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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선생님의관한글 - Windows 반 조범기- 한번넘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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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선생님이란??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이다.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군(平澤郡) 출신. 일제치하에는 신간회활동 주역이었으며, 조선어학회등 활동했었다. 해방정국에서 한성일보사 사장직으로 활동하기도 했었으며, 우사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 활동 등을 추진하였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청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어 1948년 8월 15일까지 근무했으며, 남북협상에 참가했었기도했고, 남북협상 실패 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나 6월 25일,한국전쟁때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자.다음은안재홍선생님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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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에사망으로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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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초기였을때에일이예요. 1891년 11월 30일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율포에서 순흥안씨 안윤섭(安允燮)과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 8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수원의 기독교계 학교로 진학한후, 서울 경성기독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한다. 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다니며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1910년 8월 여름방학으로 평택에 내려와 있다가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유학을 결심, 경성기독청년회(YMCA) 중학부 졸업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1년 9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과에 입학, 재학 중에는 학과목 공부 외에 취미로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밤을 새워가며 독서를 하였다. 많은 독서를 하며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술지식을 습득하였다. 그 외에 '한인유학생학우회'를 결성, 조만식, 송진우, 장덕수, 이광수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뒤 와세다 대학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호를 민세(民世)라 지었다. 생애초기에요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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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몽운동이었을때! 교육계에 투신,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학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1916년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신규식 등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신규식,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이후 그는 신채호를 존경하였다 한다. 그 후 귀국하여 1917년 초,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심어주려 한다는 이유로 일제 총독부 당국의 압력을 받고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직을 사퇴하였다. 안재홍은 이 무렵 대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해 5월 비밀조직인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총무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다가 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11월 경상북도 경무부에 의해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경무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안재홍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아 고문관마저 혀를 차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등뼈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그는 그 뒤 후유증으로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바로 재판을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2년 출옥하였다. 출소 이후 1923년 최남선 등과 '시대일보'(時代日報)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디딘 후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같은 해 9월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이사가 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30년 1월부터 조선상고사를 시작으로 신채호의 저작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제품의 국내유입을 보고 조만식·김성수·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이사에 선출되었으며 국산품 장려운동을 주관하였다. 교육계몽운동은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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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운동이었을때 1928년 1월 필화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5월 논설 〈제남 사건의 벽상관〉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옥고를 치르며 이때 《조선일보》 역시 무기 정간처분을 받는다. 뒤에 조선일보가 무기정간에서 풀리면서 조선일보로 복귀, 1929년 1월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쳐 1931년 5월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이른바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1935년 5월부터 〈조선일보〉의 객원으로 〈민세필담 民世筆談〉을 집필했다. 그러던 중 1936년 6월 중국 난징[南京]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8년 풀려났다. 그러나 1938년 첫 부인 이정순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8년 5월 흥업(興業)구락부 사건으로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이후 20여 년 동안 무려 9번에 걸쳐서 일제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장남 안정용의 결혼식 때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수감중이라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1920~30년대에 민족교육계몽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940년대에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하는 역사관을 확립하여 타민족에 대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민족사관을 주장했다. 그는 가정살림에는 무관심하였다. 안재홍의 며느리인 김순경은 후일 인터뷰를 통해, 안재홍이 도통 살림은 신경쓰지 않는 바람에 그의 아들인 안정용이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고 한다. 참고:네이버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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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후… 1940년 외부 활동을 줄이고 필생의 작업인 <조선상고사감>의 저술을 위해 고향인 평택군 고덕면 두릉리 집에 은거하며 고조선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1년 창씨개명을 강요할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항상 그를 요시찰인물로 감시했다. 1941년 분성김씨 김부례와 재혼하였다. 김부례의 친정에서는 결혼에 대한 반대가 심하였으나, 김부례는 안재홍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 김부례는 안재홍이 납북된 뒤 2000년 11월 25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43년 3월 3개월만에 불기소로 풀려났지만, 이때의 고문으로 인한 고통과 후유증은 두고두고 그의 정신과 육체를 괴롭혔다.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수시로 수감되었는데, 이 사건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 학생들 만세 운동을 지도하여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1928년 1월, 필화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5월 논설 <제남 사건의 벽상관>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조선일보가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뒤에 무기정간에서 풀리면서 안재홍은 조선일보로 복귀하고 조선일보 사장에까지 올랐다. 1929년 2월,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1936년 6월, 중국 난징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대 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한 것이 발각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아 1938년 풀려났다. (그 해에 첫 부인 이정순이 폐렴으 로 세상을 떠났다. ) 1938년 5월, 흥업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장남 안정용의 결혼식 때 서대문경찰서에 수감중이라 참석할 수 없었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어 3개월만에 불기소로 풀려났다. 1919년 이후 9번에 걸쳐서 총독부에 체포되어 7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태평양에한번가보신후조사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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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건준위활동이예요^^ 1944년 여운형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의 봉안 이상촌으로 내려가 비밀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가 되었다. 