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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Hedvig Carstensen Modified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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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v0Q9SPl-Rw
(from 7:45) for Hubble Telesc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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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 VLTs and ATs and the VST on the main peak and VISTA in the background
By European Southern Observatory - CC BY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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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ght Sky from European Southern Observatory’s Paranal Observatory, Chile
Also, see By ESO/Yuri Beletsky (ybialets at eso.org) - This media was produced by the European Southern Observatory (ESO), under the identifier potw1036aThis tag does not indicate the copyright status of the attached work. A normal copyright tag is still required. See Commons:Licensing for more information., CC BY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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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수준을 벗어나서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작
인류가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리스 철학자이었다. 이들은 그리스어로 소통하는 문화권을 뜻하며 지리적으로 그리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는 시리우스, 큰 곰 자리, 오리온 등의 별 자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호머는 약 850 BC 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이론에 의하면, 1102 BC 경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 서사시들은 초기에는 구전의 형태로 전달되었으며, 호머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아낙시만드로스는 610 – 546(?) BC 경에 활동하였던 그리스 철학자이다. 그는 최초로 신화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우주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는 지구가 무엇인가에 의해 떠받쳐질 필요 없이, 자유롭게 공중에 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최초의 우주론적 혁명이자 과학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천체가 서쪽 하늘로 사라진 다음날 다시 동쪽 하늘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한 첫 모델이기도 하다. By User:Bibi Saint-Pol - Own work (original PNG version by User:Gwwfps is/was : en:Image:Anaximandermap.png).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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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행성들이 맨 눈으로 관찰 가능하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다.
행성 planet 행성이라는 이름은 왔다 갔다 하는 “별”(실제로는 별이 아니지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즉, 다른 별들의 위치는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는데 반해, 이들은 다른 별자리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 개의 행성들이 맨 눈으로 관찰 가능하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다. 행성이 태양과 같은 방향에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혼동이 생기기도 하였다. 초기의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금성이 저녁과 아침에 보이는 것을 서로 다른 물체로 혼동하여 다른 이름을 붙였다. 피타고라스(570 ~ 495 BC)가 이 두 물체가 사실은 한 물체임을 알아내었다.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서 evening star, morning star 와 같이 다른 이름이 사용되곤 한다. 3 세기 경 동전에 새겨진 피타고라스의 모습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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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arent retrograde motion of Mars in 2003
이런 역행 현상은 중국의 점성가들이 불길하다고 여기는 징조였다. 예를 들어, 정사 삼국지의 후한서에 “이 해, 세성(歲星-목성), 진성(鎭星-토성), 형혹(熒惑-화성)이 함께 태미(太微)로 역행해 들어갔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조조에 의해 후한이 멸망(225 AD)하게 되는 징조로서 서술된다. 사실 retrograde motion 은 지구와 가장 가까운 화성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므로, 목성과 토성이 함께 역행하는 것은 확률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이보다 전에 프톨레마이오스(c. AD 100 – c. 170)는 이러한 역행 현상을 근사적으로 예측하는 천동설 시스템을 만들었다. By Eugene Alvin Villar (seav)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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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설 내에서 역행 현상은 쉽게 설명된다. 안 쪽 궤도에 있는 행성과 바깥 쪽 궤도에 있는 행성의 연장선이 방향을 바꾸면서 일어나게 된다.
By Schorschi2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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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태양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을 제시한 사람은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c. 510 – c
최초로 태양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을 제시한 사람은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c. 510 – c. 428 BC)였다. 그는 태양이 불의 전차가 아니라 펠로포네수스 보다도 큰 금속 불덩어리라고 추측하였으며, 달은 해의 빛을 반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단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그는 투옥되었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페리클레스의 중재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지구가 평평하고, 아래로부터 강한 바람에 의해 떠받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공기의 흐름이 흐트러질 때 지진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Detail of the right-hand facade fresco, showing Anaxagoras. National and Kapodistrian University of Athens. By Eduard Lebiedzki, after a design by Carl Rahl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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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은 농경지의 측량이라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 이집트에서 약 3000 BC 경부터 발전되었다.
