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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ch don’t always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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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ation on theme: "The rich don’t always win"— Presentation transcript:

1 The rich don’t always win
샘 피지개티 지음 작성자 : 원다성

2 도 서 소 개 샘 피지개티 지음 이경남 옮김 알키(시공사) 펴냄 슈퍼리치의 종말과 중산층 부활을 위한 역사의 제언.
도 서 소 개 샘 피지개티 지음 이경남 옮김 알키(시공사) 펴냄 슈퍼리치의 종말과 중산층 부활을 위한 역사의 제언. 그때 그렇게 했다면 지금 우리도 분명 할 수 있다.

3 1장 부자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1 1890년대에도 수 많은 사람이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소위 금권정치, 즉 재력가들이 국가의 양대 정당을 지배하는 정치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은 직접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인민당이 바로 그것이다. 인민당은 흔히 포퓰리스트로 통했다. 포퓰리스트들은 주의회 의원, 주지사, 하원의원, 심지어 상원의원까지 배출시켰다 년 포퓰리스트들은 민주당 후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대통령 후부로 지명했다. 위기를 직감한 부자들은 금고를 열고 유례가 없을 정도의 많은 돈을 뿌렸다. 1896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풀린 돈은 이후 110년 동안 쓰인 대통령 선거 비용 평균의 4배가 넘는 액수였다. 그리고 이 선거 자금의 90% 이상이 재력가들이 구원자로 생각한 공화당 후보 윌리엄 매킨리에게 들어갔다. 승자는 매킨리 였다. 부자들은 포퓰리스트들을 간단히 제압했다. 이들은 기록적인 돈을 썼다. 대부분 농민이던 포퓰리스트들은 돈이 없었다. 1896년의 패배로 이들은 설자리를 잃었다. 인민당은 와해됐다. 거의 완전히. 하룻밤 사이에. 한편 부자들에게는 찬란한 새로운 세기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4 1장 부자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2 돈에 밀린 페티그루의 실패
매킨리가 승리한 뒤에도 페티그루는 한껏 기가 오른 금권 정치가들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연방정부의 토지가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페티그루가 도입한 법안은 1898년 상원 회기 중에 기각됐다. 부자들은 페티그루의 입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매킨리의 선거전을 앞장서서 지휘한 오하이오의 실업가 마크 해나가 선두에 나섰다. 페티그루가 3선에 도전한 1900년에 해나는 공화당의 반역자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50만 달러의 전비를 모금했다. 선거가 치러지기 몇 달 전에 해나는 운동원들을 사우스코타로 보내 페티그루의 인기를 조사했다. 페티그루가 크게 앞서고 있었다. 해나는 선거 당일에도 직접 나서 사람들을 매수했다. 결국 페트그루는 큰 표 차로 낙선했다. 현직 의원인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였다. “재계의 큰손들이 푸는 돈을 과소평가했다.” 페티그루는 몇 해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과대평가했다.”

5 1장 부자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3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
미국에서 진짜 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섬터 요새 공격으로 남북전쟁의 서막이 오르면서부터다. 20세기 초에 들어와 폭로자라고 불리는 새로운 부류의 기자들이 나타나 사기와 횡령을 일삼는 날강도 같은 수법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보험회사의 약탈적인 사업 방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폭로 작가인 윌리엄 비크로이 마셜은 1909년에 이렇게 호통을 쳤다. 미국의 부자들, “탐욕의 신앙에 귀의한 이들은 형사법의 관점은 아니더라도 도덕법의 관점에서 볼 때 피에 굶주린 무정부주의자나 무턱대고 폭탄을 던지는 사람들보다 백배 이상의 벌을 받아 마땅한 악당들이다.” 큰돈을 꿈꾸는 모사꾼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896년 매킨리가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이것은 현실화됐다. 미국 농산물 가격이 높아지자 배가 더욱 불러진 부자들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았다. 1997년 이들은 경제계를 휩쓰는 거대한 합병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선두 주자는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입김이 센 금융가 j. p. 모건 이었다.

6 1장 부자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4 부호들의 호기로운 ‘과시적 소비’ 빈민들의 수치스러운 현실 법과 정의는 유명무실했다
과시적 소비는 1912년 타이타닉 호의 처녀 항해로 절정에 이른다. 돈이 많은 사람도 물속에서 공포와 추위에 떨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빈민들의 수치스러운 현실 공장과 광산에서 일하는 18세 이상의 남성 근로자중 주당 20달러 이상 버는 사람은 10명당 1명 꼴이었다. 뉴욕 인구 340만 명 중 2/3가 폭이 7.5m밖에 안되는 어둡고 비좁은 월세 아파트에 살았다. 법과 정의는 유명무실했다 미국에서 ‘대단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근로자의 생활 부담을 덜어주는 어떤 법안에도 반대했다. <캔자스 신문>의 발행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는 미국 상원이 업계의 권력과 수장들을 대표하는 백만장자 클럽이 됐다고 비아냥거렸다. 1890년 셔먼 반트러스트 법은 성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한 상징적 조치 이상의 의미가 없던 법으로, 판사들은 오히려 이 법을 근거로 파업과 그 밖의 노동쟁의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남발했다.

