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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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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2)

2 https://youtu.be/5o4tWeAr7fE

3 민씨 세도정치의 실상과 개혁의 실패 --민씨 세도의 대표는 민영준(1852~1935):
->1883년 성균관대사성/1885년 11월 이조참의/1887년 12월 평안도관찰사/ 지경연사(知經筵事)—평안도관찰사는 민병석에게 물려줌/ 협판내무부사 ->( )민씨 척족에 무더기로 관직제수; 형조판서 민영준, 한성판윤 민종묵, 이조참판 민병승

4 ->민영준:1891년 2월 이조판서—1892년 6월 예조판서, 1893년 5월 공조판서—그해 10월 선혜청 당상—1894년 2.29 친군영경리사 겸함--> 의정부 좌찬성(42세) ->민영준은 농민봉기를 계기로 권력형 탐학과 부패의 원형으로 지목받아 처벌. 어떻게? ; (일본군이 궁궐을 장악한 상태)“聚斂을 일삼아 원망을 샀으니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라”(고종실록,고종31년) ->민씨 일족 모두 유배: 前 통제사 민형식-絶島에 定配,경주부윤 민치헌-원지에 정배

5 Q) 군국기무처가 고종에게 보고한 민중착취 실상과 대책(고종실록, 31년.1894.7.15)
1.관리들의 개인재산 강탈-> 백성 원한 高->푯말 뽑고, 立案 말소 2.10년 이내 수령 토호들이 강탈, 늑매(勒買)한 토지, 산림, 집 등 재산은 사실 조사 후 원주인에게 환원 =>Q) 이런 실상을 고종과 민비가 몰랐을까. 알고도 묵인했을까.아니 어쩌지 못했을까.

6 고종과 민비는 과연 개명한 군주와 왕후였을까 Q) 이태진의 주장은…
->고종은 외부 실정 깨닫고 있었음;서양문명 수용없이는 나라를 지켜낼 수 없다고 판단 ->1873년 12월 쇄국정책 고집하던 대원군 섭정 중단시키고 군주 직접 정치 선언;고종의 개화정치는 근대국가 건설 신념에서 시작된 일. ->민비는 이를 뒷받침한 강력한 반려자이고 일본의 민비시해는 이 체제 파괴 위한 행동

7 Q) 이태진은 민영준의 농민착취와 탐학을 어떻게 보나?
->동학농민군의 규탄대상인 민씨 세도세력은 종종 민비로 지목돼 왔지만 실제는 민영준 ->민비를 민영준을 비롯한 민씨 척족 세력으로부터 분리 ->민영준의 배후는 고종과 민비가 아니라 원세개(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8 ->민영준이 권세가로 성장한 데는 외세인 원세개의 지원이 큰 힘으로 작용
->동학농민군 봉기까지의 정치사적 구조를 민씨 척족 세도의 시기로 규정한 것은 식민통치 체제를 합리화시키려는 식민사관의 산물이라 주장. ->민영준은 ‘황후의친척 조카. 1877년 문과 급제. 지돈령부사로 승진하여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로 성장(한영우) ->Q) 고종과 민비는 민영준의 국정농단 몰랐을까. 알았다면 얼마나 그를 견제하려고 했나?

9 ->Q) 고종과 민비가 왕실과 사직의 안전 명목으로 원세개를 등에 업은 민영준의 국정파탄을 방치하거나 방조, 편승한 것은 아닌가?

10 ->Q) 임오군란에서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민씨 척족의 발호를 막았다면 1894년 민중봉기가 일어났을까
=>고종의 유약함? 민비의 국정농단? 원세개를 등에 업은 민씨 세도가의 가렴주구?

11 Q) 이노우에 가쿠고코로(井上角五郞)의 눈에 비친 민씨 세도정치의 실상은?
--1883년 조선 외무아문 박문국에 근무하며 한성순보 창간한 인물. -- “외교상으로는 청국의 간섭, 관료들은 서로 권세 다툼. 민씨 세도안 에서도 민응식과 민영익 알력 심함. 민영환은 왕비와 친하여 영익과 총애를 다툼. 영익이 해외로 가자 영준이 영환과 세도를 다툼” ->민비의 비호가 없었을까?