플라톤, 에우독서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BC)은 에우독서스(c.410-c.347 BC)과 함께 별과 행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을 만들었다. 이 모델은 2 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사용한 수학적인 도구는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은 농경지의 측량이라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 이집트에서 약 3000 BC 경부터 발전되었다. 기하학은 유클리드(~300 BC)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그리스 수학자이다. 에우독서스와 피타고라스의 업적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직관적으로 합당해 보이는 몇 개의 공리에 기반하여 수많은 결과를 이끌어내는(연역적)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수학의 기본적인 체계가 되었다. By Euclid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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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에우독서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BC)은 에우독서스(c.410-c.347 BC)과 함께 별과 행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기하학적 모델을 만들었다. 이 모델은 2 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다. 2 개의 구 모델은 우주를 두 구역으로 나누는 천동설 모델이다. 즉, 구 모양의 지구가 중심에서 정지 상태에 존재하고,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구 모양으로 덮고 있으며, 그곳에 여러 층의 구 모양의 에테르가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은 2 개의 구 모델에 8 개의 구 또는 원을 더하여 7 개의 행성과 고정되어 있는 항성을 배정하였다. 그는 “어떤 균일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가정한다면 행성들의 이와 같은 운동이 설명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행성들의 불규칙한 운동이 등속 원운동들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 당시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에우독소스는 행성에 중심하는 구를 도입하고, 그 축의 방향과 회전 주기를 조절하여 천체 운동을 근사적으로 맞추었다. 이로써 그는 행성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모델에서 각각 회전하는 층 사이에 그 회전을 상쇄하는 층이 존재해야 천체들의 운동을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바깥 층의 운동이 안 쪽에 위치한 층의 회전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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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lycus of Pitane (c. 310 BC)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플라톤, 에우독서스, 아리스토텔레스 에우독서스 모델의 결함 : 천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기술하지 못한다 천체의 운동 속도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천체의 밝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Autolycus of Pitane (c. 310 BC)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Apollonius of Perga (c. 262 BC–c. 190 BC) responded by introducing two new mechanisms that allowed a planet to vary its distance and speed: the eccentric deferent and the deferent and epicycle. It was developed by Apollonius of Perga and Hipparchus of Rhodes, who used it extensively, during the second century BC, then formalized and extensively used by Ptolemy of Thebaid in his 2nd-century AD astronomical treatise the Almagest. The basic elements of Ptolemaic astronomy, showing a planet on an epicycle (smaller dashed circle), a deferent (larger dashed circle), the eccentric (X) and an equant (larger black dot).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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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본 태양과 수성, 금성의 운동. 금성의 경우 8 년 동안의 궤도 운동 끝에 거의 원 위치로 복귀한다
지구에서 본 태양과 수성, 금성의 운동. 금성의 경우 8 년 동안의 궤도 운동 끝에 거의 원 위치로 복귀한다. 수성의 운동은 7 년 동안의 모습이다. Aristarchus of Samos (c. 310 – c. 230 BC)는 행성(지구 포함)이 태양 주위를 궤도 운동할 것으로 짐작하였으나, 광학이나 뉴튼 역학의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지동설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적어도 1500 년을 더 기다려야 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종교가 이 시대에 성립하였으므로, 그들의 천국관은 플라톤의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구(sphere) 모델의 언어를 사용한다. (예) the third heaven By James Ferguson ( ), based on similar diagrams by Giovanni Cassini ( ) and Dr Roger Long ( ); engraved for the Encyclopaedia by Andrew Bell. - Encyclopaedia Britannica (1st Edition, 1771; facsimile reprint 1971), Volume 1, Fig. 2 of Plate XL facing page 449.,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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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archus of Samos(circa 310–230 BC)와 반달
낮에 나온 반달 작사: 윤석중 작곡: 홍난파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브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딸랑따랑 채워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짝발에 딸각딸각 신겨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 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 줬으면 By Rollroboter - Own work,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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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archus of Samos, circa 310–230 BC
태양과 달의 크기, 지구로부터의 크기를 지구 반지름 단위로 계산 반달일 때, 태양-달-지구는 직각삼각형을 이룬다. 태양과 달의 사잇각 j 를 측정하면, 망원경이 발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즉, Tycho Brahe (c AD) 도 이 값을 사용하였다. 아리스타르쿠스 j=87° 실제 값 j=89°50’ By andonee - Own work,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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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archus of Samos, circa 310–230 BC
