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6장의 특징은 예수와 예루살렘 당국의 논쟁, 십자 가, 부활이다. 이 부분을 날짜에 따라 나누어 보면, 첫째날(일요일, 10:46- 11:11), 둘째날(월요일, 11:12-19), 셋째날(화요일, 11:20-26), 넷 째날(수요일, 11:27-13:37), 다섯째 날(목요일, 14:1-16), 여섯째 날(금요일, 14:17-15:41), 일곱째 날(토요일, 15:42-47), 마지막으 로 여덥째 날(일요일, 16:1-8)이다. 내용을 중심으로 나누면, 예 수의 예루살렘 입성(11:1-37)과 예수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이 다(14:1-16:8).
마가복음 11장 예루살렘 입성(11:1-11), 무화과 나무 저주(11:12-14), 성전 청결(11:15-19), 무화과 나무의 마름과 기도에 대한 교훈(11:20-26), 유대 지도자들 과의 논쟁(11:27-33)으로 구성 되어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는 브레대(William Wrede)의 신학적 요소와 요세푸스가 전한 1세기 당시에 예루살 렘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일련의 메시아 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 다. 첫 번째, 브레데는 막 11:1-11에는 예수의 메시아성에 관한 이야기가 없고, 설혹 예수를 메시아로 이야기 할 만한 구절들도 예수 사후에 예수 생애를 메시아로 변환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수 사후 유대 총독 페두스(Fadus)에 의하 여 자칭 선지자라 하는 테우데스(Theudas)가 사형을 당하였다. 56 C.E.에 에집트인이라는 사람이 올리브 산에 사람을 모으고, 그가 명령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다고 큰소리 쳤다. 요세 프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광폭한 군주로 자리매김 했다.
1세기의 이런 사건들은 우스쾅스러운 메시아적 사건들과 이런 선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는데 의의가 있다 1세기의 이런 사건들은 우스쾅스러운 메시아적 사건들과 이런 선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는데 의의가 있다. 테우데 스(Theudas)의 선동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 가에 나아왔 다. 테우데스는 그가 명령하면 요단강이 갈라진다고 말하였다. 로마 입장에서 이들이 무장하거나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할 지라도 그들이 많은 제물을 소유하고 있고 잘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람들로 생각해서 군대(500-1000명, 기병대를 포함함)를 보내 진압 하였다. 행정과 펠릭스(Felix)는 군대를 보 내 이집트인을 포함하여 400여명을 죽이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마 21:1-11; 눅 19:28-40; 요 12:12-19)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마 21:1-11; 눅 19:28-40; 요 12:12-19) Kai. o[te evggi,zousin eivj ~Ieroso,luma eivj Bhqfagh. kai. Bhqani,an pro.j to. :Oroj tw/n VElaiw/n( avposte,llei du,o tw/n maqhtw/n auvtou/ 2 kai. le,gei auvtoi/j( ~Upa,gete eivj th.n kw,mhn th.n kate,nanti u`mw/n( kai. euvqu.j eivsporeuo,menoi eivj auvth.n eu`rh,sete pw/lon dedeme,non evfV o]n ouvdei.j ou;pw avnqrw,pwn evka,qisen\ lu,sate auvto.n kai. fe,reteÅ 3 kai. eva,n tij u`mi/n ei;ph|( Ti, poiei/te tou/toÈ ei;pate( ~O ku,rioj auvtou/ crei,an e;cei( kai. euvqu.j auvto.n avposte,llei pa,lin w-deÅ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 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 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 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 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 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1절, 마가가 벳바게와 베다니이 보다 예루살렘을 먼저 언급한 것은 예수 일행의 여행목적이 예루살렘 이었기 때문이다 1절, 마가가 벳바게와 베다니이 보다 예루살렘을 먼저 언급한 것은 예수 일행의 여행목적이 예루살렘 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에 언급된 벳바게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서 베다니 앞에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감람산이 언급된 것은 여행자들이 예루 살렘 입성을 위한 공식적인 출발점으로 예루살렘을 굽어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2절, ‘나귀 세끼’는 스가랴 9:9에서는 “멍에 메는 짐승, 새로운 새 끼 위에(evpi u`pozu,gion kai. pw/lon ne,on)”라고 언 급 되어 있다. 