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 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 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 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 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 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1 VEn evkei,naij tai/j h`me,raij pa,lin pollou/ o;clou o;ntoj kai. mh. evco,ntwn ti, fa,gwsin( proskalesa,menoj tou.j maqhta.j le,gei auvtoi/j( 2 Splagcni,zomai evpi. to.n o;clon( o[ti h;dh h`me,rai trei/j prosme,nousi,n moi kai. ouvk e;cousin ti, fa,gwsin\ 3 kai. eva.n avpolu,sw auvtou.j nh,steij eivj oi=kon auvtw/n( evkluqh,sontai evn th/| o`dw/|\ kai, tinej auvtw/n avpo. makro,qen h[kasinÅ 4 kai. avpekri,qhsan auvtw/| oi` maqhtai. auvtou/ o[ti Po,qen tou,touj dunh,setai, tij w-de corta,sai a;rtwn evpV evrhmi,ajÈ
사천명을 먹이는 기사(막 8:1-9)는 막 6:34-44의 중복이라고 여 길 만큼 만은 유사성을 가진다 사천명을 먹이는 기사(막 8:1-9)는 막 6:34-44의 중복이라고 여 길 만큼 만은 유사성을 가진다. 유사한 점들 1) 베풀어진 장소가 광야(6:35; 8:4), 2) 이용할 수 있는 떡에 대한 질문(6:37; 8:5), 3) 땅에 앉으라는 명령(6:39; 8:6), 4) 음식 나눌 때의 동일한 표현과 순서(6:1; 8:6), 5), 동일한 결과(6:2; 8:8), 6) 남은 빵을 거둠(6:43; 8:9), 7) 흩어짐과 여행(6:45; 8:10) 등이 유사하다.
차이점들은 1) 배경이 다르다:(참조 6:32-34) 떡, 고기, 바구니, 무리들의 숫자의 차이, 2) 배경의 차이: (1) 8:1-5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보조자에 머물고 있다, (2) 6:40절의 무리들 때 지어 앉 게 하거나, 6:41절의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 와 같은 구약성서를 배경에 둔 듯한 표현이 빠져 있다. 3) 표현상의 차이: 8:7절에는 6:34-44에는 없는 생선을 따로 축사하고 있다. 헬라어 표현의 차이가 나는 부분으로는 (1) 6:35절의 e;rhmoj o` to,poj와 8:4절의 evrhmi,aj, (2) 6:39절의 evpi, tw/| clrw/| co,rtw|와 8:6절의 evpi, th/j gh/j, (3) 6:41절의 euvlo,ghsen과 8:6절의 euvcaristh,saj, (4) 6:41절의 ko,finoj와 8:8잘의 spuri,da 등에서 표현상의 차이가 난다.
마가는 6:34-44를 염두에 둔 표현인지, 아니면 7:31-37에서 맞 닥뜨린 무리와 또 다른 이방인들이 합하여 오천명(6:34-44)의 큰 무리를 이루었 다는 이야기 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문장에서 마가복음은 두 번의 현재 분사(o;ntoj( proskalesa,menoj) 를 사용하여 상황이 예수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이루어진 상 황인지 아니면 그전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정보 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또한 우리 성경에 “불러 (proskalesa,menoj)”는 이 사건의 주도권이 예수에게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불트만은 이런 예수의 주도권을 필요하지 않 는 진술이라고 본다. 6:35-44에서는 제자들에 이야기의 주도권 가지고 있다.
2절, 기에서 마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내가 무 리를 불쌍히 여기노라(Splagcni,zomai evpi 2절, 기에서 마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내가 무 리를 불쌍히 여기노라(Splagcni,zomai evpi. to.n o;clon)는 6:34에 나타난 예수의 표현 “목자 없는 양”를 연상 시킨다. 하지만 6:34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영혼이 고갈된 상황을 이야기 한다면 8:2 절 에서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육적인 곤경을 언급하고 있다. 무리들이 삼각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상황은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에 자세히 설명 되어있다. 이 본문에서 마가는 무리들이 처한 상황을 보다 실감나게 표현한 부분이 “먹을 것이 없도다(ouvk e;cousin ti, fa,gwsin)”에 표현하고 있다.”ti, fa,gwsin”를 우리 성경은 “먹을”로 번역하고 있으나 조금 부족하게 느껴진다. 헬 라어 본문은 “fa,gwsin”은 가정법 부정과거를 사용하고 있다. 이 부 분을 고려하여 번역한다면 “그들은 사흘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 다”를 의미이다. 오천명을 먹이는 이적에서 오직 하루만 예수와 함께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사흘동안 예수와 함께 있었다.