태양과 달의 크기, 지구로부터의 크기를 지구 반지름 단위로 계산 여기서 q 는 태양 또는 달의 반지름을 각으로 측정한 값이다. By Andonee - Own work,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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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archus of Samos, circa 310–230 BC
그는 최초로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도는 모델을 제안하였다. 또, 다른 행성들을 정확한 순서로 태양 주위에 배치하였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처럼 그도 별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태양 같은 천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 지구의 자전을 예측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아리스타르쿠스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 아리스타르쿠스는 별들이 태양과 같은 천체이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차(parallex)가 관측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별들의 시차는 망원경으로만 관측 가능하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추론은 그의 생시에 검증될 수 없었다. Pliny[9] 와 Seneca[10] 는 행성의 역행 운동이 실제 운동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 뿐으로 생각하였다. 즉, 지동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별의 시차가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선호하였고, 이러한 추세는 중세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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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archus of Samos, circa 310–230 BC
태양과 달의 크기, 지구로부터의 크기를 지구 반지름 단위로 계산 반달일 때, 태양-달-지구는 직각삼각형을 이룬다. 태양과 달의 사잇각 j 를 측정하면, 망원경이 발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즉, Tycho Brahe 도 이 값을 사용하였다. 아리스타르쿠스 j=87° 실제 값 j=89°50’ By andonee - Own work,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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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 of Cyrene, c. 276 BC[1] – c. 195/194 BC[2])
하지에 태양이 우물 속을 비치는 아스완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의 측량 자료를 사용 지구의 반지름 측정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직으로 세운 막대의 그림자로부터 태양의 각도 측정 약 15 % 정도의 오차 범위 내에서 측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2 년에 그가 제시한 방법대로 현대의 기기를 사용하여 Anthony Abreu Mora가 계산한 결과는 0.16 %의 오차를 보인다. 콜럼버스는 에라토스테네스의 결과보다 지구가 훨씬 작다고 믿었다. By cmglee, David Monniaux, jimht at shaw dot ca - File:Egypt_sat.png File:Earth_orthographic_projection_Earthmap1000x500.jpg,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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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르쿠스 (Hipparchus of Nicaea, c. 190 – c. 120 bc)
태양과 달의 운동을 예측. 지구로부터 달과 태양의 거리 계산. 삼각함수 발견과 그를 이용한 태양의 일식 예측 히파르쿠스가 지구(Earth)-달(M) 사이의 거리를 계산한 방법을 재현하는 도표. A 지점은 부분 일식이 일어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이고, H 지점은 개기 일식이 일어나고 있는 헬레스폰트이다.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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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Claudius Ptolemy, c. AD 100 – c. 170)
로마 시민으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던 그리스 철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저서 "Almagest"에서 equant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것이 필요하게 되었던 이유는 그 자신의 관측 결과를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의 범주 내에서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는 히파르쿠스보다 향상된 결과를 제공하였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의 방법은 행성 궤도의 중심도 지구에 있지 않고, 각속도의 기준점도 지구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모든 천체 운동의 중심이 지구에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에 위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향후 1500 년 동안 천문학의 기준이 되었고, 천문학자들은 그의 모델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행성 궤도의 중심은 (X)이지만, 그 각속도는 equant (검은 점)에 대해서 일정하다는 가정을 하여 천동설의 수명을 연장하였다.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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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천문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받아들였다.
이슬람 세계의 우주관 무슬림 천문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받아들였다. 10 세기 경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의심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Abu Sa'id al-Sijzi (d. circa 1020)와 같은 학자는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고 믿었다. Al-Biruni에 의하면, Sijzi 는 “우리가 관측하는 운동이 천체의 운동이 아니라 지구의 운동으로 인한 것”이라는 학자들의 신념에 기초하여 al-zūraqī 라고 명명된 astrolabe 를 발명하였다. 최초의 astrolabe는 220 BC 경 Apollonius of Perga 또는 150 BC 경 Hipparchus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믿어진다. 그 뒤 이슬람의 과학자들에 의해 대폭 개량되었다. 왼편의 것은 1400 년 경 파리의 Jean Fusoris 에서 만들어진 planispheric astrolabe 이며 Putnam Gallery in the Harvard Science Center 에 전시되어 있다. By Sage Ross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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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loded view of an astrolabe
이슬람 세계의 우주관 Exploded view of an astrolabe By Elrond - Own work,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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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rolabe는 기계식 시계 제작을 촉발하였다