7 1장 부자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 5 윌슨 대통령은 1913년 취임사에서
“그 동안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꺼져가는 생명, 과로로 기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희생을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위대한 정부는 너무도 자주 사사롭고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되어왔다. 그리고 그런 정부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국민은 없었다.” 부자들의 논리 그레이트 노던 레일웨이 회장 제임스 j. 힐은 높은 물가를 사람들의 무절제한 사치 성향의 탓으로 돌렸다. 한 신문 기자가 힐에게 물었다. “1900년 인구조사에서 연평균 임금은 437달러로 밝혀졌다. 이런 돈으로 어떻게 과도한 사치를 부릴 수 있는가?” 힐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사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미국의 근로자들도 근검과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 뉴욕의 변호사 핀쇼는 1912년 “미국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힐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8 2장 금권주의에 맞선 위대한 전진 1 상원의원 앨버트 커민스는 “막대한 근로 대중이 쌓아 올린 수입을 분배하는 것이 이 시대의 핫 이슈다. 만사 제쳐놓고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만약에 미국이란 공화국이 난파한다면, 그 주범은 바로 분배 문제일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는 2퍼센트의 엘리트가 모든 토지와 거기에서 나오는 생산물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때 망했다.” 라고 개탄했다. 금권주의에 맞서기 시작한 변호사들 현대 산업사회에는 지금보다 훨씬 평등한 규칙이 적용되는 경기장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브랜다이스는 생각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멋대로 규칙을 만들어 대중을 위험에 몰아 넣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변호사들은 대중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소임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부자와 국민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처신하지 못하고, 거대 기업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브랜다이스는 생각했다. 다른 변호사들도 브랜다이스의 뒤를 이어 금권정치에 맞서기 시작했다.

9 2장 금권주의에 맞선 위대한 전진 2 불평등이 심한 나라는 살기 좋을 수 없다
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이자 사회사업가이며 변호사, 도시 개혁가인 프레더릭 하우는 1905년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래서 연대책임이 중요해진다. 이런 것이 하나의 복지를 모두의 복지로 만든다.” 20세기 들어 이런 추세는 더욱 뚜렷해졌다. 1912년 4월 필라델피아를 방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가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불평등이 심한 미국은 결코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없다고 개혁가들은 확신했다.

10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2장 금권주의에 맞선 위대한 전진 3
1905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노동자들의 전국 대회는 타협을 거부하는 새로운 강성 노조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을 태동시켰다. 1911년 4월, 맨해튼의 한 블라우스 공장을 잿더미로 만든 악명 높은 트라이앵글 화재로 여공 146명이 숨진 사건이 있었다. 공장주가 출구로 통하는 계단을 잠가놨기 때문에 여공들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다음날 추모식장에 28세의 로즈 슈나이더만은 “근로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살 권리다. 단순한 생존권이 아니다.” 슈나이더만은 동료들의 원혼을 달래며 외쳤다. “노동자에게는 빵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미도 필요하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11 2장 금권주의에 맞선 위대한 전진 4 세금으로 골리앗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
“힘깨나 있는 사람들”을 길들이는 방법은 바로 정부가 가장 기본적인 권한인 세금이라고 진보주의자들은 생각했다. “방법이 없다고 주저 앉는다면 그것은 직무 유기다.” 브랜다이스는 이렇게 촉구했다. “세금으로 골리앗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세금을 적용할 것인가? 미국의 여러 주정부는 오래 전부터 특정 형태의 재산에 대해 세금을 징수해 왔다. 바로 부동산이다. 1906년 12월, 공화당 중진을 기절초풍하게 만든 연설을 해 ‘미국에서 가장 희한한 2가지 명물’이 ‘ 나이아가라 폭포와 루스벨트’라는 세간의 평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정부는 오랫동안 수입 관세와 내국세 또는 소비세를 주요 세입원으로 삼아왔다. 세제를 언제, 왜 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정부는 누진 상속세를 실시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누진 소득세도 부과해야 한다.”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은 정부의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이득을 얻기 때문에 국가에 특별한 의무를 빚지고 있는 셈이다.”

12 3장 세계대전이 만들어준 기회 1 어디서 전쟁 자금을 확보할 것인가
국회 전비자금 안건의 배후 주동자인 테네시주 하원의원 코델 힐은 3년 전에 획기적인 1913년 연방소득세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킨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새로운 세법은 부자들의 세율을 2배 이상으로 늘렸다. 200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7%가 아닌 15%의 세율을 적용했다. 또한 부자들의 5만 달러가 넘는 유산에 부과된 연방소득세는 1 ~ 15센트의 누진율을 적용했다. 기업에 대한 징수법안은 군수산업체의 초과 이윤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런 일련의 입법 활동은 일종의 조세 정의의 승리였다. 부자들의 재산을 털어라 전시재정위원회 의장 핀쇼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진정한 애국자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 외에 전쟁 비용까지 부담하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겁이 없는 핀쇼는 상 하원 협의회에 통고했다. “이 전쟁을 명예롭게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비애국적인 소수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만들 것인가는 미국인의 손에 달려있는 문제다. 미국이 아니라 어떤 나라도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동시에 금권주의자들까지 보살피는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다.”