12 Q) 매천 황현이 본 고종과 민비의 관계 -- ‘갑술년(1874) 초에 고종 친정했는데 안에서는 명성황후가 주관하고 밖에서는 민승호가 받들어 행하였다’ -- ‘황후는 총명하고 민첩하며 권변(權變)의 계략이 풍부하여 임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필했다’ -- ‘처음에는 임금에 의지해 사랑과 미움을 나타냈지만 시일이 지나 방자함이 날로 심해져, 임금이 도리어 제재를 받는 바가 되었다’

13 Q)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 본 고종 --1894년부터(63세) 네차례 11개월간 조선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 --고종은 ‘심약한 군주’이며 ‘어떤 일을 단단히 그러쥐고 밀어 붙일 만한 능력은 없는 인물’: “성격의 박약함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14 동학농민봉기와 외군 청병

15 Q) 1894년 1월 전봉준(全琫準,1855~95) 주도의 제1차 고부古阜민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세금 강제징수, 재산강탈,매관매직의 달인(금송아지 대감) **박태원은 조병갑이 민영준으로부터 7만냥 뇌물로 고부군수직을 산 것으로 묘사 ->안핵사(이용태)가 고부에서 체포, 투옥, 살해, 가옥파괴 등으로 잔인하게 진압 ->전봉준, 농민군 규합해 태인에서 2차 봉기 ->보국안민, 축멸왜이, 제폭구민, 盡滅權貴 기치

16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 농민군 지도부
->4월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 대파 ->전라도 이어 충청도로 농민 봉기 확산 ->1894년 4월 27일 ‘전라 감영이 동학에게 함락되다’

17 조선의 외군 청병에 대하여… --1893년 3월 2만여 동학교도가 보은에 집결, 교조신원운동 . 무기들고 봉기하지도 않은 상황(-->이하 고종실록, 고종 30년) --1893년 3월 25일 고종이 어전회의에서 청군 청병해 동학군에 대처할 것을 처음 거론 -->고종; “군사는 하루라도 준비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지금 오랫동안 태평하여 군사를 양성하지 않고 있다. 금영과 청영에는 군사가 없다는 데 완영에도 군사가 없는가?”

18 ->고종이 외국 군대 청병 문제 제기: “다른 나라의 군대를 빌려 쓰는 것은 전례가 있는데 어찌 군사를 빌려 쓰지 않는가?
영의정 심순택, 우의정 정범조, 조병세도 청병 반대 ->고종은 과거 청조가 태평천국 진압 위해 영국의 힘을 빌린 것을 두고 “청도 영국 군사 빌려 쓴 적 있다”고 주장 ->정범조가 끝까지 반대하자 고종 물러서

19 **실록에는 없으나 김창수가 이홍장의 문서를 토대로 한 연구에 의하면…
->청군 출병 요청을 대신들이 반대하자 고종은 박제순을 원세개에게 따로 보내 청국 의사 타진 ->원세개가 거절하면서 청군 청병 방안 무산 이태진은 박제순과 원세개의 접촉을 ‘일종의 신경전’으로 취급

20 Q) 1894년 6월 외군 청병의 주체 논란 1. 자진청병론(박종근, 김창수) --招討使 홍계훈, 1894년 5월 14일 황토현에서 대패 ->증원군 요청, 외군 청병 방안 언급 ->선혜청 당상 민영준이 고종에게 외군 청병안 제기 ->대신들의 반대로 외군 청병안 부결 ->5월 31일 전주 함락->6월 2일 중신회의에서 민영준은 청군 차병 주장—대신들은 반대

21 ->민영준은 청병 반대론 누르고, 고종 명을 받아 원세개와 교섭, 청병 결정
->1894년 6월 3일, 조선은 좌의정 조병세 명의로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의 예에 준하여 청이 원군을 보내줄 것을 원세개에게 요청 =>청군 청병을 하면 일본군도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청일 양군이 조선에서 충돌할 것이란 걸 몰랐을까?

