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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Susanto Budiman Modified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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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기쁘게 하지말라 (15:1-13) 15장은 지금까지 바울이 주장했던 유대적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향한 권면의 결론이다. 그런 연유로 이 부분에서 대상이 어떤 한 무리에게만 제한 되지 않고 모든 사림이 대상이다.여기에서 바울은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될 것을 권 하고 있다. 15장에서 문제는 1-13절의 내용이 14장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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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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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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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절 상)
첫째,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절 상).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버리거나 짓밟기 위해 자신의 힘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둘째, ‘우리 강한 자가…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1절 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 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상 자연스럽다. 셋째,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 니라’(2절).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은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에서 정죄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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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3-4절)
첫째, 그것의 현재적 의미이다. 둘째, 그것의 총괄적인 가치이다. 셋째, 그것이 맞추고 있는 기독론적 초점이다. 넷째, 그것의 실제적인 목적이다. 다섯째, 그것의 신적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연합된 예배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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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으셨기 때문에 (7절) 그리스도께서 종이 되셨기 때문에 (8-13절) 바울은 이 절의 시작을 ‘상호성의 윤리’로 시작한다. 이 윤리는 로마사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였다. 시세로는 ‘감사를 제공하는 것보다 중요한 의무는 없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는 다른 이들에 대하여 거룩한 제공자의 태도를 가지고, 주변의 성도들에게서 도움을 받는 자의 태도 또한 스스로 받을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각에서 상호성의 윤리는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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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이 구절은 두 부분으로 구성 되어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kai. ga.r o` Cristo.j ouvc e`autw/| h;resen): ‘ga.r’은 이 구절이 2절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o` Cristo.j’는 바울의 권면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것이고, 관사는 ‘메시아’됨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권면이 세상, 그레코-로만 사회의 가치관에 반한 것임을 잘 알 것이다. 한지만 성도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않았던 예수의 삶을 따르는 행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기쁘게 하다(h;resen)는 부정 과거동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행위는 이미 반복할 수 없는 행위요, 그런 예수의 행위가 성도의 본이 된다는 것을 표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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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Oi` ovneidismoi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Oi` ovneidismoi. tw/n ovneidizo,ntwn se evpe,pesan evpV evme,)은 시편 69:9을 인용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행위가 이미 시편의 예언의 성취이며, 그리스도의 행위의 결과는 비방이었다는 것이다. 그 비방이란 예수의 십자가로 나타났다. 바울의 이런 권면은 로마 성도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를 비방하는 행위는 예수가 유대인들로부터 십자가를 지우는 행위와 같다는 것이다. 시편은 그들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성도의 사건으로 해석 하였다. 독자는 여기에서 ‘honor’와 ‘shame’이라는 구도를 발견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십자가’형에 처함을 통하여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었으나 오히려 그들의 행위가 부끄러워 던 것처럼, 만일 로마 성도들이 다른 이들이 자신과 다른 신앙 행습을 한다하여 비난한 다면 그런 행동을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던 유대인의 부끄러운 행위를 반복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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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소망을 가지게 함 이니라(th.n evlpi,da e;cwmen): 이곳에서 성경의 목적은 희망을 같은 것이라고 서술 하고 있다. 보통 이 ‘희망’을 일반적인 것 혹은 ‘영원한 희망’으로 번영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와 이방인 교회가 종말론적으로 하나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e;cwmen’에서 가정법 1인칭 복수형이다. 