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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사 경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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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세 전 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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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특징 1. 13세기 후반의 특징적 변화 2. 군사체제의 변화 ○ 교회의 권위 쇠퇴 : 십자군 원정 이후
○ 봉건영주의 세력 약화 - 세속군주의 입장 강화(왕권의 부활) - 중앙집권적 연방국가 출현 ○ 상공업의 발달 및 화폐경제의 발달 - 중세의 장원경제의 붕괴 2. 군사체제의 변화 ○ 봉건귀족의 신분유지 방편으로 활용 : 군 독점체제 => 특유의 약점 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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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 1. 배 경 ○ 영국과 프랑스의 결혼정책으로 프랑스에 영국령 봉토 점차 증가 ○ 프랑스 필립 4세가 후계없이 사망
크레시 전투 1. 배 경 ○ 영국과 프랑스의 결혼정책으로 프랑스에 영국령 봉토 점차 증가 ○ 프랑스 필립 4세가 후계없이 사망 - 영국으로 출가한 공주의 아들 에드워드 2세가 왕위계승 가능 => 프랑스에서 반대 - 프랑스의 세금징수 증가에 대한 상인들이 반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옹립 분위기 조성 ○ 에드워드 2세의 왕위계승권 주장 ○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간 전쟁으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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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 력 3. 주요전력 ○ 프랑스군 : 4만(봉건영주군 + 보헤미아군 + 제노아 석궁용병 등) ○ 영국군 : 1만 2천
2. 병 력 ○ 프랑스군 : 4만(봉건영주군 + 보헤미아군 + 제노아 석궁용병 등) ○ 영국군 : 1만 2천 ※ 프랑스군이 영국군 보다 약 3:1로 우세 3. 주요전력 ○ 프랑스 : 석궁용병 ※ 보통 활과 사거리는 유사, 분당 1발의 연사율 ○ 영국 : 장궁(웨일즈 롱보우) ※ 보통활 보다 정확성과 파괴력이 강함 ※ 석궁 보다 발사속도와 사거리면에서 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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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투경과 ○ 1346년 7월 영국군 노르망디 해변 상륙 ○ 프랑스 파리로 진군했으나 강력한 방어로 공격 무산
○ 해안부근 크레시에 진지를 구축, 방어전 준비 ○ 프랑스군 공격후 장궁에 의해 후퇴, 자중지란 초래 ○ 영국군 역공격으로 프랑군 대파 노르망디 해안 제 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국이 서부 전선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노르망디 반도에 상륙한 작전.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영국·미국의 41개 사단 약 100만의 병력이 5000척의 선박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그 결과 연합군은 서부 전선에서 전면적인 진격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어 프랑스를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독일군의 붕괴와 전쟁의 종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전으로 평가된다. 영국함단 크레시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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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투결과 : 영국군 승리 6. 크레시전투의 역사적 의의 7. 교 훈 ○ 프랑스 왕 및 귀족 포로 ○ 20년간 휴전협정
○ 숫적으로 열세한 영국군이 궁수와 보병의 조화로 승리 ※ 중세 1000년간 전장을 지배한 기사 종말 ○ 큰 위력은 없었지만 대포와 화약이 전장에 최초 등장 7. 교 훈 ○ 신무기 개발의 중요성(장궁 : 비대칭 전력) ○ 전장 지휘통제의 중요성 ○ 적용된 전쟁의 원칙 : 창의, 정보, 기동, 공세, 통제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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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텐 전투 1. 배 경 ○ 1740년 프리드리히가 프러시아의 왕위 계승 ○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령 제군주와 귀족들이