astrolabe는 기계식 시계 제작을 촉발하였다. 좌측의 Prague astronomical clock, or Prague orloj 는 1410 년 완성된 기계식 시계인데 astrolabe 모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By James Grimmelmann - Flickr, CC BY 2.0, By Steve Collis from Melbourne, Australia - Astronomical Clock,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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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tion showing how celestial and geographic coordinates are mapped on an astrolabe's tympan through a stereographic projection. Hypothetical tympan (40 degrees North Latitude) of a 16th-century European planispheric astrolabe. By This image has been created during "DensityDesign Integrated Course Final Synthesis Studio" at Polytechnic University of Milan, organized by DensityDesign Research Lab in Image is released under CC-BY-SA licence. Attribution goes to "Michele Invernizzi, DensityDesign Research Lab". - Own work,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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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의 우주관 Alpetragius(born in Morocco, died in South of Spain c. 1204)는 프톨레마이오스의 equant, epicycle and eccentric 로 이루어진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체계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스템은 수학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보다 부정확하였다. 그는 또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천체의 운동을 더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하나 그 운동의 원인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의 생각은 13 세기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또 천체의 운동 원인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한 최초의 학자가 되었다. Fakhr al-Din al-Razi (1149–1209)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부정하였다. 또 al-Tusi and Ali Qushji (b. 1403)는 지구의 자전을 생각하였다. 그들의 논리나 과학적 증거는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적용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동설로의 전환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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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19 February 1473 – 24 May 1543)와 지동설의 재등장
코페르니쿠스는 신학, 수학, 천문학, 의학, 정치가, 외교관이자 경제학자였다. 지동설을 주장하여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촉발하고, 과학 혁명에 큰 공헌을 하였다. 1517 경제학의 핵심 개념인 화폐 수량설을 유도하였다. 1519 후일 그레샴의 법칙으로 불리게 되는 경제학 원칙을 세웠다. Astronomer Copernicus, or Conversations with God, by Matejko. In background: Frombork Cathedral. By Jan Matejko - [1],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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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19 February 1473 – 24 May 1543)와 지동설의 재등장
Frombork Cathedral mount and fortifications. In foreground: statue of Copernicus By Lestat (Jan Mehlich)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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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19 February 1473 – 24 May 1543)와 지동설의 재등장
1514 지동설의 초기 저작인 Commentariolus 저술. Frombork에 정착하여 살면서 경제학자이면서 행정가로서도 활약하였다. 튜톤 기사단의 공격에 맞서 Olsztyn Castle 을 방어하기도 하였고, 평화 협정에도 나섰다. 프러시아의 통화 개혁에 관여하여 경제학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저서는 프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532 지동설이 담긴 저작 Dē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완성하였으나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거절하였다. 1533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비서 Widmanstetter가 교황과 2 명의 추기경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설명하였다. 교황은 매우 기뻐하면서 Widmanstetter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다. 마침내 출판을 결심한 코페르니쿠스는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책을 헌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가정들이지만, 계산에 유용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이 천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반대를 두려워했던 것인지, 종교적인 반대를 두려워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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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page, 3rd ed., Amsterdam, Nicolaus Mulerius, publisher, 1617
By Nicolaus Copernicus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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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이미 지인에게 “자신의 저작이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검토되고 비판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6]
