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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귀속문제』 한국고대사 박종원 오원택 채영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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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해사 귀속문제』 한국고대사 199910134 박종원 200110189 오원택 200210321 채영롱
강정인 김가혜 손수희

2 개 요 발해사 [渤海史] 중국의 입장 일본의 입장 러시아의 입장 한국의 입장 결 론

3 발해사 [渤海史] 발해사의 의의 고구려 - 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기본 흐름을 마련 고구려의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
약 200여 년간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써 그 위용을 내외에 널리 시위

4 발해사 [渤海史] 발해사 [698~ 926] 698년 고구려 장수였던 고왕(高王) 대조영이 길림성 돈화현 부근 동모산 기슭에 고구려 사람들과 돌궐인, 그리고 대렬을 이끌고 발해를 세움. 230년 가까이 통일신라와 남․ 북국의 형세 대조영부터 13대왕까지는 문헌 기록에서 확인 가능. 현재까지 확인된 왕은 15명

5 발해사 [渤海史] 발해사 [698~ 926] 2대 무왕(武王) - 대외정복에 탁월한 업적 3대 문왕(文王)
2대 무왕(武王) -  대외정복에 탁월한 업적 3대 문왕(文王) - 문물 제도의 정비에 힘을 써서 국가적 기틀을 완성 - 돈화 동모산에서 상경, 그 다음으로 동경으로 천도 - 말년에 적대국이었던 신라에서 사신이 파견. 점차 교류가 시작 4대 왕부터 9대 왕 - 내분기 10대 선왕(宣王)의 즉위(818년)를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뉨 13대 왕까지 전성기 -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일컬어짐 14대왕 대위해(大瑋瑎)까지 융성 15대왕 대인선(大諲譔)에 내우외환으로 점차 쇠퇴기 926년 1월 ‣ 거란에 멸망

6 발해사 [渤海史] 오늘날 발해사에 대한 논쟁 중국, 러시아와 일본 등 각자 현대적 이해관계로 인해 발해사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 특히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에서 강하게 대립 - 현재의 영토가 과거 발해국의 일부

7 중국[中國]의 입장 중국의 발해에 관한 시각 발해는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 건립된 지방봉건 정권
당대 흑룡강 지구의 지방 봉권 영주 소수 민족이 건립한 하나의 지방 정권 당(唐)조 통할하의 지방 민족 정권 말갈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 문화의 일원으로서 융합

8 중국[中國]의 입장 중국의 발해에 관한 시각 ‘속말말갈은 당나라 초기에 이미 당에 귀속되었으며, 7세기 말엽 속말 말갈의 수령 대조영이 여러 종족을 통일하고 정권을 세웠다. 713년 당 현종이 대조영을 군왕으로 책봉하였고, 발해 도독의 직위를 수여 하였다. 이 때부터 속말말갈이 수립한 정권을 발해라 불렀다.’ -중국 초급교과서『중국 역사1』

9 중국[中國]의 입장 발해사에 관한 중국 사료 -『통전』(通典)
 1) 고종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해동의 수천 리를 얻었으나 곧 신라와 말갈의 침입을 받아 상실하였다. (권171)  2) 변방전의 고구려에서 이르기를, 고종이 사공 이적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여 수도를 파괴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그 후 여중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자 신라와 말갈로 흩어졌으며 옛 땅은 모두 말갈로 들어갔다. (권186)  3) 변방전의 말갈에서 이르기를, 대당의 성화가 멀리 미쳐 말갈국이 자주 공헌하였다. (권186)  4) 주군전에 평로절도사가 신라와 말갈을 진무하였다 (권171) 당나라의 지배층은 발해국이 고구려 유민의 나라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손상된 체면을 만회하기 위하여 발해국을 보잘것없는 말갈족에 의해 우연히 세워진 것처럼 왜곡하여 기록!