로이텐 전투 1. 배 경 ○ 1740년 프리드리히가 프러시아의 왕위 계승 ○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령 제군주와 귀족들이 황제의 지배에서 벋어나고자 노력(상호 연합도모) ○ 프러시아의 지정학적 위치 불리함 극복방안 강구 - 각개 격파를 통한 연승 분위기 유지(강한모습 천명필요) ○ 프랑스전 승리 후 오스트리아군과 로이텐에서 격전 - 실레지아 지역 영유를 위한 명목으로 오스트리아 침공 (오랜기간의 지속된 반환요구를 오스트리아에서 거부) 로이텐 전투는 1757년 12월 5일 벌어진 전투로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교묘한 기동과 지형을 이용하여 수적으로 우위에 있던 카를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7년 전쟁 중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중부 독일에서 프랑스-신성로마 연합군을 격파하기 위한 로스바흐 전투를 벌이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조금씩 슐레지엔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1월 28일 슐레지엔의 수도인 브레슬라우가 오스트리아군에게 함락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재빨리 움직여 로이텐(Leuthen, Lutynia)에 도착하였고, 상대해야할 오스트리아군 숫자가 자신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두 배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대를 지휘하는 모든 이가 그렇듯이 끔찍한 패배를 겪기보다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고 싶었다. 오스트리아군 수뇌부에서는 이전에 브레슬라우에서 나가 프리드리히와 맞설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로트링겐의 카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오스트리아군은 출진하였다. 전투 날 안개가 껴 있었다. 그러나 이 주변 지역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병사들을 훈련시킨 적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센군과 프리드리히 대왕은 주변의 지형지물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었다. 양동작전[편집] 1.프로이센의 양동작전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주위를 끌다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 군의 중앙에 있는 로이텐을 향하여 바로 진군을 개시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전위는 놀랍게도 4마일에 걸쳐 있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전열을 길게 늘어뜨려 놓은 것은 프리드리히가 즐겨 쓰는 측면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이는 결국 엄청난 실수였음이 드러났다. 프리드리히는 양동작전으로서 휘하의 기병대에게 보르나(Borna) 마을에 돌격을 가하게 했고 오스트리아군의 우익과 맞서게 하였다. 이러한 기병대의 움직임은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의 오른쪽 측면공격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프로이센군은 기병대의 양동작전으로 자신들의 진짜 목표를 숨길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정예 보병대와 함께 오스트리아군의 좌측 종대를 향해 진군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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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 력 3. 전 술 ○ 프러시아(프리드리히) : 3만명 ○ 오스트리아 : 8만명
2. 병 력 ○ 프러시아(프리드리히) : 3만명 ○ 오스트리아 : 8만명 3. 전 술 ○ 프러시아군(프리드리히) : 과감한 공세작전 ※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제권 장악 ※ 적을 관찰하여 적의 약점을 파악 기만, 역이용 ※ 기병 창설 : 기동력 향상 추구 ○ 오스트리아(챨스) : 방어진 형성, 적 공격 격퇴 ※ 로이텐 부근에서 약 8Km 지역 점령, 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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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투경과 ○ 오스트리아군 우익 견제(주공기만), 우익보강(예비전환) ○ 오스트리아군 좌익공격을 위한 주력 은밀히 기동
○ 프러시아의 의도 확인 후 즉시 병력 전환배치 ○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 전열 정비전 주력 공격개시 오스트리아군 (챨스왕자) 프러시아군 (프리드리히) 로이텐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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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투결과 : 프러시아군 승리 6. 교 훈 ○ 오스트리아군 : 1,750명 전사, 5,000명 부상, 13,350명 포로
○ 프러시아군 : 1,150명 전사, 5,100명 부상 ※ 프리드리히 : 불멸의 명장이라는 칭호 얻음 6. 교 훈 ○ 공세적 전술 운용의 중요성 : 전투의 최종 승리 ○ 기만의 중요성 : 소규모로 대규모 격멸 가능 ○ 전장 지휘통제의 중요성 ○ 적용된 전쟁의 원칙 : 공세, 기동, 기만, 병력절약, 정보 전투력 집중, 통제의 원칙, 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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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의 초기전투 1. 전쟁의 변화 ○ 프랑스 혁명 = 사회적, 사상적 혁명 ○ 전쟁양상의 변화