3절, 예수는 무리들이 모여든 동기를 정확히 인지 하고 있었다. 무리들은 가지각색의 동기로 모여 들었을 것이다 3절, 예수는 무리들이 모여든 동기를 정확히 인지 하고 있었다. 무리들은 가지각색의 동기로 모여 들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동기, 혹자는 개인적인 문제를 예수를 만 나 해결 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희망을 발 견 코 자 먼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을 그냥 돌려 보 낸다면,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예수는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발견 하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 4절, 오천명을 먹인 사건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 하려 했다면, 여기 이방지역에서 맞닥뜨린 문제이 서는 속수무책임을 스스로 잔인 하고 있다. 마가는 수로보니게 여인(7:24-37)과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친구들(7:31-37)의 믿음 과 대조를 통하여 제자들의 불신의 크기를 드러내고 있다.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 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 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 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 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5 kai. hvrw,ta auvtou,j( Po,souj e;cete a;rtoujÈ oi` de. ei=pan( ~Epta,Å 6 kai. paragge,llei tw/| o;clw| avnapesei/n evpi. th/j gh/j\ kai. labw.n tou.j e`pta. a;rtouj euvcaristh,saj e;klasen kai. evdi,dou toi/j maqhtai/j auvtou/ i[na paratiqw/sin( kai. pare,qhkan tw/| o;clw|Å 7 kai. ei=con ivcqu,dia ovli,ga\ kai. euvlogh,saj auvta. ei=pen kai. tau/ta paratiqe,naiÅ 8 kai. e;fagon kai. evcorta,sqhsan( kai. h=ran perisseu,mata klasma,twn e`pta. spuri,dajÅ 9 h=san de. w`j tetrakisci,lioiÅ kai. avpe,lusen auvtou,jÅ
5절, 다섯과 대조 되는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 을 한다 5절, 다섯과 대조 되는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 을 한다. (창 9:4-6의 1) 정의의 심판, 2) 우상 금지, 3) 신성 모독, 4) 부 도덕성, 5) 살인, 6) 도덕질, 7) 살아 있는 동물의 일부를 얻 는 것을 참조하여), 다섯의 유대인의 율법책을에 필적한 인간을 위한 자연법의 형식에 비유하고 있다. 어떤이는 “일곱”을 사도 행전 6:3과 연관 짓는 이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완전한 축복의 표시로서 충만이나 완성을 뜻하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하는 성경적 증거는 전무하다
6절, 여기에서 떡을 집어 축사하는 장면은 유대 가족의 가장이 식사전에 축하한 후에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는 가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미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사천명을 먹이는 기사 는 6장의 오천명을 먹이는 기사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여준 다. 그런 차이와 주의 만찬에서 언급된 축사(euvcaristh,saj) 때문에 혹자는 8장의 사천명을 먹이는 기사가 바울서신과 누가 복음의 주의 만찬을 염두에 둔 기사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다. 주의 만찬과 사천명을 먹이는 기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6장의 사 천명을 먹이는 기사에 감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7절, 유대의 식사에서 1, 일반적으로 떡을 때어 줄 때 축복하고 메인 코스에서 다시 축복하지 않는다 7절, 유대의 식사에서 1, 일반적으로 떡을 때어 줄 때 축복하고 메인 코스에서 다시 축복하지 않는다. 