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 강의 2
양반 양반의 일반적 이해 : 18세기 이후 증가. 양반제가 해체 서양은 지배층이 2%, 중국은 5%내외, 도쿠가와시대 일본은 6% 그럼 조선은? 지배양반 되기의 조건 1. 호적상에 유학 직역의 등재와 족보 보유 2. 유교적 의례의 준행과 그 다양한 특권 : 지배집단 내부의 家格이 서로 다름(도학>문장>충절>환관의 순서), 유교적 교양과 지식의 습득, 유교적 가치관을 굥유, 奉祭祀 接賓客 3. 문중과 동성촌락의 형성 : 45,000개 중에 15,000여개, 저명한 동성촌락은 1,685개(班村), 향약으로 주변마을 통제 유명선조의 후손으로서 이름 있는 터를 택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누대에 걸쳐 세거하면서 양반 가문으로서의 전통을 유지, 강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호적대장의 유학
문화유씨 가정보 (1565년)
한국의 동성촌락
조선후기 신분상승의 오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조선후기 신분제가 해체된다고 설명 양반-평민-노비라는 사회계층 18세기 이후 양반이 비대화하여 조선사회의 후진성 내지 정체성을 설명 후대의 연구자들은 양반층이 늘어난 반면 노비가 감소함을 주목하여 신분제가 허구화되어 조선사회가 해체되어 간다고 재해석 그러나..호적인구는 당시 인구의 반만 등재, 노비는 19세기가 되어도 소멸되지 않았음, 19세기 공노비는 혁파되어 감소해도 사노비는 존재 19세기 노비는 15%까지 하락하다가 중엽이후 25%로 증가 18세기 노비의 감소 : 노비의 도망으로 인한 양인화가 아니라 상전이 노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됨. 도망한 노비는 다른 상전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노비가 상전을 선택) 일제시대, 해방이후에도 반촌에 살던 하층민은 반촌을 떠나지 않음 노비가 도망을 하여 양인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 양인(농민)과 노비는 현실적으로 구분이 되었을까. 가족을 파는 自賣문서의 존재는 대부분 농민과 노비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증거.
양반 지향의 허와 실 冒稱幼學 : 유학을 함부로 칭하는 일을 비판하는 말 양반이 늘어났다는 말은 양반이 아니라 유학을 칭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의미 양반이라는 직역은 없음(유생, 유학, 한량) 국가에서는 양반이라는 말을 정의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18세기가 되면 군대가는 사람이 줄어듬, 지방 할당제 시행, 호적에 가짜로 유학이라 기재하는 사람이 증가(양반은 군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을 칭하기 위해 향교의 교생, 서원의 원생이 되는데 지방에서 묵인, 買鄕(재정확보) 조선후기에 양반가문에서 조상이 고려시대 호장직이었다는 것을 수치로 생각->몰이해 원래 향리와 양반은 같은 부류였다가 조선초기에 갈라짐 초계변씨의 경우 하급양반과 상급향리를 오고가다가 향리로 굳어짐
양반과 상인의 구분 조선의 건국 : 양천제 실시 – 양인(양반, 중인, 농민) + 천인(노비, 천민) 16세기 이후 : 반상제로 변화 – 양반(양반,중인)+상인(농민,노비) 비양반층 일체를 상인으로 범칭 양반의 분화 : 중종 20년 전가사변을 하면서 사족의 범주를 설정, 중종 30년 서리의 역승진출을 금지(잡직의 정직참여 금지, 정직참여불가자는 상인) 전가사변 불가자:문무과 출신의 사람과 자제, 내외 4조에 현관이 있는자 및 생원, 진사 양반과 상인 구분의 심화 : 향약의 보급과 교화 향약의 보급으로 가격에 따른 구분을 도덕적으로 평가 사족의 딸은 절개를 해야 하나, 상인의 딸은 그럴 필요 없음 常漢은 농민과 노비의 별칭, 무뢰배, 치한, 선조 무렵 등장 일반 백성의 공식적인 용어 常漢
현종5년 公義, 私義 논쟁 현종 4년 11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모화관에 친행하는 왕에 대한 배종을 회피하고자 하는 수찬 김만균이 사퇴하려는 데에서 비롯 김만균은 그의 조모 연산 서씨(김익희의 母)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점을 들어 私情으로 원수를 접대할 수 없다고 거부 그러나 김만균의 사직소는 허용안됨 서필원의 비판 : 공무수행을 위해서 사사로운 정의 허용은 부모에서 그치면 그만, 祖孫간은 父子와 차이가 있어서 사정보다 공무 수행이 우선 송시열의 재비판 : 김만균을 옹호, 조모의 복수에 대한 의리를 지켜주는 것이 人心과 天理를 유지하게 하는 의리에 합당한 조치, 세속적 군주권보다 도학의 권위를 우선시 서필원의 재반박 : 국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私義에 일정한 제한이 있어야 함을 역설, 벼슬하기 전에는 사의가 위주, 벼슬 이후에는 공의가 우선 현종 : 사의론에 비판적, 송시열의 산림계가 왕권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닌지 의심. “군상을 우습게 알고 모욕한다”, “군상을 경시한다”고 비난. 서필원의 파직으로 마무리, 산림계의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