10 중국[中國]의 입장 발해사에 관한 중국 사료 -『구당서』(舊唐書) 발해국의 건국 과정에 주동적 역할
1) 대조영이 영주에서 말갈인의 두목 걸사비우와 함께 각기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풀어 말하면 처음에 고구려인 부대와 말갈인 부대는 각기 따로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2) 걸사비우의 병력이 당나라의 추격군에 의해 패하고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대조영이 그의 병력까지 흡수, 통솔하면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여 동모산에 수도를 잡았다는 것이다. 3) 대조영은 날쌔고 용감하여 전투를 잘 지휘하자 말갈족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세력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그는 발해국을 세우고 그 첫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발해국의 건국 과정에 주동적 역할 발해국은 고구려 유민이 세운 국가, 권력을 잡은 것도 고구려인

11 중국[中國]의 입장 발해사에 관한 중국 사료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 신당서(新唐書) 발해전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덧붙여, 성은 대씨이다.) 발해국의 창업자를 고구려인이라고 인정한 『구당서』와 반대로 『신당서』는 창업주를 속말말갈인으로 둔갑시켰다.

12 중국[中國]의 입장 발해와 진국 한국의 역사 문헌에서는 ‘발해’라고 표현 진(震) - 해 뜨는 나라를 의미
중국의 역사 문헌은 ‘진국(振國․震國)’ 또는 ‘진단(震旦)’이라고 표현 대조영의 자주적인 발해국을 규모가 작은 진국의 계승국으로 만듦으로써 발해국의 자주적 위상을 흠집 내려는 저의 발해가 중국의 역사 문헌에 진국으로 기록된 이유는 중국이 발해국을 당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어보려는 정치적 책략 ! 진(震) - 해 뜨는 나라를 의미 발해(渤海) - 당나라와의 외교적 타협 결과 당 현종(玄宗)은 713년에 진국의 황제를 자처하는 대조영을 '좌해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駭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책봉 -> 독립을 인정해주면서 명분을 얻으려는 정책 당나라가 발해를 형식상 중국보다 한 단계 아래의 지위에 두고자 함

13 일본[日本]의 입장 일본문헌에서의 발해사 인식
1. 발해국의 제2대 무왕이 727년(인안 8) 일본의 쇼우무(聖武) 천황에게 보낸 국서 - “발해국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지키고 있다.” - 쇼우무 천황은 다음해 무왕에게 “발해국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음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답했다. 발해국이 부여의 풍속을 지키고 있다고 한 것은 발해국의 건국세력이 종족상 부여-고구려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 (고구려는 부여 풍속의 계승국)

14 일본[日本]의 입장 일본문헌에서의 발해사 인식
2.『속일본기』 쇼우무 천황 징키(神龜) 4년 병신조 中 - “당나라의 장군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의 일본 조공이 오래 단절되었다가 727년에 이르러 59년(668~728) 만에 무왕이 파견한 영원장군(寧遠將軍) 高仁義 등 24명의 일본 입국으로 재개되었다.” 일본은 발해국을 고구려의 후계자로 확신하고 발해국의 첫 사신이 일본에 입국한 것을 고구려 멸망 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관계와 관련지음. 발해국이 일본에 대한 조공을 하러 온 것으로 간주.

15 일본[日本]의 입장 일본문헌에서의 발해사 인식
3. 796년(강왕 정력2)의 기사 -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라는 기사와 850년(함화 20)에 “발해(原作高麗)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수빙하였다.” 850년까지도 문헌에 발해국이라고 써야 하는데도 고(구)려라고 씌여있는 것은 일본이 발해국을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식. 4. 930년 동란국(東丹國) 의 사신으로서 일본에 입국한 배구(裴璆)를 나무란 일본 천황이야기가 실린 문헌 발해국이 말갈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면 일본 천황은 배구 등이 동란국에 항복한 것을 나무랄 이유가 없다. 말갈은 거란과 같이 야만족으로 간주되었기 때문.