이 축복은 생선을 “떡”과 별개로 취급하고 있으며 유대적 배경에서 볼 때 매우 독특하다. 2, 유대인들은 축복이나 감사는 빵과 포도주를 위한 것이 아니 라 최고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학자 들은 이 부분은 유대의 관습을 잘 알지 못한 후대의 헬라주의적 편집으로 본다. 8절, 풍성한 식사는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사실을 연상 시킨다. 마가는 이런 표현을 통하여 예수에 의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풍성한 식사를 즐길 수 있 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천명을 먹인 이적 또한 예수 의 힘과 이적을 이야기 하는 기독론적인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9절, 사천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많은 이론이 있다. 어떤 이들은 6장에서 다섯개의 떡으로 오천을 먹였으니, 일곱개의 떡으로는 칠천을 먹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천과 칠천을 합하면 일만 이 천에 이르고 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기서 사천명만 먹였기 때문에 미래에 삼 천명을 먹이시는 또 한 번의 이적이 있었음을 은연중 암시한다 고 한다. 또 다른 해석은 “사천 명”을 나침반의 네 방위를 뜻하 는 지구의 “네 구석”에 대한 암시, 곧 이방인들이나 세상의 모든 족속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간주한다. 두 급식 기사를 마 무리 지으면서 무리들의 반응이 없다.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6장에서의 오천명이 사천으로 줄었고, 남은 빵조각도 열두 바구 니에서 일곱 강주리로 줄었다. 이런 숫자상의 차이는 예수 능력 이 감퇴나 다른 요인을찾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두 사건 모두 에서 예수의 기적과 힘은 충분이 입증 되었다. 이 급식 이적은 다음에 이어질 사건과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어야 한다.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 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 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2)표적 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 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2)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2)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 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 으로 가시니라 10 Kai. euvqu.j evmba.j eivj to. ploi/on meta. tw/n maqhtw/n auvtou/ h=lqen eivj ta. me,rh Dalmanouqa,Å 11 Kai. evxh/lqon oi` Farisai/oi kai. h;rxanto suzhtei/n auvtw/|( zhtou/ntej parV auvtou/ shmei/on avpo. tou/ ouvranou/( peira,zontej auvto,nÅ 12 kai. avnastena,xaj tw/| pneu,mati auvtou/ le,gei( Ti, h` genea. au[th zhtei/ shmei/onÈ avmh.n le,gw u`mi/n( eiv doqh,setai th/| genea/| tau,th| shmei/onÅ 13 kai. avfei.j auvtou.j pa,lin evmba.j avph/lqen eivj to. pe,ranÅ
10절, 달마누다 지방(ta. me,rh Dalmanouqa), 이 지역에 대 한 정보는 거의 없다 10절, 달마누다 지방(ta. me,rh Dalmanouqa), 이 지역에 대 한 정보는 거의 없다. 마태복음 15:39은 “마가단”으로 읽고 있으 며, 이 마가단은 서쪽 해변의 디베래보다 더 유명한 막달라 (Magdala)로 생각 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지명이 바다의 서쪽 편에 있는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다. 11절, 바리세인과 서기관은 마가복음에서는 기금까지 거의 모 두 예수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율법에 관한 논쟁, 특히 정결 논의와 죄인들과 식사하고 인식일에 “이삭을 자르고”, 안식 일에 병을 고치는 것 등의 안식일 행동들과 부정한 손으로 먹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활동하고 죄를 용서하고 귀 신을 쫓아낼 때 누구의 권세를 사용했는지에 관해 묻는다. 여기 에서는 예수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라는 요구이다.