稱念 어려운 전문용어가 다수 등장 칭념:불교경전에서 “칭송하여 생각한다”, 稱은 術한다의 의미->염원하는 것을 말한다. "전라도사 권문해가 지나다가 들렀다. 내가 稱念을 부탁했다“(미암일기) 부탁하여 물건을 얻어낸다는 의미. 부탁, 의뢰 중앙에 있는 관료나 지인이 새로 부임하는 신임지방관에게 부탁하는 일. 관직자 상호간에. 칭념자가 지방관에게 물품을 부탁하면 그 물품을 지방재정에서 충당->재정부족, 향리들이 메움->향리의 부정, 처벌대상이 아님 16세기 경제생활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역할이 큼. 관직자는 국가의 재물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로 경제생활 유지 "성주목사가 병사 張公의 칭념으로 米.太 각 1석과 酒.魚.果를 보내주었고, 병사가 특별히 청어 10마리를 보내주었다. 고맙다는 편지를 썼다“(묵재일기)->묵재일기의 저자 이문건은 경상도병사에게 칭념을 부탁했는데 병사는 이것을 성주목사에게 지시한 모양인지 성주목사가 이문건에게 쌀과 콩 각기 1석과 술과 물고기, 과일을 보내주었고, 병사 자신은 청어 10마리를 보내주었습니다.
실학과 민족주의 “우리나라는 땅이 중국과 가깝고 음성도 대략 중국과 같다. 그러니 온 나라 사람이 본래 말(한국어)을 깡그리 버린다 해도 안될 것이 없다. 그렇게 한 뒤라야 오랑캐라는 한 글자(夷)로 불리는 수치를 면할 수 있고, 수천리 우리나라 땅이 절로 주.한.당.송의 풍기를 갖게 될 것이니, 어찌 통쾌할 일이 아니겠는가“ – 박제가의 <북학의> 실학과 민족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저 우리는 조선사람이니, 말과 의복, 풍속, 법제를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초탈하여 시속을 어기고자 한다면, 망령된 사림이 아니면 미치광이다. 다만 생각과 도량만은 중국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 해서 어찌 꼭 중국에 가서 배워야만 하겠는가. 지금 경적(經籍)은 중국 사람이 만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잘 읽는다면 나의 생각과 도량이 째째해지지 않고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 박제가의 친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약간의 민족주의적 인식이 보임 박제가와 이덕무의 친구 유득공의 <발해고> 박제가와 이덕무, 유득공 모두 북학파, 실학파 민족의식에 충만해야 할 박제가는 왜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조선후기 산림황폐화 전근대 사회에서 산림은 연료, 목재 그리고 비료를 제공 인구 증가에 의해 식량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산림은 개간되어 경작지 산림이 헐벗고 농업생산성이 하락 온돌의 보급 또한 연료수요를 증가 “사대부집에서는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 인조실록 2년 3월5일 : 17세기 상황 "오늘날 온돌을 놓고 구들고래를 내는 제도는 舊時의 마루방을 꾸미던 풍속과는 아주 다른 바가 있다. 곧 시대를 타고 바뀐 것이다“ – 이규경의 <오주연문> : 19세기는 보편화 산에 대한 정부의 인식 변화 – 19세기의 남벌을 우려 인구의 증가와 함께 경지에 대한 수요도 증가 : 산간의 화전 개발 화전에 의한 산림의 황폐화
조선후기 산림황폐화 정부의 대책 : 화전을 현실로 수용하되 "산허리 이상"으로 표현된 난개발 억제 정책을 기본입장 "왜 이 나라가 이렇게 황폐한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설명은 참으로 한국적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능한 한 외국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연안은 황폐하게 되었으며 내륙에서는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 숲을 불살랐고, 언덕은 정상으로부터 토양이 씻겨 내려올 만큼 벗겨졌다는 것이다“ – 1898년 외교관 Sands 虎患 : 18세기 후반 26건, 19세기 3건. 18세기 후반 도성 안에 나타난 호환 8건 19세기에 호랑이 활동영역 단절 축소