22 ->갑신정변 후 청일간에 맺은 텐진조약(1885, 조선에서 양군이 철군하되 조선에 출병할 때는 상호 통고하기로 약속)에 근거하여 청이 파병하자 일본도 동시에 파병
--일본은 철병 거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 침입, 장악 ->김홍집 내각 발족. 갑오개혁 강요하고 조청 통산무역장정 폐기 요구. 조-청 국교 단절 -> 조선 정부 요청 받은 것처럼 위장하여 일본군이 아산만 주둔 중인 청군 공격하며 청일전쟁 시작(1894.6~1895.4)

23 2. 청병 강요설(이태진의 주장) --주한 일본공사관의 정탐기록, ‘일본외교문서’ ‘일한외교사료’의 관련기록 근거 --조선 정부의 자진청병 아닌 원세개가 강요하여 이뤄진 청병(민영준-원세개 밀약) --청병 결정의 중심 인물은 원세개와 민영준이며 민영준은 원세개가 키운 권세가 =>고종이 처음부터 반농민입장에서, 두려움에 못이겨 자진 청병한 것 아니라고 주장

24 매천 황현이 묘사한 동학봉기 당시 상황 -- “대원군 시대에는 해마다 무기와 병장기를 점검하여 모두 날카로운 무기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물러난 지 10년이 안되어 선혜청의 대문과 담장이 무너지고 동학군이 일어났을 때 각 주현의 무기고를 열어 보니 다 녹슬고 무뎌져서 사용할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도와 궁궐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25 동학농민봉기에 대한 근본적 원인? --i) 참을 수 없는 수준의 지배층 학정에 대한 기층 민중의 저항과 몸부림
--ii) 동학란은 대원군이 원세개 등 외세와 밀약하여 농민들을 교사해서 발생(기쿠치 겐조;이태진)– 대원군은 당시 고종과 민비 등 집권 세력과 대립관계

26 Q) 이태진이 주목하는 인물,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1895년 10월 8일 새벽 민비시해사건 가담 --‘무능한 고종과 탐욕한 민비가 조선 망국의 책임자 라는 역사인식의 뿌리’ 를 놓음 ->기쿠치가 식민주의 역사왜곡의 진원지라는 게 이태진의 평가 ->기쿠치는 ‘동학란이 대원군과 원세개의 밀약에 의해 교사된 것’으로 봄:상당한 타당성 있다는 게 이태진의 주장

27 ->원세개와 대원군은 동학란을 청군의 조선 출병 계기로 삼아 정치적 목적 달성 노려
->원세개는 러시아 세력 제어를 위해 고종과 민비 정부 전복할 필요성 ->이런 맥락에서 기쿠치는 조선망국의 원인을 대원군과 민비의 극한 대결로 봄 (<=> 이태진은 이걸 식민주의 사관의 뿌리로 인식)

28 =>이태진의 주장은… ---동학봉기의 배경을 민비 세력 축출을 위한 대원군의 권력욕과 원세개란 외세 간의 야합 결과라는 기쿠치의 설명에 동의. ---하지만 고종과 민비가 무능하고 탐욕적이었다는 것은 식민사관적 시각이라는 것. 다른 한편, 동학농민봉기의 배후엔 민씨 세도정치, 조선 전통질서의 악순환에 대한 기층민중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는 게 실록의 한 단서.

29 =>1893년 3월 25일 좌의정 조병세의 진언 --“동학의 횡행은 전적으로 관리들이 탐오한 짓을 자행하여 침해와 학대를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 -- “수령들이 청렴하다는 소문은 전혀 없고 탐오하는 기풍만 무성하여…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고 조정의 걱정은 끝이 없다” =>우의정 정범조: “탐오하는 관리들을 삶아 죽여도 죄가 남음이 있는데 징벌하는 조치가 없다…법과 기강이 이 같으니 나라 구실을 어찌..”