이 것은 ‘희망’이 결코 현재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의 사건의 논리기 선교적 기대를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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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dw,|h)은 기원법으로 LXX에서 너무나 흔한 기도와 소원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것은 기원법을 사용하여 ‘얻기를 원한다’는 것으로 만일 하나님아 원한신다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u`mi/n’은 단수 시 ‘se’을 복수화 함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이런 확장은 15:3에 인용한 시편의 수용자를 모든 로마의 성도들로 확장한 것이다. 15:2에서와 같이 약한자와 강한자 모두가 그 축복에 포함되어지고 각자가 같은 마음을 가질 의무를 갖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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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한 마음(o`moqumado.n): 같은(o`mo)와 마음, 감정‘qumado.n’합성어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만장일치로 결정, 혹은 한 그룹의 열정을 뜻으로 사용 되었다. 필로는 이 단어를 로마서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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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아(kaqw.j kai. o` Cristo.j prosela,beto u`ma/j): 바울은 본질에 있어서 ‘서로 환영하라’의 동기를 설명 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그룹 모두에게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이다. 예찬에서 사람을 초대한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속에는 이런 내용(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담고 있었다. 예찬을 통하여 다양한 형태의 두 그룹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 15:3의 내용을 15:8에서 다시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만찬을 경험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이 ‘proslamba,nesqe’ 은 예수님의 구원의 행동과 공동체에서의 서로를 받아들이는 행위로까지 확장 된 것이다. ‘o` Cristo.j’는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이방인을 차별하는 하나의 벽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u`ma/j’는 ‘서로’라는 단어와 같이 다양한 경쟁적인 그룹들을 포함하고 있다. 메시아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 이나 모두를 그의 메시아적 식사에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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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절, 8-9a는 인용한 9b-12의 ‘하나님이 복음을 통하여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음을 통하여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성취 하셨다’는 중심 주제를 지지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이 진리를 상기시켜 ‘서로 받아들이라’것을 격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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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LXX에 있는 ‘ku,rie’가 로마서에서는 생략 되었다. 생략한 이유에 대하여 바울은 9a의 이방인을 지지하기 위하여 생략되었다고 Barrett은 주장하고 있으나 이 절은 7-8절과 연결된 절이다. 오직 9절만이 분리된 절로 이해되어 지지 않는다. 바울은 이 구약인용이 7-9절 전체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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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기에서 신명기를 시편 뒤에 놓음으로 인하여 랍비들의 전통인 Haraz을 거부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 하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였다. 바울은 유대인의 인식인 이방인을 유대인보다 열등 하다는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 마지막 때에 사회적 정치적으로 열등한 이방인이 예루살렘으로 선물을 가저온다는 예루살렘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바울의 비젼은 모든 민족이 서로 존경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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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이 절은 결론적인 축복기도이다. 15:4에서 주어진 축복을 다시 언급 하고 있다. 이사 15:12이 그리스도를 통한 이방인의 희망의 예언의 멧세지를 위하여 다시 인용 되었다. 이것은 이 희망은 하나님이 그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이런 표현은 한편으로 기독교의 교리인 ‘믿음’을 모호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사야 인용은 선교적 목적을 보증하고 있는 것처럼, 이 전례가 없는 표현은 하나님 안에서 일반적인 약속의 성취 혹은 진정한 성도를 이웃으로부터 분리하거나, 혹은 그의 이웃 이방인으로부터 진정한 성도를 구별하는 긍정적인 배출구의 근거가 되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로마교회안의 약한자와 강한자의 합일을 넘어 시도를 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유대인과 동등한 화해의에 임한 다는 것을 제거하고 구원의 우주적 목적을 제기하고 있다. 그 목적은 스페인 선교를 통하여 나타난 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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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사도적 섬김 (15:14-22)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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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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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의 사역은 제사장적 사역이었다 (16-17절) 2. 바울의 사역은 능력 있는 사역이었다 (18절).
첫째, 바울은 사역의 목적을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자신의 공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거부한다. 셋째,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은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문자적으로는 말과 행동으로 하신 것이라고 쓴다. 넷째,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다섯째, 바울의 사역은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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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울의 사역은 개척자적 사역이었다 (19-22절) 첫 번째, 선교 여행은 실제로 안디옥에서 출발하였다.