마태에서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위에 (evpi o;non kai. evpi pw/lon ui`o.n)”라고 기록 되어 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evfV o]n ouvdei.j ou;pw avnqrw,pwn evka,qisen)”은 새로운 새끼임을 암시 하기 위한 스가랴9:9의 난외 주일 가능성이 있다.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 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 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 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 지라 4 kai. avph/lqon kai. eu-ron pw/lon dedeme,non pro.j qu,ran e;xw evpi. tou/ avmfo,dou kai. lu,ousin auvto,nÅ 5 kai, tinej tw/n evkei/ e`sthko,twn e;legon auvtoi/j( Ti, poiei/te lu,ontej to.n pw/lonÈ 6 oi` de. ei=pan auvtoi/j kaqw.j ei=pen o` VIhsou/j( kai. avfh/kan auvtou,jÅ
4-6절, 이 구절에서 어떤 이들은 신적인 행동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잘 계획된 행동의 증거로 보기도 한다 4-6절, 이 구절에서 어떤 이들은 신적인 행동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잘 계획된 행동의 증거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질문은 이 절 에서 언급된 “주(~O ku,rioj)”가 누구인가?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는 첫 번째, 나귀의 주인이다. 이런 주장에는 너무 허점이 많다. 만일 나귀의 주인이 따로 있다면, 나귀를 사용하는 주인이 예수라는 점에 서 본문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예수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다. 세 번째는 모든 사물이 하나님 소유라는 측면이라면 타 당성을 갖는다. 또 그 사물이 예수에게 맏겨져 있다면 본문의 전체적 인 의도에 부합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의미에서 가장 설 득력 있는 주장은 두 번째, 예수이다. 또 한편 이 구절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 속에는 일종의 “고르 반”, 즉 하나님이 사용 하시도록 드려진 물건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7 kai. fe,rousin to. n pw/lon pro. j to. n VIhsou/n kai 7 kai. fe,rousin to.n pw/lon pro.j to.n VIhsou/n kai. evpiba,llousin auvtw/| ta. i`ma,tia auvtw/n( kai. evka,qisen evpV auvto,nÅ 8 kai. polloi. ta. i`ma,tia auvtw/n e;strwsan eivj th.n o`do,n( a;lloi de. stiba,daj ko,yantej evk tw/n avgrw/nÅ 9 kai. oi` proa,gontej kai. oi` avkolouqou/ntej e;krazon( ~Wsanna,\ Euvloghme,n oj o` evrco,menoj evn ovno,mati kuri,ou\ 10 Euvloghme,nh h` evrcome,nh basilei,a tou/ patro.j h`mw/n Daui,d\ ~Wsanna. evn toi/j u`yi,stoijÅ 11 Kai. eivsh/lqen eivj ~Ieroso,luma eivj to. i`ero.n kai. peribleya,menoj pa,nta( ovyi,aj h;dh ou;shj th/j w[raj( evxh/lqen eivj Bhqani,an meta. tw/n dw,dekaÅ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 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 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 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 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 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 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7절, 보통의 순례자들은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는다 7절, 보통의 순례자들은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면 에서 이 장면에서 겉옷을 짐승 등위에 얹어 안장을 대신하는 모습은 대관 식을 연상케 한다. 이 장면에서 예수가 그 짐승위에 앉았다는 것은 솔로몬 이 왕위 계승을 과시하기 위하여 부왕 다윗의 노새를 타는 행위를 연상하 게 한다. 8절, 장군이나 왕이 지나갈 길에 옷을 펼쳐 놓는 예를 성경(왕하 9:13)과 아델피아(Adelphia)의 부조에서 볼 수 있다. “입이 무성한 가지들”를 길에 편것으로 보아 유월절이 아니라 장막절 혹은 수전절이라는 주장도 있다. 마카비 1서 13:51에 유다 마카비에 대한 환영 묘사가 예수에 대한 환영 묘 사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유다는 성전과 제단을 정화한 후에 환영을 받았고(마카비 2서 10:1-3), 예수는 성전 경내에서 행동하기 전에 환영을 받았다. 아델피아(Adelphia)의 대리석 관을 장식하고 있는 잘 보존 된 석재 부조에서 우리는 아델피아가 탄 말의 굽 아래에 한 사람이 옷 또 는 돗자리를 까는 장면을 볼 수 있다.
