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 사회의 팽창 (1) 유럽 사회의 안정 : 10세기 이후 민족 이동의 혼란 수습, 농업 발달(쟁기 보급, 삼포제 농법 실시), 인구 증가 등이 배경 (2) 도시의 발달 ① 도시의 출현:주로 교통이 편리한 제후의 성, 큰 교회의 주변에 시장 형성 → 도시로 발전 ② 자치권의 획득:봉건 영주의 지배 → 11세기 이후 길드를 중심으로 자치권 획득, 자유로운 상공업 활동에 종사 ③ 길드:도시의 상업.수공업자들이 상호 협조를 위해 조직 → 도시의 행정에도 참여
(3) 상업의 발달 ① 교역의 확대:지리 지식 확대, 교역로 증가 → 유럽 각지로 상업 활동 확대 ② 원거리 무역:비잔틴 제국이나 동방 세계와도 무역 활동 전개 (4) 유럽 사회의 팽창 ① 배경:10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적 발전 → 11세기경 세력 확대 ② 팽창:11세기 말의 십자군 전쟁 1) (세속적인 목적 내포), 13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 축출(크리스트 교 세력 확대) - 한자동맹
2. 흔들리는 중세 사회 (1) 장원의 해체 ① 화폐 사용의 일반화:화폐가 필요한 영주들이 부역 노동 대신 화폐 지대 요구 → 돈을 받고 농노의 신분을 풀어 주기도 함 ② 인구 감소:14세기 중엽의 흑사병 1) → 유럽 인구의 1/3 이상 사망 ③ 농민의 신분 상승:많은 영주들이 노동력 확보를 위해 농민들의 처우 개선 → 농노의 신분 해방으로 발전 (동유럽의 농노제)
(2) 기사 계급의 몰락 ① 십자군 전쟁의 영향:기사들의 사망,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② 새로운 무기의 보급:화약과 대포의 등장 → 전쟁의 형태 변화, 기사 계급의 사회적 비중 크게 약화 (3) 교황권의 쇠퇴 ① 십자군 전쟁의 실패, 성직자의 부정과 부패 → 교황의 권위 하락 ② 교회의 대분열:14세기 후반 로마와 프랑스의 아비뇽, 두 곳에서의 교황 선출 → 세력 양분
3. 중앙 집권 국가의 출현 (1) 왕권의 강화 ① 배경:13세기 말 이후, 교회 세력과 봉건 귀족의 영향력 약화 ② 관료제와 상비군 제도 확립: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국가의 바탕 (2) 도시 상공업자의 성장 ① 국왕 후원:국왕을 재정적으로 후원, 국왕의 관리로 봉사 ② 사회적 지위 상승:귀족(마그나 카르타), 성직자와 함께 신분제 의회 1) 프랑스)에 참여 (3) 중앙 집권 국가의 출현 :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4) 백년 전쟁(1337~1453) ① 배경: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갈등 ② 경과:전쟁 초기 영국 우세 → 잔 다르크 1)활약으로 프랑스 승리 ③ 결과:국민 의식 성장, 봉건 귀족 약화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5) 장미 전쟁 1)(1455~1485) : 영국의 왕위 계승 전쟁 → 튜더 왕조 성립 (6) 동유럽의 중앙 집권 국가 : 정치적 분열, 농노제 강화 → 서유럽보다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이 매우 늦음
용 어 정 리 ● 삼포제 : 중세 초기 서유럽의 농업 수준은 매우 낮아서 한번 경작을 하면 지력이 크게 떨어져 몇 년 간은 농사를 짓지 못하였다. 또, 당시 농법은 이탈리아 주변의 부드러운 흙에 적합한 것이어서 서유럽의 척박한 토질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1세기 이후에는 인구 증가로 몇 년 간이나 넓은 토지를 휴경시킬 여유가 없게 되자, 작물의 종류를 바꾸면 연작을 하더라도 그다지 수확이 줄지 않는 점에 주목하여 삼포제 농업이 개발되었다. 삼포제 농업의 장점은 여름에 성장하는 작물이 파종되었다는 점이다. 지중해 연안은 여름이 건조하지만, 북유럽은 습하였으므로 여름에도 작물을 충분히 재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지나친 지력 소모를 막고, 농작물을 다양화함으로써 자연 재해로 인한 피해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력을 연중 골고루 분산시켜 주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었다. 그러나 삼포제 농업은 개방 경지 제도를 바탕으로 봉건 사회의 공동체 의식이 반영 된 것이었다. 따라서 봉건적 규제가 심하고 농민의 창의 성을 억제하여 농업의 근대적 발전을 지체시키기도 하였 다. ● 도시 : 중세 도시는 방어를 위해 원형으로 집들을 지 었기 때문에 내부 구조가 매우 복잡하였으며 상 하수도 등 생활 기반 시설도 빈약하여 매우 불결하였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은 봉건 영주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이었기 때 문에 주변의 농민들과는 구별되었으며, 자치권을 지니고 있어서 ‘국가 속의 국가’라고 불리었다. 또한 도시민에게 는 ‘성벽(burg)안에 사는’이라는 뜻에서 ‘부르주아지’라 는 명칭이 붙여졌다.
