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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 학과:문헌정보학과 학번: 이름:이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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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치통감강목소개 2. 강목체 [綱目體] 3. 갑인자로 찍은 책
1.자치통감강목소개 2. 강목체 [綱目體] 3. 갑인자로 찍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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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치통감강목소개 ≪자치통감강목≫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 간행된 중국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송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해 ≪춘추≫의 체재에 따라 사실에 대하여 큰 제목은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의 형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세종은 이 책을 애독하여 신하들에게도 읽기를 권장하였으며, 또 집현전 문신들에게 명하여 ≪훈의≫까지 만들게 하였다. 그 훈의가 완성되자 세종은 그 간행에 필요한 종이 350,000권(700만장)을 중앙과 지방에 만들게 하여 총 권수 139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간행해 냈다. 이 때에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는 갑인자를 사용하고 강의 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 유(뒤의 세조)가 글씨를 써서 연(鉛)으로 주자한 병진자를 사용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을 찍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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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본은 총 139권 중 권19 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책 첫장에‘校正(교정)’인이 있으며, 책 맨 끝장에‘玉淵墨藏(옥연묵장)’이라는 인기가 있다.
옥연재(玉淵齋)는 경북 안동시 풍산면(豐山面) 하회동(河回洞)에 있는 유성룡(柳成龍)의 서재이므로 그곳에 간직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지는 뒷장이 없어졌던 것을 개장하였고, 앞장은 원형대로 보존하였으며 표제는 따로 목판인쇄하였고, 권차는 그 아래 묵서하였다. 병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 18년 7월 임술조와 유의손(柳義孫)의 서문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유성룡의 후손인 유시부(柳時溥)가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현재는 아단문고로 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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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은 보물 제552호로 1971년 8월 30일에 지정되었으며, 1권이 서울 중구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인쇄문화와 유교문화를 살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자치통감강목은 보물 제552호로 1971년 8월 30일에 지정되었으며, 1권이 서울 중구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인쇄문화와 유교문화를 살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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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목체 [綱目體] 큰 글씨로 쓴 줄거리 기사의 강(綱),
보다 작은 글씨로 쓴 구체적 서술의 목(目)으로 기본 틀을 이루는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술의 형식이다. 그 시원(始源)은 공자가 쓴 노나라의 역사인 《춘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자료로 이용하여《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함으로써 강목체의 체계가 정비되었다. 강목형식에서는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명분과 전통을 중시하여 문자표기로 포폄(褒貶)을 가리는 강과 목의 구별은 성리학적인 도덕적 평가가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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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강목형식 역사서로는 고려시대에 김관의(金寬毅)가 편찬한《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이 그 시원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책은 현전하지 않아 그 내용과 형식을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 크게 일어난 17세기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임상덕(林象德)의 《東史會綱)》,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민경호(閔京鎬)의 《대동사강(大東史綱)》 등이 강목체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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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갑인자로 찍은 책 갑인자는 1434년(세종 16)에 만든 동활자(銅活字)로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한다. 왕명을 받아 중추원지사 이천(李狀)ㆍ직제학 김돈(金墩)ㆍ직전(直殿) 김호(金鎬)ㆍ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ㆍ사역원첨지사(司譯院僉知事) 이세형(李世衡)ㆍ사인(舍人) 정척(鄭陟)ㆍ주부(主簿) 이순지(李純之) 등이 경연(經筵)에 소장하고 있는 <효순사실(孝順事實)>, <논어> 등 명나라 초기 판본(版本)을 자본(字本)으로 삼고, 모자라는 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의 글씨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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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뒤의 개주와 구별하기 위해 특히 세종대 만들어진 활자를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 한다. 이 초주갑인자는 1580년(선조 13)에 재주(再鑄)될 때까지 140여 년간에 걸쳐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해지고 있는 인본의 종류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 소장의 <대학연의(大學衍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등을 초인본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갑인자에 붙여 특기할 것은 이 활자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함께 사용된 점이다. 갑인자 한글활자는 획이 굵고 강직한 인서체(印書體)인 것이 특징이며, 세종이 우리의 글자를 제정하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인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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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갑인자는 글자가 바르고 해정하여 자주 가주(加鑄)와 보주(補鑄), 그리고 개주(改鑄)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는 ‘성종실록’을 찍기 위하여 보다 큰 가주 또는 보주를 하였고, 1515년(중종 10)에는 닳고 이지러진 것을 갈기 위한 보주가 이루어졌으며, 완전한 개주는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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