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전선교착과 휴전협정 협상을 위한 인식의 변화와 예비회담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중공군의 최후공세 휴전협정이 조인되다
I. 협상을 위한 인식의 변화와 예비회담
협상을 위한 인식의 변화와 예비회담 1. 협상‘ 이전의 각국 상황 적절한 휴전 협상 하에 전쟁을 종결 /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귀 소련의 전쟁 개입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끝내려 함. 한국 정부와 민족은 통일의지가 확고하였으며 반 휴전 운동이 확산 막대한 물적/인적 손실로 대규모 공세 지양 및 소규모 공세 전환 전쟁이 장기화 되어 북한의 피해가 커지자 가장 절실히 휴전을 원함
협상을 위한 인식의 변화와 예비회담 2 2. 예비회담 7월 10일 오전 11시에 개성에서 본 회담 개최 1951년 5월 31일 과 6월 5일에 미국은 소련과 두 차례에 걸친 접촉 6월 27일 소련이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임 6월 30일 공산국 측에게 라디오를 통해 회담 장소 통보 7월 8일 예비회담에서는 대표명단의 교환, 정식회담의 개최, 상호 안전에 관한 사항 등 논의 7월 10일 오전 11시에 개성에서 본 회담 개최
II.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1. 협상에 임하는 각국의 자세 7월 10일 아침, 휴전협상 제1차 본 회담 시작 쌍방은 협상에 임하는 자세에서 큰 차이 협상의제 채택,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감시 방법 / 기구의 설치 적대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 한반도로부터 외국군의 철수가 우선이라는 정치적 주장
쉽지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2.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다 <유엔군> <공산군> 공산군 측이 회담불참을 선언 유엔군 측은 군사적 압력을 가해 공산군 측을 회담장으로 불러낸다는 방침 수립 휴전회담이 중단된 채로 1951년 10월이 됨 이 기간 중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선의 요충지를 하나하나 점령 (고지쟁탈전의 시작)
‘현 접촉선을 기준하여 군사분계선을 설정 한다’는 것으로 가닥을 잡음.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2.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다 <유엔군> <공산군> 공산군 측은 결국 회담 재개를 요청 ‘현 접촉선을 기준하여 군사분계선을 설정 한다’는 것으로 가닥을 잡음. 그러나 개성을 두고 양측은 공방을 펼침 전쟁 전부터 남한이었으며 고려의 도읍지라는 역사적인 상징성 서울 방어의 중심 , 인삼의 집산지 등 다방면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 인민들에게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소한 개성만큼은 소유 해야만 했음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2.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다 <유엔군> <공산군> 갈등이 계속 되자, 회담 자체가 결렬될 것을 우려한 유엔군은 개성을 양보 ‘현재의 접촉선을 변경함 없이 군사분계선으로 한다’ 는 내용에 합의 1951년 11월 27일 현재의 휴전선과 흡사한 군사분계선이 확정 완전한 휴전협정은 이 시점 에서부터 1년 8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체결
양국은 유리한 상황조성을 위한 ‘제한공격’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임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3. 고지쟁탈전의 원인 및 전개 양국은 유리한 상황조성을 위한 ‘제한공격’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임 협상과정에서 주요 쟁점사항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의 수단 <유엔군>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빼앗긴 일부 진지를 탈환함으로써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목적 <공산군>
결국, 양측 모두 휴전협상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것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3. 고지쟁탈전의 원인 및 전개 결국, 양측 모두 휴전협상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것
351고지, 펀치 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3. 고지쟁탈전의 원인 및 전개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무모한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 (맹조의 발톱 작전)을 수립 상황의 반전 시도, 그러나 휴전회담의 영향을 생각한 리지웨이 중장 은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의 지상 작전만을 승인. <유엔군>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의 화력 때문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중동부의 산악 지역에 집중 <공산군> 중동부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351고지, 펀치 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임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4. 983고지 (피의 능선 ) 의 전투 983고지를 장악한 북한군이 유엔군의 후방지역인 인제 일대까지 관측하면서 포격을 하기 때문에 유엔군에게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감제고지 1951년 8월, 북한군의 주보급로인 양구 북방의 문등리 계곡과 사태리 계곡을 감제할 수 있어 983고지를 한국군이 제한 적인 공세 실시 한국군 제 5사단 제 36연대가 선공을 실시 773고지 940고지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점령 곤란 731고지 983고지 983고지의 가장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773고지와 가운데의 940고지를 먼저 공격하고 기습적으로 983고지를 향해 공격 8월 22일, 5사단 36연대는 마침내 고지 점령 북한군이 역습을 시도하여 26일에 다시 983고지 피탈 미 제 2사단 9보병연대가 합류, 9월 5일 오후 2시경, 한국군은 983고지점령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4. 983고지 (피의 능선 ) 의 전투 구분 한국군 제 5사단 제 36연대 미 제2사단 북한군 인원(명) 소계 전사 부상 실종 1,700 15,000 2,772 326 2,032 414 983고지를 피의 능선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당시 전투상황을 목격했던 미군 성조지의 종군기자들이 ‘피로 얼룩진 능선’이라고 하며 983고지전투를 ‘피의 능선전투’ 로 보도하면서 붙여지게 되었다.