16 일본[日本]의 입장 2차 대전 이전의 일본의 발해국 인식 제국주의적 목적에 부합한 연구가 주류
발해는 미개한 퉁그스계의 민족인 말갈족이 만주의 땅에 처음 건국한 독립국이며, 그 문화는 고구려나 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문화의 고유성이나 독자성이 없다고 인식

17 일본[日本]의 입장 근래의 일본교과서 “발해는 열심히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고 일본과도 교류했지만 그 문화는 도시에 거주하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일반사회에 널리 미친 것은 아니었다.” 발해는 고구려가 세웠으며 당의 문물제도를 열심히 받아들였으면서도 발해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음.

18 러시아[Russia]의 입장 러시아의 발해 연구 19세기 후반의 극동개척 : 발해의 고고학적 유적에 관심
아브리코스 절터, 코프이토 절터가 있는가 하면 우쑤리스크 성터, 크라스키노 성터를 비롯한 여러 성터들이 있고, 그 밖에도 무덤, 항만 유적지 등 [크라스키노 Kraskino 성터]

19 러시아[Russia]의 입장 러시아 학계의 발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발해사를 러시아의 극동소수 민족의 하나인 말갈족의 역사로 인식 (발해사=러시아사) 발해 문화를 고구려 요소와 더불어 내륙 아시아로부터 전래된 돌궐족, 위구르족, 네스토리우스교의 영향과 함께 설명 러시아 내에서의 한국학 분야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우수리 주의 지방사 분야에서 연구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된 유물들]

20 러시아[Russia]의 입장 러시아 학자들의 입장 카파로프
- 실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연해주에 발해 문화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최초의 연구자 - 극동 민족들의 초기 국가 권력이 고구려와 중국의 영향력 아래 형성되었다고 판단 아르쎄니예프 - 20세기 초에 연해주 유적에 큰 관심 - 발해가 668년부터 12세기까지 존재하였고 이웃의 문명국으로부터 외부적 영향을 받아 건국되었다는 시각에서 검토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된 발해시대 허리띠 유물]

21 러시아[Russia]의 입장 러시아 학자들의 입장 마뜨베예프 샤브꾸노프
- 1929년 출간된 저서 『발해』: 당시 알려져 있던 중국, 한국, 일본의 사료들을 검토하여 발해에 대해 전반적으로 서술 - 발해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왕국이었음을 강조 샤브꾸노프 - 문헌사료를 근거 삼아 독립국으로서의 발해의 건국 과정, 정치, 대외 관계, 행정 구조, 주민, 경제 등과 함께 독창성이 강한 문화를 분석 - 발해의 문화가 인접 국가나 민족들의 문화와 상호 작용하여 이룩되었음을 강조하였고 또한 이 독립 왕국이 그 이후 극동 남부 주민들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

22 한국[韓國]의 입장 한국의 발해사 연구의 시작 → 현대에 이르러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보아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
조선시대 유득공의 『발해고』(1784)에서 시작 →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남북국이라고 언급 김정호 『대동지지』(1864)에서 “고구려 계승국인 발해가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을 이루고 있다고 봄”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1960년대에 북한에서 출간 이우성이 남한쪽에서 남북국 시대론의 당위성을 강조하여 발해사의 기본 시각은 남북한 학계가 같음 → 현대에 이르러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보아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 → 발해와 신라와의 동족 관계 증명, 발해의 고구려의 계승 관계, 민족적 계보 관계의 해명을 중심으로 연구

23 한국[韓國]의 입장 건국자의 출자문제 사 서 정혜 공주의 묘
사 서 『오대회요』→ 대조영을 ‘고구려 사람(高麗種)’으로 서술 『삼국유사』의 『신라고기』에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다고 서술 『제왕운기』에서도 같은 기록 정혜 공주의 묘 고구려계의 석실 고분과 일치 고구려와 백제에서 독특하게 행해지던 3년장의 장례제도 계승 정혜공주는 고구려계임 정혜공주의 증조 할아버지인 대조영도 고구려계임 박시형은 대씨가 고구려의 왕실과 직접 혈연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고구려인이며 고씨와 같이 크고 높다는 말의 대음으로 고씨와 동일한 것이라도 설도 있다고 주장

