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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미래를 읽다(5) 영양괘각(羚羊掛角) 영양이 훌쩍 뛰어 나뭇가지에 뿔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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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누구인가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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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권징(美刺勸懲) 흰 바탕이라야 그림을 그린다.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2. 心道: 마음 길 미자권징(美刺勸懲) 흰 바탕이라야 그림을 그린다. 소단적치(騷壇赤幟)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 제목은 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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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누습(吾東陋習)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을 버려라.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3. 觀道: 보는 길 오동누습(吾東陋習)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을 버려라. “오늘날 사람들은 다만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꺼풀을 가지고 있어 뚫어 보지를 못 한다. 학문에는 학문의 꺼풀이 문장에는 문장의 꺼풀이 단단히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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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유물(以物遣物) 닭치는 일을 글로 풀어내라.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3. 觀道: 보는 길 이물유물(以物遣物) 닭치는 일을 글로 풀어내라. 혈유규지(穴牖窺之) 창구멍을 뚫고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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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1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선립근기(先立根基) 먼저 바탕부터 세워라 버클리대학의 심리학연구소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600명을 연구했다. 그들은 다섯 가지의 공통점을 특징으로 지녔다. 강한 집중력, 살아 있는 감성, 정직한 성품, 창의적 사고, 그리고 풍부한 독서이다. 이 ‘3. 독도’는 독서의 중요성과 그 방법을 다룬 장이다. 독서는 독서자가 책을 가운데 놓고 작가와 벌이는 한 판의 겨룸이며 부단한 탐구 과정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승기를 잡으려는 독서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독서는 무엇보다 먼저 바탕을 세워야 한다(讀書必須先立根基)” 다산은 독서를 하는데 먼저 그 바탕이 분명이 있어야 한다고 다짐을 둔다. 독서의 바탕은 무엇일까? 다산 선생의 말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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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은 위의 <기이아(寄二兒)>에서 독서는 단 두 가지라고 한다.
5주차 1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바탕이란 무엇을 말함이냐? 배움에 뜻을 두지 않고는 능히 책을 읽을 수 없다. 배움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그 근본을 세워야 한다. 근본은 무엇을 말함이냐? 오직 효제(孝弟)를 행할 뿐이다.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에 힘써 근본을 세운다면 학문은 저절로 젖어들게 마련이다. 학문이 내게 시나브로 젖어들면 독서는 모름지기 별도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된다. 다산 선생은 위의 <기이아(寄二兒)>에서 독서는 단 두 가지라고 한다. 첫째, 먼저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한다. 둘째, 배움에 뜻을 세웠으면 효제(孝弟)를 힘써 실천해야한다. 이 둘은 또 하나이기도 하다. ‘배움의 뜻이 효제로 나아가야한다’로. 다산 선생이 ‘배움(學)과 효제(孝悌)를 행함’ 두 가지를 독서의 바탕으로 드는 이유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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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1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다산 선생은 <두 아들에게 부친다(寄兩兒)>에서 “몸가짐을 삼감(動容貌), 말을 온화하게 함(出辭氣), 얼굴빛을 바로잡음(正顔色)”을 학문하는 데 가장 먼저 마음 기울여야 할 것으로 꼽았다. 그리고는 “이 세 가지에 힘을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늘을 꿰뚫는 재주와 남보다 뛰어난 식견이 있다 할지라도 끝내 발을 땅에 붙이고 다리를 세우지 못한다”라고까지 하였다. 