둘째, 바울이 일루리곤을 복음화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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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너희 스스로가 선함이 가득차서(o[ti kai. auvtoi
14절, 너희 스스로가 선함이 가득차서(o[ti kai. auvtoi. mestoi, evste avgaqwsu,nhj), ‘o[ti’은 다음에 연거되는 로마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치사가 다른 이들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kai. auvtoi’이 부분은 ‘또한 스스로’쯤으로 번역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런 표현은 앞에 언급된 ‘kai. auvto.j evgw’와 은율을 맞춘 표현이다. 다만 ‘evgw’ 대신 ‘evste’속에 ‘su’에 담은 것이다. 이른 사본 (P46과 D)등에서 이 부분을 생략 한 것은 이 서신이 로마에 국한 되어 이해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mestoi, evste avgaqwsu,nhj’ 다른 사람에 의하여 현재 로마 성도들에 대하여 전해들은 내용이 다음에 열거된다. ‘evste’은 다음에 이러지는 모든 서술적인 표현의 주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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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대강(avpo. me,rouj)이 부분이 무었을 가르키느냐는 문제가 된다
15절, 대강(avpo. me,rouj)이 부분이 무었을 가르키느냐는 문제가 된다. 첫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전체를 뜻한다. 로마서 전체 내용이 담대하게 썼다는 것과 연결되어 이해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부분에 국한한다로 이해 하는 경우는 12장 이하에서 바울의 권면으로 이해가 가능 하다. 12장 이하의 바울의 권면이 윤리적이고 강하게 행함을 요구 하고, 14장 이하에서는 공동체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 된다. 하지만 본인은 이 부분이 로마서 전체와의 관계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바울의 12장 이하의 권면도 1-11장까지 와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14장 이하의 공동체의 문제도 성도로써의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의의 문제 해결 없이 이해 하기 힘들다. 바울의 권면은 성도로써의 마땅히 행할 바을 권면 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고 믿는 것을 부분적으로 일깨워 주고(evpanamimnh,|skwn u`ma/j)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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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표현이 로마 성도들은 ‘선함이 넘친다’는 것이다
첫 번째 표현이 로마 성도들은 ‘선함이 넘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1:29에 표현된 이방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표현이다. 여기에서 생각 해 보아야 하는 것은 왜 바울은 이렇게 선함이 넘친 성도들에게 1-2장에서 그런 이방인들의 죄 된 모습을 이야기 해야만 했을 까?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고린고 성도들처럼 죄악에 빠졌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어려운 상황, 정치적 탄압과 윤리적으로 타락한 이방 사회, 우상숭배가 만연함 속에서 성도로써 삶을 사는 그들이 자랑스러울 것이다. 이런 바울의 생각은 ‘믿음이 널리 알려졌다, 형제들’이런 표현 속에 들어있다. 1-2장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의 목록을 제시하고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죄성을 언급 한 것은 성도들이 그런 삶이 아니라 다른 이방인들의 특성을 통하여 믿음 없는 사람들의 죄와 위선을 지적 하기 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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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 이방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leitourgo. n Cristou/ VIhsou/ eivj ta
16절, 이방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leitourgo.n Cristou/ VIhsou/ eivj ta. e;qnh)이 부분에서 생각 하여야 할 것은 ‘일꾼(leitourgo.n)’과 ‘이방인(ta. e;qnh)’이다. ‘일꾼, 혹은 대사’라는 표현은 바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운 표현이다. 이 일꾼의 개념 속에는 ‘무급 봉사’라는 의미와 어떤 특별한 권위를 같지 않는 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부분에서 언급한 이방인은 특정한 이방인 이다. 이 특정하다는 의미는 ‘아직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을 뜻한다. 잘못하면 이 구절이 특정한 이방인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이방인’으로 이해 할 수 있으나 이는 로마서의 전체적인 상황과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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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 말과 기사의 능력(lo,gw| kai. e;rgw|)고후 10:11; 골 3:17; 대후 2:17에서 이 두 요소(말과 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말과 기사도 다음에 이어지는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evn duna,mei shmei,wn kai. tera,twn( evn duna,mei pneu,matoj Îqeou/Ð)’와 교차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duna,mei shmei,wn kai. tera,twn)’은 ‘기사(e;rgw)’와 ‘성력의 능력은(duna,mei pneu,matoj)’은 ‘말(lo,gw)’과 대칭을 이룬다. 하지만 ‘기사(e;rgw)’는 이곳 외에서 이적과 관련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기사(e;rgw)’는 말하는 것과 반대의 일로 5:18에서 사용 되었다. ‘말(lo,gw)’은 ‘speaking’과 ‘wrighting’을 포함하고, ‘기사(e;rgw)’는 고통을 포함한 계속된 인내를 의미한다. 이런 두 요소는 바울의 사역을 놀라우리 만치 성공적으로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이 이적이고 이는 성령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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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evn duna,mei pneu,matoj Îqeou/Ð) 바울의 교회에서 신적인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언어로 상용 되었다. 이 본문은 방언, 치유, 회심하는 능력의 근원이 성령임을 보여준다. 바울 서신에서 능력은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난다. 첫째는 올리우신 그리스도의 현현, 둘째는 성령의 존재 과 대응하는 것이다. 두 양식, 힘과 성령이 합하여서 올리우신 주가 그이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런 능력과 놀라운 일은 로마교회에 일상이 되었다는 것임을 뜻한다. 