13 3장 세계대전이 만들어준 기회 2 사회주의 세력의 수난
세계를 민주주의의 안전지대로 만들기 위한 전쟁은 이런 투지 넘치는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대표적 인물이 우정공사 총재 앨버트 벌리슨이다. 그는 지역 우체국장들을 동원해 “전쟁을 수행하는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방해하는” 어떤 정기 간행물도 집배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기수격인 <이성에의 호소>는 신문을 계속 발행하기 위해 입장을 바꾸어 전쟁에 찬성해야했다. 굴욕적인 항복 선언이 있은 후 <이성에의 호소>는 그들을 언론계의 첨병으로 만들어준 금권주의와의 투쟁 정신을 두 번 다시 보여주지 못했다. 매서운 펜을 휘둘렀던 <이성에의 호소>는 1920년대 초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회당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세계를 민주주의의 안전지대로 만들기 위한 전쟁은 미국을 금권주의의 가장 사나운 적이 발붙일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사회당에 대한 강도 높은 전시 탄압은 잔인한 아이러니였다. 윌슨 정부가 전쟁에 이기기 위해 사회주의를 혼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3장 세계대전이 만들어준 기회 3 활기를 찾은 노동운동, 그러나
진보파의 베테랑 윌슨 행정부의 노동부 차관보 루이스 포스트는 “주변의 안면 있는 몇몇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노동을 인간이 아닌 그저 노동 비용 정도로 생각하던 많은 구시대 금권주의자가 전체로서의 노동을 하나의 인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후의 노동 기준을 한층 높이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금권주의자들은 입지를 잃고 있었다. 전국의 철강파업, 시카고 근로자들의 파업, 보스턴에서는 경찰관들까지 파업에 나섰다. 시애틀 근로자들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시 차원의 총파업을 단행했다. 노동 저널리스트인 딕 마이스터는 근로자들이 기본적인 서비스는 정상 가동시켰다고 전했다. 도시 곳곳에서 우유가 배달됐고 식사도 준비됐다. 그 외에는 6일 동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애틀 시장 오울 핸슨은 총파업을 미국 판 볼셰비키 혁명의 시발점으로 규정했다. 미국노동총연맹은 시장 못지않게 겁을 먹고 전국 지역 지부장들에게 파업을 끝내도록 압력을 넣었고, 결국 지부장들은 승복해서 파업을 중단했다. 들불은 전국 곳곳으로 번졌지만 뿔뿔이 흩어진 사회당은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참전 반대라는 당의 원칙론은 결국 조직을 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5 3장 세계대전이 만들어준 기회 3 또 한 번, 금권주의의 승리
“정치권력이 대중에게 있는데 경제력이 유산계급의 손에 있다면, 그 사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1919년 피셔는 이렇게 지적했다.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할 것이다. 금권주의가 민주주의를 접수하거나, 민주주의가 투표로 금권주의를 몰아내거나 둘 중 하나다.” 니어링은 이렇게 썼다. “물과 기름처럼 두 사상은 섞일 수 없다.” 1920년에 들어서자 승자의 윤곽이 뚜렷해진 것 같았다. <하퍼스 위클리>의 발행인 햅굿은 지식층 개혁가들이 첫째 “중요하고도 필요한 물품을 만들기 위해,” 둘째 “그런 물품을 중단 없이 생산하기 위해,” 셋째 “ 그것을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경제 발전에 중요한 1가지 목표에 정치력을 집중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지식층 개혁가들은 그런 책임을 외면하고 있었다. 미국 정치 현장에서 평등은 더 이상 중요한 개념인 것 같지 않았다. 금권주의자들은 살아남아 또 한 번 10년 동안의 호시절을 맞는다.

16 4장 탐욕에 눈먼 부자들 1 1920년 신임 대통령 워런 하딩 은 금권주의자들의 복권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말했다.
그는 앤드루 멜론을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 멜론은 슈퍼 리치의 반열에 오른 사람으로 막대한 재산가. 부자들은 혼란스러운 세계대전과 전후의 적색 공포를 거치며 다시 우위를 점령했다. 핀쇼의 동료인 상원의원 조지 노리스도 이런 현실을 마찬가지로 우려하고 개탄했다. 진보다운 진보는 이제 무망해 보였다. 근로자들은 고용 조건으로 노조에 절대 가입하지 않겠으며 노조를 결성하지도 않겠다는 서약(아메리칸 플랜) 사용자들은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와, 특권을 주지 않는” 직장을 뜻하는 오픈 숍의 수호자라 선언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권리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17 4장 탐욕에 눈먼 부자들 2 대법원은 시위와 불매 운동으로부터 사용자들을 지켜주었다. 하급법원의 명령은 효과적인 파업을 수행할 수 있는 노조의 역량을 무력화했다. 정부 규제기관은 기업의 장부 내역을 추궁하고 조사할 능력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주 할 것 없이 규제 당국은 전력 회사의 수중에서 놀아났다. 소위 ‘멜론 플랜’으로 알려진 세제안은 양당의 공감대를 반영하고 있었다. 고소득 고세율에 대한 멜론의 적대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쿨리지는 선거인단에서 압도적인 과반수를 가져갔다. 의회에서도 공화당이 상하 양원모두를 휩쓸었다. 진보파 라폴레트는 자신의 출신지에서만 승리했다. 쿨리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금권주의자들은 세금전쟁에서 승리했다. 과거에 납입한 세금을 돌려받은 것은 당연한 전리품이었다. 현금이 차고 넘치자 이들은 늘 하던 일을 했다. 투기였다. 처음에는 부동산이었다. 1926년 부동산 거품은 꺼졌다. 이제 투기꾼들은 주식시장으로 옮겨갔다.