조선시대 재판 재판기관 조항은 없고 재판절차, 법죄에 따른 형량, 형벌 절차를 규정 형벌권 : 流 이하(형조, 개성부, 감영), 笞 이하(군현), 사형(국왕만) 최고의 형벌권자이자 최종의 재판권자 : 국왕 조선시대 형벌 : 苔, 杖, 徒, 流, 死, (贖錢, 刺字, 노비몰수, 재산몰수) 재판관할(지방) : 자기 지역 군현, 피고가 있는 군현(원고는 피고지역에 고소) 재판관할(중앙) : 토지와 저택(한성부), 노비(장예원), 토지와 전택,노비,법률(형조) 재판순서 : 군현->감영->형조 사건에 대한 재심리 : 1. 담당관이 바뀔 경우 다시 호소, 2. 상급기관에 호소 3. 3번 소송 중에 2번 승리하는 자가 승소, 단 재판관의 오결은 승수로 치지 않음 형사, 민사, 행정소송의 구분은 모호 소지(고소장)의 제출은 양반이나 노비나 아무 제한이 없음 형사사건에서 가장 많은 소송은??
조선시대 재판 가장 많은 소송 : 산송(山訟) 민들이 호소하기 위해 낸 문서 : 민장(民狀) 재판 결과를 처리한 민장 위에 쓴 판결 : 제사(題辭) 민장과 제사는 판결문 및 증빙문서로 작용
산송(山訟)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1614년 영의정 심지원이 윤관의 묘 바로 위에 부친의 묘를 조성한 뒤에 일대의 땅을 받으면서 시작 1763년 파평윤씨에서 심지원의 묘를 파헤치고 청송심씨 처벌 요구 영조의 화해 요구->파평윤씨에서 반발 광복 이후에 돌담 설치 2005년 청송심씨 19기의 묘 이장으로 합의
정약용의 편지 중국은 문명한 것이 풍속이 되어 아무리 궁벽한 시골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서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데 방해받을 일이 없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서 서울 문밖에서 몇십 리만 떨어져도 태고처럼 원시사회가 되어 있는데 하물며 멀고 먼 시골이랴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에 높이 올라 권세를 날릴 때에는 빨리 산비탈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로서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서울에 붙어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지만, 앞으로의 계획인즉 오직 서울의 십리 안만이 가희 살 수 있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한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만약 하루 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 버린다면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뿐이다 –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19세기 사회의 현실을 반영
임진왜란 의병 다시보기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 1. ( ) 2. ( )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 1. ( ) 2. ( )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넘어서기 의병의 역할 : 일본군 진로 방해 의병이 일어난 이유 : 국가를 위한 봉기? 초기 관군은 속수무책 : 조선전기 군사제도(제승방략)의 문제점 드러남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 병사들이 모두 인심을 잃고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모두 밉게 여겼다. 그러다가 도내의 거족과 명인들이 유생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이에 관군과 의병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병사들 대개가 의병장과 화합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초토사 김성일은 요령있게 잘 조화시켰기 때문에 영남의 의병들이 그 덕분에 정중하게 대우를 받아 패하여 죽은 자가 적었다(선조실록 25년 6윌 기축) – 읽을 수 있는 것? 초기 의병은 관군과 비타협적 의병끼리도 합심이 안됨 정조대 <호남절의록>, 의병이 일어난 이유는?