12절,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1) 은닉이 아니라 불신이다 12절,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1) 은닉이 아니라 불신이다. 어떤 설명이나 행동에도 바리세인들의 불신앙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 다. 2) 믿음의 본성상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세인들은 항상 불신앙의 이유를 찾았다. 3) 믿음의 눈을 지닌 자들에게는 예수 의 사역은 하나님이 확증하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의 충분한 표본이다. 하지만 불신앙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떤 이적과 표 적도 예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바라볼 수 없다
13절, 이곳에서 예수의 떠남은 바리세인들로 대표되는 “이 세대” 즉 갈릴리 유대인들이 대부분 예수를 거절 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유대 지역에서의 예수와 유대인들간의 갈등 이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를 향한 종교당 국자의 음산한 그림자 또한 짙어지고 있다. 그 결말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가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섭리 와 인간적인 연민속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기사이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마 16:5-12)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 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 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 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 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4 Kai. evpela,qonto labei/n a;rtouj kai. eiv mh. e[na a;rton ouvk ei=con meqV e`autw/n evn tw/| ploi,w|Å 15 kai. dieste,lleto auvtoi/j le,gwn( ~Ora/te( ble,pete avpo. th/j zu,mhj tw/n Farisai,wn kai. th/j zu,mhj ~Hrw,|douÅ 16 kai. dielogi,zonto pro.j avllh,louj o[ti :Artouj ouvk e;cousinÅ 17 kai. gnou.j le,gei auvtoi/j( Ti, dialogi,zesqe o[ti a;rtouj ouvk e;ceteÈ ou;pw noei/te ouvde. suni,eteÈ pepwrwme,nhn e;cete th.n kardi,an u`mw/nÈ
14절, 많은 주석가들은 이 상황을 예수께서 바로 무리들을 먹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떡 한 개”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본다. 아이 러니 하게도 사천명의 급식 기사 이후에 제자들에게 남은 떡이 오직 한개 밖에 없었다. 이 표현의 의미는 1) 떡 한 개 이신 예수에 대한 성 만찬을 암시한다. 2)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한 개의 떡”이신 예수를 의미한다. 3) 이적을 행하여 자자들의 곤경을 해 결 할 수 있는 예수. 15절, 누룩은 인간 안에 있는 악한 생각을 상징한다. 바리세인들의 누 룩과 헤롯의 누룩은 독특한 표현이다. 마태복음 16:6에는 “바리세인들 과 사두게인들의 누룩”를 첨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누가복음 12:1은 누 룩을 외식과 동일시 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6:12는 누룩을 교훈과 동 일시 하고 있다. 이 부분의 해석에 있어서 “누룩”이 혁명적인 메시아 (바리세인)”나 권력의 통합 혹은 통치(헤롯)”로 해석하여 예수가 잘못 된 메시아 대망아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한 경고로 해석 하기도 하지 만, 본질에 있어서 “누룩”은 불신앙이다. 바리세인과 헤롯은 그들의 불 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독특한 구속 사역을 행하고 계신 것을 믿지 못한다.
16절, 제자들이 수군거리기를(dielogi,zonto), 미완료 과거를 사용하여 제자들의 걱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묘사 한다. 제자들은 “누룩”에 대한 예수의 말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오해할 위험에 빠졌다. 17절, 예수는 16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상태를 보고 그들의 둔 함을 질책 하신다. 제자들은 선자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 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 메시지에 반응을 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처럼 마음이 둔하여 짐으로 바리세인들의 누룩이 될 위험에 처 하였다. 깨닫지 못하느냐(ouvde. suni,ete)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질책한 표현으로 이미 4:2에서 사용 하였다.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 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 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 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 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 느냐 하시니라 18 ovfqalmou.j e;contej ouv ble,pete kai. w=ta e;contej ouvk avkou,eteÈ kai. ouv mnhmoneu,ete( 19 o[te tou.j pe,nte a;rtouj e;klasa eivj tou.j pentakiscili,ouj( po,souj kofi,nouj klasma,twn plh,reij h;rateÈ le,gousin auvtw/|( Dw,dekaÅ 20 {Ote tou.j e`pta. eivj tou.j tetrakiscili,ouj( po,swn spuri,dwn plhrw,mata klasma,twn h;rateÈ kai. le,gousin Îauvtw/|Ð( ~Epta,Å 21 kai. e;legen auvtoi/j( Ou;pw suni,eteÈ
18절, 예수는 외인들의 보지 못함과 듣지 못함을 묘사한 이사야 4:12를 통 하여 제자들을 질책한다 18절, 예수는 외인들의 보지 못함과 듣지 못함을 묘사한 이사야 4:12를 통 하여 제자들을 질책한다. 도움을 청한 이적 기사에 나온 사람들(4:35-41; 6:45-52; 8:14-21)과 달리 모든 것을 수수께끼로 여긴 외인들(4:13; 7:18)이 나 예수의 적대자들(3:5-6; 6:14-16; 8:15)과 같은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는 질책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느냐(ouv mnhmoneu,ete)는 예수를 따르 면서 경험했던 사실을 이리도 빨리 잃어 버린 것에 관한 것이다. 19-20절, 예수는 이 질문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고 있다. 제자들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떡 하나로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떡을 가져오지 못했음을 걱정하고 있었 다. 제자들은 외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적의 의미, 즉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그들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제자들은 첫 번째 도하 사건에서 예수의 나타나심을 보고(4:35-41) 당황하였으며, 두 번째 도하 사건 때 예수의 나타 나심을 보 고 놀랐으며(6:52), 세 번째 도하사건 때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잊 고 떡을 가져오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근심하고 있다(8:14, 16, 17a).
