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ation is loading. Please wait.

Presentation is loading. Please wait.

제11주제. 한국전쟁의 성격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 가운데 하나. 국내적 대결과 국제적 충돌이 결합된 이 전쟁으로 3백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됨. 전쟁은 식민과 분단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사를 전후 시기로.

Similar presentations


Presentation on theme: "제11주제. 한국전쟁의 성격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 가운데 하나. 국내적 대결과 국제적 충돌이 결합된 이 전쟁으로 3백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됨. 전쟁은 식민과 분단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사를 전후 시기로."— Presentation transcript:

1 제11주제. 한국전쟁의 성격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 가운데 하나. 국내적 대결과 국제적 충돌이 결합된 이 전쟁으로 3백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됨. 전쟁은 식민과 분단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사를 전후 시기로 갈라놓음. 전쟁은 패배와 승리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휴전으로 미봉됨. 종식되지 못한 전쟁의 영향으로 한반도에는 적대적인 체제와 전시상태가 유지되었고, 갈등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함. 상대편에 대한 적대의식과 증오심에 바탕을 둔 정치체제가 운영되었고, 남북 사이의 대결 대립 구조는 공고해짐.

2 전쟁의 기원과 배경 전쟁은 개전 당시부터 도발자와 기원을 둘러싼 의혹으로 미궁상태였다. 1950~60년대의 냉전기에는 교전 당사국이 제시한 공식견해가 지배적. 1970년대 중반 미국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미국 측 입장과 정책에 대한 분석이 정교해짐. 미국자료에 근거한 새로운 연구성과는 1980년대에 제출됨. 이 연구들은 한반도 분단, 전쟁에서 미국의 책임을 부각시키는 수정주의적 경향을 보임. 특히 1950년대 이래 스톤(I.F.Stone)-콘테(Conde)-굽타(Gupta)-커밍스(Cumings)로 이어지는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확산됨.

3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구소련 정치,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구소련 정치,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고위급 외교, 정책문서로 구성된 구소련문서들은 북한, 중국, 소련의 책임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특히 북한지도부의 개전 전후 모습이 복원됨. 구소련문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을 통해 개전주체를 둘러싼 논쟁과 개전의 비밀들이 상당부분 해명되었다. 전쟁의 명칭, 성격, 발발을 둘러싸고 다양한 가설이 제기됨. 명칭에 관해서 한국(조선)전쟁, 남북전쟁, 6.25동란 사변 전쟁 등이 제시됨. 성격의 측면에서는 내전설, 국제전설(민족해방전설), 국제전적 내전설, 내전적 외형의 국제전설 등이 제시됨.

4 전쟁 발발과 관련해서 남침설,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이 각축을 벌였지만, 구소련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음.
전쟁을 바라보는 가장 큰 대립각은 전쟁의 기원 배경과 그 시기적 연원, 전쟁의 도발자 책임자 규명을 둘러싸고 형성됨. 내전(Civil war)론은 한국전쟁이 국가 간의 교전행위나 전쟁이 아니라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상호대립하는 국가 체제 내의 갈등과 대립의 폭력적 해결방안이었다고 해석함. 때문에 한국전쟁은 내전을 의미하는 다양한 용어(Civil warfare, Civil conflict, Internal warfare)로 불리웠다. 이런 견지에서 전쟁은 1948년 남북한 정부 수립 이후, 또는 1945년 해방과 남북분단 이후, 아니면 1930년 이후 한국사회 내부의 계급 신분 사상 갈등에서 기본적으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5 내전론에 입각한 연구들은 남북 좌우의 갈등을 중심적으로 분석했으며, 이에 따른 전쟁사 서술은 ‘1945년 38선 분단-1945~48년간 좌우 남북 갈등-1948년 정부수립 이후 반란, 폭동, 38선 충돌-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남북 좌우의 갈등 충돌을 강조하는 서술체제를 중시했다. 곧 전쟁은 한국인들의 대립과 갈등 속에 자라난 것이라는 설명틀이었다. 국제전(International war)론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소련이 전쟁의 도발 책임자라는 전통주의적 견해, 전쟁의 성격은 개전이 아닌 전개과정에 있다는 신전통주의적 견해, 북한과 미제국주의 간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북한의 견해 등이 있다. 이 경우 전쟁사는 남북한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을 주어로 하는 국제정치사로 서술되었다.

