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광주대교구 예비신자 교리교사회의 주보성인 성 정하상 바오로의 생애 천주교 광주대교구 예비신자 교리교사회의 주보성인
성인은 1795년,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의 마현촌(마재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인은 1795년,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의 마현촌(마재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재성지
정하상(1795∼1839) 가계도 정하상 정약전 정약종 유소사 바오로 정재원 윤씨부인 ? 아우구스티노 정약용 요한 정학초 체칠리아 정약용 요한 정하상 바오로 정학초 정철상 가롤로 정정혜 엘리사벳 정학연 정학유
천주교 조선 독립교구 설정 추진자 정하상 정하상은 1800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조선 독립교구 설정 추진자 정하상 정하상은 1800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곱 살 때 부친의 순교로 가산을 몰수 당해 갈 곳이 없던 정 하상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어머니와 함께 마재에 있는 숙부 정약용의 집에 얹혀살지만, 이미 관리가 될 자격을 박탈당했기에 친척과 노복들의 극심한 박대를 받습니다. 1814년에 상경한 정하상은 함경도 무산에 귀양 가 있는 조동섬(유스티노)을 홀로 찾아가 수년간 교리와 한학을 수학합니다. 굶주림과 박해의 고통 속에서 숨어 살며 기도의 힘으로 장성한 정하상은,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지피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면서 꺼져가던 조선교회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 당시 정하상이 내놓은 묘책은 ‘성직자 영입’ 운동! 이를 위해 1816년 이후로는 왕복 5천리의 중국 길을 아홉 차례나 왕래하며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 주교에게 직접 호소합니다. 그리고 1823년부터는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최초의 한국인 신학생 정하상 드디어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면서 1833년 이후로는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와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고, 한국인 신학생인 (김대건·최양업· 최방지거) 선발도 주도합니다. 정하상도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던 앵베르 주교로부터 신학수업을 받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함으로써 사제의 꿈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1839년의 기해박해까지 20여 년을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전력한 그는, 서양 선교사를 집에 모시고 살며 보좌, 자문하는 비서의 역할도 수행하면서 애주애인(愛主愛人)하는 평신도로서 성교회의 도리에 충실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천주교인들은 그를 ‘장상’으로 여기며 존경했고, 수많은 이들이 정하상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김대건 성인의 부친인 김제준은 자신의 회개 동기가 정하상의 권고 덕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1839년 6월 1일 노모와 동정녀 누이와 함께 체포된 그는, 호교론적 탄원서 한 폭을 당시 조정에 제출합니다. 정하상은, 잔혹한 형벌과 심문 끝에 45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합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 3,400여자 남짓한 한 폭의 탄원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는,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로써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박해를 중단해야 할 이유와 그 주장을 밝힌 글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호교론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당 시대의 유교 문화와 화해하고자 한 협정서로써, 피를 토하는 아픔으로 애절하면서도 당당히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면서 당국을 설득하고자 노력합니다. 성인의 이러한 복음 선포 방법은, ‘유교’를 가지고 ‘천주교’를 보호하며, ‘천주학’ 으로써 ‘유학’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인은 곧 ‘천주교’를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유교’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한 나라 에서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실행하면 온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상재상서‘ 본문 중에서) ~ 내용은, 신대원 사제의 저서인 ‘정하상의 상재상서’를 참고했습니다.
‘상재상서’를 전하는 정하상 상재상서 한문 필사본
1839년, 9월 22일 ‘기해박해’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셨습니다(45세). 1839년, 9월 22일 ‘기해박해’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셨습니다(45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털끝만한 것도 하느님의 힘입니다."
성인의 묘소가 있는 천진암 성지 둘째는 양지(良知,양심)이며, 셋째는 성경입니다. 첫째는 만물이고, “스스로 주재하시는 분을 증명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이고, 둘째는 양지(良知,양심)이며, 셋째는 성경입니다. ~상재상서 중에서
천진암 성지 내에 있는 성 정하상 바오로의 묘지 천진암 성지 기념비 (200주년 기념비)
정하상은 1925년 7월 5일, 시복되셨습니다. 주님의 참된 용사이신 정하상 바오로여...
정하상은 1984년 5월 6일, 시성 되셨습니다. 1984년 5월 6일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
우리의 주보성인, 정하상 바오로!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정하상 바오로!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정하상 바오로! 천주교 광주대교구 ‘예비신자 교리교사회’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심으로써, 1. 교리와 교회 학문에 대한 성인의 뜨거운 열정과 학식을 본받고자 하며, 2. 성직자 영입을 위한 성인의 목숨 건 활동을 본받아 선교와 교회 성장을 위한 열성적 활동을 다짐하며, 3. 이로써 오늘날의 진정한 평신도 지도자의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성인의 전구를 간청한다. 성 정하상 바오로! 저희 예비신자 교리교사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 정하상 바오로의 헌신적인 삶과 순교는... 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우표 2천년 대희년 한국 평신도 대회 이 땅에 수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우표 2천년 대희년 한국 평신도 대회 '데레사의 집' 홈지기가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