21절, 제자들은 첫 번째 급식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무리를 먹이 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자하고 있고, 두 번째 급식기사에서는 논리적인 분석을 통하여 양식을 공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리 들을 먹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자신들이 충분한 떡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의논하고 있다.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 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 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 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 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 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 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22 Kai. e;rcontai eivj Bhqsai?da,nÅ kai. fe,rousin auvtw/| tuflo.n kai. parakalou/sin auvto.n i[na auvtou/ a[yhtaiÅ 23 kai. evpilabo,menoj th/j ceiro.j tou/ tuflou/ evxh,negken auvto.n e;xw th/j kw,mhj kai. ptu,saj eivj ta. o;mmata auvtou/( evpiqei.j ta.j cei/raj auvtw/| evphrw,ta auvto,n( Ei; ti ble,peijÈ 24 kai. avnable,yaj e;legen( Ble,pw tou.j avnqrw,pouj o[ti w`j de,ndra o`rw/ peripatou/ntajÅ 25 ei=ta pa,lin evpe,qhken ta.j cei/raj evpi. tou.j ovfqalmou.j auvtou/( kai. die,bleyen kai. avpekate,sth kai. evne,blepen thlaugw/j a[pantaÅ 26 kai. avpe,steilen auvto.n eivj oi=kon auvtou/ le,gwn( Mhde. eivj th.n kw,mhn eivse,lqh|jÅ
22절,. 이 여행은 이방인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는 갈릴리 북 동쪽 해변 인접 지역을 포함한다 22절, . 이 여행은 이방인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는 갈릴리 북 동쪽 해변 인접 지역을 포함한다. 베새다는 갈릴리의 동쪽 궁경 너머에 있으며, 헤롯 빌립의 통치 지역이었다. 베세다는 “가이사 랴 빌립보”와 함께 분봉왕 빌립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아우구스 투스의 황제의 딸 줄리아(Julia)의 이름을 따서 쥴리아스(Julias) 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울지방의 수도이기도 했다. 귀먹고 어눌 한 자에 관한 기사에서처럼 안수보다는 손대시기를 예수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데려와 예수 에게 자기들의 침구를 고쳐줄 것을 요구한다.
23절, 붙잡으시고(evpilabo,menoj)는 현재분사로 마가는 단 한번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다 23절, 붙잡으시고(evpilabo,menoj)는 현재분사로 마가는 단 한번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다. 마을 밖으로 나간 행위는 7:33에 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치유에서도 있었다. 이는 주술적인 행 위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자들이 많다. “눈에 침을 밷으시고 (ptu,saj eivj ta. o;mmata auvtou), 7장의 치유에서도 침을 사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치유기사의 본질은 안수를 통하여 치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무엇이 보이느 냐(Ei; ti ble,peij)”는 이적 기사에만 나오는 문구이다. 환 자에게 이적이나 이적의 성공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24절, 쳐다보며(avnable,yaj), 정확한 표현은 ‘우러러 보며’이 다 24절, 쳐다보며(avnable,yaj), 정확한 표현은 ‘우러러 보며’이 다. 7:34절에서 표현이 마술적 배경을 지녔다면, 여기에서는 “시 력을 회복하다”의미를 지닌다. 이 분사를 통하여 예수가 그 사 람에게 시력을 제공했다는 표현이다. 후반절 ‘Ble,pw tou.j avnqrw,pouj o[ti w`j de,ndra o`rw/ peripatou/ntaj’ 참 어색한 표현이다. “내가 사람을 봄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무처럼 보이는데 걸어다니고 있습니다.”학 자들은 이런 어색한 표현은 아람어 정서를 묘사 한다고 생각한 다.
