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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풍암고 국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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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ation on theme: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풍암고 국사과"— Presentation transcript:

1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풍암고 국사과
근 현대의 경제 2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풍암고 국사과

2 일제의 식민지 경영 목표 한반도를 일본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는 독점 시장화 값싼 식량 및 원료 공급지화
자원과 노동력 수탈장화

3 동양척식 주식회사 1908년 8월 27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발포, 일제 식민지 지배를 위한 국책 회사
 1908년 8월 27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발포, 일제 식민지 지배를 위한 국책 회사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업을 증식하는 것을 목적 일본의 퇴역 병사들을 조선에 이식, 일본의 인구 문제를 해결, 조선 내의 민족 운동을 저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고 착취하기 위한 목적 특수 법인 50% 이상의 고율 소작료를 징수 빌려준 곡물은 20% 이상의 비싼 이자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둠

4 동양 척식 주식회사

5 토지 조사령 <조선 총독부 관보> 1912. 8. 13
토지 조사령 <조선 총독부 관보>   1. 소유권의 주장은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2. 불복자에 대해서는 증거주의를 채택한다. 4. 토지의 지주가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한다. 5. 기간 안에 토지의 사방 경계의 표식을 세우고 지목 번호 및 민유지에서는 소유자의 씨명, 명칭을, 국유지는 보관 관청명을 써야 한다.

6 토지 조사사업의 실시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간도 매우 짧음. 그리하여 기한 내에 신고를 못한 사람이 많았고, 마을이나 문중의 공유지도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음. 지주의 소유권만을 인정, 소작인은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 일제는 신고 못한 토지와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를 모두 약탈하여 총독부 소유로 만듬. 총독부는 이 땅의 일부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비롯한 일본 토지 회사나 일본인 지주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김 그 결과 일본인 농업 이민이 10배로 크게 늘어났고, 한편, 토지 소유권과 토지 가격 조사로 인해 총독부의 지세 수입도 1919년에는 1911년의 두 배로 늘어남.

7 토자 조사 사업

8 회사령(1910년)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2조 조선 외에서 설립한 회사가 조선에 본점이나 또는 지점을 설립하고자 할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회사가 명령과 허가 조건에 위반하거나----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한다.   한국인의 기업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함으로써 산업구조를 일제의 의도에 따라 재편      

9 일본 지식인의 망언 조선 경제가 그토록 비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 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48년경에 일본 도쿄 대학 교수 스즈키가 한 망언

10 민족별 공업 회사 불입 자본액

11 민족별 광산 생산액 현황

12 민족별 어획고

13 증산량보다 더 많은 쌀을 수탈하다. -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
쌀 수탈을 위해 쌀 생산을 늘리려는 것, 1920년부터 시작되어 일본 국내의 쌀값이 안정된 1934년까지 계속 이를 위해 수리 시설을 개선하고, 품종을 개량하며, 밭을 논으로 만들어 논의 면적을 늘렸으나, 목표한 만큼 쌀 생산을 늘리지 못함 지주는 빠르게 토지 소유 확대,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 계획한 만큼 쌀을 수탈하였고, 그 대신 만주에서 조, 수수, 콩 등의 잡곡을 들여왔다.

14 미곡의 생산량과 수탈량

15 일본의 군수 공업화 정책 1차 대전 종전으로 전쟁경기 후퇴 1920년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꿈
1920년대 : 일제 독점 자본의 본격 침투, 광업, 비료, 섬유 회사 등 설립 1929년 세계경제 공황 발발 1930년대 : 일제의 대륙 침략 → 군수 공업 시설 ( 전기 , 제철 , 중화학 공장 ) 설치 → 병참 기지화-노동력과 자원의 수탈(비참한 노동환경)

16 황해도 일본 삼릉 제련소

17 남면북양 정책 – 1930년대, 병참 기지화 정책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南綿北羊 정책을 실시하여 조선농민에게 강제
남면북양 정책 – 1930년대, 병참 기지화 정책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南綿北羊 정책을 실시하여 조선농민에게 강제 남한의 농민에게는 면화재배를, 북한지방의 농민들에게는 가구 당 5마리의 양을 기르도록 함 이는 세계경제 공황 뒤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보호무역주의를 취하여 원료공급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인 방직자본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

18 미곡공출제도 년대, 민족 말살 정책 처음에 과잉지역의 과잉수량을 공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공정가격에 의해 자발적 공출을 장려한다 하여 지주층의 소작료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재정 및 식량 사정이 점점 악화됨에 따라 전체 농민을 대상으로 자가 소비량을 제외한 전량이 강제 공출되었다.

19 전시 총동원 체제 징병과 징용 실시 경제활동 통제 강화-군수산업 이외 활동 통제 세금 늘리고 저축 강요-군수 기업에 집중 지원
군수 공장이나 광산에 한국인 노동자 강제 동원 금속류 강제공출

20 조선 물산 장려회 궐기문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에 제일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 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

21

22 조선 물산 장려 회보

23 조선 물산 장려 선전 표어

24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브 나로드(Vnarod)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일찍부터 문화 운동을 전개하던 동아 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농촌 계몽에 나섰다. 다음은 동아 일보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1931).