18 4장 탐욕에 눈먼 부자들 3 미국은 이들의 재산에 질식 당했다.
1929년 3월 취임식에서 후버는 “축재와 상속으로 인한 과도한 부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는 선언했다. 퍼스트 내셔널 뱅크 오브 뉴욕 은행장 조지 F. 베이커 주니어는 1929년 가을에 베이키의 화려한 출근길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월스트리트의 사상누각, 투자신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커와 6명의 동료들은 서둘러 2억 5000만 달러를 투입했지만 시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미국 최대의 투기 거품이었다. 예금주들은 겁에 질려 은행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은행은 돈을 지급할 수 없었고, 기업은 파산했고, 근로자들은 직장을 잃었다. 금권주의는 실패했다. 미국은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었다. 이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도 받았다. 그리고 인센티브와 보상으로 계속 재산을 늘렸다. 미국은 이들의 재산에 질식 당했다.

19 5장 대공황이 불러온 대혼란 1 <배너티 페어>의 발행인 에드먼드 윌슨은 1931년에 “현재의 불황은 하나의 전환점”이라며 “남북전쟁 이후 처음 겪는 진짜 위기”라고 단정했다. 해가 갈수록 경제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현재의 불황은 대공황으로 변했다. 미국에 닥친 재앙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부자들의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위를 하도 많이 벌여 사람들은 그 황량한 공원(유니언스퀘어)을 “붉은광장” 이라 불렀다. 1932년 노동절에는 6만 명이 모였다. 기겁한 경찰들은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건물 지붕 곳곳에 기관총까지 설치했다. 연방 매출세로 야기될 대중의 분노를 무릅쓰기보다는 부자에 대한 세금을 적당히 올리는 것이 낫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새로운 법안으로 거둬들인 세수는 신설된 소비세에서 나왔다. 소비세가 적용된 품목은 대부분 껌이나 엔진오일 같은 일상용품이었다. 1932년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NBC에서 방송된 연설에서 “경제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있는 잊힌 사람들”을 상기시키면서 “사회경제 구조의 꼭대기에서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행정부를 질타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그의 아내 둘 다 상류 특권층 출신이다.

20 5장 대공황이 불러온 대혼란 2 루스벨트, 대통령이 되다
루스벨트는 9월에 샌프란시스코의 커먼웰스 클럽에서 자신의 선거운동이 “모두를 희생시켜 부당하게 번영을 구가한 소수에게 혜택을 준” 정부를 상대로 수세기 동안 벌인 지속적인 투쟁의 일환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는 11월 선거에서 6개 주를 싹쓸이하면서 57%의 득표율로 현직 후버 대통령 을 간단히 제압했다. 이런 몰표는 루스벨트의 개인적 열망만큼이나 변화를 바라는 민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루스벨트는 보수파도 살리고, 보다 평등한 경제 정책을 내세우는 캠페인도 유지하는 양다리 작전을 구사해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렇다면 대통령 루스벨트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임기 초기부터 오랫동안 재계에 군림해온 기득권 조직을 궁지에 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선거운동 당시 긴축재정을 주장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계산 때문만이 아니었다. 브랜다이스 같은 구시대 인물도 과감하게 미래에 베팅한 바 있으나 1933년의 루스벨트에겐 그런 배짱이 없었다.

21 5장 대공황이 불러온 대혼란 3 진보파 의원들의 활약
수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지속적인 실험을 한 상원의원 휴고 블랙은 노동시간을 주당30시간으로 제한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방안 이었다. 미국노동총연맹 의장 윌리엄 그린은 좀처럼 하지 않던 지지발언을 상원에 나가 증언하는 자리에서 노동자들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계급 전쟁’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상원은 1933년 4월 6일 블랙 법안을 통과시켰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첫 100일 동안 총 15개의 주요 법안을 의회에서 처리했다. 대공황 전문가 로버트 매켈바인은 루스벨트를 가리켜 “기존 권력 체계 안에서 일을 처리했을 뿐 개혁의지는 없었다.” 라고 평가했다. 시민국토보존단과 그 밖의 신규 연방 구호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과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이런 노력도 “기존 권력 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22 6장 민물 같은 민중의 저항 1 부자들의 소득을 공개하라 노동자들의 승리
루스벨트 대통령은 최고소득자를 압박하는 조치에 대해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승인해주지도 않았다. 부자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면 기업의 신용도가 떨어지고, 나아가 경제 회생의 희망도 사그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루스벨트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떠밀리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의 승리 1934년 150만 명의 근로자가 1,800건으로 추산되는 파업을 벌였다. 가장 큰 파업은 톨레도 파업이다. 작지만 과격한 투쟁을 일삼는 미국근로당은 수 천 명의 실직 근로자를 동원해 일렉트릭 오토라이트 공장을 에워쌌다. 5월 말에 85개의 톨레도 지역 노조가 투표로 전 도시의 총파업을 지지했다. 위협을 느낀 사측은 6월 초 노동자들의 요구 조건을 수락했다. 샌프란시스코 파업은 아래로부터 압력, 즉 일반 근로자들로부터 시작된 파업이었다. 부두 노조는 핵심 요구 사항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의 가장 신성한 제도와 전통”을 파괴할 작정으로 뛰쳐나온 노조원들이 샌프란시스코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한 업체의 주장에 퍼킨스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파업 지도자들이 파괴하려는 유일한 신성한 제도와 전통은 저임금과 뇌물로 얼룩진 직업소개소다.”