25절, 기사가 암시하고 내용들은 1) 제자들이나 적대자들이나 외인들처럼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나 적대자들과는 근본 적으로 다르다. 2) 예수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질책 하고 있다. 3) 온전한 시력의 회복은 위대한 의사인 예수를 통하 여 회복 될 수 있다. 밝히 보는지라(die,bleyen)는 완료형으로 시력이 완전히 회복 되었음을 암시한다. 26절,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Mhde. eivj th.n kw,mhn eivse,lqh|j), 마가의 메시아 비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이 마가가 다음장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 한다.
베드로의 고백,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심(마 16:13-28; 눅 9:18-27) 베드로의 고백,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심(마 16:13-28; 눅 9:18-27)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 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 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4)세 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 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 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27 Kai. evxh/lqen o` VIhsou/j kai. oi` maqhtai. auvtou/ eivj ta.j kw,maj Kaisarei,aj th/j Fili,ppou\ kai. evn th/| o`dw/| evphrw,ta tou.j maqhta.j auvtou/ le,gwn auvtoi/j( Ti,na me le,gousin oi` a;nqrwpoi ei=naiÈ 28 oi` de. ei=pan auvtw/| le,gontej Îo[tiÐ VIwa,nnhn to.n baptisth,n( kai. a;lloi( VHli,an( a;lloi de. o[ti ei-j tw/n profhtw/nÅ 29 kai. auvto.j evphrw,ta auvtou,j( ~Umei/j de. ti,na me le,gete ei=naiÈ avpokriqei.j o` Pe,troj le,gei auvtw/|( Su. ei= o` Cristo,jÅ 30 kai. evpeti,mhsen auvtoi/j i[na mhdeni. le,gwsin peri. auvtou/Å
27절, 예수(VIhsou/j), 아람어 예슈야라는 이름은 유랑하던 이 슬라엘 백성을 영도하여 약속의 땅을 정복했던 영웅 여호수아 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으로 유대인들 사이에 인기있는 이름이 다. 제자들(maqhtai)은 탈무드는 “배워야 될 것” 또는 “연구해 야 될 것”에서 나온 “배우는 자”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가르침을 듣고, 비판자들과 논쟁들을 지켜보 아 왔으며 고대 말엽 유대교 랍비들의 제자들처럼 행동해 왔다. 빌리보 가이사랴(Kaisarei,aj th/j Fili,ppou)는 아우구 스투스가 이성읍을 헤롯에게 주었고, 헤롯 대왕은 이곳에 백색 신전을 세웠다. 빌립은 로마왕재를 기려서 가이샤라로 명명했고, 아그립바 2세는 이 도시를 ‘네로니아’로 개명 하였고, 예루살렘 점령이후에 티투스는 승리를 축하나는 의식을 치룬 도시이다.
28절, 예수는 영혼으로든 새로 부활한 것이든 사람들이 “침례요 한”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를 좋게 평가 했다는 것이다 28절, 예수는 영혼으로든 새로 부활한 것이든 사람들이 “침례요 한”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를 좋게 평가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보활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 는 일을 계속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엘리야가 이스라 엘 회복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은 시락서 48:1-14, 특히 10절 같은 구절들에 잘 나타난다. 이 구절은 말라 기 4:5-6에 근거하고 있다. 선지자 중의 하나(ei-j tw/n profhtw/n)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다. 요세프스에 따르면 예수 시대에 이적과 표적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을 일께 우고자 했던 소위 자칭 선지자들이 여렷있었다.
