-5 나는 즐기고자 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는 것을 열망한다. 일을 놀이로 만들고자 한다.
가능한 자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으려고 한다.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삼고자 한다. 재미는 전염 되는 것. 재미만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도 할 만하다. 재미 없이는 난 살 수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물어보라. 너무나 재미있어 내 능력껏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가능하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라.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라.

25 “독서를 통한 자기경영 고급정보”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아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소크라테스- ◈ 작성자 : 박기원 프리랜서 ( 김철홍 대표위원 ( ○ 북 교정/교열 - 프리랜서 교정·교열 작업 경력 5년  - 경영, 경제, 역사, 여행, 건강, 수험, 기타 인문 분야 서적 130여 권을 교정·교열 ○ 중소기업 w/s 특강 강의 - 변화관리, 생존전략, 인생역정, 세일즈, 나도 1억 대박, 인생설계, 성공,자기경영, 자기관리, 자기계발 “독서를 통한 자기경영 고급정보” 네이버:자기경영노하우 카페 북칼럼에 공개합니다. 누구나 정보를 얻어 가실수 있습니다.” 행복, 자기관리, 자기경영, 자기계발, 시간관리, 목표관리, 재테크, 제2막 인생설계, 세일즈, 성공, 중소기업 경영, 자영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시길 원하시면 노크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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