23 6장 민물 같은 민중의 저항 2 20세기 초 사회당 전성기 시절에 이름을 날린 소설가 업튼 싱클레어가 1934년 8월에 열린 캘리포니아 민주당 주지사 예비선거에서 “캘리포니아에서 빈곤을 끝내자.”라는 구호로 승리해서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싱클레어는 에픽 캘리포니아에서 “대형 사업가는 주 소득세로 너무 많은 몫을 내야 하기 때문에, 소득이 많은 것이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싱클레어의 주력 경쟁자는 위조 전단을 대량 살포했다. 캘리포니아의 부자들과 양당의 권력자들은 싱클레어를 대단한 위협으로 여겼다. 이들은 싱클레어를 떨어뜨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참패했다. 프랜시스 타운센트는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의사로 1933년 어느 날 아침, 자신의 자택에서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 골목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할머니 3명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 수치스러운 장면을 끝낼 대담하고 간단한 계획을 세운다. 연방정부 예산으로 60세 이상 노인에게 한 달에 150달러를 지원해주자는 제안이었다. 단 조건은 매달 받은 수표를 30일 이내에 모두 소비하겠다고 동의하는 조건이었다.

24 6장 민물 같은 민중의 저항 3 개혁 돌풍을 몰고 온 주지가 롱
휴이 P. 롱 시니어는 졌지만, 그의 아들 휴이 P. 롱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24세가 되던 1918년 그가 밝힌 대로, 전국민의 2%가 “전체 부의 65~70%”를 소유하고 있었다. “부가 집중되면서 계급이 정해진다.” 그는 계속했다. “기독교적인 도덕 운동이나 종교 교육을 할 기회도 없다. 경제 개혁이 선행되어야 그런 기회도 생긴다.” 1928년에는 주 상원 예비선거 사상 가장 큰 표차로 승리했다. 취임과 거의 동시에 롱의 개혁 돌풍이 시작된다. 글을 모르는 성인들을 위한 야학, 무료 교과서와 스쿨버스, 운전자를 위한 포장도로 확장 등 중요한 사업들이 계속 이어졌다. 롱이 계획한 사업의 금액 규모는 주기적으로 변했다. 그의 사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수치 계산이 맞지 않는다며 비난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들이 재산의 상당 부분을 떼어내 가난한 가정이 복지를 향상시키는데 써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그들의 재산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25 6장 민물 같은 민중의 저항 4 루스벨트의 반금권주의적 제스처
루스벨트는 “막대한 개인 소득이 그들의 노력이나 능력이나 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그만큼 유리한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안다. 따라서 정부엔 매우 높은 세금으로 그런 소득을 제한할 의무가 있다.” 뒤늦게 통과된 루스벨트의 법안은 실효성은 전무하고 상징적 의미밖에 없었다. 금권주의자들은 루스벨트의 법안을 싫어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부를 효과적으로 나누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롱은 배턴루지의 루이지애나 의사당 건물에서 저격 당했다. 2틀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1936년에 루스벨트는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이쪽저쪽 저울질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재계리더들을 달래는 당근도 던지지 않았다. 그는 “특권 세력, 탐욕의 무리”와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매년 1월 의회에 보내는 교서에서 대통령은 “힘 자랑하는 경제 독재”에 맞서 “중단 없는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스벨트는 국민투표에서 60.8%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531표 중 8표를 제외한 나머지를 얻었다. 루스벨트는 부자들에게 맞서 놀랄 만큼 폭넓은 연합 세력을 만들었다.

26 7장 함께 잘 사는 나라로 1 루스벨트에게 부자 과세는 이제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없어서는 안 될 무기가 됐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부자들은 온 힘을 다해 뉴딜을 방해했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1940년 봄에 루스벨트는 대대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전시 재정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등주의에 입각한 자신의 재정 원칙에 한 치의 의심도 같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도 이 불행한 전쟁으로 부자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단언했다. 2만5,000 달러 개인 납세 소득 제한을 요구한 대통령의 4월 27일 발표에 부자들은 일단 신중하게 대응했다. 폴과 재무부는 어쨌든 계획대로 6월 15일에 부가소득세 안건을 하원 예산결산위원회에 상정했다. 다음 심의위원단은 루스벨트의 소득세 상한제 안건을 기각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다른 행정조치를 통해 의회 돌파를 시도했다. 백악관은 새로운 연방조직인 경제안정사무국을 창설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포고를 발령했다. 포고령에 따르면 경제안전사무국은 납세 이후의 급여를 2만5,000달러로 제한하도록 규제할 수 있었다. 보수 진영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루스벨트가 2만5,000달러의 소득 상한선을 제청한다면, 당장 난감해지는 쪽은 금권주의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선거자금에 의존하던 입법 의원들 이었다.