1539 년에 마르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람들은 하늘이나 천공, 태양이나 달보다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얼치기 점성술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 어리석은 자는 천문학 전체를 뒤집어 버리기를 원하지만, 신성한 성경은 (여호수아10:13) 여호수아가 태양에게 멈추어 서라고 명령하였다고 말하였지 지구에게 명령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매우 테크니칼한 방식으로 책을 써서 아주 뛰어난 천문학자가 아니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게끔 하였다. 이는 책이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키기 전에 전문가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이 책의 내용은 물리학적인 실제와 무관하며 순수한 수학적인 가설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 의한 공격이 바로 시작되었다 년에 루터의 추종자인 Melanchthon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코페르니쿠스에 찬동하는 자들의 불신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지동설은 천동설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어놓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직도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고 가정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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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lens)는 볼록렌즈의 모양이 렌즈 콩(라틴어로는 렌틸 콩)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렌즈와 망원경의 발명 렌즈(lens)는 볼록렌즈의 모양이 렌즈 콩(라틴어로는 렌틸 콩)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오래된 렌즈는 700 BC 경의 아시리아에서 유래하는 Nimbrud lens이다. By Geni - Photo by user:geni, GF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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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경으로 쓰이기도 하고 태양광을 모아 점화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렌즈와 망원경의 발명 확대경으로 쓰이기도 하고 태양광을 모아 점화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cavations at the Viking harbour town of Fröjel, Gotland, Sweden discovered in 1999 the rock crystal Visby lenses, produced by turning on pole lathes at Fröjel in the 11th to 12th century, with an imaging quality comparable to that of 1950s aspheric lenses. 최초의 망원경은 1608 년 네덜란드의 Lippershey와 Janssen과 Metius가 제작한 굴절 망원경이었다. 갈릴레오는 1609 년 6 월 네덜란드 망원경의 소식을 전해 듣고 한 달 안에 자신의 망원경을 만들었다. 또한 1609 년, 토마스 해리엇 (Thomas Harriot)은 천체 관측을 위해 망원경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초기의 망원경은 당연히 가시광선을 사용하였다. 현대에는 가시광선 뿐 아니라 전자기파의 다른 영역들, 즉, 라디오 파, 적외선, 자외선, X-선 등의 영역도 사용하여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있다. The Very Large Array at Socorro, New Mexico, United States. 대 배열 라디오 전파 망원경 By user:Hajor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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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6′ wide view of the Crab nebula supernova remnant, viewed at different wavelengths of light by various telescopes By CM Hubert Chen, Fiona A. Harrison, Principal Investigator, Caltech Charles J. Hailey, Columbia Principal, Columbia, Finn E. Christensen, DSRI Principal, DSRI, William W. Craig, Optics Scientist, LLNL, Stephen M. Schindler, Project Manager, Caltech - High Energy Focusing Telescope (HEFT), NASA's Scientific Ballooning Program,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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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발견과 그 파장 달 표면의 반점 발견, 즉, 달이 완벽한 에테르로 이루어진 천체가 아니라 불완전한 형태의 천체임을 최초로 발견. 달이 지구처럼 불완전한 천체라는 것은 곧 지구나 달이 어떤 유일성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가 됨 목성에도 달이 있음을 발견. 이는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더라도 달을 거느릴 수 있다는 증명이 되기도 함. 금성이 마치 달처럼 여러 위상으로 변화함을 발견. 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지동설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 태양의 흑점 발견 토성의 반지 발견 은하수의 별 발견 By Nichalp 09:56, 11 June 2006 (UTC) - Based on PD raster image Image:Phasesofvenus.jpg,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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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모델에서 본 금성의 위상 변화
Von Astrobryguy Derivative work of en:File:Phases-of-Venus2.svg (released to public domain). - Eigenes Werk,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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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반구에서 본 달의 모습 By Gregory H. Revera - Own work,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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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r prominence from STEREO spacecraft September 29, 2008
By NASA - NASA website; description: [1] high resolution image: [2],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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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2008년 7월 카시니 호가 토성으로부터 전송한 사진이다
이것은 2008년 7월 카시니 호가 토성으로부터 전송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인공적으로 색을 입히지 않은 것이며, 약 2 시간에 걸쳐 촬영한 사진 30 장을 모자이크한 것이다. By NASA / JPL / Space Science Institute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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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X-ray flares from Sagittarius A
Bright X-ray flares from Sagittarius A*, location of the supermassive black hole at the center of the Milky Way.[83] By NASA/CXC/Stanford/I. Zhuravleva et al. - (image link),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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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15 February 1564[3] – 8 January 1642) 의 발견과 그 파장