이런 놀라운 일들은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사자로써 인정 하고 순종하는 개기가 돼가도록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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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우는 곳에서는 설교하지 않기로(euvaggeli,zesqai ouvc o[pou wvnoma,sqh Cristo,j( i[na mh. evpV avllo,trion qeme,lion oivkodomw)이 것은 바울의 선교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바울은 새로운 선교지, 어떤 사도나, 성도가 복음 전하지 않는 곳에서 선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복음이 이미 전하여진 ‘안디옥’에서 선교한 경험이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의미는 로마 교회에게 다음에 언급될 스페인 선교와 관련 지어 이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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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바울이 이사야 52:15을 인용한 것에 대하여 무(Moo)는 세가지 이유를 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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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여행 계획 (15:22-33)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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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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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23-24절) 2.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계획 (25-27절)
첫째,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의 바울의 선교 사역은 환수되었다. 둘째, 바울은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었다. 세 번째, 자신의 로마 방문을 서바나로 가는 디딤돌로 생각하게 되었다. 2.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계획 (25-27절) 3. 바울의 서바나 방문 계획 (28-29절) 4. 그의 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 (30-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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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불신자들의 반대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기도 요청은 신자들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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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 바울은 왜 로마교회를 방문 하지 못했는가? 1) 명분때문에,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 어서 2) 동부 지역에서의 예기치 않은 일 때문에 일 수 있다. 하지만 Jewett은 바울이 로마를 방문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바울이 스스로 진술한 여러 위협, 특별히 감옥에 갇혔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바울이 그 상황을 자세히 밝히지 않는 것은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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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 이 지역에서는 다른 공간을 갖고 있지 않다(mhke,ti to,pon e;cwn evn toi/j kli,masi tou,toij), 바울은 이제 로마여행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역‘to,pon’은 갈 1:21과 고후 11:10에서와 같이 이는 로마의 행정 구역 보다는 지역을 의미한다. 로마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지도 없이도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교회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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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이 절에서의 파격구문에 대하여 바울이 원래 본문의 구조를 잃어 버려서 이것을 재론하기 위하여 다른 것으로 대신 한 것이다. 하지만 Jewett은 이 파격구문은 의도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것은 바울의 선교 계획을 위한 전략과 로마 성도들이 스페인 선교에 동참 하도록 하는 의도와 부합된다. 더군다나 15:25-32에는 이 계획의 성패는 예루살렘에 헌금한 것을 성공적으로 전하는 것과 이 것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받아 들이는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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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 그러나 이제는 (nuni de)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의 성도들이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성금을 전달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 할 예정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1) 영적인 것을 받은 이방인이 예루살렘 성도를 돕는 것은 너무 당연 한 것이다. 2) 이 성금은 안디옥 사건 이후에 갈라졌던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 고리 역할을 할 수 없었다. 3) 이방 교회들이 거둔 성금은 종말론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사66:30, 슥3:10에 예언된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이방인들이 흩어진 유대인들을 도와 예루살렘으로 와서 야회께 예물을 바치는 날이 온다는 예언의 성취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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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중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eivj tou. j ptwcou