● 길드 : 길드는 중세 유럽의 동업자 조합을 말한다. 11 세기 상인 길드가 먼저 나타났는데, 12세기에는 곳곳에 퍼져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 였다. 약 1세기 뒤에는 장인 길드도 생겨났는데, 나중에 는 상인 길드보다 더욱 번성하였다. 길드는 원래 상호 부조와 친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 나, 차츰 구성원들 간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시장을 독점 하기 위하여 제품의 품질과 가격, 노동 시간과 임금 등을 규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길드의 폐쇄적인 성격 은 나중에 오히려 경제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압하는 부 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 원거리 무역 : 9~10세기 무렵부터 노르만족이나 이슬 람 상인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고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 이후 교역 범위가 크게 넓어져 지중해를 통한 동방과의 원거리 무역이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이탈리아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향신료, 비단 등을 들여와 북유럽에 넘기기도 하였으며, 플랑드르 상인들은 그들의 모직물을 동유럽에 팔았다. 또, 북독일의 상인들은 북해와 발트해 연안에서 나는 목재, 해산물 등을 서유럽에 팔았다. ● 십자군 : 십자군이란 ‘크리스트를 본받아 십자가를 진 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 에 서유럽의 크리스트 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감행한 원정 부대를 말한다. 그들이 십자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원정 에 참여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 : 예루살렘은 크리스트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계 3대 종료의 성지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은 유대교의 성지이며, ‘통곡 의 벽’ 위쪽으로는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성지가 있다. 예루살렘에는 황금빛을 발하는 ‘바위 사원(Dome on the Rock)’이 있는데, 이곳의 바위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 은 외아들 이삭을 야훼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려 했던 유 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성지인 동시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할 때 밟고 오른 곳이어서 이슬람교의 3대 성지 중 한 곳이다. 한편 ‘통곡의 벽’은 야훼의 성전 중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불태웠을 때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 던 서쪽 벽으로, 긴 유랑 시절 유대인들이 그 벽에 머리를 대고 통곡하여 기도를 올렸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 십자군 전쟁의 동기 : 10~11세기에 걸쳐 유럽 사회 는 민족 이동과 수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지나 전반적인 안정기에 들어섰다. 기후도 한랭기에서 온난기로 접어들 자, 각지에서는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하고 인구도 증가해 사회 전체에 활력이 넘쳐 흘렀고, 이는 다시 국왕, 제후, 기사 등의 모험심과 정복욕을 자극했다. 특히, 봉건제 아래에 서 확립된 장자 상속제로 인하여 기사의 차남과 삼남 등 은 토지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구하고자 하 였다. 그리고 국왕과 영주는 영지 확대를 통해 지위와 권 력의 증대를 꾀하였다. 