천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은 별의 시차(stellar parallax)가 관측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Stellar parallax is the basis for the parsec, which is the distance from the Sun to an astronomical object that has a parallax angle of one arcsecond. (1 AU and 1 pc are not to scale, 1 pc = ~ AU) 1 arcsecond = 1/3600 of a degree = 1/ of a radian Tycho Brahe 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반대한 주된 이유가 바로 별의 시차가 관측되지 않으므로, 이는 즉, 토성과 항성들이 있을 8 번 째 구 사이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었다. 별의 시차는 1838 년 Bessel에 의하여 최초로 관측되었다. (for the star 61 Cygni using a heliometer) By Srain at English Wikipedia - This image is an altered version of :Image:Stellarparallax2.svg, which is an SVG version of :Image:Stellarparallax2.png. Stellarparallax2.svg was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creator, Booyabazooka.,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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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코 브라헤(Tycho Brahe, 14 December 1546 – 24 October 1601)
갈릴레오보다 약 20년 앞선 천문학자, 점성술사, 연금술사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 맨 눈으로 관측하였던 마지막 천문학자 1573 년의 De Nova stella (On the New Star)에서 그는 변하지 않는 천상의 영역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을 논박했다. 그의 정확한 측정은 1572 년의 "새로운 별"(지금은 초신성으로 알려져 있는)에 달 보다 낮은 높이의 천체에서 예상되는 시차가 없었으며, 따라서 이전에 믿었듯이 대기권 내의 꼬리 없는 혜성이 아니라 달 보다 먼 천체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혜성들 역시, 대기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불변의 천구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597 년 덴마크의 왕 크리스찬 4세와 사이가 틀어져서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루돌프 2세의 초청으로 프라하로 가서, 조수인 케플러와 함께 행성에 대한 관측을 하였다. 브라헤의 무덤은 1901 년과 2010 년에 두 차례 검사를 거쳤다. 그 목적은 그의 사망 원인(수은 독살설이 제기되었음)과 결투의 결과물인 그의 인공 코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전설대로 방광이 터져서 죽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었고, 그의 인공 코는 전설처럼 은이나 금이 아니라 청동일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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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설에 대한 종교적인 반론은 성경의 시편 93:1, 96:10과 역대상 16:30 의
갈릴레오의 발견과 그 파장 코페르니쿠스는 별들이 매우 먼 곳에 있으므로 시차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지만, 브라헤는 별들이 측정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그토록 멀리 존재한다면 그들은 태양보다도 엄청나게 커야 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지동설에 대한 종교적인 반론은 성경의 시편 93:1, 96:10과 역대상 16:30 의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104:5의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전도서 1:5 의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에 기초하고 있다. 티코 브라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중간 형태인 모델을 만들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는 천동설로 분류된다. 그의 모델은 카톨릭 교회가 갈릴레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근거가 되었다. 티코 브라헤의 모델. 달과 태양은 파란색 궤도를 따라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지만,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오렌지색 궤도를 따라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배경에는 별들이 있는 구면이 회전하고 있다. 티코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지구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By User:Fastfission - Own work,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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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에 가한 박해에 대한 사과는 1992 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갈릴레오의 발견과 그 파장 1615 년 로마의 종교재판은 지동설이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어색하며, 성경의 정신을 정면으로 반대하므로 분명히 이단이다”고 결론지었다. 갈릴레오는 “두 개의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그때까지 자신의 편이었던 교황 우르반 8세와 예수회의 적대감을 사고 말았다. 그는 1633 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단의 혐의가 불을 보듯 분명하다"는 판결을 받았고, 그의 입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택 연금에 처해졌다. 갈릴레오에 가한 박해에 대한 사과는 1992 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Stephen Hawking에 의하면 갈릴레오는 현대 과학의 탄생에 누구보다도 큰 기여를 하였으며, Albert Einstein은 그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칭하였다. By Cristiano Banti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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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프라하에서 브라헤의 조수로 일했으며,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케를러는 브라헤의 일하는 방식에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를 천문학 부흥의 기초를 놓을 새 히파르쿠스로 여겼다. 브라헤는 프라하의 오찬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사망하였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에티켓을 지키려고 화장실에 가는 것을 참았었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온 후로 그는 소변이 나오지 않아 고통을 받았다. 죽기 전에 그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자신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기를 바란다고 외치곤 하였다. 또 케플러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아니라 자신의 체계 속에서 하던 일을 마쳐줄 것을 부탁하였다. 