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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권 확보와 근대민족국가 건설의 실패 →망국(亡國)→민족분단
문호개방에서 망국까지 서세동침→문호개방 →자주권 확보와 근대민족국가 건설의 실패 →망국(亡國)→민족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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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세동침 (西勢東侵) 서양의 근대화 :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원적 민주주의
구미열강(歐美列强)은 19세기부터 동아시아 침략 - 식민지, 반(半)식민지, 예속지역으로 만들었다. 년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구미 열강의 중국침략 시작 중국(청)은 반(半)식민지로 전락(손문 선생의 표현) 뒤이어 일본이 강제 개방, 인도지나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침략도 진행,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 서세동침(西勢東侵)의 전제가 되는 구미열강의 부국강병(富國强兵) = 유럽의 공업혁명(산업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결과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의 정신문화, 인민주권주의의 정치문화에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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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조선의 정치와 경제 당쟁의 연속 세도정권 시기
16세기부터 19세기 초 세도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200여 년간 조선왕조의 정치사는 당쟁의 연속 세도정권 시기 - 1800년 정조(正祖)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김조순(金祖淳)이 세도정권을 수립 - 세도정권(勢道政權)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를 중심으로 강력한 혈연 연합적 집단으로 60여 년간 존속 - 세도정권은 견제세력이 전혀 없는 조건 아래서 진보적 지식인층(실학파)을 철저히 탄압,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 -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집약되는 농민수탈은 그 절정기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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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조선의 정치와 경제 -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반란은 계속 폭발
- 농민들의 관아습격 반복, 홍경래의 난( ) 후에도 농민항거가 계속 - 1862년에는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발생(임술민란, 壬戌民亂). 그 결과 안동김씨 일파는 정권을 상실 지주와 관료들의 가혹한 착취와 억압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은 혹독한 가난과 무(無)권리에 시달렸고 농민의 빈궁화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국력은 극도로 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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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조선의 정치와 경제 세도정권시기 열강의 조선 접근
- 이미 세도정권 시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조선에 적극적으로 접근 - 세도정권은 쇄국주의 원칙을 고수 ① 영국은 1787년에 제주도와 울릉도 주변을, 1797년에 영흥만과 동래 용당포를, 1816년에 서남 해안 일대를 탐사/측량, 1832년 상선 앰허스트(Lord Amherst)를 서해안 일대에 보내 통상 요구 ② 프랑스는 1846년에 군함 3척 파견, 이후에도 수차 군함을 파견 하여 신부(神父) 처형에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 ③ 미국 포경선이 1852년에 처음으로 동래 앞바다에 표도(漂到) ④ 러시아 군함 2척이 1853년에 동해안 일대를 측량, 1860년 북경 조약(흑룡강 이북과 연해주 차지)의 결과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 과 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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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세의 무력침략과 쇄국정책 대원군정권 시기(1863-1873)
- 1863년 철종이 죽고 고종 즉위 → 대원군 정권 장악 (참조 강만길, 한국근대사 1994, 40쪽 이하) - 당시 지배세력이 당면한 위협은 생존권을 요구하는 ①농민의 저항과 신교(信敎)의 자유와 통상요구를 앞세운 ②외세의 위협 - 대원군정권은 외적(外的) 도전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항(천주교 탄압과 외국 함대 격퇴)하여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견지, 내적(內的) 도전에 대해서는 세도정치세력과 양반관료세력을 억압하고 민중(농민층 등)과는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왕권강화를 추구 - 그러나 후에 경복궁 재건 강행으로 농민들의 원성 고조 → 민란이 계속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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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세의 무력침략과 쇄국정책 대원군 통치기간 구미열강의 조선침략 적극화
- 1866년 독일계 상인 오페르트(Ernst Oppert), 대원군 부친 묘 도굴 시도, 실패. - 1866년 7월 미국의 무장해적선 셔먼(General Sherman)호가 중국 천진(天津)을 떠나 대동강에 침입, 조선 군민들 배를 불태우다. 선원전원 사망. -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프랑스군함 7척 침입, 강화도 약 1개월간 점령, 대량의 서적, 금괴, 은괴 등 약탈 후 퇴각. 전형적 포함외교. -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미국군함 6척 강화도 침범, 개항요구. 전형적 포함외교. 조선군 미국군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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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세의 무력침략과 쇄국정책 - 대원군은 미국군 격퇴 후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 중국과 일본을 차례로 개방시킨 구미열강은 조선에도 개방 강요 - 안으로는 민중의 저항과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을 동시에 받은 대원군 정권은 정치체제와 사회․경제체제를 개혁, 이를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문호를 개방, 세계사의 흐름에 동행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쇄국주의만 고집 - 한편 해외통상론과 문호개방론을 주장한 재야 진보적 사상가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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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세의 무력침략과 쇄국정책 ※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대원군정권이 일찍 개방을 했더라면 조선은 부강한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고 망국의 화(禍)를 면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조선은 이미 기회를 놓친 것일까? 중국과 조선은 화를 입었는데 왜 일본은 화를 면할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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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민씨정권 시기 (1873-1884) - 1873년 대원군 퇴진, 민씨정권 수립
