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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조지아(그루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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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그루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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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리 면적 69,700㎢(한반도의 2/3), 인구 540만 명(그루지야인 83.8%,
아제르인 6.5%, 아르메니아인 5.7%, 러시아인 1.5%, 그 외 2.5%), 높은 인구밀도 가장 큰 도시는 수도 트빌리시(120만 명) 수라미 산맥이 대 카프카스(북부)와 소 카프카스(남부)를 가로지름 산과 계곡에 많은 하천, 그 중 쿠라(현지어 므트크바리) 강과 리오니(파시스) 강 을 수력발전에 이용 - 쿠라강은 그루지야의 중남부와 터키로부터 발원, 아제르바이잔을 관통하여 카스피 해로 흐름 - 리오니 강은 카프카스 산맥으로부터 발원, 쿠타시 시를 관통하여 흑해로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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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리 흑해연안과 리오니 강 계곡은 영상의 겨울과 따뜻하고 습한 여름으로 인해 식물생육기간이 길지만 동부지역은 대륙성기후
농업 발달 : 포도, 목재, 감귤, 차, 곡물류, 축산이 성행 금속, 광물, 석탄, 석유도 남 조지아의 가장 큰 산업은 관광(많은 수의 유적과 흑해) - 3차 산업이 국민경제의 60%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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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BC 4천년 경 인간 거주, BC 11세기 아시리아인들이 그루지야를 언급
그루지야 왕국으로 통일 왕국은 인접 아르메니아의 경우처럼 페르시아, 투르크, 몽골, 그리스, 로마인들과 전쟁 결국 서방의 로마보다 동방의 페르시아로부터 문화와 정치적 요소를 얻었지만 로마로부터의 기독교 도입으로 서방과의 문화적, 정치적 유대도 잇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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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세기-12세기 비잔틴 제국, 아랍, 셀주크 투르크의 속령.
왕위세습을 허용한 무슬림 군주에 의해 독립국 수준이었던 중세 그루지야의 황금기(12세기-13세기 초)는 타마르 여왕(1184년-1212년) 시기 이때 그루지야는 셀주크 투르크인들과 싸워 국경을 따라 작은 공국들을 건국 - 13세기 중반 몽골침입 전까지 조공과 무역으로 흥성하였지만 이 공국들과의 불화로 왕국은 쇠약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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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이후 15-16세기 그루지야의 봉건제도 세 개의 독립 왕국으로 분열
- 서쪽의 오토만 제국과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서 국가 안위를 위해 북쪽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 러시아가 1554년 볼가 강 하구의 아스트라한을 점령하면서, 기독교 신봉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유입되어 기독교인들인 그루지야인과 아르메니아 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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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762년 왕위에 오른 러시아 에카테리나 여제가 대 오스만 투르크 전쟁에서
1762년 왕위에 오른 러시아 에카테리나 여제가 대 오스만 투르크 전쟁에서 그루지야인들을 이용하고 그루지야를 보호령을 만들기 위해 그루지야의 왕 에레클레에게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것이 인접 약탈자로부터 자신의 왕국을 보호 해 줄 수 있다고 설득 - 1783년 게오르기에프스크 조약(러시아가 그루지야를 보호령으로 만듦) 에 서명 그러나 러시아의 보호 약속은 불발 - 즉 4년 후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군대를 그루지야로부터 철수하여 발칸반도로 이동 → 그루지야를 페르시아로부터의 약탈에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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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이런 조약파기에도 불구 그루지야인들은 러시아의 도움 외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음