27 7장 함께 잘 사는 나라로 2 그리고 마침내 대공황이 막을 내리고 물러갔다.
루스벨트의 거부권을 뿌리치고 시행된 세법조차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물렸다. 부자 중의 부자인 최상위 0.01%에 대한 평균 세율은 1943년에 71.7%에 달했다. “단 1명의 전쟁 부자도 만들어지는 일이 없도록”하기 위해 추진한 루스벨트의 저돌적인 정책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루스벨트는 세금 평등 전선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는 못했지만, 금권주의를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로 큰 성과를 올린 것만은 분명했다. 전시 미국은 부자와 기업에 대한 가파른 비율의 누진 과세,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한 기업 규제, 노동권 존중, 중요한 경제사업의 시행 등 국가가 해야 할 거의 모든 것을 진취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보수 진영은 이런 ‘반기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공공정책에서는 결코 자유 경제가 살아 남을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해왔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생산력도 치솟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공황이 막을 내리고 물러갔다.

28 7장 함께 잘 사는 나라로 3 모두가 중산층이라 불리는 나라
1943년 초 진보적 공화당 의원 월리스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의 미국은 무산자 근로 국가가 아니라 모두가 중산층이라 불리는 나라, 그 옛날 중산층이 누렸던 혜택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는 나라다. 단, 금권주의에 대해 영원한 승리를 거둘 때만 그런 미래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1944년 초에 루스벨트는 장병들을 전역 후 무리 없이 사회로 돌려보낼 수 있는 법안을 제안했다. 사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법안이었다. 그러나 이번 법안은 조금 특별했다. 퇴역 장병들은 엄청난 규모의 유권자로 돌아왔다. 당시 재향군인회는 300만 명의 회원과 모든 선거구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1944년 6월에 재향군인정착법은 의회에서 간신히 통과됐다. 루스벨트는 전환기의 시작을 보지 못했다. 그는 1945년 4월 12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고참 상원의원인 해리 투루먼이 백악관을 물려 받았다.

29 8장 적색공포 그러나 달라진 세상1 1945년 9월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국방부는 전시 계약을 줄줄이 취소했다. 100만 명이 넘는 전시산업 근로자들이 직장을 앓었다. 온 나라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초의 파업은 일본이 항복한 후 3주 지났을 때 뉴욕 시에서 터졌다. 뉴욕 경제는 파업으로 마비됐다. 뉴욕 주지사 토마스 듀이의 중재로 파업자 측에 유리한 쪽으로 사태는 일단락 됐다. 미국노동총동맹 노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기승을 떤 적색 공포에 혼쭐이 난 후로 지나칠 정도로 반공주의를 표방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루스벨트와 가장 가까웠던 산업별노조 지도자 시드니 힐먼을 위험한 공산당 동조자로 몰았다. 전쟁이 끝난 후 우익의 빨갱이 사냥은 더욱 거세게 불붙었다. 몇 년 동안 공산당원과 손잡고 일했던 노조 고위 간부들은 이제 공산당 배경을 가진 활동가들을 영향력 있는 지위에서 쫓아내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은 보수파는 세금 규약과 노동계부터 손을 댔다. 세금 투쟁은 1947년 새로운 국회가 열리기 무섭게 시작됐다.1947년에 보수파가 상정한 노동 탄압 법률안은 노조 결성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술수였다. 투루먼은 1947년 6월 20일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상하 양원은 바로 다음 날 거부권을 무효화했다. 이로써 살벌한 태프트-하틀리 안건은 법으로 확정됐다.

30 8장 적색공포 그러나 달라진 세상2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노동계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은 태프트-하틀리 법을 라이벌을 쫓아내는 철퇴로 사용했다. 사상적으로 잘 무장된 산업별노조 지도자들은 반공 공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법에 어설프게 맞섰다가는 그 동안 공들였던 탑을 한꺼번에 무너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대부분은 타협을 택했다. 태프트-하틀리 법이 지나간 자리에 세워진 두 진영을 가르는 담장은 더욱 높아지기만 했다. 금권주의자와 독점가에 맞서 함께 투쟁을 벌인 연합 전선은 이렇게 맥없이 무너졌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무엇이 두려워 누진세와 노조를 인정하게 됐을까? 답은 제2차 세계대전에 있다. 인류는 공전의 대량살육과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소련도 두려운 존재였다. 미국은 이제 이데올로기로 양분된 세계에서 한쪽을 대표해 적과 대치해야 한다. 미래도 두려움의 대상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상, 다음 전쟁은 인류의 종말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트루먼의 역전승으로 공화당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실리파는 뉴딜을 인정했다. 그들은 부자들이 높은 세율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 발 물러섰다. 노조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부의 분배를 놓고 계속 협상을 벌였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31 9장 노동자의 승리, 디트로이트 협약 1 월터 루서의 아버지 팔 루서는 독일인으로, 새로운 금권주의 세기가 열리기 직전인 1899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 웨스트버지니아 사우스휠링에 정착했다. 그는 인근 제철소에서 일주일에 6일, 하루 12시간씩 교대로 일하는 일자리를 구했다. 하루 일당은 1.50달러였다. 젊은 루서는 산업계의 생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945년 루서는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잡았다. 전미자동차 노조 대표위원으로 제너럴 모터스와 벌이는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루서가 소비자 보호가 우선이라고 말하자 코언은 버럭 화를 냈다. “당신들 수준에 맞게 돈 얘기나 하지 그래?” 코언은 내뱉듯이 말했다. “빌어먹을 정치꾼 흉내는 그만두고 말이야.” 루서도 “노동자들이 생산한 부를 현실에 맞게 분배”할 수 있게 되기 까지는 “정치꾼 노릇”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응수했다. 노동자들에게는 “경제 메커니즘이 계속 돌아가게”만들 수 있는 소비력이 없었다. “또 그 얘기군.”코언은 또 다시 코웃음을 쳤다. “입만 열었다 하면 그 놈의 사회주의 타령이란 말이야.”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주의적이라면 사회주의자라는 죄명을 달게 받겠소.” 루서도 지지 않았다. “그럼 자넨 유죄인 것 같은데.” 코언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죄를 인정하지요.” 루서는 대꾸했다.

