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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의 출생과 성장 - 출생에서 전국명창대회 입상하기까지 - 임방울의 후원자 2 지 춘 상(전남대학교 명예교수)
표 인 주(전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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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방울의 후원자 문순태는 임방울이 생존시에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는 임방울 자신의 자전적 진술을 인용하여 임방울과 박재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임방울이 박재실 창극단에서 2년 동안 <춘향가>와 <박타령>을 익혔다고 기록한 내용과14) 임방울이 공창식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어렸을 때에는 외숙 김창환에게서 귀동량을 했고, 근년에는 박재실에게서 <수궁가>를 익혔다고 대답하는 내용15)이 서로 일치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문순태는 임방울이 박재실에게서 배운 소리가 <춘향가>와 <박타령>인지, 아니면 <수궁가>인지를 혼동하고 있다. 다만 천이두의 《임방울》에 수록된 내용은 박재실이 임방울의 첫스승일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해방 직후에 임방울이 강남준, 정광수, 공기남, 박귀희, 임유앵, 임초월 등과 함께 동일창극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하고 다닐 때 같은 멤버로 참여하여 임방울에게서 소리공부를 하였다는 임준옥(1986년도에 정읍국악원 원장)의 구술을 고려할 때 임방울이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고, <흥보가>를 많이 불렀다고 한 점16) 은 임방울이 누군가로부터 <흥보가>를 배웠다는 것인데, 그것은 (표3)에서처럼 박재실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도리어 임방울의 첫스승이 박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천이두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근거로 임방울의 스승으로 공창식과 유성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방울이 집에서 나와 이웃마을 소리꾼한테 찾아갔다고 했는데, 그 때의 소리꾼은 공창식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며, 임방울의 노래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공창식에게서 사사한 이후부터 일이고, 그 이후에 유성준을 찾아간 것은 음악적 자질이 어느 정도 다져진 이후의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17) 특히 필자가 박화선, 한애순, 정철호를 통해서 임방울과 박재실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다각적으로 질문을 했으나, 이들은 박재실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생소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어서 임방울이 과연 박재실에게서 소리수업을 받았는지 다소 의문을 갖게 한다.. 14) 문순태, <팔도명인전>(196), 전남매일신문 1975년 12월 2일자 신문. 15) 문순태, <팔도명인전>(197), 전남매일신문, 1975년 12월 3일자 신문. 16) 천이두, 앞의 책, 44∼45쪽. 17) 천이두, 앞의 책,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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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방울의 후원자 박화선은 임방울이 소리수업을 받았던 사람은 김창환과 유성준을 언급하면서 공창식에게서도 소리수업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고, 한애순은 임방울로부터 공창식이 소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유성준에게서 소리수업을 많이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철호는 임방울이 유성준에게서 주로 소리를 배웠고, 공창식에게서도 소리를 배운 적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임방울의 첫 스승이 과연 박재실인지 아니면 공창식인지는 좀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문순태에 의하면,18) 임방울이 공창식을 만나게 된 것은 박재실 단장으로부터 명창 공창식 선생이 화순 능주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재실 단장의 허락을 받아 14세 무렵에 화순 능주 범우골에 있는 공창식을 찾아가면서 이루어졌다. 공창식은 능주 출신인 김채만에게서 소리를 익혔던 김창환 부자와 한성태, 박종원 등과 같이 협률사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화하면서 크게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공창식의 소리는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의 소리를 계승한 서편제로서 서른 살에 서울로 올라가서 미남 명창으로 인기를 독점했는데, 어느 재상의 첩이었던 보영이라는 여자와 뜨거운 사랑에 빠져 극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를 놓아주지 않은 보영이로부터 밤에 맨발로 도망쳐 나왔다고 하여 사람들은 '맨발의 공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4세 때 임방울은 화순 능주 범우골로 공창식 선생을 찾아갔는데, 그 때 공창식 선생은 뒷산에서 <수궁가> 중 새타령을 소리하고 있었다. 이 때 임방울은 공창식의 소리에 도취되어 우두커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한참 후에 공창식이 소리를 끝낸 뒤에 임방울과 상견례가 이루어졌다. 임방울이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면서 공창식 선생이 했던 <수궁가>의 한 대목을 하니, 누구한테 소리를 배웠는지를 물었고, 이에 임방울은 "어렸을 때는 외숙인 김창환 선생한테서 귀동냥을 했고, 근년에는 박재실 선생 밑에서 수궁가를 배웠다"라고 말했다. 18) 문순태, <팔도명인전>(196∼198), 전남매일신문 1975년 12월 2일∼4일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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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4)<임방울과 공창식, 남국일의 만남에 대한 이견>
2. 임방울의 후원자 이 때 공창식은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속골로 이사간 김채만을 찾아가 3년 동안 다시 수련을 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범우골 뒷산에서 새들을 벗삼아 소리를 연마하고 있었다. 공창식은 원각사가 폐쇄된 내막을 임방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902년에 건립된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창극단체의 육성의 요람지로서, 원각사가 폐쇄되자 많은 국악인들이 실의에 빠져 있었다. 원각사의 활동이 한창 활기를 띌 무렵에는 많은 명창들이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했다. 김창환, 박기홍, 송만갑, 이동백, 한성준 같은 당대의 명창들은 통영갓에 옥관자를 달고 마음대로 궁중을 출입하여 어전에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 1905년에 원각사가 패쇄되자 활발하게 예술활동을 하던 국악인들이 실의에 빠져 뿔뿔이 고향으로 흩어지고 만 것이다. 공창식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공창식은 임방울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임방울은 그 날부터 본격적으로 소리수업을 받았다. 특히 공창식은 신재효의 <광대가>를 불러가며 소리광대가 되는 험난한 길을 가르쳐 주었고, 구슬픈 애원성 하는 법, 잉애걸이, 완자걸이, 보비위가락, 군목질, 엇붙임, 드렁조 등 창법을 가르쳐 주었다. 임방울은 17세 무렵에 공창식에게서 소리를 배우던 중 화순읍에 사는 남국일의 생일잔치에 참석하게 된다. 참석의 계기는 남국일이 공창식을 생일잔치에 초대했는데, 임방울이 대신 참석하게 되면서이다. 남국일은 임방울의 소리에 반하게 되고, 급기야는 유성준 선생을 소개해 주게 된다. 공창식의 승낙과 더불어 남국일의 배려에 의해 유성준 선생한테서 본격적으로 소리수업을 받는다. 지금까지 임방울과 공창식, 남국일의 만남에 대한 이견은 (표4)와 같다. (표4)<임방울과 공창식, 남국일의 만남에 대한 이견> 출 전 내 용 문순태, 전남매일신문의 <팔도명인전>, 1975. ·공창식 선생으로부터 다양한 창법을 배움 ·남국일 씨가 화순 만연사에 독방을 얻어주고 독공을 계속 하도록 함 ·남국일 씨 소개로 유성준을 만남 국창임방울선생기념재단, <국창 임방울 선생> ·공창식 선생한테서 <적벽가>를 배움 기타 문헌 ·공창식과 남국일에 대한 언급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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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방울의 후원자 남국일에 대한 기록은 위의 (표4)와 같다. 남국일은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데 후원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순태의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박화선과 한애순의 구술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박화선은 당시 소리하는 사람이 남국일의 집에 안간 사람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임방울도 남국일의 집에 드나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임방울이 화순 만석꾼 부잣집인 남국일의 생일날 소리를 하여 총애를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애순도 남국일이 임방울의 소리 공부를 시켰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국일은 임방울이 소리 공부하는 데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 남국일은 화순에서 재력이 있고 소리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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