29절, 그리스도(o` Cristo,j)는 히브리어(hyvm)를 번역한 것이다. 사해사본에도 여러번 등장한다 29절, 그리스도(o` Cristo,j)는 히브리어(hyvm)를 번역한 것이다. 사해사본에도 여러번 등장한다. 4Q521에는 “하늘과 땅이 그의(하나 님) 메시아에게 순종할” 때를 예상하고 있다. 이 본문은 가난한 자들 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과 병 고침 및 심지어 죽은 자들의 불활까지 언급한다. 다른 쿰란 사본에는 다윗의 가지, 의의 기름부음 받은자의 오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솔로몬의 시편 17-18장에서 이방인들의 축출과 이땅을 정결케 할 다윗 가문의 메시아를 열망한다. 30절, 예수가 제자들에게 비밀을 명한 것은 메시아 비밀과 일맥 상통 한다. 이 대화가 오간 시점에서 예수의 인기는 높아 갔다. 메시아 비 밀 사상은 예수 전승에 메시아와 관련된 내용이 결여된 결과가 아니 라 예수에 대한 경외감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 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 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 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 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 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 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라 31 Kai. h;rxato dida,skein auvtou.j o[ti dei/ to.n ui`o.n tou/ avnqrw,pou polla. paqei/n kai. avpodokimasqh/nai u`po. tw/n presbute,rwn kai. tw/n avrciere,wn kai. tw/n grammate,wn kai. avpoktanqh/nai kai. meta. trei/j h`me,raj avnasth/nai\ 32 kai. parrhsi,a| to.n lo,gon evla,leiÅ kai. proslabo,menoj o` Pe,troj auvto.n h;rxato evpitima/n auvtw/|Å 33 o` de. evpistrafei.j kai. ivdw.n tou.j maqhta.j auvtou/ evpeti,mhsen Pe,trw| kai. le,gei( {Upage ovpi,sw mou( Satana/( o[ti ouv fronei/j ta. tou/ qeou/ avlla. ta. tw/n avnqrw,pwnÅ 34 Kai. proskalesa,menoj to.n o;clon su.n toi/j maqhtai/j auvtou/ ei=pen auvtoi/j( Ei; tij qe,lei ovpi,sw mou avkolouqei/n( avparnhsa,sqw e`auto.n kai. avra,tw to.n stauro.n auvtou/ kai. avkolouqei,tw moiÅ
31절,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 칭 하였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이루어 진 이 칭호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31절,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 칭 하였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이루어 진 이 칭호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예수는 자신을 신비한 천상의 존재를 말하는 다니엘 7:13-14을 통해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칭호에 정관사가 붙은 것은 전문적이거나 칭호로서의 의미가 아 니라 특정성을 보여 준다.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진술은 다니 엘 7:15-27의 전체적인 취지와 일치하고 모세 또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을 받았다. 예수의 수난 예고는 마가복음 10:45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 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은 다니엘 7:14의 환상에 조건을 붙이는 말이다. 버린바 될 것(kai. avpoktanqh/nai)는 시편 118:22을 인용한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 는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은 등은 복음서 기자에게서나 앞선 전승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나 왔을 것이다.
32절, 마가는 이렇게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을 비유들로 말하고서 종 종 제자들에게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수수께끼 같 은 차원과 대비 시키길 원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말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제자들을 두려움과 혼란에 빠뜨렸다. 베드로 가 예수를 탓하기 시작 했다. 베드로의 말투는 거칠고 무례했다. “꾸 짖다(evpitima/n)”은 더러운 귀신들과 위협하는 꾸짓는 상황에서 사용 되었기 때문이다. 33절,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o` de. evpistrafei.j kai. ivdw.n tou.j maqhta.j auvtou)”는 베드로로 뒤로 돌아가 제 자들의 위치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사단이라고 칭한 것은 베드로 가 어둠의 왕 사단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사단적”이라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일들(ta. tou/ qeou)”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필연성 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34절, 이 부분의 주석에는 두가지 사항을 살펴 보야야 한다. 1) 여기에 등장하는 무리(to. n o;clon)가 누구인가 34절, 이 부분의 주석에는 두가지 사항을 살펴 보야야 한다. 1) 여기에 등장하는 무리(to.n o;clon)가 누구인가? 제자들이 무리일 수는 없다. 마가는 항상 제자들과 다른 무리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정체성 에 대하여 어느 복음서도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 마태복음은 이런 난처 함 때문에 생략해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마가는 분명히 그들을 제자들 과 함께 불렀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WBC는 다음에 이어지는 제자 도의 내용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 되 는 내용이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2) 34절에 드러난 예수의 이야기에는 당시 유대인들과 초대교회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견유학파의 주장과 비 교할 필요성이 있다. 