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창 윤 ( 언론영상학과 ) 언론사 SWUSWU
7 주 일제 하 와 1. 정간처분 2. 와 의 갈등 SWUSWU
1. 정간처분 정간처분 정간기간 총 280 일 4 회 1 차 사설 ‘ 자연의 화 ( 化 ) - 민간신문 최초의 정간처분 2 차 사설 ‘ 우열한 총독부 당국자는무슨 이유로 우리 일보에 정간을 명하였나뇨 ” 3 차 사설 ‘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 ’ - 총독부 사법경찰관 발동 신일용 기자 구속 - 3 차 정간해제 조건으로 반일 언론인 17 명 축출 ( 박헌영, 서범석, 신일용 해고 ) 4 차 사설 ‘ 濟南 사건의 壁上觀 ’ - 와 신간회의 밀접한 관계 - 총독부 주필 겸 발행인 안재홍 구속 SWUSWU
정간처분 1 차 사설 ‘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 ’ 2 차 사설 삼일절 기념축사 ‘ 조선 농민에게 ’ 3 차 창간 10 주년 기념특집 미국 Nation 誌의 축사 ‘ 조선의 현 상황에 귀보 ( 貴報 ) 의 사명은 중대하다 ’ 4 차 일장기 말소사건 - 무기정간처분 : 사장 송진우 사직 - 일장기 말소사진은 여운형의 (8.13 일자 ) 에 먼저 실림 - 송진우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웠다고 분개 - 김성수 몰지각한 행위라고 개탄 - 이길용 등 사원 13 명 해고 SWUS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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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압수처분 1920 동아 16 조선 동아 15 조선 동아 15 조선 동아 56 조선 48 시대 동아 57 조선 56 시대 동아 28 조선 21 중외 26 * 1929 년부터 항일논조는 급격히 약화 * 1929 년 광주학생운동을 고비로 민중운동은 사라짐, 통제강화 일제하 와 는 문화사업과 보도주의 표방 양 신문은 정치문제보다 문화사업과 민족주의 강조 1930 년 12 월 한글기념가와 문자보급가 1931 년 춘계문자보급반 결정, 문명퇴치를 위한 한글 원본 보급 네 차례에 걸쳐 학생하기 브나로드 운동전개 농촌계몽운동 : 이광수의 ( ), 심훈의 ( ) SWUSWU
1930 년대 중반 와 는 친일지 1938 년 일제 징병제의 전 단계로 지원병제 실시 와 는 대일본제국군대에 지원할 것을 설득 ‘ 황국신민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사하지 않으랴 ’ 1940 년 전시체제가 되면서 와 폐간 폐간의 대가로 80 만원, 50 만원 는 을 통해 친일 본격화 “ 내선 문제에 있어서 그 통치의 근본정신이 서양류의 식민지 정책과 그 범주를 달리하고 있는 것인데 특히 미나미 총독의 내선일체 정책의 강 화는 이 원리르 완전히 구현시켜 민족융합의 이상적 경지로 매진하고 있다 ” SWUSWU
2. 와 의 갈등 김성수와 방응모 김성수 사주 김성수, 중앙고보, 보성전문 ( 고려대 ), 경성방직 금융기관으로 김연수의 해동은행을 거느림 김경중 ( 김성수의 아버지 ) 는 珍山郡首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29 세에 창간 당시 근대식 사업으로 재산을 늘린 최대 부호 중의 한명 1931 년 창간 방응모 1923 년 정주지국장 금광에서 큰 돈을 번 이후 1933 년 인수 (50 세 ) 정주군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시골갑부, 학력은 한문공부, 글방훈장 인수 후 사장겸 총무국장 공격적인 경영과 판매활동 SWUSWU
와 의 갈등 의 방응모가 인수 후 기자들을 스카웃 이광수, 함상훈, 김동진 등 양 신문은 증면경쟁 1935 년 6 월 보성전문 신입생 추가모집 폭로 태평로 신사옥을 짓고 내외적으로 과시 보성전문은 에 사과 및 집필자 해임요구 “ 新聞道를 망각한 태도 ” 라고 공격 1935 년 5 월 방응모가 함남 영흥군 국유림을 대부받으로 한다는 기사보도 : 화전민 천여명과 주민 8 천여명 생존위협 는 잡지, (1933) 창간 도 잡지 (1935), (1936), (1937) 1940 년 8 월 10 일 강제폐간 직전 발행부수 55,977, 발행부수 59,394 SWUS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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