- 예카테리나의 손자인 파벨 1세( 년)가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또 다시 그루지야를 보호령 으로 만듦 1801년 즉위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루지야 왕국을 멸망시키고 러시아제국 에 직접 병합 상대적으로 러시아제국에 늦게 흡수되어 민족주의 감정이 아주 강해 러시아혁명 직후 1918년에 독립선언 그렇지만 3년 후 붉은 군대가 지역의 볼셰비키 쿠데타를 지원하며 침입하여 그루지야는 소련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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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24년 레닌 사후 그루지야 출신인 요시프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 - 스탈린은 레닌 하의 민족 인민위원으로서 정치적 중앙 집중화를 위임 받아 국유화 계획을 주장 - 공화국의 지배적인 주도 민족의 구성원들이 최고위층을 차지하도록 했고 이들의 절대적 충성 요구 그러나 1930년대 대숙청 시기 그루지야는 여타 소련지역처럼 처형, 체포, 추방으 로 고통 1991년 4월 독립 선언, 반체제 지도자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초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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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감사후르디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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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 소련의 해체로 자치권을 얻은 압하지아와 남 오세티아가 독립 또는 러시아연방 과의 합병 주장, 분규로 인해 고통
러시아연방 과의 합병 주장, 분규로 인해 고통 독립 이후 반체제 지도자이자 유명한 문학가 아들인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국민투표에서 87%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 곧 반대 세력은 그가 독재경향을 가지고 있고 독재 권력을 만들려 한다고 저항, 내전 발생 - 이 피의 내전 동안 감사후르디아 대통령 정부가 1992년 1월 전복되고 북 카프카스로 유형갔지만 권력 이양은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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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 감사후르디아의 전복과 유형 뒤에 소련 마지막 외무장관이자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자 에드와르드 셰바르드나제에게 내전과 국가전복으로부터 국가를 구해 주도록 그루지야로 올 것을 요청 1993년 12월 31일 감사후르디아가 현 정부의 정책에 항거하여 자살했다는 보도 - 미망인은 그의 경호원이 셰바르드나제의 명령에 의해 남편을 살해했다고 주장 - 다른 계파들은 파벌 싸움으로 살해되었다고 주장 감사후르디아의 사망 혼란 중 일부 소수 민족들이 트빌리시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한 투쟁 전개 - 남 오세티아인들과 압하스인들이 반기 - 그루지야인들은 러시아가 군사 간섭을 하고 그루지야의 독립을 막기 위해 이들 반란을 부추겼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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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 <셰바르드나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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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 오세티아 사태 정치 1990년 12월 유혈전투 발발 - 1992년 6월 러시아가 휴전협정 조인
휴전협정으로 러시아, 그루지야, 남 오세티아 공동 순찰대가 활동, 불안한 평화 지속 그러나 남 오세티아의 분명한 지위 결여로 2008년 8월 남오세티야 전쟁, 또는 러시아-조지아 전쟁 발발, 그루지야 군과 친 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아분리주의자들 사이의 전쟁. 2008년 8월 7일 조지아군이 분리 지역인 남오세티야 수도인 쓰힌발에 진군하여 군사 작전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 러시아가 이러한 공격에 반응하여 8월 8일 국경을 넘어 남쪽 남오세티야에 전차 및 야전포 등의 지상 부대를 진군하여 전투가 본격화.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군의 진군은 남오세티야에서의 러시아 국적의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 조지아 대통령은 조지아는 러시아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러시아군이 조지아의 민간인을 폭격하고 있다고 주장. 8월 12일, 유럽 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중재가 있었고, 조지아의 미헤일 사카시빌리 대통령은 자국의 독립 국가 연합 탈퇴를 선언하였다. 러시아는 8월 16일 평화협정안에 서명하였다.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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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그루지야 전쟁 2008년 8월 남오세티야 전쟁, 또는 러시아-조지아 전쟁 발발, 그루지야 군과 친 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아분리주의자들 사이의 전쟁. 2008년 8월 7일 조지아군이 분리 지역인 남오세티야 수도인 쓰힌발에 진군하여 군사 작전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 러시아가 이러한 공격에 반응하여 8월 8일 국경을 넘어 남쪽 남오세티야에 전차 및 야전포 등의 지상 부대를 진군하여 전투가 본격화.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군의 진군은 남오세티야에서의 러시아 국적의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 조지아 대통령은 조지아는 러시아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러시아군이 조지아의 민간인을 폭격하고 있다고 주장. 8월 12일, 유럽 연합 의장국인 프랑스의 중재가 있었고, 조지아의 미헤일 사카시빌리 대통령은 자국의 독립 국가 연합 탈퇴를 선언. 러시아는 8월 16일 평화협정안에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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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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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압하지아 사태 정치 러시아의 지원으로 압하스들이 그루지야에 저항하고 러시아가