쉽지 않은 협상, 그리고 군사분계선 5. 한국군과 유엔군의 추계작전 밴 플리트 장군은 다시 ‘맹조의 발톱 계획’과 유사한 잠정 군사분계선 (1951. 11. 27) 밴 플리트 장군은 다시 ‘맹조의 발톱 계획’과 유사한 대공세 작전인 ‘추계작전계획’을 수립하여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건의 그러나 이번에도 이전과 같이 제한된 지상 작전만 승인 한국군과 유엔군은 단장의 능선 전투와 백석산 지구 전투를 펼쳤고,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끝에 고지를 점령 그리고 결국 이때의 전선이 큰 차이 없이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III.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1. 포로송환, 휴전협상의 난제 - 포로 송환 문제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협약에 동의함에 따라 쉽게 타결될 것으로 예상. - 문제 발생 → 포로송환 협상의 쟁점이 됨 . ① 유엔군의 포로(북한군&중공군) 중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 ② 자기나라의 정치제도 반대 입장에서 귀국거부, 제3국 택하는 포로들 미국은 1:1 동수교환 제안, 포로의 명단을 먼저 교환하기로 함. → 유엔군과 공산군 측에서 제시한 포로수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발생 . → 자유송환을 고수한다는 원칙 이외에는 포로송환 협상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특별한 진척이 없었음.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2. 거제도 포로수용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포로 수 급격히 증가.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38도선 이남으로 후퇴하면서 포로들은 부산으로 이송. 미 제8군 사령부는 1950년 10월 거제도를 선정 하고, 수용소 건설. - 수용소장인 도트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됨. 후임 수용소장 콜슨 준장이 합의각서를 쓰고 도트 준장을 인도받음. * <각서 내용> 1)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들을 살상하는 유혈사태가 있었음을 시인한다. 2) 포로의 송환문제는 판문점에서 논의된 결정에 따른다. 3) 포로들의 강제심사는 없을 것이다. 4) 포로의 대표단 조직을 승인한다. 등 이 각서로 유엔군은 포로문제 협상에서 매우 불리하게 됨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은 중공기와 미군 비난하는 플랜카드 게시, 중화기로 무장강화. → 신임 수용소장 보트너 준장이 포로들을 분리시키고, 무기들 압수 → 포로들의 폭동은 막을 내리고, 개인 의사가 확인된 포로들은 각 지역으로 분리 수용.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3. 395고지 전투(백마고지 전투) 1952년 여름, 휴전회담의 난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지전이 계속됨. 그 중 치열함이 말로 다하기 힘든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 1952년 10월 6~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 10일간의 전투에서 395고지의 주인은 7번이나 바뀐 것은 그만큼 대혈전이 벌어졌다는 의미. ( * 395고지 :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야산으로, 철원 서북방 12km 효성산 남쪽 의 끝자락에 있는 고지로 공산군에 점령되면 철원평야가 노출되고, 중부지역에 배치된 유엔군의 병참선인 3번 도로 사용 불가 )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3. 395고지 전투(백마고지 전투) ① 1951년 11월 3일,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한국군 9사단 2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29연대가 잘 막아내자 중공군은 5일 오후 9시에 재차 공격하여 29연대는 결국 백마고지를 중공군에 빼앗김. ② 28연대의 2개 대대로 역습하여 다시 고지 탈환. ③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공격준비사격과 북쪽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시켜서 한국군의 증원 및 군수지원을 차단하고 인해전술로 공격함. 이에 9사단은 3개 연대(28,29,30연대)를 교대 투입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치름. ④ 한국군 제9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끝까지 투지를 불사르면서 395고지를 장악함.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4. 한·미 상호방위조약 휴전회담의 시작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온 국민들은 휴전에 반대. 1953년 휴전협상 타결 분위기가 조성되자 국민들은 ‘휴전반대운동’ 전개. 휴전회담의 타결 가능성이 확실시되자, 정부는 휴전협정에 동의하되 조건을 달기로 함. * <조건> 1)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2) 한국군 증강을 위한 지원 & 소련의 침략행위에 대비하여 미 해군의 한국해역 봉쇄 3) 공중방위를 보장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안전보장 차원에서 정치적 최후의 수단으로 ‘반공 포로 석방’ 단행하여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냄. 이는 6·25전쟁의 최대성과라 할 수 있음. - 6·25전쟁 휴전 이후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이 체결됨.