25 동아일보 내용  “……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여름 방학에 고향의 동포를 위하여 공헌하지 아니하시렵니까? 가령 글을 모르는 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위생 지식이 없는 이에게 위생 지식을 주고, 이러한 일을 아니 하시렵니까? 당신이 일 주일만 노력하면 당신의 고향에 문맹이 없어질 것이요, 당신이 일 주일만 노력하면 당신의 고향에 위생 사상이 보급될 것입니다. ……”

26 1920년대 농민 운동 ­대전군 가수원리(대전 광역시 대덕구) 일대 농민들의 임시 농민 대회 선언문(1922)­
1920년대 농민 운동   ­대전군 가수원리(대전 광역시 대덕구) 일대 농민들의 임시 농민 대회 선언문(1922)­ 노동....우리에게는 아직 피가 있고 힘이 있다. 우리 농부도 사람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노예의 처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   우리는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또 있을 곳이 없어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의 팔자이며 운수인가? 결코 팔자가 아니며 운수가 아니다. 다만 무리한 지주의 횡포에 기인한다. ……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정정당당히 무리한 지주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며 우리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 한다. ……  

27 소작쟁의의 원인별 비율

28 소작인 조합의 결성과 요구 사항 소작 조건을 보장하고 소작료는 실제로 수확하는 양의 40%를 한도로 할 것.
지세,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할 것. 지주나 마름의 선물 및 부역 강요에 대해서는 거절할 것. 머슴 및 일용 노동자들과의 단결을 도모할 것. 동양척식주식 회사의 일본인 이민을 반대할 것. 위의 내용은 경상 남도 노동 운동자 협의회의 요구 사항이다(1924). 점차 군 단위의 지역 연합체로 발전하면서 활발한 공동 투쟁을 전개하였다.

29 치열해지는 농민운동 종래 조선의 농민 운동이 치열하였다고는 하나 무리한 소작권 이동과 높은 소작료 반대 등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1930년경부터 쟁의 형태가 차츰 전투적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이미 단순히 경작권 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토지를 농민에게’와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농민 야학, 강습소 등을 개설하여 계급적 교육을 실시하고, 또 농민 조합의 조직도 크게 달라져 청년부, 부인부, 유년부 같은 부문 단체를 조직하여 지주에 대한 투쟁이 정치 투쟁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 비밀 보고서(1933)­

30 농민들의 투쟁 방식과 그 성격은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
농민들의 투쟁 방식과 그 성격은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 시기 투쟁 방식 변화 성격 변화 원인 변화(쟁의의 주된 주장) 1920년대 경제 투쟁 농민의 생존권 투쟁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 농민들의 경작권이 박탈되고 소작농 증가 → 소작료 인하, 소작 조건 개선, 소작권 이전 반대 1930년대 전반 정치 투쟁, 전투적 식민 지배를 부정하는 항일 민족 운동, 계급 투쟁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몰락한 농민 증가, 식민지 지주제 강화 →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키는 일제 타도,  농민의 토지 소유 요구

31 암태도 소작쟁의

32 민족별 노동시간 비교

33 조선 노농 총동맹의 결성  3.1운동 이후 활성화된 노동 운동은 주로 상호 부조와 계몽을 내세우는 노동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자, 노동 운동은 노동 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점차 대중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적 조직을 갖춘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었는데,

34 노농 총동맹의 발전 이 단체는 “노동자, 농민 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건설한다.”,
“자본가 계급과 철저히 투쟁한다.”, “노동자, 농민 계급의 복리 증진과 경제 향상을 기한다.”라는 강령을 내세우며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도하였다. 이 동맹은 뒤에 노동 총동맹과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35 부산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태  어두컴컴한 공장에서 감독의 무서운 감시를 받고, 100도에 가까운 뜨거운 공기를 마시며 온몸이 쑤시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는 대개 15, 16세 또는 20세 전후로, 그 대부분은 각지의 농촌에서 모집되어 온 것이다. …… 노동 시간은 길고 식사는 형편 없어 그들의 영양 상태와 건강은 극도로 나빠지고 있다. 이 여성들의 낯빛은 마치 중병 직후의 환자와 같고 몸은 쇠약하여 졸도하는 일이 허다한데, 공장 내에는 특별한 규율이 있어 조금이라도 그 규율을 어기면 바로 매를 맞는 형편이었다.                                    ­조선 중앙 일보, 1936년 7월 2일­

36 원산 총파업

37 노동쟁의가 활발해진 까닭  3․1 운동 이후 일제가 회사령을 폐지하면서 일본인들의 자본 투자가 늘어나고 한국인들이 세운 기업도 이전보다 많아져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남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나쁜 작업 환경에 시달렸지만, 일본 기업들이 경찰의 힘을 빌려 노동 운동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을 결성하여 노동 쟁의를 벌림

38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노동․농민 운동이 활성화되었는데, 계급 투쟁을 강조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 운동을 조직화하여 노동자의 각성과 단결을 강화하였다.

39 노동 운동의 투쟁 방식과 성격이 점차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
시기 투쟁 방식 변화 성격 변화 1920년대  합법 투쟁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 1930년대 비합법 투쟁 노동 조합의 지하 조직화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내세우는 항일 민족 운동 노동자 농민 해방을 내세우는 계급 투쟁

40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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