6 한편 한국전쟁이 내전적 성격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나 국제냉전의 영향과 복합되면서 일어난 ‘국제적 내전론’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입장은 한반도 냉전에 영향을 준 냉전 국제정치의 요소들을 중시하며 미소냉전과 남북냉전을 복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전쟁은 남북한 간 내전으로 출발했지만, 미국 유엔 중국 소련이 개입해 결국 국제전이 되었다는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전환론’도 있다. 가장 최근에는 한국전쟁이 미소의 한반도 분단, 대한정책의 결과로 형성된 결과물이며, 1948년 이후 남북간의 갈등이 외형적으로는 1950년 폭발한 것이지만, 전쟁의 주요 동력은 미소의 국가주의적 정책과 개입의 결과였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7 곧 전쟁은 ‘내전적 형태의 국제전’이며, 발발시점에서 이미 내전적 요소와 국제전적 요소가 결합되었다는 것.
이런 입장에서 전쟁사 서술은 남북 좌우의 내부 갈등보다는 ‘1945년 38선 분단-1945~48년간 미소의 분단정책-1948~50년간 남북갈등-한국전쟁’이라는 외적 규정력을 강조하는 설명틀이 제시됨. 2) 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전쟁을 둘러싼 가장 치열한 논쟁은 최초의 발화자, 도발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북한이 남한에 대규모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남침설, 남한이 선공했다는 북침설이 대립했으나 북한을 포함한 교전당사자들이 모두 6월 25일 이른 아침 북한의 대규모 공격 개시를 인정했기 때문에 북침설은 설득력을 얻지 못함.

8 그렇지만 북한은 남한이 해주 방향 서쪽 등에서 선제공격을 가한 뒤 자신들이 반격했다는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을 주장했고, 남한정부는 개전 직후 한국군이 해주를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양자의 주장이 결합되어 남한이 옹진반도 등 특정 지역에서 북한을 선제 공격한 뒤 북한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남침유도설이 1970년대 이후 제기됨. 이후 30년 이상 한국군이 해주를 공격, 점령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 의혹이 만연했다. 최근 구소련문서와 북한노획문서, 한국군 작전 명령서들을 종합한 연구로 오랜 논쟁은 종식됨. 이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북한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한 방어계획의 일환으로 해주공격계획을 준비했으며, 실제 상황이 부여되자 공격명령을 내렸다.

9 그러나 이는 전황상 실현 불가능했다. 그 소용돌이 속에 해주에서 철수하던 17연대가 양분되어 한 부대가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고, 방어계획상 해주공격을 명령했던 육군본부는 해당 부대가 해주를 점령했을지도 모른다는 주관적이고 낙관적인 추정을 했다. 그 결과 국내 언론, 미극동군사령부에 해주점령설이 유포되었으나 해당 부대의 인천철수가 확인되자 이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국은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 아니었지만, 미국은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에 개입하며 이를 경찰활동으로 명명했다. 왜 미국이 신속히 개입했는가와 관련해 미국의 개입이 사전에 준비된 시나리오의 실현이었다는 주장과 트루만행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독일의 침략을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1930년대의 역사적 교훈’에 입각,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이라는 주장.

10 김일성과 스탈린은 방대한 중국의 공산화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이 한국같은 전략적 가치가 낮은 지역에 참전할 가능성이 적고, 개입하더라도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기 전에 상황을 종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반대로 미국은 한반도를 상실한다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과 신뢰가 추락하고 이는 연쇄적으로 유럽과 다른 세계에서 미국의 정치적, 심리적 위신과 영향력의 몰락과 직결된다고 생각. 스탈린은 전쟁의 최종 결정권자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시아-북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고, 동유럽에 집중해 있었다. 1949년 말 이래 아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정책을 결정한다는 소련-중국간 권위의 이양 서열화가 이뤄졌다.