26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중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eivj tou.j ptwcou.j tw/n a`gi,wn tw/n evn VIerousalh,m) Karl Holl에 따른면 ‘성도’란 단어와 함께 ‘가난’하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칭호 였다. 그러 무로 이 부분은 ‘the genitive construction’을 고려하여 ‘그 가난한자들은 성도들이다’라고 번역 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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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 빗(ovfeile,tai)에 대한 이해는 로마사회에서는 반드시 값아야 할 것으로 인식 되었으나, 바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분배된 것으로 그가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운총으로 주어진 것이다. 연장 선상에서 성도는 상호 빗진자로써 교회의 연합을 이끄는 개념으로 사용 되었다. 영적인 것들(toi/j pneumatikoi/j)이라는 것은 초대교회 전통에서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령이 하신일로써 선교, 믿음의 성장들을 뜻한다. 육적인 것들(toi/j sarkikoi/j)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간적인 것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섬기다(leitourgh/sai)는 단어도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티베리우스 황제때에 소아시역의 지방 유력자들에게 여행하는 관리들의 통행을 도우라는 명령에 사용 되었다. 하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목숨의 위험이 있어던 일들에서 사용 되었다. 여기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가난한자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으로써 사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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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 그러나 나는 너희를 권한다(Parakalw/ de
30절, 그러나 나는 너희를 권한다(Parakalw/ de. u`ma/s)이것은 이 구절이 로마서의 목적에서 중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일에 기도을 통한 지지를 희망 했다. ‘dia’가 두번 사용 된 구절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그의 탄원을 그의 요청과 함께 부탁 하는 것이다고 한다. 14:4-9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의 인종적인 나뉨을 상호 받아 들이라고 요청한다. 5:5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믿는자들이 마음에 부어진다. 8:17에서 유대적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똑 같다고 주장 한다. 그러무로 바울은 로마인들이 이방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 하는 계획은 성령과 그리스도을 통한 하나님의 행함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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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성도들에게 밭아들여질(euvpro,sdektoj toi/j a`gi,oij) 이것은 바울이 이방교회의 헌금이 예루살렘 성도들에 의하여 받아 들여지기를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해석은 1) 예루살렘에 의하여 과도하게 거부 되었다. 2) 그들이 적절한 감사없이 받아 들였을 것이다. 3) 헌금을 무시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4) 이것은 바울의 자기만족의 ‘중심으로 부터의 자유로’ 어떻게든 헌금이 받아 들여질 것을 예견한 것이다. 바울의 여기에서의 관심은 복음이었다. 그는 헌금이 받아들여 질수도 혹은 거부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행 21:23-24에 보면 바울의 나실인 서원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일종의 종교적 돈세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적으로 그의 헌금은 받아들여 졌고 이것이 법적인 헌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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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절, 기쁨 안에서‘evn cara’에서 ‘cara’은 현재적 미례적의미로 인간구원과 관련된 종말론적의미로 사용 되었다
32절, 기쁨 안에서‘evn cara’에서 ‘cara’은 현재적 미례적의미로 인간구원과 관련된 종말론적의미로 사용 되었다. ‘evn’은‘cara’연결되어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 되는 것을 거부하고 성서적의미에서 구원의 승리에서 오는 축하의식과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evn cara’는 이사 55:12에서는 이스라엘의 해방에대한 하나님의 약속 시20:6에서는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 한다는 의미로 사용 되었다. 바울의 이 표현은 1:10의 메아리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dia. qelh,matoj qeou) 표현은 본질적으로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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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 이 부분은 바울의 선교가 복음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세상과의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에 관한 축복으로 결론을 맺는다
33절, 이 부분은 바울의 선교가 복음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세상과의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에 관한 축복으로 결론을 맺는다. Jeffrey은 ‘de.’이 서신의 마지막의 시작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나 살전 5:23과 살후 3:16에서 축복은 앞에 논의된 내용의 요약과 결론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화(o` qeo.j th/j eivrh,nhj)은 신적인 근거와 평화의 수여자가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LXX의 왕하 24:23에 ‘주 너의 하나님이 너를 축보하길(ku,rioj o` qeo,j sou euvlogh,sai se)’는 표현이 있다. 신약 밖에서는 T. Dan 5.1-2에서는 갈등이 율법에 의하여 해결될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평화가 적대자를 변화시키고 동역자로 만들 가능성으로 이해 하고 있다. 너희 모두(pa,ntwn u`mw/n) 이것은 예루살렘 헌금을 통하여 로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축복에 동참 할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멘(avmh,n)은 통상적인 유대인의 축복이나 저주의 마지막은 마지막 기능을 한다. 신명 27:15-26에는 각각 열둘의 저주가 아멘으로 끝이 난다. 로마서도 1:15에서와 같이 로마 성도들에게 바울이 말한 내용에 반응으로 초대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가 로마의 믿는자들과 그의 온 세상을 통하여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동료들에게 있을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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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천거와 인사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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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에 대한 논의 이 16장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서신 이라는 주장들은: 1) 26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울이 세우지도 안 했고 방문 한적도 없는 교회에 있었다는 사실과 이 많은 사람들이 짬은 기간에 동쪽에서 로마로 이주 했다는 고는 사상하기 힘들다. 2) “아시아에서의 첫 개종자 에파네도”(16:5)는 로마가 아니라 에베소에 있어야 마땅 하고, 부르스길라 아쿨라는 로마에서 추방되어(행 18:2) 처음에는 고린도에 살다가 후에 에베소에 자리잡았다(행 18:18, 26: 고전 16:19). 