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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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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생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2 “ 우리들은 학생이다. 학생 중에서도 중학생이다
“ 우리들은 학생이다. 학생 중에서도 중학생이다. 우리들의 앎이 비록 부족하고 견문이 빈약하지만, 그렇지만 오해하지 마라, 그것을 이유로 우리들을 지금까지 도구시하였으며 지금까지 기계시하고 앞으로 또한 개와 말같은 동물처럼 대우하고 봉건적 노예와 같이 학대하면 우리들은 결코 그것을 감수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 (1927년 10월의 중앙고보동맹휴학 시의 격문)

3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충돌사건을 보도한 1929.11.6일자 <동아일보>기사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충돌사건을 보도한 일자 <동아일보>기사

4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을 구타한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 (朴準彩)군
광주고보생들은 일본인 학생의 비행 규탄과 왜곡 보도한 일제 기관지 <광주일보> 규탄을 위해 데모에 돌입. 이 데모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크게 충돌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을 구타한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 (朴準彩)군 자료출처:광주서중 일고 총동창회

5 ‘학생의 날’의 의의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6 학생들 스스로 식민지 조선의 잘못된 현실을 깨닫고, 당당하게 실천으로 옮겼던 날
 학생들 스스로 식민지 조선의 잘못된 현실을 깨닫고, 당당하게 실천으로 옮겼던 날.  일본제국주의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식민지 노예로 자신을 길들이는 학교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식민지 노예로 길들여지는 자신의 삶에 부당함을 느끼고, 그것이 고쳐지지 않는 한 영원히 이 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항일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해방이후 군사독재시절에는 민주화의 깃발을 들은 자가 ‘학생’이었다. 학생의 날 학생의 날 지정 1953년 10월 20일 국회발의로 1929년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운동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의결 학생의 날 부활 1972년 10월 유신 직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항일 광주 학생 운동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8 1929년 민족차별교육·식민지노예교육에 반대한 광주지역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한 항일학생운동.
개요 6·10만세운동 학교·학년별로 조직된 비밀결사·독서회는 민족의식 고양,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나아가서는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의 핵심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기원도 1926년 11월 광주고 보생과 광주농교 생 10여 명이 조직한 성진회(醒進會)라는 학생비밀결사를 모태로 이루어졌고 성진회는. 각 학교·학년·학급별로 조를 편성하여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학습을 실시했다 배경

9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들

10 항일 광주 학생 운동은 이렇게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11 광주항일학생운동은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통학하는 광주중학생
(일본인)과 광주고보생(조선인) 사이의 충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福田修三] 등이 광주여자고보 3년생인 박기옥(朴己玉) 등 여학생들의 댕기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하자, 이때 개찰구를 나오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朴準埰)와 싸움이 일어 나고, 급기야 나주역전에서 광주고 보생들과 광주중학생들 사이의 편 싸움으로 번졌다. 이에 일본인 순경들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편들고 박준채를 구타했다. 일본인 신문인 〈광주일보〉도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옹호하는 보도를 했다. 역전충돌은 11월 3일에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적 격돌로 발전했다. 광주고보의 다른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천에서 맞붙어 광주역전까지 쫓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중학생 수백 명이 검도 등으로 무장을 한 채 광주역전으로 몰려들자, 광주고보생들은 농교생들과 합세하여 일본인 학생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충돌에서 한국학생은 9명, 일본학생은 26명이 부상을 당했다. 역사영상

12 물결은 광주를 넘어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13 제2차 광주학생 가두시위 이후인 12월 2일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중요 공·사립학교와 시내 곳곳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이 살포되었다.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가 참가한 이 운동에는 194개교의 학교와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였으며, 그 중 580여 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體刑)을, 2,330여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젊은 학생들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이 다시 한번 분출된 독립운동사상 격렬하고 힘찬 운동이었다.

14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약 5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참가한 학생수가 전국에서 약 5만 4,000명으로서,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학생수 8만 9,000명의 약 6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 운동으로 구속 기소된 학생수는 1,642명으로 이중에서 4년 이상의 체형을 받은 학생이 3명이었으며,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이 2,330명에 달했다.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학생운동이 대중운동과 결합하지 못했지만, 해외의 조선인단체들은 이 운동과 연대하여 행동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간도성의 조선인학교가 만세시위를 했으며, 지린[吉林] 에서도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이 결성되었다.

15 항일광주학생운동은 이렇게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16 일시 내용 1924년 6월 제 1차 동맹휴학 광주고보(광주서중․일고전신)와 일인 선발팀과의 야구 시합 때 일본인 단장의 횡포로 인한 충돌로 3개월간의 동맹휴학(4명 퇴학). 1926년 11월 3일 성진회 결성 광주고보생 9명과 광주농고생 7명이 항일 비밀결사 조직. 1928년 6월 이경체 사건 반일 유인물 살포사건 으로 구속 퇴학. 1928년 6월 26일 제 2차 동맹 휴학 광주고보생 「이경채(李景采) 사건」의 진상규명과 식민지교육에 항거한 맹휴(27명 퇴학, 281명 무기정학). 1929년 3월 유시 퇴학 일제의 압력에 의한 학교장의 「유시퇴학」에 항의한 사건으로 4명의 학생이 구속 기소되어 실형 언도. 1929년 6월 독서회 결성 광주고보 졸업생 장재성(張載性)과 왕재일(王在一)의 주도하에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여고보(현 전여고) 학생이 「독서회 중앙본부」를 경성하여, 서울의 「신간회」등과 연락 활동. 1929년 9월 광주학생 소비조합 결성 광주고보, 광농, 광사, 광여고보생이 결성하여 「독서회」와 함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의 고취 등 항일운동 전개. 1929년 광주학생 항일독립운동 10월 30일의 나주역 충돌사건을 시발을 계기로 한․일 학생간의 쟁투가 벌어지다가 11월 3일, 명치절(일본국경일)에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여고보생들까지 합세하여, 일본인 신문사를 습격하는 등, 대대적인 시위가 국내외로 파급되어 1931년 5월말까지 320교에 5만 4천여명이 참가하여 권고퇴학 580여명, 자진퇴학 350여명, 무기정학 2,300여명, 피검자 1,640여명. 1941년 12월 서중 무등회 결성 「독서회」의 맥락을 이은 비밀결사조직 활동.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서중학생이 주동이 되어 거사한 이차 학생독립운동으로 징역 22명, 퇴학 70여명, 정학 120여명.

17 항일 광주 학생 운동의 과거와 현재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충북지부

18 나는 누구인지, 학생은 무엇인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떠한지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날
과거 가. 학생본위의 교육실시 나. 학생자치권 허용 다. 인격적 대우 라.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마. 자각된 주체 현재 나는 누구인지, 학생은 무엇인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어떠한지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날

19 함께 생각해봅시다.  ① 항일광주학생운동은 거대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었던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운동이라니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탄압도 심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징계를 받고, 퇴학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선배들의 운동에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② 항일광주학생운동은 저절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성진회’나 ‘독서회’라는 학생들의 조직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조직은 통학열차사건이 발생하고 만들어져서 항일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수년 전부터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성진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③ 당시 학생들은 많은 요구사항을 걸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학생들이 우리사회에 간절히 외치고 싶은 구호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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