브라헤는 자신의 묘비에 “현자처럼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라고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에 기초하여 행성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세웠고 이는 뉴튼의 만유인력 이론의 기반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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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케플러가 어린 시절에 목격하였던 1577 년의 대 혜성은 유럽의 모든 천문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By Jiri Daschitzsky - Zentralbibliothek Zürich,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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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Remnant of Kepler's Supernova SN 1604. By NASA/ESA/JHU/R.Sankrit & W.Blair - Larger version uploaded from a NASA-sponsored site. Per Bridgeman Art Library v. Corel Corp., no new copyright should apply anyway.,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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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1604 년 10 월에 밝은 저녁 별 (SN 1604)이 등장했지만 Kepler는 자신이 직접 볼 때까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케플러는 수퍼노바를 체계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케플러 (Kepler)는 별의 점성술적 해석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별의 광도가 약해지는 것에 주목하였고, 그 원인에 대하여 추측하였다. 또, 시차가 관측되지 않는 것에 미루어 그 별이 고정된 별들의 구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바, 즉, 천구는 완전무결하고 변화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별이 태어나는 것은 하늘이 변화함을 뜻할 수 밖에 없었다. 사이에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에 대한 법칙을 출판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개선하여, 원형 궤도와 epicycle 대신 타원 궤도를 사용함으로써 어떻게 행성의 속도가 변화하는지를 설명하였다. 화성 궤도에 대한 계산 결과는 정확도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타원 궤도를 의미하였다. 이로부터 케플러는 태양계 내의 다른 천체들도 타원 궤도를 가질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케플러는 방대한 양의 계산을 홀로 힘으로 해내면서 많은 시행착오 끝에 행성의 운동법칙을 세웠다. 그러나 브라헤의 자료를 사용하였으므로 그것이 브라헤의 유족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인지의 분쟁 문제로 출판이 상당 시간 지연되었다. 케플러는 점성술을 멸시하였지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후원자들이 떨어져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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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화성 궤도에 대한 계산 결과는 정확도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타원 궤도를 의미하였다. 이로부터 케플러는 태양계 내의 다른 천체들도 타원 궤도를 가질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케플러의 제1법칙: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며, 태양은 그 초점에 위치한다. 타원의 이심률이 0 에 가깝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과 일치한다. 즉, 행성의 궤도는 원이 되고, 태양은 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행성의 속력은 일정하게 된다. By Hankwang - Own work, CC BY 2.5, 지구의 궤도가 타원이기 때문에 춘분으로부터 추분까지는 186 일이 걸리지만 추분으로부터 춘분까지는 179 일이 걸린다. 이 때의 이심률은 정확한 값 에 상당히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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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케플러의 법칙에서는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고, 태양은 타원의 초점에 위치하며, 행성의 속력이나 각속도는 일정하지 않지만 면적속도가 일정하다. 즉, 일정시간 동안 행성이 쓸고 지나간 면적 A1 과 A2는 같다. 케플러의 제2법칙: 일정시간 동안 행성이 쓸고 지나간 면적은 일정하다. By Hankwang - Own work, CC BY 2.5, 케플러의 제3법칙: 행성의 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케플러는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제3법칙을 세웠지만, 어떤 과정으로 이것을 찾아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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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 역학 뉴튼은 저서 “자연 과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케플러의 법칙에 따르는 행성의 가속도를 계산하였다. 이 때 가속도의 방향은 태양을 향하고 그 크기는 태양으로부터 행성까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즉 행성의 가속도는 태양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성은 태양을 향하여 끌어당겨지고, 그 힘은 행성의 질량에 비례하며 태양으로부터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 태양이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모든 천체들은 서로 잡아당긴다고 가정하였다. 따라서 한 쌍의 천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은 그들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그들 사이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 행성의 질량은 태양에 비해 작으므로, 그들의 궤도는 케플러 법칙에 근접하게 된다. 뉴튼 모델은 케플러의 모델보다 정확도가 더 높으며, 실제 관측 결과와도 더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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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December 27, 1571 – November 15, 1630)
케플러의 법칙에 대한 과학계의 반응 갈릴레오와 데까르트는 완전히 무시 많은 천문학자들은 물리학을 천문학에 도입하는 것에 반대 어떤 천문학자들은 중간지점에서 타협, 예를 들어, 제1법칙은 받아들이고 제2법칙은 거부 케플러 법칙의 검증 몇몇은 천문학적 관측에 의해 케플러 이론을 검증하였다. 수성과 금성이 태양의 표면을 통과하는 것은 케플러 이론의 민감한 테스트였다 년 수성의 통과에 관련하여 케플러는 매개 변수의 값에 확신이 없는 상태라서 예측된 날짜의 전후로 관측할 것을 요청하였다. Gassendi 가 예측일에 수성의 통과를 관측하여 케플러 이론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최초로 수성의 태양 표면 통과를 관측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는 금성의 통과는 관측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유럽에서는 거의 관측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Horrocks 는 케플러가 사용한 매개 변수의 값을 손수 조정하여 1639 년 금성의 통과를 관측하였다. 17 세기 후반에는 케플러의 법칙에 기반을 둔 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Giovanni Alfonso Borelli 와 Robert Hooke은 관성의 개념과 인력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Isaac Newton이 Principia Mathematica (1687)에서 만유인력의 이론으로부터 케플러의 행성의 운동 법칙을 유도함으로써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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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t of Mercury, 2006-11-08 Transit of Venus, 2012-6-6