3)16:17-20의 거짓교사들에 대한 경고는 로마서의 구조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로마서는 조심스럽게 화합을 도모하고(1:10, 15:14, 12:3) 이를 위하여 바울은 외교적 수사를 사용 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엄격한 경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경고는 차라리 갈라디아에 유대주의화를 획책한 적대자들에게 더 어울린다. 4) 15:33은 16:20처럼 공식적인 편지의 결어의 역할을 한다. 5)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편지 말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를 부탁 한 경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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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보낸 편지를 주장한 근거들은: 1) 이곳에 언급된 26명 모두를 바울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로마에 보낸 편지를 주장한 근거들은: 1) 이곳에 언급된 26명 모두를 바울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 중 9명만이 동쪽에서 로마로 이주해 갔던 것으로 생각 된다. 2) 아시아 최초의 개종자 에파네도는 로마서가 기록 될 당시에 로마에 있다는 사실에 별 의문이 없다. 아시아에서의 특별한 언급은 그에 대해 잘 알려진 에베소보다는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가 더 자연스럽다. 더불어서 유대인를 추방했던 클라우디스 황제가 죽은 54년 후에 그의 칙령이 철회된 후에 브리스굴라와 아굴라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3) 16:17-20의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 (골로세교회), 비도덕적 경향, 유대적 경향의 종합이다. 바울은 로마서에 다른 교회에서 문제점을 언급 하지 안았는대 그는 로마서의 끝 무렵에서 미래 상황을 예상하고 자신이 경험 했던 다른 지역에서의 거짓 교사들의 출현이 로마교회에서 있을 것을 미리 경고한 것이다. 4) 마지막 축복 기도(15:33)는 다른 서신에서도 발견 된다.( 살전 3:11-13, 빌 4:9) 5) 16:1-23 이나 16:3-23 과 같이 안부로만 된 서신은 발견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냈던 에베소 교회에 아무런 내용도 없이 문안 인사 부탁만 하는 편지를 쓸 리가 없다. 5) 사본 비평에서도 16장에 대하여 현재의 본문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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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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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거 (1-2절) 뵈뵈는 바울의 편지를 로마의 목적지로 가지고 가는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바울은 그녀가 겐그레아 교회 일꾼임을 인정한다. 그녀는 바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 2. 인사말 (3-16절) 로마 교회의 다양성 가이사의 집 사람 스물여섯 사람 중 아홉 명이 여자이다. 세 군데에서 남편보다 먼저 이름이 나온다. 로마 교회의 연합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정 교회 혹은 가족 교회들에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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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뵈(Foi,bhn) 뵈뵈에 대하여는 크렌필드가 뵈뵈라는 이름이 신화적인 배경 때문에 이방인 기독인이라고 주장한다
뵈뵈(Foi,bhn) 뵈뵈에 대하여는 크렌필드가 뵈뵈라는 이름이 신화적인 배경 때문에 이방인 기독인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 이라면 이런 신화적 배경을 가진 이름을 갖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핏츠마이어는 뵈뵈는 하늘과 땅의 딸이라는 의미이며 자유-노예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 이름을 가졌고, 유대인 노예는 그의 주인에 의하여 이름이 주어졌다. 여러 정황은 그가 사회적으로 상류사회여인 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부유 하였을 것이다. Coeus의 아내, Leto의 어머니, Apollo와 Artemis의 할머니이다. 그 이름의 의미는 ‘빛을 비추다, 빛, 밝다’의 의미이다. 그레코-로만 사회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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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부분일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부분일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귀족인 브리스가와 노예신분인 아굴라가 결혼의 가능성은 고대사회 어떤 곳에서도 가능성이 없다는 데 있다. 부리스가의 집은 로마의 Aventine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부일 한가지 가능성은 아굴라가 귀족 Acilius 가족과 관계가 맺어져 있고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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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경고, 메시지, 송영 (16:17-27)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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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 (없음)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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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의 경고 (17-20절) 2. 바울의 메시지 (21-24절) 3. 바울의 송영 (25-27절)
첫째, 바울은 경계하라고 호소한다. 둘째, 바울은 의도적으로 사도적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되라고 명한다. 셋째,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분별력을 키우라고 권한다. 2. 바울의 메시지 (21-24절) 3. 바울의 송영 (25-27절) 첫째,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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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신비 둘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쓴다. 셋째, 바울은 열방의 복음화에 대해 쓴다.
그 비밀은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알려지고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으라 복음의 대한 적절한 반응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현재 알리는 것은 모든 민족을 위함이며, 그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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