9절, 여기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 것으로 생각 할 수도 있지만 WBC는 시편 118:25에서 인용 한 이 구절의 수신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무리 가 약속된 구원과 다윗의 나라를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소리 질렀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고한다. 또한 시 118:26에서 “여호아 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셨다”는 내용이 예수의 성전입성으로 성취 되었다. 10절, 이 말을 외친 사람은 무리들이었다. 랍비 전승에는 다윗이 스스로를 낮춰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 조상(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음으로 으뜸가는 자로 삼으셨 다 (b. Moed Qat. 16b).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개작한 유대적인 표현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Wsanna. evn toi/j u`yi,stoij) 를 토레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를”이라 번역한다. 하 지만 백성들의 외침은 구원은 단순히 이스라엘 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관한 것이다. 11절, 만일 예수가 시편 118편의 아람어 번역을 지침으로 삼았 다면, 그는 제사장의 영접을 기대 했을 수 있다. 헨헨(Haenchen, 378)은 이 엉성한 결말이 입성을 묘사하는 자료와 성전 경내를 방문한 것을 묘사한 자료의 결합으로 본다. 또다른 견해는 예루 살렘 입성이 예수와 따르는 자들의 기대했던 대로 끝나지 않았 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지만 제사장의 영접도 없었고 그는 철저히 유대 당국자들에 의하여 철저히 무시 되었다
무화과나무에게 이르시다(마 21:18-19)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 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 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 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 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 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 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2 Kai. th/| evpau,rion evxelqo,ntwn auvtw/n avpo. Bhqani,aj evpei,nasenÅ 13 kai. ivdw.n sukh/n avpo. makro,qen e;cousan fu,lla h=lqen( eiv a;ra ti eu`rh,sei evn auvth/|( kai. evlqw.n evpV auvth.n ouvde.n eu-ren eiv mh. fu,lla\ o` ga.r kairo.j ouvk h=n su,kwnÅ 14 kai. avpokriqei.j ei=pen auvth/|( Mhke,ti eivj to.n aivw/na evk sou/ mhdei.j karpo.n fa,goiÅ kai. h;kouon oi` maqhtai. auvtou/Å
12절, 이튿날(th/| evpau,rion)은 장면 전환을 위한 장치이 다 12절, 이튿날(th/| evpau,rion)은 장면 전환을 위한 장치이 다. 12절에서 독자들은 ‘evxelqo,ntwn’에서 ‘~부터 나온 후에’ 의 의미와 ‘avpo’에서 다시한번 ‘~부터’라는 이중적 표현을 만 나게 된다. 에반스는 이 표현을 이 이야기의 이면에 전승의 존재 를 확인해 주는 것으로 본다. 시장해졌다(evpei,nasen)는 표 현속에 모순점이 드라난다. 첫째, 예수가 묵었던 집 주인이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예수만 시작하고 제자들은 시장하지 않았을까? 어찌하여 예수의 배 고픈행위로 인하여 상 징적인 행위를 낳게 만들었는가?
이런 의문들 때문에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발전단계에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의문들 때문에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발전단계에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생각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오해에서 비롯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미가7:1에서 처럼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 은 무화과가 없 도다”를 인용하여 말씀드린 것을 제자들이 예수가 시장하 다는 말로 오해 했다는 주장이다. 이 구절에서 마가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 니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것임이 분명하다. 13절, 이 나무는 격언에서는 평화와 안전을 상징한다. 잎사귀 있는 (e;cousan fu,lla), 낙엽수인 이 나무는 3월 하순에 잎들을 내고, 늦가 을에 잎사귀들이 떨어진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에서 잎사귀를 가지고 있 다고 두번이나 언급하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가들은 저주를 통하여 말라버린 사실을 알도록 하려는 마가의 복선으로 보고 있다. 그 나무에 무 엇이 있을까 하여(eiv a;ra ti eu`rh,sei evn auvth)라는 여기서 사용된 가정법은 추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간접의문문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가 무엇을 얻을까 하는 장면을 통하여 이 이야기의 배경을 초가을 장 막절로 보기도 한다.