○ 프랑스 혁명 = 사회적, 사상적 혁명 ※ 봉건주의 타파, 자유와 평등사회 구현 ※ 현대사회의 지도원리인 자유민주주의 확보 ○ 전쟁양상의 변화 - 혁명이전 : 군주전(군주에 의한 직업군인수행) - 혁명이후 : 국민전(국민이 국가의 주인) ※ 용병철폐, 국민군대 조직 = 국민개병제도 확립 => 현대적 총력전 기초 1789년에 그 첫번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흔히 쓰이는 '1789년 혁명'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을 일컬으며 후에 일어난 1830, 1848년의 혁명과 구별해 쓰이기도 한다. 이 혁명의 동기에 대해 역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이 인구를 충분히 먹여살릴 수 없었다. ②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부유한 부르주아지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제도적으로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③ 농민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시대착오적이고 짐스러운 봉건제도를 지지하는 경향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④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주창하는 철학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프랑스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한 결과 국가의 재정은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다. 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하에서 자본가계급이 부상하고(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민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도시민과 농민의 개입(대공포)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 민족의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 민족을 거느린 주변 여러 강대국을 불안하게 하였다.[1]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일으킨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간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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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폴제옹의 전략개념 ○ 섬멸전 사상 ○ 병력운용 - 적의 군사력을 격멸(전쟁의 목적 달성)
- 우수한 기동력을 갖춘 소수병력으로 적 주력 견제 및 병참선 위협 - 결정적 접적지역에 주력의 상대적 우세 달성 => 적 주력 격파 - 적 패주시 과감한 추격 => 적 병력 섬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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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제옹의 섬멸전 성공을 위한 5대 작전원칙 1. 단일 작전선 원칙 2. 적의 주력을 공격의 목표로 삼는다.
- 결정적 지점에 전투력 집중(2개 이상시 각개격파) 2. 적의 주력을 공격의 목표로 삼는다. 3. 작전선 선정시 적의 측면 또는 후면 공격 4. 강한 적과 접촉시 우회 5. 안전한 병참선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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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폴제옹의 주요전투 I(이탈리아지역 전투)
○ 배 경 - 1796년초,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스위스 산지에 접한 이탈리아 지방에서 대치 - 나폴레옹은 주력 카르노 장군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피드몬드군과 오스트리아 군을 견제하는 임무 수행 - 카르노 장군이 작전에 실패하자 나폴레옹이 적을 격파 ○ 전 력 - 프랑스군(나폴레옹) : 3만 7천명 - 피드몬드군(콜리) : 2만 5천명 - 오스트리아군(보리우) : 3만 5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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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술 - 피드몬드와 오스트리아 연합군 : 자국 영토의 침입저지, 공격시 목표 사전분할 선정
○ 전 술 - 피드몬드와 오스트리아 연합군 : 자국 영토의 침입저지, 공격시 목표 사전분할 선정 ※ 연합체 구성되었으나 지휘권 구분 - 나폴레옹 : 피드몬드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주공(카르노군)방향 으로 전투력 전환을 못하도록 견제 (방어, 파쇄공격, 유인 등) 오스트리아군 (보리우장군) 피드몬드군 (콜리장군) 프랑스군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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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경과 - 프랑스의 주공 카르노 장군의 공격이 실패하고 큰 피해를 입자 나폴레옹이 적을 격멸하고자 공격시도
※ 연합체 구성되었으나 지휘권 구분 - 1단계 작전 : 견고히 결속되지 못한 연합군의 약점 활용, 양분작전 ※ 중앙 돌파로 피드몬드군과 오스트리아군을 분리(이해관계상반) 오스트리아군 (보리우장군) 피드몬드군 (콜리장군) 프랑스군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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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경과 - 2단계 작전 : 오스트리아 군을 소수병력으로 견제하고, 피드몬드군을 집중 공격하여 격멸 피드몬드군 (콜리장군)
오스트리아군 (보리우장군) 프랑스군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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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경과 - 3단계 작전 : 피드몬드군을 격멸하고, 소규모 부대가 오스트리아군
: 피드몬드군을 격멸하고, 소규모 부대가 오스트리아군 을 견제하는 틈을 이용 우회기동하여 측후방공격 피드몬드군 (콜리장군) 오스트리아군 (보리우장군) 프랑스군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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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과 : 나폴레옹군 대승 ○ 교 훈 -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지지세력 안정적 확보