조선후기 문중화와 사족 현대의 문중과 조선후기 문중의 차이 1) 19세기 이후 굴절되고 왜곡된 문중조직의 말기적 현상 2) 일제와 해방이후의 혼돈사회를 거치면서 더욱 증폭, 변질된 모습 3) 현대사회의 우리 주변에서 보여지는 가문 이기주의나 특정 이해의 반영모습 조선중기 사족들은 개인의 능력과 활동이 중심, 혈연은 부차적 가문의식도 크지 않음 : 적장자 중심이 아님 양계친에서 적장자 중심의 부계친족으로의 변화, 제사상속 및 상속상에서 장자 우대의 경향, 족보의 친족수록 범위의 축소, 입양제도의 변화, 그리고 동족마을의 형성이 특징은 18세기 이후의 모습
조선후기 문중화와 사족 문중화 경향 : 한 군현 내에서 유력 양반끼리 모이던 모습에서 같은 현조(顯祖-유명한 조상)를 모시는 가문 구성원끼리 뭉치는 경향 동족마을 형성 : 자신들만의 공간 조성 문중서원 건립 : 사적인 조직을 공적인 공론(公論)형성의 장으로 마련하여 자신들 위주로 주도 추숭, 정려, 신원, 추증 : 자신들의 현조의 행적을 재평가 신도비, 행장, 영당 : 선조의 유적을 현창 서원, 사우 : 국가에서 인정받은 건물 건립 파보, 족보, 문집의 간행 : 문중의 권위를 홍보 사족(양반)들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청라동 촌락 형성
청라동의 주요 경관
연산에 정착한 사족들 최종 승자는?
광산김씨 세거지 : 고정리 김집사당 돈암서원 김계휘신도비 모선재 김국광사당 연산영사재 양천허씨 정려비 영모재 광산김씨 종가 논산신풍리마애불 김장생 묘소 영사암
조선시대 대표가옥 분포
여러 종류의 가옥
윤증고택
족보의 위조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시대 다시보기 세종에 대한 인식 : 조선시대 눈부신 업적, 조선의 자주성 과학사상 그 유례가 드문 황금시대 15세기 전반기 세계 과학기술사에서 세종 때와 같은 유형의 발전은 어느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서방세계는 물론 아랍세계와 중국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 그러나.. 유교적 보편성과 조선적 자주성이 가지는 함의를 되새기는 일이 필요
세종시대 다시보기 풍토부동(風土不同) : 조선의 자주성을 이야기 할 때 하는 말 -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훈민정음> <농사직설> : 중국과 다른 자주적 농업기술(한전농법)이 아닌 오히려 중국의 강남 선진적인 농업기술(수도작농법)을 따라하기 위한 자구책 <향약집성방> : 자주성보다는 중국과 다른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인식 <훈민정음> : 한자를 읽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이 중요, 하층 백성들을 위한 한글이었는지 의심, <동국정운>의 서문을 보면, 중국과 말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서적에 한자에 적힌 성인의 도를 밝힐 수 없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를 창제했다는 암시. 고제(古制) 연구와 아악이 정비 : 중국의 고대의 제도를 복원 박연은 중국과 조선의 풍기(風氣)가 다르고 산출되는 기장도 달라서 고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세종은 끝내 이를 굽히지 않고 중국 삼대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부심. 유교적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세종의 생각 세종대의 대부분의 가치들은 이러한 유교적 이상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