한편, 상공업의 발전 속에서 도시 의 상공업자는 상업권을 확대하기 위해 동방 무역의 주 도권을 놓고 이슬람 상인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을 종합해 볼 때 십자군 전쟁은 성숙해진 유럽 봉 건 사회에서 대외적으로 팽창하려는 열기가 높아진 가운 데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 : 중세 북유럽 상업권 의 패권을 잡았던 북독일 중심의 도시 동맹을 가리킨다. 한자(Hanza)라는 말은 원래 ‘집단’을 뜻하여, 외지에서의 상업 권익을 지키기 위해 단결한 무역 상인의 조합을 가 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 흑사병 : 페스트 균에 감염되어 일어나는 급성 전염병 이다. 유럽을 덮친 흑사병으로 도시의 경우 인구의 절반 이 감소하고, 아비뇽에서는 추기경의 절반이 죽었다. 농 촌에서는 농민들이 병으로 죽거나 병마를 피하여 마을을 버리고 도망가 폐촌으로 변한 곳이 적지 않았다. 흑사병 이 유행하는 동안 사회 질서는 무너졌으며, 대다수가 공 포에 사로잡혀 가족조차 버리고 도망쳤다. 환자를 간호 할 사람이 있을리 없고 시체의 매장도 불가능하였다. 일 부에서는 ‘악마의 소행’으로 믿어 ‘마녀 재판’을 벌여 수 많은 여성들을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 지대의 금납화 : 동방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유럽 에는 구하기 힘든 물품이나 사치품들이 유럽으로 대거 흘 러 들어왔다. 이를 구입하기 위해 화폐가 필요해진 봉건 영주들은 직영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부역 노동에 의해 직영지를 경작하는 것이 비효율적 인 데다, 농민들의 반발과 장원 이탈을 막기 어려웠기 때 문에 임대해 주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생산물의 일부를 팔아 화폐나 현물로 지대를 납부하였는데, 이러한 금납화 현상은 실질적으로 농민들 의 부담을 줄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외적인 강제도 크게 약화시켰다. 이는 곧 농노의 예속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장원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봉건적 반동’과 농민의 저항 : 흑사병으로 인한 장원 의 노동력 감소는 전체적으로 농민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영주의 반동적 지배에 대한 저항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 하여 1349년에 <노동자 칙령>, 1351년에 <노동자 조령> 을 발표했다. 봉건 지배층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지배 체제를 더 욱 강화하자, 농민들은 실력으로 맞섰다. 와트 타일러의 봉기는 새로운 인두세 징수에 반대하여 일어난 영국 역 사상 최대의 농민 운동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한 때 국왕 리처드 2세에게 농노제 폐지 요구를 관철시키기 도 하였다. ● 기사 계급의 몰락 :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송 나라에서 발명된 화약이 이슬람을 통해 유럽에 전래되었 다. 이후 칼을 주무기로 하던 기사들은 총과 대포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몰락해 갔다.
● 동유럽의 재판 농노제 : 서유럽에 비해 사회 발전이 뒤 늦었던 동유럽은 11세기부터 시작된 개간 운동으로 새로 이 봉건제가 이식된 지역이었다. 중세 말로 접어들면서 동유럽 역시 봉건제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농민과 영주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서유럽에 비해 인구가 희박하였던 동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인한 노동력의 손 실이 더욱 심각하였다. 그런데 서유럽만큼 봉건제의 역사 가 길지 못했던 동유럽의 농민들은 영주에 대항하는 단결 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으며, 자유를 찾아서 도피할 수 있는 도시도 없었다. 결국 농민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 던 봉건 귀족들은 봉건적 반동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서 유럽에서 농노제가 거의 사라져 가던 16세기에는 오히려 농노제가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를 재판농노제(The Seco Nd Serfdom)라고 한다.