24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국의 이름에 대한 문제 『통전』→ 대조영이 세운 정권의 본래 이름은 진국
『통전』→  대조영이 세운 정권의 본래 이름은 진국 713년 당나라가 발해군왕에 봉한 뒤부터 발해군이 됨 당나라의 지방 정부 정도로 보고 있음  『신라고기』,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처음부터 국호를 발해라고 했던 기술이 있음 중국의 외교적 승인 이전의 독자적인 국호  건국 초기 영토가 그리 크지 않았으며 당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발해군의 표현을 받아들임  당나라가 말갈의 호칭을 피하고 발해라는 호칭을 사용 발해가 고구려와 말갈계로 구성된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   본래 국호를 알고 있었으나 미루어 오다가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

25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의 종족구성 – 사 료 『금사』의『고려전』- 발해를 속말말갈에 의해 세워진 것,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말갈발해 또는 말갈이라는 표현을 사용 여진족에 의해 세워진 금나라는 발해국을 여진의 조상인 말갈계의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족적인 자신감을 얻으려고 함 원나라 역시 북방민족 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부식이나 일연은 발해에 대해 자유로운 언급 제약, 단『신라고기』나 최치원전에서 넌지시 언급 신라와 대결관계에 있는 발해를 낮추어 부르기 위한 해석도 가능

26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의 종족구성 – 사 료 『통전』발해를 말갈족이라 기술
통전이 쓰여질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 시키려고 많은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다시 부흥했음을 인정 회피 『구당서』의 발해전은 발해를 고구려의 유민으로 기록 발해국 멸망 20년 이내에 쓰인 『구당서』에서는 사실에 입각해서 발해를 고구려 유민국가로 바로 잡은 것임 『신당서』에서는 발해를 말갈족의 국가로 봄 『신당서』 가 쓰인 송나라 시기에는 거란, 여진 등의 북방의 유목국가에 시달리던 때였으므로 고구려를 수, 당에 고통을 안겨준 북방민족으로 단정지으며 적대시 하기 위해 발해국까지 낮게 평가했을 가능성 있음

27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의 종족구성 – 행정기구 일본에서 편찬된 『유취국사』에서 토인은 적고 말갈 사람이 많다는 기록 있음
발해국과 일본의 교통로는 동경용원부이며 이곳은 속말말갈의 거주지이므로 이러한 기록 가능 발해국의 중앙통치기구를 3성 6부이며 지방 통치는 주현제만 있었고 부족제는 없었다. 따라서 통치의 대상은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다. 건국초기 협력의 관계였으나 낙후한 문화를 가진 말갈계가 고구려의 문화에 흡수 동화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 [정혜공주묘]

28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의 고구려 계승인식 나라 이름을 스스로 ‘고려’라 칭하기도 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국왕’이라고 서명하기도 하는 등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자처하였음 특히 발해의 3대 문왕은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칭하고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창하던 ‘천손’을 일컫기까지 함

29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 존속시기의 각국의 발해 인식 일 본 『속일본기』에서 발해와의 국서에서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임을 인정
일 본 『속일본기』에서 발해와의 국서에서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임을 인정 신 라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증명 “…고구려 유민들이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모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 고 려 거란이 발해를 멸한 것을 들어 거란과 교류를 거절한다 태조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대인선의 세자 대광현 등을 후하게 대우하며 왕실의 종적에 올려주며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배려 태조는 후진의 승려와의 대화에서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언급함

30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다. 대조영의 아우는 검교태위 반안군왕 대조영의 아들은 계루왕에 책봉
→ 발해국의 최고 통치자는 작은 왕들을 거느린 대왕 즉 황제였다. 정효공주 묘비문에는 그의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으로 표현 발해의 관제는 제국에서만 나타나는 3사와 3공제와 작호제도가 있었음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끌여들여 발해국을 외교, 군사적으로 고립시키려 했을 때 발해는 즉각 당나라와 흑수말갈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서적을 수입하거나 빈공과에 합격하는 횟수와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벼슬의 종류와 횟수는 말갈부와 달랐다.