○ 결 과 : 나폴레옹군 대승 -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지지세력 안정적 확보 ※ 위대한 장군으로서의 능력과 비범한 정치수완 인정 ○ 교 훈 - 열세한 병력을 보충하고 전투력을 증강하는데 있어 기동력의 중요성 입증 - 열세한 병력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선제공격 실시 - 오스트리아군의 답보적인 전술이 패배원인 - 연합작전의 취약성 - 적용된 전쟁의 원칙 : 공세, 집중, 정보, 기동, 창의 기습, 절약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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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폴제옹의 주요전투 II(마렝고지역 전투)
○ 배 경 - 나폴레옹이 1통령이 되어 통치를 하기 시작한 초기의 혼란을 이용,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동맹을 체결 - 나폴레옹은 국민이 평화를 원하므로 화의를 신청했으나 주변 동맹국이 받아 들이지 않음(전쟁준비 시작) - 오스트리아의 선제 공격으로 패퇴하는 프랑스군(마세나) 추격함에 따라 나폴레옹이 직접 전투에 참여 ○ 전 력 - 프랑스군(나폴레옹) : 5만 2천명 - 오스트리아군(멜라스) : 10만명 마렝고 전투(Battle of Marengo, 프랑스어: Bataille de Marengo, 1800년 6월 14일)는 이탈리아 피에몽테주(州) 알렉산드리아 도시 근교 남동쪽 5km 떨어진 마렝고 평원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군이 미하일 폰 멜라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격전끝에 이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브뤼메르 쿠데타(Brumaire coup)로 인해 신설된 제 1집정관(First Consul)이 된 나폴레옹은 휘하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진군하던 와중에 멜라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에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허를 찔렸고 물러날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전투 와중에 나폴레옹이 보낸 전언으로 인해 루이 드제(Louis Desaix)가 지휘하는 선발 예비대가 돌아와 전투에 참여했다. 드제는 포격을 가한 끝에 반격을 시도했고, 물러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였다. 이때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맡은 기병대의 지휘는 프랑수아 에티엔 드 켈레르만(François Etienne de Kellermann)[1]이 맡아 오스트리아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약 9,5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태로 알렉산드리아로 물러났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역전을 성공시킨 주역 드제는 난전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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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술 - 오스트리아군 : 마세나군 추격 격멸, 병참선 보호 및 급속방어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파악 후 측후방 공격
○ 전 술 - 오스트리아군 : 마세나군 추격 격멸, 병참선 보호 및 급속방어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파악 후 측후방 공격 - 나폴레옹 : 멜라스군의 병참선 차단 및 후방 공격 ※빅토르 장군의 허위보고 프랑스군 (나폴레옹) 프랑스군 (마세나장군) 오스트리아군 (멜라스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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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경과 - 1차 전투 : 오스트리아군 후방 공격을 위한 은밀 기동, 병참선차단
후방공격간 이를 간파한 멜라스의 역공격 실시로 나폴레옹군 위기에 몰려 철수 프랑스군 (나폴레옹) 프랑스군 (마세나장군) 오스트리아군 (멜라스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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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경과 - 2차 전투 : 오스트리아군이 승리를 확신하고, 프랑스군을 추격
하지 않고 종대대형으로 천천히 병참선을 따라 복귀 하자, 나폴레옹군이 재정비하여 측방을 공격함 프랑스군 (나폴레옹) 오스트리아군 (멜라스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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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과 : 나폴레옹군 대승 ○ 교 훈 - 나폴레옹의 지지를 확실하게 구축하는 계기
○ 결 과 : 나폴레옹군 대승 - 나폴레옹의 지지를 확실하게 구축하는 계기 ※ 나폴레옹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최선을 다한 전투 ○ 교 훈 - 승리를 위한 정열과 확신으로 승리 획득 ※ 악조건 극복 : 알프스의 험준한 산악지역 통과 ※ 최초 전투의 패배에 굴하지 않고 역전의 기회 확보 - 임기응변의 승전묘안(적 접촉 유지) - 전투종결 미흡(오스트리아군) - 적용된 전쟁의 원칙 : 공세, 집중, 정보, 기동, 창의 기습, 통제, 통일, 절약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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