- 1875년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일본 운양호가 강화도에서 무장도발 - 1876년 민씨정권, 청나라의 권유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며 불평등 조약. 조선은 이를 계기로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강제로 편입 일본에 대해 부산, 인천, 원산 3개 항구 개방, 치외법권 인정, 무관세 무역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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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 문호개방 후 개화정책채택: 관제개혁(1880년), 군제개편 별기군(別技軍) 설치, 조사(朝士)시찰단 62명 일본에 파견(1881년), 영선사 38명 청나라에 파견(1881년) - 개화반대세력 반발 : 보수 유생층(儒生層) ⇒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 구식군인들과 서울의 도시빈민층 ⇒ 임오군란(1882년) - 1882년 청, 조미조약 체결 주선. 그 후 조선은 유럽 각국과 통상조약 체결하여 본격적으로 문호 개방 - 1882년 임오군변(임오군란) : 구식군인들과 서울 도시빈민층 봉기, 문호개방과 개화정책에 반대. 대원군 재집권. 청국군(3000명) 파견 대원군 납치(1885년 귀국, 1898년 사망). 청국군 조선에 상주, 내정간섭(종래의 의례적 종속관계를 실질적 식민지배관계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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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1884년 갑신정변 : 우리나라의 첫 부르주아 개혁운동
1884년 10월 김옥균, 박영호, 홍영식 등의 개화당이 민씨 일파 (청국추종세력)를 물리치고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혁신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 - 이 정변으로 인해 부르주아 개혁운동의 새로운 발전단계가 시작 - 청국군(원세개의 1500명)의 무력개입으로 ‘3일정권’으로 끝났다. * 한성조약 체결( ): 조선, 일본에 사의 표명, 배상금 지급. * 영국 거문도 점령( ) * 천진조약 체결( ) : 청․일 양국군 철수,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 일본 청나라와 동등한 파병권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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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 갑신정변의 결과 조선을 둘러싸고 외세의 각축전 고조. 이에 한반도 중립화 주장 제기(1885년 부틀러 H. Budler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1885년 유길준, 1886년 김옥균) (강만길 1994, 쪽) - 구미열강과 일본의 개방요구에 강력히 반대한 대원군정권이 퇴진하고 민씨정권이 들어서자(1873년) - 조선의 문호는 개방되고 일본․구미 각국과 통상이 열렸다. - 그렇다고 해서 민씨정권이 보다 더 진보적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조선이 개방할 만한 내부적 준비가 갖추어 진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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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 민씨정권은 개방 후 점진적이나마 개혁(개화정책)을 단행
→ 개화반대론(척사위정론 斥邪衛正論)과 개화반대운동 활성화 - 척사위정론자들(보수 유생들)은 서양의 공업생산품과 조선의 농업생산품을 교역하면 국내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며, 한번 문호를 개방하면 일본과 구미열강의 침략이 계속되어 이를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논리 주장 - 그러나 이들 보수 유생들은 조선왕조의 정치체제(전제군주제 專制君主制), 경제체제(지주․전호제 地主․佃戶制), 양반지배의 신분체제, 성리학적 사상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더 많은 목적을 두었을 뿐 조선의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 했다. (반(反)시대적 수구적 성격) - 민씨정권의 개화정책 또한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외세 의존적이고 몰(沒)주체적인 성격이 강했다. (친청수구정책 親淸守舊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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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개화정권 시기 (1894-1904)
- 1894년 갑오농민전쟁 : 고부민란( )이 도화선 농민이 기본세력으로 되어 천대받던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참가한 반봉건, 반외세 전쟁 -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청국군과 일본군이 서로 이 나라를 지배하려고 다투어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 - 갑오농민전쟁은 외세의 개입으로 실패했으나 그 결과 개화정권이 출현하였고 갑오개혁을 하게 되었다. - 즉 일본은 경복궁을 포위하여 친청적인 민씨정권을 퇴진, 친일적인 개화정권(김홍집내각)을 세웠다(1894년 7월) - 개화정권은 1894년 7월 27일 이후 약 2개월 동안 중요한 개혁을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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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1895년 10월 민비 학살 만행(을미사변, 乙未事變)으로 일제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전국에 확산 운동의 특징 : 의병장이 모두 위정척사파 유학자들 - 1895년 청일전쟁, 일본 승리, 여순반도 차지, 삼국간섭, 여순반도 반환, 조선 내에서 러시아의 위상 제고 -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친일 김홍집내각 퇴진. 친러친미정권 등장, 개혁 중단, 열강들의 이권쟁탈전 본격화 - 1897년 10월 12일 조선왕조 국호변경 : 대한제국(大韓帝國) 군주의 위상 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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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망국의 길(식민화로의 길) (1904-1910)