유대 랍비들은 십자가의 멍에를 지는 지는 것이 아 니라 토라의 멍에나 계명의 멍에를 지도록 권유 받았다. 또한 견유학파 의 가르침에는 자신들의 세계관이나 생활양식 때문에 자신들에게 십자 가가 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 때문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다. 결코 유대 지도층과의 충돌이 이유가 될 수 없다.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 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 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 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 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 러워하리라 35 o]j ga.r eva.n qe,lh| th.n yuch.n auvtou/ sw/sai avpole,sei auvth,n\ o]j dV a'n avpole,sei th.n yuch.n auvtou/ e[neken evmou/ kai. tou/ euvaggeli,ou sw,sei auvth,nÅ 36 ti, ga.r wvfelei/ a;nqrwpon kerdh/sai to.n ko,smon o[lon kai. zhmiwqh/nai th.n yuch.n auvtou/È 37 ti, ga.r doi/ a;nqrwpoj avnta,llagma th/j yuch/j auvtou/È 38 o]j ga.r eva.n evpaiscunqh/| me kai. tou.j evmou.j lo,gouj evn th/| genea/| tau,th| th/| moicali,di kai. a`martwlw/|( kai. o` ui`o.j tou/ avnqrw,pou evpaiscunqh,setai auvto,n( o[tan e;lqh| evn th/| do,xh| tou/ patro.j auvtou/ meta. tw/n avgge,lwn tw/n a`gi,wnÅ
35절, 이 이야기도 후대의 랍비 문헌에 들어있다. 예수는 여기서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 고 있다 35절, 이 이야기도 후대의 랍비 문헌에 들어있다. 예수는 여기서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 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지금이 구원의 때이다. 인류의 구원은 복음이 없이 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복음을 떠난 구원은 존재하지 않고, 복음을 향한 인류의 선택은 필 수불가결한 것이다. WBC 하, 149, “토라에 나오는 한 가지를 보존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 기의 목숨을 보존하고, 토라에 나오는 한가지를 잃는자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잃으리 라.” 36절, 예수의 말이 1세기 유대문헌과 구약성서와 유사성을 같는다. 이런 유사성이 본문이 예수로부터 기원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 할 근거가 돼지 않는다. 인용된 성경중 외경인 바 룩서가 가장 유사성을 갖고 있다. 예수가 바룩서를 알고 있었는 가는 알지 못한 다만 예수 당시 이런 격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 유행 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간결하고 명료 함은 어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천하 하고도 비교 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소중 함을 이야기 한다. 본문을 정확히 변역하면 “사람이 만일 모든 천하의 권력이든 물질이든 얻고도, 생명에 해를 당한다면 현재의 삶에서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 이처럼 인간에게 복음을 통하여 얻게 될 생명의 소중함을 예수는 이야기 하고 있다. WBC 하, 150. 바룩 2 서 51:15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잃었고, 무엇 때문에 이땅에 있는 사람들 이 자기 목숨을 바꾸었는가?” 전도서 1: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 엇이 유익한가”, 시편 49:7-9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 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 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37절, 수사 의문문을 통하여 예수는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 37절, 수사 의문문을 통하여 예수는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 온전 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세상의 물질과 쾌락과 생명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 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극적인 쾌락과 현세적인 권력과 물질을 위하 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있다. 38절,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은 36-37절에 언급된 이유들 만으로 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더 가지 있는 것은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 다. 그때 주님은 자신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을 부끄러워 할 것이다. 이런 인간 응보를 탈리오의 법칙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예수는 인자(o` ui`o.j tou/ avnqrw,pou)와 자신(me)를 구분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 에 불트만은 이 구절에서 언급된 “인자”가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인가를 부끄러워하는 것을 등치 시키고 있은 점에서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은 무 리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다니엘서 7:13-14에 그려 진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완성 될 것이 다.
9:1절, 예수는 또다른 약속을 하고 있다. 약속의 첫 머리를 아멘(VAmh 9:1절, 예수는 또다른 약속을 하고 있다. 약속의 첫 머리를 아멘(VAmh.n)으로 시작 한다는 것은 그 진정성에 대한 강조이다. 이 구절에서 예수가 한 약속 “죽기 전에(ouv mh. geu,swntai qana,tou)”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죽음을 맞보지 안을 것이다”이다. 마가는 죽음을 보다 감각적인 의미로 표현 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9:2-13에서 엘리야와 모세처럼 불멸의 경험을 언급한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는 이런 선조들의 경험처럼 예수 믿는자들의 불멸이 확실함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