11 때문에 1949년 3월과 1950년 4월 김일성,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의 전쟁 결정은 미국의 전쟁 불개입에 대한 보증, 북한군의 병력 화력 우위 보증, 모택동의 원조 보증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된 뒤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스탈린은 전쟁에 소련이 개입한 것을 위장하는 데 주력했고, 군사고문단의 38선 이남 월경조차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권이라는 대영역의 지배자였던 스탈린은 미국과의 대결, 제3차 대전 발발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고,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 이후 김일성의 패배와 유엔군의 한반도 석권을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소련은 개전 초기 북한군 편제 무장 훈련은 물론 작전계획 수립에 이르기까지 북한군의 본질적 근원이었다. 개전 이후 소련군사고문단이 북한군 지휘부를 따라 낙동강 계선까지 진출. 유엔군의 북진 이후 전투비행단이 참전함.

12 북한군의 전면 기습전으로 개시된 한국전쟁은 미국과 유엔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을 보이게 됨.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지연전이 전개되었고, 8월에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되었다. 제공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다다르면서 이미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8월말 북한군은 대공세를 펼쳐 유엔군을 궁지로 몰았으나 병력 화력 전투의지에서 앞선 한국군, 유엔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킬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모택동은 북한군의 길어진 병참보급선과 병력분산 상태를 이용해 미군이 인천이나 원산에 상륙할 것이며, 북한군이 유연하게 전선에서 철수해 ‘적을 유인’해야 한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13 맥아더는 1950년 9월 중순 육해군 합동의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맥아더는 1950년 9월 중순 육해군 합동의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미군이 노획한 북한문서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미군의 인천 원산 상륙작전을 감지하고 대비책을 세우려 노력했으나, 미군의 화력과 물리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14 9월말에 이르러 유엔군은 38선을 원상회복했다. 이미 전쟁 중이던 7월부터 38선 돌파와 북진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고, 이는 미국가안보회의(NSC)81로 구체화됨.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북한으로 진격할 권한을 부여했다. ‘반격(rollback)’으로 명명된 이 결정의 결과 10월 초순 유엔군은 북진을 결정했고, 압록강 부근까지 전선을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맥아더의 원폭투하 위협과 중 한 국경지대에 대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체제 위기에 직면한 중국이 전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함. 이로써 자본주의진영 대 사회주의진영의 전쟁으로 아시아는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 위기에 놓였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한국전장에서 원폭 사용을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가능성을 참색했다.

15 맥아더는 30~50기의 핵폭탄 사용을 주장했고, 소련의 마리노프스키 장군도 12개의 핵이면 한반도 전장을 정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抗美援朝를 내걸고 지원군의 형태로 전쟁에 끼어들었다. 중국이 곤경에 처한 북한을 돕는다는 원칙은 이미 1950년 4~5월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사이에 합의된 사안이었다. 1951년 1월 초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함. 중국군의 참전 목적은 무력 공산통일의 완성보다는 38선의 원상복구와 중국을 방어할 수 있는 완충지대의 확보였기 때문에 전쟁을 확대시키길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확전을 우려한 중국과 공격지속을 주장한 북한 소련의 의견이 엇갈렸다.

16 미국은 한국의 상실을 우려했고, 이승만정부와 한국의 지도층을 제주도 등지로 망명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기동전으로 전개되었던 전쟁은 서울의 주인이 네번째 바뀐 1951년 3월 38선과 비슷한 위치에서 진지전으로 교착됨. 이 시점에서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승리선언을 위한 위신의 대결 결과 2년 이상을 더 끌었다. 위험한 반격보복 정책 보다는 안정적인 봉쇄정책이 타협안으로 미국 조야의 광범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맥아더는 지속적인 명령불복종, 원폭사용과 지속적인 확전 시도 등의 이유로 해임되었다. 전쟁은 남북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국제적 대리전이었다.

17 한국군의 지휘권은 대전에서 작성한 이승만의 서한에 따라 유엔사령관에게 이관(1950
한국군의 지휘권은 대전에서 작성한 이승만의 서한에 따라 유엔사령관에게 이관( )되었고, 직접적으로 미군이 한국군을 지휘하였다. 북한군 또한 연합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조중연합사령부( )의 지휘 아래 놓여졌다. 병력, 무기, 작전이라는 전쟁의 3가지 구성요소 가운데 남북한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병력뿐이었다. 전쟁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는 전선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에 있던 비전투 민간인들 가운데서 발생했다. 대다수는 공중폭격에 희생되었고, 남한 북한의 예방, 보복학살이 잇달았다.