By NASA - on Public Domain, Transit of Venus, By NASA/SDO, AIA - Flickr: SDO's Ultra-high Definition View of 2012 Venus Transit -- Path Sequence,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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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와 갈릴레오와 바다 갈릴레오가 조수 이론을 연구한 이유는 그것이 지구의 운동의 결과임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그의 저서 “두 세계관에 대한 대화"의 원제목을 “바다의 밀물과 썰물에 대한 대화"로 지으려고 하였다. 조수에 관련된 부분은 종교재판소의 명령에 의해 삭제되었다. 갈릴레오가 보기에, 조수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해 바닷물이 있는 지점이 가속 운동을 하기 때문에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최초로 바다 주변의 지형이 조수에 미치는 영향을 간파하였지만, 그의 이론은 하루에 한 번의 밀물을 예측하기 때문에 틀린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바다의 모양이나 깊이 등의 요인 때문일 것이라고 치부하였다.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오는 매혹적인 논리를 개발하였지만,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대한 물리학적 증거를 찾으려는 욕망 때문에 그 논리를 비판적인 태도로 바라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케플러는 조수의 원인이 달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갈릴레오는 믿지 않았다. 그는 케플러의 타원 궤도 주장도 무시하였다. 갈릴레오는 “두 세계관에 대한 대화"에서 항해하는 배의 예를 들었다. 즉, 고요한 바다에서 흔들림 없이 일정한 속도로 진행하는 배의 갑판 아래 선실에서 실험을 한다면, 배가 정지해 있는지 항해 중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갈릴레오 불변성 또는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라고 한다. 이것은 뉴튼 역학의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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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vs. 카톨릭 교회 갈릴레오에 가한 박해에 대한 사과는 1992 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0 년 2월 15일에 라칭거 추기경(후일의 교황 베네딕트 16세)은 로마의 라사피엔짜 대학에서 갈릴레오 사건이 “과학 기술 분야에서 현대인들의 자기자신에 대한 회의가 어디까지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하였다. 그 증거로 그는 파이어아벤트의 말을 인용하였다. 즉, “갈릴레오 당시 교회는 갈릴레오 자신보다 더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으로 인한 윤리적 사회적 영향 또한 고려하였다. 교회가 갈릴레오에 대하여 내린 판결은 이성적이고 정당한 것이었으며, 이 판결을 바꾸는 것은 오직 정치적인 이유로나 정당화될 수 있다.” 라칭거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직접 밝히지 않았으나 “충동적으로 사과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말하였다. 2008 년 1 월 라사피엔짜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교황 베네딕트 16 세의 방문에 항의하였다. “교황의 갈릴레오에 대한 입장은 이성에 충실하고 지식의 발전과 전달에 헌신한 과학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에 교황은 방문 계획을 취소하였다. 이는 대학 당국의 반론과 그에 대한 재 반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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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아벤트는 2차대전 이후 나타난 물리학자들이 철학적인 지식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철학이 직업적인 껍질 속으로 퇴보하는 것은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파인만이나 슈빙거 같은 젊은 물리학자들은 매우 똑똑하다. 이전의 보어나 아인슈타인, 슈뢰딩어, 볼츠만, 마하 등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교양을 갖추지 못한 야만인들이다. 그들은 철학적인 깊이가 없다. 이것은 직업정신이라고 떠받들어지는 생각의 잘못이다.” 반면에, 파이어아벤트 자신도 위에 언급된 과학자들, 특히 마하와 아인슈타인의 업적이나 방법들 그리고 목표들을 그릇되게 표현하여 심하게 비판받았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이 기본적으로 무정부적이며, 자기들만의 신화에 사로잡혀있고, 그들의 실제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범위까지 진리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한다고 말한다. 그는 과학자들이 대안적인 전통을 깔보는 것에 특히 분노한다. 예를 들어, 점성술이나 기우제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정할 권리가 없으며, 그런 것은 과학자들이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거나 인종주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학이 해방 운동으로 시작되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파이어아벤트는 다중적인 사회는 다른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과학에 의해서도 너무 많은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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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과학자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이어아벤트 같은 현대의 철학자들은 매우 똑똑하다
사실 과학자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이어아벤트 같은 현대의 철학자들은 매우 똑똑하다. 이전의 히파르쿠스나 데모크리투스 같은 철학자들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적인 깊이가 없고 교양을 갖추지 못한 원시인들이다. 이것은 그들끼리만 떠들어대는 습성의 결과이다.” Alan Sokal 은 뉴욕 대학교와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물리학 교수이다 년에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학술지인 Social Text에 논문을 기고했다. 그것은 Social Text 지의 지적 엄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논문이 그럴 듯하게 들리고 그들의 사상적 편향성에 부합되기만 하면 북미의 유수한 문화 학술지에 실릴 수 있느냐는 실험이었다. 그 논문은 1996 년 Social Text 의 “과학 전쟁“ 특집 호에 실렸다. 그 당시 Social Text 는 학자 간의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에 의한 외부 전문가 검토 또한 없었다. 논문이 발표된 날, Sokal은 인터뷰에서 그 논문이 속임수이며, “좌익 구호를 혼성 모방하고, 아첨 섞인 참조 문헌들과, 거창스러운 인용, 그리고 말도 안되는 엉터리이고 …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의 가장 바보같은 말들을 인용하여 짜집기"된 것이라고 하였다. Sokal은 1997 년에 “지적 사기"라는 저서에서 과학적 용어를 부정확하게 사용하는 사회과학 종사자들과 진리의 가치를 부정하는 과학 사회학의 옹호자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물리학 법칙이 단지 사회적인 합의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은 내 아파트에 와서 그런 합의를 어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참, 우리집은 21 층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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