32 9장 노동자의 승리, 디트로이트 협약 2 노동자들의 쾌거, 디트로이트 협약
파업은 필요 없었다. 제너럴 모터스는 원만한 노사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5년 계약을 제시했고 노조는 동의했다. 그 대가로 노조는 연금과 그 밖의 문제들을 진척시키기로 했다. 1950년 5월 제너럴 모터스와 전미자동차노조 간의 협약이 타결됐다. 매달 125달러의 연금을 보장하고, 자동차 근로자의 생계비 인산 요인을 억제하고, 연간 생산성 향상에 따른 임금 인상을 조정하는 내용이었다. 합의 내용 중에는 제너럴 모터스가 진료비의 절반을 책임지는 항목도 있었다. <포천>은 새로운 자동차 협정을 ‘디트로이트 협약’이라고 부르며 높이 평가했다. 1950년에 노동자들은 제도권 내의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미국의 부를 공유하고 부가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활약했다. 노조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노조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노조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빈곤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사회보장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노동운동은 미국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높여주고 있었다.

33 10장 부자들을 쥐어짜는 세상 1 아이젠하워는 돈 많은 기업가들에게 “자고로 풍요가 한 나라를 부패와 파멸로 이르게 한 경우는 너무도 많다.” 어리석게도 부자들이 “내야 할 만큼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그런 부패는 미국 또한 파멸시킬 것이다. 라고 상기 시켰다. 그는 뉴딜에서 물러 받은 고소득에 대한 가파른 누진세율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20세기 중반에는 단체든 개인이든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무거운 세금에 반대하면 대중이라는 거센 물결을 역류해서 헤엄칠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부자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방법을 찾고 계획을 짰다. 미국납세자협회의 비밀 캠페인은 차근차근 1개 주씩 끌어들이면서 행보를 계속하다 1944년 2월 뉴저지가 16번째로 헌법 수정안 결의안에 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세금에 대한 맹렬한 투지가 없었기 때문에 세율 상한선 수정안 캠페인은 1950년대 사그라지고 말았다. 20세기에 막 접어들었을 때만 해도 석유는 미국 경제에서 결코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는 자원이 아니었다.세금 개혁가들은 이 모든 세금 우대 조치를 석유 감모공제 규정으로 통합했다. 감모공제는 사실상 석유 사업을 노다지 사업으로 만든 3가지 세금 우대 조치 중 하나였다.

34 10장 부자들을 쥐어짜는 세상 2 <뉴요커>의 분석대로 석유 감모공제 덕분에 석유는 미국 부자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으로 떠올랐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텍사스의 오일맨들이 돈을 갈퀴로 긁어 모으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석유 감모공제를 비난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어떤 공격에도 소중한 감모공제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돈이 남아돌았다. 앤드루 멜론은 1937년에 사망했지만, 재무부 장관시절에 연방증여세를 임시로 폐지한 뒤였다. 멜론은 그 기회를 타 그의 딸 에일사와 다른 자식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큰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이 같은 높은 세율에 분통을 터뜨렸다. 국세청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는 써서 없애는 작전을 썼다. 이런 갑작스러운 호탕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학자 새뮤얼은 이렇게 해석했다. “가혹한 상속세 때문에 쓰는 게 남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사회적으로 부자들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잃었다. 미국은 더 이상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부자들을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 귀찮은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사회학자 밀스는 어떤 의미에서 슈퍼 리치가 없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금권주의는 옛말이었다.