18 남한의 보도연맹, 형무소 수감자 처형, 북한의 서울대병원, 대던 학살, 북한점령 시기 지역 좌익 빨치산 등에 대한 보복 예방 학살, 남한 미국의 수복 토벌과정에서 학살 등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미군도 남북한에서 노근리사건과 오폭사건 등에 관련되었다. 3) 휴전과 전쟁의 영향 최초의 휴전 제안은 전쟁발발 다음날 미국이 제시했지만, 전쟁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황에 따라 휴전안을 내놓기도 하고 상대방의 제안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진지전에 돌입하고 난 뒤인 1951년 7월에야 양측은 유리한 조건에서 명예롭게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무력충돌과 정전회담을 병행하였다.

19 포로교환 원칙을 둘러싼 대결이 심화되었고,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폭동과 살육극이 벌어졌다
포로교환 원칙을 둘러싼 대결이 심화되었고,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폭동과 살육극이 벌어졌다. 협상은 체제유지와 승리선언을 위한 선전장이 되었다. 575차례의 공식회담을 거쳐 2년 뒤인 1953년 7월 27일에야 휴전협정이 타결됨. 극단적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환수해 북진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20 미군포로의 귀환이 위태로워진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편,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두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동의하였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20개 사단 규모의 군대 확보와 이를 유지할 수 있는 군사 경제원조를 확보했다. 전쟁은 승패가 분명한 종전이 아니라 휴전상태로 중단되었고, 그 영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 등 거의 모든 차원에서 한국현대사를 지배하였다. 전쟁은 한국현대사를 전전 시기와 전후 시기로 극명하게 양분시켰다.

21 전쟁으로 말미암은 사상자는 남북한 약 280~369만 명(전체 인구 대비 10%) 수준으로 추산되었고, 월북 납치 약 30만 명, 월남 45~100만 명 등 민족의 대이산과 가족해체가 이뤄졌다. 미군은 전사 사망자 36,940명, 부상 9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의 물적 피해는 남한 제조업의 경우 1949년 대비 42% 파괴,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 60%, 광업 20%, 농업 78%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민족공동체 의식이 파괴되고 분단의식이 내면화되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북한은 1952년부터 전쟁 책임론과 결부된 반대파 숙청작업을 통해 김일성의 패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22 소련파에 이어 이승엽, 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이 전쟁 책임과 정치적 이유로 숙청되었고, 김일성 단일지도체제가 한층 강화됨.
헌병, 특무대, 경찰 등 억압기구와 국민회 등 5대 사회단체를 동원한 반공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의식, 대결의식이 심화되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생사의 경험을 통해 국민들 속에 내재화되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남북 모두 군사 중시노선을 택함. 한국군은 전전 10만 규모였던 정규군이 63만으로 강화됨. 또한 한국군은 대북 방어군의 차원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유지군, 대소전진군의 위상을 지니게 됨. .

23 이렇게 강화된 군은 필연적으로 정치개입과 군부집권을 향해 나아갈 위험성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은 전후복구를 거쳐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돌입했고, 농업집단화, 상공업 국유화, 중공업 우선주의 노선을 택했다. 남한은 전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 대외종속적인 관료자본주의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수입대체공업화를 필두로 공업화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1945~65년 사이 미국의 원조로 약 120억 달러가 한국에 투여됨.

24 냉전이 해체되고, 구소련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전쟁사 연구는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입장보다는 각국 사료에 기초한 실사구시적 연구 방법, 또는 다국적 사료교차 연구방법이 중시되고 있다. 최근 공개, 활용되기 시작한 구소련문서와 북한노획문서들을 기존의 연구지형에 잘 결합시킨다면 좀 더 진전된 연구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한반도는 냉전시기 국제관계가 창출한 마지막 분단국가이지만 종국적으로는 평화체제 정착을 통한 통일로 나아갈 것이다. 한국전쟁의 유산들은 분단체제가 해체된 이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청산이 시도될 것.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야 한국전쟁은 더욱 완전하고 자유로운 역사로 새롭게 서술될 것이다.


Download ppt "제11주제. 한국전쟁의 성격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 가운데 하나. 국내적 대결과 국제적 충돌이 결합된 이 전쟁으로 3백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됨. 전쟁은 식민과 분단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사를 전후 시기로."

Similar presentations


Ads by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