30 갑오농민봉기와 대원군의 연계설? 동학농민군은 봉기 초기 세도정치 타파, 민씨 척족 축출, 대원군의 복권 요구
--척왜양이는 대원군의 쇄국과 궤를 같이 함 --동학세력은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국방책을 차선으로 간주-->대원군은 국가권력 사유화 혁파: 양반계층에 조세, 군역 부과 --고종 친정 1년 만에 대원군 비축금 탕진(매천야록)—>원자(순종) 탄생(1874) 이후 매관 매과 등 온갖 폐정 발생

31 --1885년 대원군 귀환 후 민씨 척족과 치열한 권력 암투전개; 대원군은 일본 망명 개화파 정객들과 교신하며 정치적 재기 모색.
--1892년 서울주재 미국공사 어거스틴 허드(Augustine Heard)의 조선 동향 보고서; “민비와 그 척족들은 모든 권세와 부귀를 누리며 미움을 사고 있다. …혁명을 바라는 사람들이 급속히 결집할 것이다. 대원군 이외 그런 역할 담당할 사람이 없다. 대원군에 대한 최근의 암살기도는 민비와 민비파 인물에 대한 대원군의 적대감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나았다…”

32 일본 총검 하의 ‘갑오개혁’ --1894년 음력 6월 21일 새벽, 일본군 2개 대대 경복궁 점령->조선궁궐수비대 무장해제 ->이와 동시에 청일전쟁 도발 ->일본은 대원군 입궐시켜 정권 강제교체: 김홍집 수반으로 한 친일파와 중립계로 새정부 구성(갑오개혁: 1894년 후반 군국기무처~1896년 2월 아관파천시기 까지 진행)

33 Q) 갑오개혁의 성격과 내용 --개혁추진 군국기무처는 초정부적 존재 --국왕, 왕비 무시. 대원군의 지위도 위협 --정치, 행정, 사법, 사회체제, 경제개혁 ->과거제 폐지, 반상과 문무 차별 철폐, 사법권 분리독립, 신분제도 타파, 귀천차별없는 인재등용, 고문과 연좌제 폐지, 과부재가허용, 재정일원화(탁지부), 도량형 통일

34 Q) 갑오개혁 시기의 조정의 권력관계 -->기본적으로 개혁관료 중심 의결과 집행권 강화, 전제군주권 약화 -->갑오개혁 추진 친일 내각 vs 고종·민비(친러) vs 대원군의 대립구도(친청) -->대원군은 고종 폐하고 손자 이준용 왕위 옹립 정변 기도;동학농민군 및 청군과 연합해 일본군 축출 기도 -->청말 양무자강운동이 대원군의 개혁구상

35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승리를 확신한 대원군이 청군에 보낸 밀서가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
->이 문서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가 대원군을 정치에서 퇴장시키는 수단으로 작용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내각 출범시키고 ‘홍범 14조’ 공포( ; p.701)—갑오개혁의 기본방향을 밝힌 서약(강요된 개혁선언)

36 —>법치를 통한 생명과 재산의 보호, 문벌타파, 인재등용->조선왕조체제 개혁, 근대국가제도 수립 기여(왕현종의 평가)

37 Q) 갑오개혁 주체세력의 한계 --위로부터의 개혁, 지주제 해체나 농민적 토지 소유 실현 수용 거부 --조선 왕실을 포함한 국가가 주체적으로 시작한 일 아님. 구조적 타율성 --개혁파는 일본군과 손잡고 동학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협력

38 ->1894년 11월 8일.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갑오개혁 정권 핵심 인사들과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와 공동 ‘토벌’작전 논의
->일본군에 의한 농민군 토벌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의해 본격화: 1천명의 일본군과 3천명의 조선군의 ‘조일 합동정토군’ 편성(요청 하루만에 즉각 편성 출범) ->Q) 외세의 힘을 빌려 민란을 진압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39 ->합동군 지휘자는 일본군 19연대 대대장 미나미 고니시료(南小西郞); 일본군은 동학군 학살의 주역, 동학의병 지도자 체포 처형은 친일개화파 관료들의 몫(유영익 1998)
->김개남은 재판없이 즉결처형, 서울거리 효수;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송두한 김덕명은 교형(絞刑) 선고후 처형.