여운형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항복하자, 바로 8월 15일 저녁에 안재홍 등과 함께 건국동맹 위원들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안재홍은 1945년 8월 15일 밤 발족된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5년 8월 16일 경성중앙방송국에 나가 방송 연설을 하였다. 안재홍은 건준의 결정 소식을 알리면서 질서 유지를 위한 경비대와 정규병의 편성, 식량 확보와 배급, 통화와 물가 안정, 미결의 정치범 석방 등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건준에서 박헌영파의 영향력 강화로 인해 안재홍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1945년 9월초 안재홍은 건준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는 박헌영에 대해 반감을 가진것에 건준을 떠난것이 주요인이지만, 충칭 임시정부에 대한 시각 차이도 안재홍이 건준을 떠난 중요한 이유였다. 방법의 차이는 있을망정 안재홍도 송진우처럼 '임정 봉대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안재홍은 '임정 절대 지지'를 표명한 뒤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9월 4일 건준을 탈퇴하였다. 그러나 안재홍과 한민당은 민족통일전선과 좌우합작운동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조금달를가생각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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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정치활동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였으나 건준이 박헌영의 개입과 영향이 좌경화되어가면서 안재홍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탈당, 9월 1일 조선국민당을 창당하였다. 박헌영이 '건국준비위원회 내에 민족주의자들이 많다'며 우경화를 우려하며 개조를 요구하였다. 여운형은 단독으로 결심할 일이 못된다며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을 찾아가 협의하였는데, 안재홍은 여운형에게 '박헌영을 멀리하라'며 그에게 충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건준에서의 박헌영파의 영향력 강화는 안재홍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안재홍은 9월 초 건준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5년 9월 24일 사회민주당·자유당·민중공화당·근우동맹·협찬동지회 등의 군소정당과 통합하여 국민당을 창당하였으며, 국민당은 다시 1946년 4월 18일 한국독립당에 흡수되어 한독당에 입당하였다. 1945년 10월 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그는 "(조선일보가)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절식(絶息·숨이 끊어짐)되었었고, 이제 조선민족에게 약속된 해방과 함께 또다시 그 보도와 비판 및 선양의 기관으로서 신(新)출발하게 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며 축전을 보내주었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곧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1946년 우익 언론인 한성일보사의 사장에 취임, 한성일보사를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정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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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운동참여와과도입법위활동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 이어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2월 14일 민주의원이 결성되자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우익중심단체의 활동을 하면서도 극우세력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다. 그해 2월 여운형과 김규식, 원세훈 등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자 그 역시 여기에 가담한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하는 이유로 "만일 우리 한국에서 적정 타당한 합작으로 하루빨리 통일정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조국에는 중대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 경고하고, 극좌와 극우 편향으로 세력이 치달으면 "멀지 않은 장래에 그야말로 내란적인 항쟁의 피를 흘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 원세훈, 여운홍 등과 같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12월 미 군정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과도입법위원회에 참여하였다. 5월 조봉암이 전향을 선언하고 박헌영에 대한 공개비판서를 발표하자 이를 입수해서 한성일보에 보도케 했다. 대체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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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참여와만년인듯(/-.-/) 1948년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딘의 주도로,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 등이 제주도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가졌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입후보, 출마하였으나 2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후 국민당 당수와 조선일보사 사장 겸 주필을 역임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 1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기시정위원회를 조직했다. 안재홍은 국기시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48년 8월 안재홍은 민간위원으로 사학자 이병도, 이선근, 미술협회장인 화가 고희동, 국어학자 최현배와 함께 참여하였으며 기타 관선인 국회의원, 법조인, 언론인, 학자 등 총 42명의 시정위원이 선출되었으며 12명의 특별심사위원을 구성하여 새 나라의 국기 채택을 의논하게 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평택군 민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9월 26일에 인민군에 의해 북조선으로 납북되었다. 납북당한 이후 안재홍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재북평통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는것만 알려졌을뿐 그외에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1965년 3월 1일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일본방송을 통해 당일에 대한민국으로 전달되었고, 아들 안정용과 변호사 이인(李仁)의 주관하에 3월 9일에 시신 없는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그의 고향인 경기도 평택의 생가에는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운구도 없는 장례식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사후 1989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크!정부수립은너무어려운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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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비판 평가 비판 시인 이기형은 '민세(안재홍의 호)는 모든일에 군자연하고 타협적이며 순응적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안재홍은 전형적인 학자같은 성격으로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자기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가정적으로는 가부장적 성향을 가졌다고 한다. 송건호는 '민세(안재홍의 호)는 거짓이 없고 순정한 인간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민족지도자로 존경 받기는 했으나 한국적 정치 풍토에서 정치인이면 으레 몸에 지니고 있어야할 권모와 술수, 당략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일제 수난기와 해방후의 거센 파도속에서 시대적 희생자로서 인생을 마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라고 평가 하였다. 시인 이기형은 '민세(안재홍의 호)는 모든일에 군자연하고 타협적이며 순응적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기형은누구시죠?) 죄송.(반말를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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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쿡! 친일혹설과반론 저서 동아일보, 조선일보등 비롯한 뉴데일리 등 일부 보수언론에서 안재홍을 여운형과 더불어 '골수 친일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명단 및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병 유세에 들었다는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2010년 1월,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월간잡지 <<신동아>> 1월호에 '여운형과 안재홍은 친일파'라는 내용의 기사를 개제했다. 그러나 실제로 안재홍은 여운형과 더불어서 일제치하 시절, 국내에 살면서 마지막 끝까지 저항했던 독립운동가였고, 오히려 그의 민족주의적 행보 때문에 일제로부터 수차례 투옥되어 여운형같이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감시대상 1호'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안재홍 본인 스스로 '순정우파'라고 노선을 분명히 밝힌 적이 있을 정도로 확실히 민족주의 우파이므로 일부 극우세력이 아닌 이상 우파 입장에서 그를 친일파라고 제기할 수도 없고 좌파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즉, 안재홍의 친일의혹설은 여운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제로부터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무단으로 명의도용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국민주당의 기관지인 동아일보측에서 그를 친일파라고 몰아붙인 것으로 보이며, 그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상고사감》 《조선통사》 《한민족의 기본진로》(조양사 출판부, 1949) 《고원의 밤》 (종합출판 범우, 2007)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세안재홍선집》 (지식산업사, 1983) 드디어알려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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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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