- 1904년 2월 8일 일본, 여순항 기습 공격, 러․일전쟁 도발: 러시아군 27만 명 사상(5만 사망), 일본군 27만명 사상(8만 6천 사망) - 1905년 7월 29일 미일, 태프트․카츠라 비밀협약 체결: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찬성하는 내용 (갈라 먹기). -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 체결. 영국은 이 조약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 특수 이익을 가지며 일본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시키기 위하여 조선에 대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 - 1905년 8월 9-29일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회담 개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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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조인, 미국, 일본을 지원
러시아는 조선을 일본에 넘겼다(제2조 “일본은 조선에 지배적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 이 조약으로 일본은 여순․대련의 조차권과 장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 남(南)사할린섬을 얻었고,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러시아령 연안 어업권도 가져갔다. - 일본의 러일전쟁비용 총 19억 8 400만 엔 중 12억 엔을 미국과 영국이 제공. -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 - 외교권을 비롯한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고 통감정치가 시작, 군대해산까지 당하게 되자 의병투쟁이 대중화되고 고조 - 이때 의병투쟁에 위정척사파 유생들과 농민들, 그리고 군인들이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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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및 자주권 상실 - 1906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 1907년 7월 제1차 러일협약: 남만주는 일본이, 북만주와 외몽골은 러시아가 차지하기로 합의. - 1908년 11월 미일, 루트․다카히라 협약 조인: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상대방의 독점적 이익 재차인정. - 1910년 7월 제2차 러일협약: 일본 러시아와의 제휴 강화, 미국의 대일 강경책을 무력화 -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체결, 8월 29일 공포, 망국(亡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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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는 말 - 조선은 19세기 후반에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여 거세게 저항
결국 쇄국주의 청산, 내부 개혁 없이 일본과 구미열강에 문호개방 - 그러나 조선의 개방은 근대 국가건설(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공업혁명)의 계기가 되지 못하였고 자주권의 수호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에는 주체적 방법으로 조국근대화(Modernizing)를 수행할 만한 정치적 경제적 세력이 성장하지 못 했다. - 당시 지배층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 대신, 외세에 의탁하여 기득권 유지에 주력 - 친청정책, 친러정책, 친일정책, 친미정책 등으로 전전 - 결국 척사위정론자들의 예상대로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 앞에 견디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 (강만길, 한국근대사 199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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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는 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외세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접촉하는 곳
- 중세까지는 대체로 대륙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그 정치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일본과 그 배후 지원세력인 미국, 영국 등의 해양세력이 청국, 러시아 등의 대륙세력을 차례로 누르고 결국에는 해양세력인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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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는 말 (2) 강대국에 둘러싸인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이론적으로 3가지 가능성을 제시
①한반도는 민족적 단결과 지혜를 발휘하여 강대국 간의 완충지대 내지는 중립지대가 되어 부강한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고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다. ② 강대국들 사이에 일종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분단되어 분단개체들이 각기 강대국들의 세력권에 편입될 수 있다. 이 경우 자주성은 약화 내지 상실될 수밖에 없다. ③ 한반도 전체가 어느 한 강대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식민지, 반(半)식민지 또는 보호국(예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3)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두 번째 가능성을 놓고 흥정이 있었으나 결국 조선왕조는 세 번째 길을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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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는 말 두 가지 민족적 과제 (1) 서세동침 이후 망국까지 약 40년 동안 민족적 과제는 무엇이었는가?
근대민족국가 건설과 자주권 수호 우리민족은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민족 자주권의 상실은 우리민족이 생명을 잃은 것과 같은 것이다. (2)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피지배대중은 민족의 자주권 확보와 근대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워 왔다. 이 두 가지 과제를 이루기 위해 일어난 민족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운동,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강만길 1994, 21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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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는 말 (3) 그러나 이 두 과제는 아직도 미완의 상태
지구상에서 이처럼 외세에 의해 민족의 생명유기체가 두 동강나고 그토록 처절하고 그토록 긴 세월 동안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4) 한반도 분단은 국토와 함께 민족이 갈라진 것이며 계급이 갈라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분단극복은 민족논리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화된 민족의식을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민족자주의식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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