14절, 나무에게 말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겐 낯설게 느껴지지만 랍비들의 학가다(Haggadah)에 나오는 몇몇 이야기들에는 나무 들도 도덕적 차원에 반응하고, 말을 부칠 수 있으며, 인간의 필 요에 따라 열매를 낼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다. 나무들이 꽃 피 우다가 시드는 것은 도덕적인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학가다 의 세계에서 랍비의 저주는 명백한 효과를 갖는다. 자연은 의인 에게 반응한다. 이 이야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으로 WBC는 예수 의 저주를 상징으로 보기보다는 실제적인 배고픔에 따른 행동 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 이야기가 마가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으로 이용 되었다고 생각한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마 21:12-17; 눅 19:45-48; 요 2:13-2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마 21:12-17; 눅 19:45-48; 요 2:13-22)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 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 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 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 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 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 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 로 나가더라 15 Kai. e;rcontai eivj ~Ieroso,lumaÅ kai. eivselqw.n eivj to. i`ero.n h;rxato evkba,llein tou.j pwlou/ntaj kai. tou.j avgora,zontaj evn tw/| i`erw/|( kai. ta.j trape,zaj tw/n kollubistw/n kai. ta.j kaqe,draj tw/n pwlou,ntwn ta.j peristera.j kate,streyen( 16 kai. ouvk h;fien i[na tij diene,gkh| skeu/oj dia. tou/ i`erou/Å 17 kai. evdi,dasken kai. e;legen auvtoi/j( Ouv ge,graptai o[ti ~O oi=ko,j mou oi=koj proseuch/j klhqh,setai pa/sin toi/j e;qnesinÈ u`mei/j de. pepoih,kate auvto.n sph,laion lh|stw/nÅ 18 kai. h;kousan oi` avrcierei/j kai. oi` grammatei/j kai. evzh,toun pw/j auvto.n avpole,swsin\ evfobou/nto ga.r auvto,n( pa/j ga.r o` o;cloj evxeplh,sseto evpi. th/| didach/| auvtou/Å 19 Kai. o[tan ovye. evge,neto( evxeporeu,onto e;xw th/j po,lewjÅ
15절, 성전 경내에서 희생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는 모세율법의 요구 사항에 정확히 일치하지만 초기의 자세한 정보는 전무하 다 15절, 성전 경내에서 희생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는 모세율법의 요구 사항에 정확히 일치하지만 초기의 자세한 정보는 전무하 다. 스가랴 14:21은 이런 매매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전에 삼천마리의 소를 가져온 샴마이 문도들의 이야기는 성 전 경내에서 희생제물를 위한 짐승들을 매매했을 보여준다. 랍 비전승에 따르면 환전상들의 상들이 성전 경내에 설치되어 있 었다고 한다. 환전상들은 돈을 받고 그 금액만큼 자기 나라에서 통용되는 주화를 주었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온갖 주화가 통용 되었다. 가난한 자들과 문둥병자를 위한 정결례를 위하여 성전에 덜 비싼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는 것이 허용 되었다.