35 11장 중산층 황금시대 1 에드워드 키팅은 금권주의와의 투쟁에 평생을 바쳤다. 1912년 밀려온 진보 물결을 타고 하원 의원에 당선됐다. 평범한 사람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을 만들어내기 위해 키팅보다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팅이 발행하는 <레이버>는 노동자들에게는 중요한 대체 정보원이자 사기를 진작시키는 매체였다. 키팅의 <레이버>를 읽으면서 성장한 근로자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안정과 지위를 누리는 수천만 미국인이 바로 중산층이다. 연방주택관리국은 주택 건설업자에게 주택 가격의 95%까지 은행 대출을 보증해주었다. 에브러햄 레빗과 아들 윌리엄, 엘프레드는 이런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레빗 부자는 하루에 집을 30~40채 짓는다는 야무진 목표를 세웠다. 1947~1951년 레빗 앤 선스는 레빗 타운에 1만 7,450채의 단독주택을 짓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위리엄 레빗은 자신들의 작품을 “미국 최고의 집”이라고 불렀다. 최고의 집이라는 말은 과장인지 모른다. 그러나 최고의 가치라는 데는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1900년대 중반의 정치학자들은 더욱 뚜렷해지는 중산층 국가의 본질을 부자들의 퇴조로 설명했다. 부자들은 단지 중심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수 많은 세력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36 아니 ‘위대한 사회’가 됐다. 11장 중산층 황금시대 2
하지만 축제 분위기에 덩달아 좋아할 수 없는 집단이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새로운 중산층으로의 행진은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축제였다. 사회보장법이 시행되고 나서는 평생 저축해놓은 돈을 건들이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는 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흑인들은 사회보장법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속수무책이었다. 1956년 젊은 목사 킹은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새로운 민권운동의 효시가 됐다. 이후 10년 동안의 민권 투쟁은 성 평등을 외치는 여성운동에 불을 지폈고, 나중에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촉발시켰다. 1960년대 후반에 불평등 지역으로 소문난 곳은 하나같이 전에 없는 도전을 받았다.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경제적인 평등이 이루어지면 더 좋은 사회가 됐다. 아니 ‘위대한 사회’가 됐다.

37 12장 금이 가기 시작한 중산층 기반 1 저널리스트 시어도어 화이트는 “새로 얻은 재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강한 힘을 얻은 이 한 줌도 안 되는 꼴사나운 부자들은 텍사스의 분위기와 그들의 지배력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1963년 케네디는 의회에 보낸 세금 관련 교서에서 최고 91%의 세율을 65%로 낮추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아울러 자신의 소득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그래서 국가의 소득과 부까지 증대시키는 사람이 결과에 대한 합리적인 몫을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선진국이라 해도 다른 나라들은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었다. 폐허뿐인 파괴였다. 모든 게 폐허가 된 세계에서 미국과 경쟁할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했던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 경제가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데밍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방위 산업 공장에서 고안해낸 품질관리법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데밍은 팀워크와 쌍방향 현장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데밍의 말을 가장 먼저 귀담아 들은 것은 전후 일본 기업가들이었다. 1970년대의 이런 새로운 기업관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2편의 논문이 있었다.2편의 논문은 미국 재계를 집결시켜 전투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전투는 재계의 승리로 끝났다. 중산층은 완패했다.

38 12장 금이 가기 시작한 중산층 기반 2 몸을 추스른 기업가들은 자신의 힘을 실제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제이콥 해커와 폴 피어슨은 이를 가르켜 “국내판 충격과 공포”라고 표현했다. 젠슨과 메클링의 논문은 한마디로 기업 경영진의 현실 대처 방식이 너무 안이하다는 주장이었다. ‘주주 가치의 극대화’라는 만트라는 기업들에 전에 없는 탐욕의 갈퀴를 쥐어 주었다. 레이건은 파업중인 1만 3,000명의 항공관제협의회 관제사들에게 48시간 이내에 파업을 끝내라고 통보했다. 파업자들은 레이건의 최후통첩을 무시했다. 레이건은 그들을 해고했다. 협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체 없이 파업근로자를 파업 파괴자로 대체하는 조치는 작업 현장의 분위기를 바꾸었다고 역사학자 조지프 매카틴은 지적했다. 할리우드 스타였던 레이건은 20만 달러가 넘는 소득을 올려 94%의 최고한계율을 적용 받았다. 그에겐 매우 못마땅한 세제였다. 1981년에 의회는 신임 레이건 대통령에게 미국 슈퍼 리치들에 대한 최고 세율을 70%에서 50%로 삭감하는 세법안을 내놓았다. “1981년과 1986년의 세금 인하로 나는 내가 워싱턴에서 하려던 것 중 많은 것을 해냈다.” 레이건은 이렇게 자화자찬했다.

39 13장 돈이 돈을 버는 풍조를 막지 못한다면 로널드 레이건은 1986년 최고 소득 세율이 28%로 줄어들었을 때, 자신의 과업이 완수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 경영진과 보수 운동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간단히 말해 금권주의를 되살려내야 했다. 2009년 헤지펀드 최상위 급여 수령자 25명의 평균 급여는 10억 100만 달러 였다. 각자 그렇다는 말이다. 금권주의의 위력은 대단했다. 계속 저항할 부자들을 물리칠 만한 더 큰 인센티브를 줄 누진세 방법론을 만들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논쟁을 위한 논쟁이지만, 일반 근로자의 임금과 CEO의 임금 차이를 20세기 중반 수준인 25배로 잡아보자, 2012년 연방 최저 임금은 시간당 7.25달러 였다.최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부부가 한 해 동안 벌 수 있는 돈은 3만 달러가 조금 넘었다. 3만 X 25배 = 75만 달러 75만 달러의 세금 구간에 속한 부자 납세자들은 새로운 인센티브를 갖게된다. 최저 임금이 올라가면 이들의 세금 납부액은 줄어든다. 최고 세율과 최저 임금을 묶는다면, 최저임금이 계속 오르는 한 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가지 않고 굳는 돈은 더 많아질 것이다. 역사는 소중한 교훈을 가르친다. 부자가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40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아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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