비록 이 말이 《논어》<태백>에 보이는 증자의 말이라지만, 다산 선생이 이를 인용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증자는 몸가짐은 사납고 거만하지 말며, 얼굴빛은 믿음직스러워야 하며, 말은 상스럽고 도리에 어긋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다산 선생의 말은 용모, 사기, 안색인 마음바탕부터 바로 잡아야 배움의 뜻을 세우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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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1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다산 선생은 초의 스님(의순)에게 주는 말인 <위초의승의순증언(爲草衣僧意洵贈言)>에서도 ‘글(시)은 뜻(詩者言志也)’이라고 하며, “뜻을 세운 근본이 비겁하다면 제 아무리 맑고 높은 글을 지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뜻을 세운 근본이 좁고 천박하다면 제 아무리 탁 트인 글을 지어도 형편에 맞지 않네”라고 점잖게 일렀다. 그리고는 시를 배우려고 하면서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더러운 흙에서 깨끗한 샘물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격이요, 악취가 풍기는 가죽나무에서 향기를 구하려는 격”이라 폄하하고, ‘한평생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지!’라고 매서운 말결로 마감한다. 지면 관계로 자세한 내용은 [부록]에 넣어 두었지만 이제 저 앞에서 말한 배움의 뜻인 효제와 연결시켜 본다. 이는 자신의 몸가짐에서 비롯한 독서 행위가 ‘행동’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실용지학(實用之學) 독서를 말함이다. 조선의 임금 중 내로라하는 독서광인 정조(正祖,1752~1800) 임금도 배움에 뜻을 제일로 치며 실천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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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1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다산 선생은 ‘행동’이라는 ‘실천’의 실용지학 독서에 뜻을 세웠으면 다음에는 ‘초서지법(鈔書之法)’하라고 한다. ‘초서’란, 읽은 책에서 문장이나 구절을 취하고 버리면서 중요한 요점만 가려 뽑아 적어두는 독서법이이다. 다산 선생은 이 초서지법을 ‘학문의 요령’이라고까지 하였으며, 정조임금, 연암 선생 등 내로라하는 독서인들은 모두 이 방법을 즐겨 썼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나의 학문이 먼저 주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뒤에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저울이 마음속에 있어 취하고 버림이 어렵지 않게 된단다”라고 하였다. 결국 학문하려는 뜻을 세움은 ‘취하고 버림’, 즉 초서지법을 잘하기 위한 전제임을 분명히 하는 문장이다. 이 초서지법은 책을 요약하는 것뿐 아니라 독서과정 일체를 책임지는 용어로도 쓰이기에, 매우 체계가 선 독서 방법으로 요즈음에도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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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의 <송한교리치응사연서(送韓校理致應使燕序)>
5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이여관지(以余觀之) 내 뜻으로 읽어내라 내 뜻으로 보니 그 이른바 ‘중국’이 ‘중앙[中]’인 까닭을 모르겠다. 그 소위 ‘동국’도 그것이 ‘동쪽’인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 해가 정수리 꼭대기에 있으면 ‘정오’라 한다. 정오를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같으면 내가 선 곳이 동ㆍ서의 중앙임을 안다. 북극은 땅에서 약간 높고, 남극은 땅에서 약간 정도가 낮기는 하나, 오직 전체의 절반만 된다면 내가 선 곳이 남ㆍ북의 중앙이다. 이미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었으면 가는 곳마다 ‘중국’ 아님이 없거늘 어찌 ‘동국’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님이 없거늘 어찌 ‘중국’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다산 선생의 <송한교리치응사연서(送韓校理致應使燕序)> “옛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盡信書則 不如無書)” –맹자 피에르 바야르의 ‘개입주의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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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영양괘각(羚羊掛角) 영양이 훌쩍 뛰어 나뭇가지에 뿔을 걸다 언어는 문자에 실려 있는데, 두 빗장을 뚫어야 비로소 언어의 전달이 문자에 미친다. 전하려는 자는 손으로써 말하고 받으려는 자는 눈으로써 말을 들어야 한다. 구한말, 실학자이며 과학자요, 사상가이기도 한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선생이 자신의 ≪기측체의(氣測體義)≫(<신기통>제2권 ‘구통(口通)’)에서 설파한 참 멋진 언어의 정의이다. 말을 전하려는 자는 필자요, 받으려는 자는 독자이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는 언어라는 섬이 있다. 최한기는 이 섬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두 개의 빗장을 풀라고 한다. 전하려는 자가 손으로써 말한 것이 한 빗장이라면, 받으려는 자가 눈으로써 말을 듣는 것이 또 한 빗장이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이 둘의 빗장이 활짝 열려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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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여기서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는 ‘언불진의(言不盡意)’을 곰곰 짚어보아야 한다. 