40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Q)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한반도
S.C.M.Paine, 한반도는 “극동에서 가장 전략적인 위치”라는 지정학적 속성 지님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아시아 삼국이 만나는 곳으로 자국 안보에 사활적인 지점 ->일본은 아시아 대륙 진출로 ->러시아에겐 따뜻한 항구 보유(부동항)가 매력이며 러시아 위협할 수 있는 위치란 점도 지정학적 강점(vs 블라디보스톡항)

41 --중국에게 한반도는 특별한 의미: 황해를 통해 중국의 남방과 북방 연결
--중국, 일본, 러시아는 한반도 지배하는 외세가 누구인지에 따라 자신들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인식 --한국인들의 불행은 외세가 창조해 낸 태풍의 눈에 살고 있다는 점 -->페인, “외세가 움직일 때마다 한국인들은 황폐화와 슬픔을 겪어야 했다”

42 Q) 일본은 왜 청일전쟁을 벌였는가? --모리야마 시게노리(森山茂德)의 일본 학계 연구 소개;
->기존의 세가지 주요관점: i)일본군부 주도설(이중외교론)-일본의 대한정략을 놓고 군부와 문관 대립->군부 뜻 관철 ii)군부-정부 일치설: 군부와 문관 대립 표면적. 대중국 전쟁에 합심. “청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아시아 침략이며 한국 식민지화 추구 한 것”

43 iii) 상황설: 일본의 淸에 대한 주도면밀한 전쟁준비 인식 거부하고 상황에 이끌린 것—전쟁 전까지는 청과 공동으로 한국내정 개혁하자는 대청 협조노선이었다는 것

44 **모리야마의 비판과 주장: ->군부주도설은 태평양전쟁 당시 군부의 군국주의 주도설의 연장선<—>청일전쟁은 역사적 고유성 있다는 것/ ->군부-정부 일치설은 일본 제국주의론에 근거.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개념의 불명확성, 정부 단결론은 부적절한 가정 ->상황설은 부적합: 1893년 일본 육군의 군비확장계획 완성--전쟁준비 완료 상태

45 **모리야마가 보는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 원인 네 가지
--i) 임오군란 이후 청의 조선 종주권 강화정책에 맞서 일본 육군의 군비확대 노선 전개—淸이 일본의 가상적으로 부상(이전엔 러시아) –1893년 일본의 군비 확대 완성 --ii)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청일전쟁까지 10년간 일본 내 조선 보호국화 시각 확산

46 배경은? -->조선이 외세 지배 받을 수 밖에 없다면 일본이 조선지배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 대세: 조선이 청,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는 건 일본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논리 ->후쿠자와 유키치: 갑신정변 계기로 탈아론(脫亞論) 주창-일본 주도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 보호 주장 ->사족으로 불리던 무사계급의 전쟁열광

47 ->1891년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부설 착수도 일본 내 전쟁 열광, 한국 속방론 가열:첫 단계로 조선에서 청 축출->한반도에 일본의 군사적 근거지 구축->러시아 영향력 차단; 전쟁 4년 전에 군부의 의견 일치 --iii) 청일 전쟁 대비해 이토 내각은 대영 외교전 총력: 영국이 淸과 관계 단절하고 친일본적 혹은 중립적 태도 유도—시베리아 철도 부설 이후 영국은 영-일간 불평등조약 개정 승인: 편무적 영사재판권 폐기 포함한 평등조약으로 개정

48 Cf. 1892년 치시마칸(千島艦) 사건(344p)이 계기
->1894년 7월 16일 영일신조약 체결: 청을 상대로 전쟁 도발 시 유럽열강이 간섭할 두려움 제거 -> 이토 내각-무쓰 외상 외교는 ‘전쟁 수행에 유리한 국제환경 조성에 진력’ 성취 Q) 일본이 영, 미와 조약을 맺고, 조선의 친러정책이 왜 패착인가? 영국,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멀고, 러시아는 가깝지 않은가?

49 --iv) 조선을 놓고 일본 조야는 淸과의 결전 의지 일치—구체적인 전쟁 기회 제공은 일련의 상황전개
=> 세가지 상황이 전쟁 결정 촉진: 제국의회에서 야당(개진당, 국민협회)이 대외 강경 노선 촉구/영국의 일본 적대 가능성 소멸(러시아 견제목적)/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 발생 ->조선 출병의 계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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