16절,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어떤 기구도 성전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허용되지 않았다 16절,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어떤 기구도 성전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종 류의 물건들은 희생제사 용으로 준비된 것들 것 제외하고는 제 단에 드려질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스가랴 14:20-21에 비추어 서 해석 되어야 한다고 칠튼(Chilton, Temple of Jesus, 135-6)은 주장한다. 17절, 두 번째 인용문인 예레미야 7장은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하게 보호해 주지 못한 다고 경고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심판을 불러 올 것이고 종교 당 국자들이 철썩같이 믿었던 바로 성전은 파괴될 것이다. 성전 당 국에 대한 예수의 고발과 단순히 예언적인 것이 아니라 부분적 으로는 성전목적에 대한 솔로몬의 이해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18절, 예수의 비판은 성전 당국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18절, 예수의 비판은 성전 당국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성전 내에서의 상업활동이 고위 제사장들, 특히 대제사장 의 권한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차원에서 예수가 불 러일으킨 두려움은 폭동이나 반란에 대한 두려움 이었다. 하지 만 마가에서 예수가 고위 제사장들에게 불러일으킨 두려움은 무리들에게 불러일으킨 두려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절, 마가는 예수가 도성에서 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 한다. 수많은 다른 유월절 순례자들과 만찬가지로 예수와 제자 들도 예루살렘에서 숙소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가 마르다(마 21:20-22)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 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 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 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 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 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 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 라 20 Kai. paraporeuo,menoi prwi> ei=don th.n sukh/n evxhramme,nhn evk r`izw/nÅ 21 kai. avnamnhsqei.j o` Pe,troj le,gei auvtw/|( ~Rabbi,( i;de h` sukh/ h]n kathra,sw evxh,rantaiÅ 22 kai. avpokriqei.j o` VIhsou/j le,gei auvtoi/j( :Ecete pi,stin qeou/Å 23 avmh.n le,gw u`mi/n o[ti o]j a'n ei;ph| tw/| o;rei tou,tw|( :Arqhti kai. blh,qhti eivj th.n qa,lassan( kai. mh. diakriqh/| evn th/| kardi,a| auvtou/ avlla. pisteu,h| o[ti o] lalei/ gi,netai( e;stai auvtw/|Å 24 dia. tou/to le,gw u`mi/n( pa,nta o[sa proseu,cesqe kai. aivtei/sqe( pisteu,ete o[ti evla,bete( kai. e;stai u`mi/nÅ
20절, 뿌리부터 말랐다(evxhramme,nhn evk r`izw/n), 나무 가 죽었다는 말 보다는 예수의 말씀이 완벽하게 효과를 발휘 했 다고 본다. 이 어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제자들이 실제로 뿌리를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21절, 주께서 저주한(h]n kathra,sw)은 베드로가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들은 것을 기억한 내용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말을 믿음과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실 기회로 삼았다.
22절,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여기에서만 나 온다 22절,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여기에서만 나 온다. “겨자씨 만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전반절에 존재 할 것 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23절, 고전 13:2에 축약된 형태로 나온다. 도마복음에서는 산을 옮기는 것에 관하여 두개의 말씀이 나오지만 믿음에 관한 언급 은 없다. 눅 17:6에서는 산 대신에 뽕나무로 되어있다. 뽕나무는 본 뿌리가 깊어서 뽑아 내기가 매우 어렵다. 고전 13:2과 도마복 음에서는 산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은유적인 의 미로 사용되었다.