제 아무리 말을 잘하거나 글을 잘 쓴다한들 자기 속내를 말이나 글로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바로 언어의 한계성이다. 제 가슴을 치며 “아이고, 답답해라. 왜, 내 말을 못 알아들어”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을 전하려는 저자의 속내도 챙겨야 한다. 말은 다하였으나 뜻은 아직 다하지 않았네’라는 ‘사진의부진(辭盡意不盡)’, ‘글 밖에 뜻이 있다’는 언외지의(言外之意), 그리고 심행수묵(尋行數墨)이라 하여 ‘문자 밖의 참뜻을 찾으라’는 주자의 말을 새겨야 해서다. 말하는 저자가 실수로 빠뜨린 경우도 있겠지만, 고의로 생각을 문자 행간으로 밀어 넣은 경우는 허다하다. 이쯤이면 저자의 빗장보다 독자의 빗장 열기가 더 만만찮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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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산 너머로 연기가 보인다.’라는 문장이 있다 치자. 다만 산 너머로 연기가 보이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글일까? 아니다. 산 너머로 연기가 보이니 불이 난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담장 위로 뿔이 보인다.’ 담장 뒤로 지나가는 소를 쓴 글로 보아야 한다. 연기가 나는 데도 불을 못 보고, 소가 지나가는 데도 소를 못 보았다면 글을 영판 잘못 읽었다. 독서자의 빗장은 아직도 잠겨있다. 얼음이 녹으면? 녹기도 하지만 봄이 온다. 하나 더, ‘남자’와 ‘여자’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만약 백화점 문에 붙어 있다면? 남ㆍ녀 화장실이다. ≪맹자≫ <공손추>상을 보면 공손추가 맹자에게 ‘말을 안다(知言)’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맹자는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이익에 눈이 가려져 있음을 알며, 지나친 말에서 마음이 정욕에 빠져 있음을 알며, 사악한 말에서 마음이 바른 도리에서 멀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마음이 궁지에 떨어졌음을 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한다. 말 속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말을 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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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독서 역시 그렇다. 책을 읽는데 문자에만 구애되면, 저자가 행간 속에 은밀히 감추어 둔 문자 밖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이는 말에 나타난 뜻 이외의 숨은 의미를 제대로 읽어냄이 이토록 어려운데도 글자만 읽고 책을 덮는다. 이 계를 이끄는 ‘영양괘각’이란 넉 자를 몰라서다. ‘영양괘각’은 ‘영양이 뿔을 걸다’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선가에서 나온 것으로≪전등록(傳燈錄)≫에서 설봉선사(雪峰禪師)가 한 말이다. 영양은 앞으로 꼬부라진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잠을 잔다. 영양의 발자국만 추적하던 사냥꾼은 영양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양이 ‘글의 뜻’이고, 발자국이 ‘글’이다. 영양의 발자국인 글을 따라갔는데, 영양이 훌쩍 뛰어 나뭇가지에 뿔을 걸어 버렸다. 글이 끊겼다. 발자국만 더듬거리다가는 영영 영양을 찾지 못한다. 끊긴 발자국(글) 위에 걸린 영양(글의 뜻)을 찾는 것은 사냥꾼(독자)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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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1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5. 讀道: 읽는 길 정지상의 <송인>,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기생 매창의 시,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왕희지의 <설야방대>, 도연명의 <음주>는 영양괘각을 반드시 요구하는 글들이다. 독자는 이렇듯 영양의 발자국이 사라진 자리, 즉 끊긴 글 속에서 뜻을 찾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공중의 소리요, 물 속의 달이요, 거울 속에 비친 모양과 같아서 분명 있는데 잡히지 않는 그 어떠한 뜻이다. 바로 “산 밖에 산이 있으니 산은 끝이 없고, 길 가운데 길이 많으니 길은 무궁하다(山外有山山不盡 路中多路路無窮)”(≪백련초≫)요, ‘십분심사일분어(十分心思一分語)’이다. 연천 홍석주 선생의 말을 빌자면 영양을 찾지 못한 독서는 할 일없이 시간만 죽였으니 최하 5위이다. 책 밖에, 말 밖에-, 글쓴이의 마음이 있어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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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꼭 기억합시다! “독서는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이다. 즉,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동이 아니라 주변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길이다.”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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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2교시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차시예고 讀道: 읽는 길 춘화도법(春花圖法) 사랑은 방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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