31 한국[韓國]의 입장 발해의 고구려의 문화계승 성의 위치, 도성의 구조, 성벽의 축조방식 등이 고구려와 동일
발해는 고구려와 같은 구들을 사용, 전반적인 주택주조도 동일 무덤양식 중 횡혈식 무덤과 수혈식 무덤이 고구려 후기와 동일하며 당나라의 벽돌 무덤과는 차이가 있음 발해 무덤 중 고분 위에 일종의 사당과 같은 목조건축물을 세운 흔적이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등의 왕릉급의 고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임 당나라의 보낸 금은 불상은 당나라의 것과 다르고 그 이전의 양식과 유사하다 따라서 발해의 불교는 그 이전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으며 말갈은 불교를 몰랐으니 발해는 고구려의 불교를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질그릇의 모양, 질, 색깔이 고구려의 유물과 유사하며 기와도 형태, 색깔, 수법, 장식 무늬 등에서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 한다.

32 결 론 중국 [中國] 일본 [日本] 각국의 입장 요약
결 론 각국의 입장 요약 중국 [中國] 발해문화는 말갈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또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원 한족의 고도로 발달한 봉건 문화에 깊이 물들고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마침내 당 문화의 일원으로서 융합함. 일본 [日本] 일본 옛 문서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제국주의시대 이후부터는 목적론적 시각으로 발해를 어느 나라에도 귀속되지 않은 말갈인의 독립국이며, 주체성 없이 고구려와 당의 문화를 받아들인 나라로 인정.

33 결 론 러시아 [Russia] 한국 [韓國] 각국의 입장 요약
결 론 각국의 입장 요약 러시아 [Russia] 고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발해를 연구하는데 발해사를 말갈족의 역사로 보는 점에서 중국과 동일하나 말갈족을 러시아 극동 소수민족의 하나로 파악하여 러시아 역사의 일부로 판단. 한국 [韓國] 발해 당사자들의 인식과 문화는 고구려를 이어받았으며 발해는 고구려 유민 중심의 독립국가였다고 주장.

34 결 론 우리조의 생각 발해를 찾아서 - 송기호(1993), 서울: 솔 출판사 / p. 293-294
결 론 우리조의 생각 발해를 찾아서 - 송기호(1993), 서울: 솔 출판사 / p 『발해사에 대한 시각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이라면 그것은 모두 자국의 입장에서 발해사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문제는 자국의 입장을 먼저 설정하여 놓고 발해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 밖의 부분들에 대하여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데에 있다…. 앞으로는 이 역사가 과연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하는 점을 보류해두고 그 실체 규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상호간의 자료와 연구 결과의 교환이 활발하지 못한 것이다. 교류와 비판이 활발하게 벌어져야만 보다 객관적인 발해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35 끝 결 론 우리조의 생각 “발해사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합시다!!”
결 론 우리조의 생각 위의 글처럼 우리는 발해사에 대해 역사적 사실 규명보다 역사적 해석을 앞세우며 자국의 입장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발해, 그 자체를 보지 않은 채 고구려 계승 요소만을 혹은 당나라적 요소만을 강조하여 발해의 일면적 측면만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일본이 발해를 주체성 없이 고구려와 당의 문화를 받아들인 나라로 인식하여도 할말이 없게 된다. 우리는 발해의 귀속문제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사료, 문화연구에도 힘써 올바른 발해사 규명에 노력하고 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의적 해석을 지양하여야 할 것이다. “발해사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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