24절, 이 어구는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앞의 엄숙한 선포와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에 관한 말씀을 기 도 응답의 확신에 대한 논리적 토대를 만든다. 기도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경우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믿는 것은 기도 응답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기도를 위한 토대 자체이 다. 마음의 태도로서가 아니라 관계로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신자의 기도를 통하여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수 있게 한다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 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 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 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5 kai. o[tan sth,kete proseuco,menoi( avfi,e te ei; ti e;cete kata, tinoj( i[na kai. o` path.r u`mw/n o` evn toi/j ouvranoi/j avfh/| u`mi/n ta. paraptw,mata u`mw/nÅ
우리가 남들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것으로부터 나 와야 한다 우리가 남들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것으로부터 나 와야 한다. 그러므로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휼 을 받고도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우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치 못한 것이다. 22-24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표현으로 이해된 기도를 우롱하는 것이 된다.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마 21:23-27; 눅 20:1-8)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마 21:23-27; 눅 20:1-8)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 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 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 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 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27 Kai. e;rcontai pa,lin eivj ~Ieroso,lumaÅ kai. evn tw/| i`erw/| peripatou/ntoj auvtou/ e;rcontai pro.j auvto.n oi` avrcierei/j kai. oi` grammatei/j kai. oi` presbu,teroi 28 kai. e;legon auvtw/|( VEn poi,a| evxousi,a| tau/ta poiei/jÈ h' ti,j soi e;dwken th.n evxousi,an tau,thn i[na tau/ta poih/|jÈ 29 o` de. VIhsou/j ei=pen auvtoi/j( VEperwth,sw u`ma/j e[na lo,gon( kai. avpokri,qhte, moi kai. evrw/ u`mi/n evn poi,a| evxousi,a| tau/ta poiw/\ 30 to. ba,ptisma to. VIwa,nnou evx ouvranou/ h=n h' evx avnqrw,pwnÈ avpokri,qhte, moiÅ
27절, 고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산헤드린을 구성 한 세 집단이다 27절, 고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산헤드린을 구성 한 세 집단이다. 그들의 등장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상기시키고, 마가복음 이야기의 앞으로의 진행에 불길한 기조를 설정한다. 28절, 예수는 첫 번째 질문은 전혀 답을 하고 있지 않다. 두 번 째 질문에 관하여도 역 질문을 통하여 사태를 역전 시키고 있다. 본문에서 고위 제사장들은 성전에 대하여 배타적인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질문은 예수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한 것이었 다기 보다는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질 문이었다. 만일 예수가 자신의 행위가 불법한 것임을 인정한다 면 그는 여론에 의하여 비난을 받을 것이고, 예수 자신이 고위 제사장들의 권세를 대체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위험에 처할 것이다.
29절, 예수는 질문자들에게 자신에게 던지 질문 중 핵심 내용을 되풀이 하고 있다 29절, 예수는 질문자들에게 자신에게 던지 질문 중 핵심 내용을 되풀이 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예수께서 이런 일을 행 하신 것은 하나님 영의 능력과 권세라고 생각 할 것이다. 30절, 요한의 권세에 대한 예수의 질문은 승계가 아니라 병행에 관한 것이다. 요한의 권세가 하나님에게 소급될 수 있듯이 예수 의 권세도 하나님에게 소급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 답하라 (avpokri,qhte, moi), 질문은 예수의 권세를 강조하고 어떻 게 전세를 성공적으로 역전 시켰는가를 보여준다
31 kai. dielogi,zonto pro. j e`autou. j le,gontej( VEa 31 kai. dielogi,zonto pro.j e`autou.j le,gontej( VEa.n ei;pwmen( VEx ouvranou/( evrei/( Dia. ti, Îou=nÐ ouvk evpisteu,sate auvtw/|È 32 avlla. ei;pwmen( VEx avnqrw,pwnÈ& evfobou/nto to.n o;clon\ a[pantej ga.r ei=con to.n VIwa,nnhn o;ntwj o[ti profh,thj h=nÅ 33 kai. avpokriqe,ntej tw/| VIhsou/ le,gousin( Ouvk oi;damenÅ kai. o` VIhsou/j le,gei auvtoi/j( Ouvde. evgw. le,gw u`mi/n evn poi,a| evxousi,a| tau/ta poiw/Å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 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 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 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 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 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 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1절, 믿는다는 것은 요한과 그의 침례를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 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의 회개의 침례에 순순히 복종하여 그러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32절, 이 대화는 양 당사자가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들을 제기하는 논쟁 이야기이다. 무리에 대한 두 려움은 당국자들에게 하나의 딜레마 였다. 마가는 요한의 선지 자적인 역할이 성경에 약속되어 있었다는 것(1:2-8; 9:12-13)과 아울러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다는 것(6:15; 8:28)을 이미 언급 하였다. 당국자들은 예수의 반대 질문에 솔직히 답하길 거 부 하였다.
33절, 겉으로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권한도 없는 사람들의 행 패로부터 보호하고 바로 그러한 자들에 조치를 취하기 위해 온 이 산헤드린 고위 제사장들은 그들의 본색을 드러낸다. 성전을 보호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이기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요한과 예수라는 인물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도전해 오는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할 수 없음을 드러 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