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953년 7월 27일, 그 이후
목 차 아, 6.25 !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6.25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Ⅰ. 아, 6 ∙ 25! 6 ∙ 25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전쟁의 성격면 ; 국제전, 현실전, 이념전 -전쟁의 성격, 수행방식, 종결 모양이나 상태 면에서 양면성을 띤 전쟁 전쟁의 성격면 ; 국제전, 현실전, 이념전 전쟁의 수행방식 ; 국지전, 전면전, 제한전쟁, 총력전, 현대전, 재래식전쟁
6·25 전쟁의 기네스북 세계기록 인증
☞300만이 넘는 억울한 한민족의 원한만을 남긴전쟁 ☞한반도 내의 동족내분이 동서의 국제냉전을 확대시킨 결과 -김일성의 무력통일 열망과 스탈린의 ‘세계적화전략’이 맞아떨어져서 발발한 것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과 유엔참전국의 도움으로 맞선 전쟁 -동족상잔의 비참한 전쟁 “민족의 통일은 민족의 보존을 전제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6.25전쟁 같은 전쟁을 막아야 한다!”
※ 국내정치적 - 우익적이고 반공적인 국가질서를 강화시킴 6 ∙ 25전쟁의 영향 약 3년 1개월간의 전쟁이 휴전으로 귀결됨 – 남한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 ※ 국내정치적 - 우익적이고 반공적인 국가질서를 강화시킴 : 민주사회주의의 온건한 이념조차 공산주의와 동일시되고 중간노선과 협상노선을 추구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월북하거나 납북됐고 죽음을 당함 우익적, 반공적 정치질서와 친미 성향이 두드러짐
※ 국제관계 - 미국이 대한민국의 구원자이며 은인이라는 믿음이 국민들 사이에 확산됨 : 점차 친미적 외교노선을 추구, 국제연합에 대한 신뢰 강화 국제연합을 대상으로 한 외교를 중시하게 만듦 ※ 경제분야 - 미국과 유엔의 경제 원조에 힘입어 전후 경제를 복구시켜 나감 : 대한민국의 경제적 요구나 필요와는 관계없이 경제 원조가 이루어짐 소비재 경공업 우선의 공업화가 추진됨에 따라 공업의 대외 의존적 성장과 농업의 침체 현상 발생
※ 군사적인 영향 - 전쟁 발발 시 6만 5천명 규모의 육군이 휴전직후 65만 5천명 규모 로 확대됨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미군의 지원이 체계화되며 , 전력증강 및 군비증강의 필요성이 급부상하고 재래식 전쟁의 대비가 필요하다고 인식함. 해군과 공군을 균형 발전시키고 전술적으로 특수전 부대에 대비한 대비정규전 수행능력과 산악 작전 및 야간작전 능력을 향상시키며 무기체계도 자주포와 전차 등 획기적으로 발전 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됨
※ 정신적인 영향 - 반공주의적인 정신적 분위기를 높임 : 반공은 ‘국시(國是)’의 지위를 차지하여 때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기도 하고 권위주의나 독재주의가 합리화 되는 경향도 있었음. => 반공주의가 부분적으로 부작용을 빚은 점은 비판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북한의 남침도발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높이고 국가안보 유지에 공헌한 사실은 인정 돼야 함.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 국가 이념이나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
※ 사회적인 영향 - 민족의 대이동, 도시로의 인구집중, 사망률 증가, 출산율 저하, 심각한 실업률 등이 발생했으며 수많은 전쟁고아, 전쟁미망인 및 상이군경, 혼혈아 문제를 낳기도 함 전반적으로는 한국의 학문과 기술 및 예술 등에서 기여한 바가 큼
6·25 전쟁의 문학적 영향 선우휘 - 불꽃 윤정모 - 전쟁과소년 윤흥길 - 장마
∴ 6.25 전쟁은 각 분야에 걸쳐 전 방위적으로 영향이 심대하였으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과 앞으로도 ※ 문학적인 영향 - 6.25 전쟁에 대한 문학이 일반화되고 대중화됨 ∴ 6.25 전쟁은 각 분야에 걸쳐 전 방위적으로 영향이 심대하였으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과 앞으로도 계속하여 살아 숨 쉴 것이다.
Ⅱ.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인명 피해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피해 현황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21개국이 지원. 16개 국가에서는 전투부대, 5개 국가에서는 의료지원 및 시설을 파견했다.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혔다
남한 북한 6.25 전쟁 당시 민간인 인명 피해 약 200만 명 추정 (사망, 부상 등 모든 피해자) 24만명 사망 12만명 학살 22만명 부상 8만명 납치 30만명 행방불명 북한 약 200만 명 추정 (사망, 부상 등 모든 피해자)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인명 피해 6.25 전쟁 당시 중공군 인명 피해 구분 사망 /부상 비전투 손실 실종 /포로 계 512,000 177,000 102,000 791,000 6.25 전쟁 당시 중공군 인명 피해 구분 전투 손실 비전투 손실 계 사망 부상 실종/포로 중공군 135,600 208,400 25,600 13,000 590,000 972,600
물질적 피해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및 교통시설이 파괴 정부 건물의 4분의 3과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경제적 중심지였던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한국군에게 재 수복이 반복 건물, 유물, 국민의 생활 터전 등 물질적 재산 요소가 다수 파괴 경제적 파탄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원조물자는 기초경제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는 계기가 되고 엄청난 전통 문화재가 파괴, 소실, 행방불명 되었음
민간가옥 학교 의료기관 행정기관 22억 8,105만 4,217달러 물질적 피해 사회전반의 기반시설 파괴 피해액 (2조 6,209억 3,129만원)
Ⅲ. 6.25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자주국방의 필요성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적인 침략을 받음 무력 도발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함 전·후방 동시전투 체제의 확립, 전투수행능력, 전투기량 등을 연마해 완벽한 자주국방태세를 확립
입체적인 조기 경보 체제 확립 적의 기도를 사전에 탐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 연합 및 민·관·군 모두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조기경보가 가능토록 체제를 확립해야 함
연합 및 합동작전 능력의 요구 현대전에서는 연합 및 합동작전이 필수불가결한 요소 평소부터 꾸준한 훈련을 통해 작전능력을 구비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억제'를 위하여 국력신장하는 것 ! 해·공군 전력의 균형된 발전으로 국방태세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 북한이 해·공군의 증강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완벽한 국방태세 요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억제'를 위하여 국력신장하는 것 ! 투철한 정신전력 및 국민화합은 총력안보의 원동력 북한의 불법남침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온 국민이 강한 애국심과 반공사상으로 무장하여 대항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