포로송환 협상과 백마고지 전투 5. 반공포로 석방 1953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판문점을 통해 포로 교환 실시 1952년 말 ~ 1953년 초에 미국과 소련의 정권이 교체되면서 전쟁 조기 종결의 입장표명. 1953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판문점을 통해 포로 교환 실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원용덕 장군은 육군헌병 경비대가 기습적으로 수용소를 개방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한다는 계획을 승인 받음 1953년 6월 18일. “각 경찰 관리들은 이들을 지도 보호하라” 는 대통령의 담화와 함께 반공포로 2만 7000여명이 석방됨. 이 사건으로 미국을 당황스럽게 하였음. 이에 미국은 한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상호방위조약 체결, 장기간의 경제원조 제공,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편, 휴전 후의 정치회담’ 등에 관해 합의(1953 년 7월 12일에 이를 발표함) → 한·미간의 갈등 해결. 휴전은 조인만을 남겨두게 됨
IV. 중공군의 최후 공세
중공군의 최후 공세 1. 상황개요 1953년 초, 휴전회담이 중단된 상황으로 소강상태 중인 가운데 양 진영은 고지쟁탈전 후의 휴식과 정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를 타결 하려했고,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 그리고 정치 심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의 전쟁 종결 등을 위한 군사전략 모색에 전력투구 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1. 상황개요 유엔군은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억제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1953년 3월까지 방어력의 강화와 공세역량을 쌓는데 집중하였다. 그리고 5월부터 하계공세를 하였다. 유엔군은 이에 대응하였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만주폭격을 포함한 ‘확전 계획’을 건의하였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핵무기의 사용을 포함한 다각적 압박전략을 모색했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1. 상황개요 공산군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의 20개 사단 증편을 추진 <결사> 공산군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의 20개 사단 증편을 추진 사단 증편안은 4월 22일 확정됐다. 공산군에 효과적인 대처방안이고 휴전 후 북한의 재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다. 1953년5월1일 한국군 제3군단은 재 창설 됐다. 그리고 6월18일까지 제 26·27사단이 창설되면서 한국군은 3개 군단 18개 사단이 되었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전초전 : 최후 공세 제1차 공격 중공군은 1953년 1~2월에는 전력증강과 진지공사에 주력하다가 중공군은 1953년 1~2월에는 전력증강과 진지공사에 주력하다가 3월이 되자 유엔군의 전초, 특히 서부전선의 유엔군 전초진지에 공격 한강하구-판문점-철원 백마고지-금성-교암산-동해안의 감호를 연한 선에 따라 중부 전선의 화천북방전선이 금성 쪽으로 불거져 금성돌출부라 하였다. 중공군 제60군 제180사단이 한국군의 제5사단 전초진지 공격을 시작으로 5월13일부터 금성돌출부 정면의 전초진지에 대해 공격을 가해왔다. 한국군 제2군단과 제9사단 및 수도사단은 대부분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제8사단의 전초는 피탈되고 말았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6월공세: 최후 공세 제2차 공격 1953년 6월 8일 포로송환 협상이 타결되면서 다시 휴전회담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공산군은 최후의 공세를 준비했다. 배치된 공산군의 수는 약 180만 명에 도달했다 (* 공산군이 전력을 강화하여 대규모 공세를 하려 한 이유) 휴전이 발효되기 전에 점령지역을 최대한으로 확대함으로써 전쟁의 승자는 공산군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2. 한국 내에서 들끓고 있는 휴전반대 운동과 한국 정부의 북진주장을 위축시키기 위해 한국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자 했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6월 공세: 최후 공세 제2차 공격 공산군은 한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는 강원도 금성 지역을 선정했다. 이유 : 지형이 험준하여 인적·물적 지원이 어렵고, 지형적으로도 북쪽으로 돌출되어 점령하는데 유리하다. 중공군은 6월 10일 밤에 51년 5월 공세 이후 최대 규모인 1개 군을 투입하여 한국군 제2군단을 공격했다. 중공군과 비교하여 병력이 너무도 부족하여, 한국군은 북한강 남안까지 남진하게 된다. 유엔군 전폭기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6월18일 황급히 구축한 방어선에서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7월 공세 : 최후 공세 제3차 공격 1)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약27,000여명에 달하는 반공포로가 일방적으로 석방된다. 이에 휴전협정이 중단되고 공산군은 마지막 최종공세를 준비한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7월 공세 : 최후 공세 제3차 공격 <제187공수연대의 공수낙하 모습> 2) 중공군은 6월 공세에서 얻은 효과가 반공포로 석방으로 상쇄됐다고 판단하여 “실추된 그들의 이미지를 군사작전을 통해 갚겠다.”