● 교회의 대분열 :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사람들의 신앙 심이 시들해진 가운데, 14세기 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성직자에 대한 과세권을 놓고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로마 교황청은 필리프 4세에 의해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옮겨져 이후 70년 동안 교황이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만 했다. (아비뇽 유수-잡아서 가두어 놓다)그 후 로마와 아비뇽에 서 각각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 였는데, 이를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부른다(1378~1417). 교회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콘스탄츠 공의회를 개 최하여 교회의 대분열을 마무리 지었으나, 교황권의 쇠퇴 는 막을 수 없었다. ● 관료제 :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관료가 행정을 담당하 는 제도 ● 상비군 : 유사시에 대비하여 항상 준비된 군대
● 초기 자본주의적 요소의 대두 : 중세 말기 변환기 속 에서 도시에도 길드의 엄격한 규제에서 벗어나는 자본 주의적인 요소들이 차츰 나타났다. 프랑스의 자크 쾨르, 피렌체의 메디치, 독일의 푸거 가문 등은 선대제 수공업 과 복식 부기 등 합리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운영하였는 데 이에 힘입어 상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고, 어음과 같은 신용 제도도 등장하였다. 새로운 방식으로 부를 축 척한 대상인, 금융업자(고리 대금업자)들은 그 무렵 등장 한 중앙 집권적인 국왕의 정치적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 다. 또, 민족 국가의 형성과 르네상스의 성립에도 기여하 여 근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 신분제 의회(모범의회) : 중세 말기 유럽 여러 나라에서 는 성직자, 봉건 영주, 시민들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가 성 립하였다. 각 신분의 대표자들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었지 만 국방의 자의적인 조세 부과에 반대하여 조세 승인권을 행사하였으며 그 밖의 일반 국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러나 근대 사회의 의회 의원과는 달리, 소속된 신분 집단 의 구속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에서 신분제 의회를 ‘중세 의회’라고도 부른다. 또, 국왕에 의해서만 소집되었고, 토 의 안건과 일정 역시 국왕이 정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의회와는 크게 다르다.
●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 Magna Carta ) : 마그나 카 르타라고 하는데, 영국의 첫 헌법이 되는 헌장이다. 내용 은 왕이 세금을 거두려면 신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자 민의 체포와 처벌은 법에 따라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었다. 대헌장을 통해 영국의 귀족들이 왕에게 요구한 것 은 세금 내는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지켜달라는 것이었 다. 영국 왕권이 최초로 귀족들에 의해 제한된 사건이다. ● 삼부회 :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소수 특권층인 사제 귀족 도시의 대표를 모아놓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개최한 것이 기원이다. 그 뒤 제1부 사제, 제2부 귀족, 제3부 평 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삼부회)로 정형화되 었다. 영국의 의회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성격을 띤 반면, 삼부회는 교회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 하는 성격을 띠었다.
● 백년 전쟁(1337~1453) : 백년 전쟁은 플랑드르 지방 의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원인이 되어 일어 났다. 라인 강 하류 지역인 플랑드르 지방은 11세기 노르 만족이 정복한 이래 영국령으로 편입되어 일찍부터 모직 물 산업이 발달하였다. 영국에서는 양목업이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플랑드르 지방은 영국에서 양모를 수입하여 모직물 공업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프랑스 왕가는 플랑드르 지방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하였으므로 영국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한편,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카페 왕조가 몰락하고 바로 아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가 카페 가문왕조 출신이라는 이유를 내세 워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로 군대를 보냈다. 백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잔 다르크 :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고전을 면치 못하 고 있던 어느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 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 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고 한다. 백년 전쟁이 끝 나갈 무렵, 영국군의 포로로 잡힌 뒤 재판에서 마녀로 낙 인 찍혀 화형을 당하였다. 이후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 판결을 뒤집고 명예를 회복시켰고, 카톨릭 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 장미전쟁 : 백년 전쟁 이후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30년 전쟁. 랭커스터가의 귀족들은 붉은 장미 문양을 쓰고 있었고, 요크가는 흰 장 미 문양을 쓰고 있었던 데서 ‘장미전쟁’이라고 불리워지 게 되었다.
길드의 기술 시험
신분제 의회. 에드워드 1세가 1295년에 소집한 모범 의회의 모습
헨리 7세는 요크 집안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뒤, 자 신의 문장인 붉은 장미에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겹친 도안으로 영국 왕실의 문장을 새롭게 만들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