는 의도로 화천저수지를 목표로 최종공세를 취했다. 이를 간파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일본에서 정비 중인 제24사단과 제187공수연대를 한국으로 불러와 재배치한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7월 공세 : 최후 공세 제3차 공격 <금성전투에서 포로가 된 국군> 3) 중공군은 7월 13일 밤에 공격하였으며 무려 5개 군의 병력을 투입하였다. 금성의 좌/우측에서 양익포위전술을 구사하며 한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 후방을 차단한 후 섬멸하고자 했다. 미 제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조정한 후 철수할 것을 명하였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7월 공세 : 최후 공세 제3차 공격 2. 중공군 7월 공세 : 최후 공세 제3차 공격 <돌격하는 중공군 전차와 보병> 4) 한국군 제2군단과 미 제9군단은 적근산과 백암산을 연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가 재빨리 반격하여 금성천과 북한강을 연하는 선까지 탈환했다. 계속하여 금성천 북안으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미 제8군사령부의 공격중지 명령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중공군의 최후 공세 2. 중공군 7월 공세 : 최후 공세 제3차 공격 <목숨을 구걸하는 중공군> <고지를 따라 이동하는 미군> 5) 결국 한국군 제2군단은 다시 반격으로 잃었던 금성지역의 절반 정도를 회복하는데 그치고 작전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현 접촉선은 휴전으로 인하여 군사분계선으로 확정되었다. 중공군은 무려 6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V. 휴전협정이 조인되다
( 월터 로버트슨 :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미 대통령 특사파견] ) 휴전협정이 조인되다 1.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1953년 7월 중순 –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과 협의, 한국정부도 휴전 인정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당일) 22시를 기해 발효시키기로 합의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 6.25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됨 ( 월터 로버트슨 :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미 대통령 특사파견] )
휴전협정이 조인되다 2. 총성은 End, 전쟁은 ing
휴전협정이 조인되다 ※ 6.25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북한의 도발사례 1966년 5월 17일 – 경남진주 덕의마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7년 1월 19일 – 해군당포함(56함) 초계함 북한 해안포에 격침 당함 1967년 5월 21일 – 강릉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1월 21일 – 1.21 사태. 김신조를 포함한 북측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기습을 시도 1968년 11월 2일 –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북한 124군부대) 전원사살 1974년 5월 20일 –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6년 8월 18일 – 판문점 도끼 사건 발생. 북한군 미군장교사살 1983년 10월 9일 – 버마(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사건. 부총리 외무장관 등 수행원 17명 사망 1987년 11월 29일 – 인도양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 테러사건(김현희 주도) 1996년 9월 18일 –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발생 북한 특수부대 상어급잠수함이용 침투 전원사살 소탕 1998년 6월 22일 – 속초 앞바다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9년 6월 15일 – 제 1차 연평해전 발생 2002년 6월 29일 – 제 2차 연평해전 발생 (특히 이 사건은 한일 월드컵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 2006년 7월 5일 –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함 2006년 10월 9일 –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함. 2008년 7월 11일 – 금강산 관광 중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 2009년 5월 – 미사일 발사실험 남한에 도발 엄포 2009년 11월 10일 – 서해교전(대청해전) 서해북방한계선에서 남북해군교전 북한해군 반파 3명 사상. 아군피해 경미함 2010년 3월 26일 –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 피격침몰사건 발생 2010년 11월 23일 – 북한 연평도에 포격, 해병대원 전사 2명, 부상 16명 주민가옥 20여채 전소
휴전협정이 조인되다 2. 총성은 End, 전쟁은 ing 휴전협정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말 그대로 전쟁을 잠시 쉬는 것뿐 종결된 것이 아니다 이는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평화조약이나 강화조약과는 다른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현재까지도 계속적인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