그루지야 정부와 압하지아 분리주의자들 간의 휴전을 중재했지만 곧 압하지아 군이 이 휴전을 깨뜨리고 1993년 가을 그루지야인의 마지 막 근거지인 주도 수쿠미를 점령 압하스인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독립, 러시아로의 편입 주장 - 평화유지군이 주둔, 탄압을 피해 압하지아를 탈출했던 수십 만 명의 그루지야인 난민들의 귀환은 불허 - 이 지역은 여전히 출입금지 지역, 영토문제도 미해결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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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 영토보전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의 제1 내정과제 -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유지가 최고의 외교정책
이 지역 국가들이 강력한 중앙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평화로운 카프카스 (For a Peaceful Caucasus) 프로그램’ 지지 → 실패, 러시아의 정치적 지배에 좌우되고 있는 독립국가연합에 재 가입 그루지야 내의 러시아군의 주둔은 많은 국민들의 관심사, 러시아에 대항 하기 위해 외부세계와 접촉을 확장시키고 있고 인접국인 아르메니아, 터키, 아제르바이잔과의 우호관계를 유지 1999년 유럽의회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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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 <사카슈빌리 대통령> 2010년 러시아식 국명인 그루지야 대신 영어식 표기인 조지아로 바꿔주길 세계에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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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제 최근 정치구조의 변화가 실생활과 경제에 긍정적인 작용 인플레 하락(1994년 18.9%, 1998년 4%)
신 통화인 라리 화가 1995년 9월 도입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석유와 가스를 세계시장으로 보내기 위한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의 석유송유관이 국가채무를 경감하고 심각한 에너지부족 난을 완화시켜줄 것으로 기대 독일, 이란, 세계은행은 발전설비 개선자금지원, 국제 통화기금의 경제, 구조 개혁 자금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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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교 4세기 기독교 도입 대부분 기독교인 독립 된 그루지야 정교회 부활절이 가장 중요한 경축일
- 부활절 전날 사순절 단식이 해제, 한밤중에 축하행사 거행 (서구보다 2주 늦다) - 성직자와 신도들이 교회를 3차례 도는 전통 행진 - 부활절 다음날이 현충일 : 가족 묘를 참배 금속공예가 유명하여 이콘(종교성화)은 목재가 아닌 금속 액자로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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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교 1917년 혁명 와중에 주교가 러시아로부터 그루지야 교회의 독립 선언
1920년 소비에트의 집권으로 종교억압 수천의 교회 폐쇄, 파괴, 창고로 개조 1922년 제노아 공회에서 공산주의가 민족, 종교생활을 억압하고 있다고 그루지야 주교가 주장 년대 교회가 반 러시아 공산주의, 반 소비에트-종교 캠페인 중심지화 1930년대 반-소비에트 성향은 다른 공화국들보다 더 거셌지만, 나치독일에 대항하여 많은 그루지야인들이 희생당했다는 이유로 1943년 스탈린이 종교자유 허용 아브하지아와 남 오세티아는 무슬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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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언어 그루지야어는 슬라브어 및 여타 인도유럽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인
이베로-카프카스어, 카르트벨리아어 그룹에 속하는 세 언어 (그루지야어, 스반어, 밍겔로-라즈어)중의 하나 세계에서 독특한 14개 문자 중의 하나 - 키릴문자가 나타나기 500년 전인 5세기경에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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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언어 <그루지야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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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유서 깊은 전통에 특별한 의미 부여 - 투쉐티 지역의 유목민들과 양들은 여전히 그들의 조상이 계절 변화를
표시해놓은 길을 따라 이동 - 양치기들은 이른 여름에 도착하여 9월1일까지 머물다가 남동 그루지야의 쉬라키 스텝에 있는 겨울 집으로 되돌아감 생활에 전설이 깃들어 있다 -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과 아르고 선대가 황금 양피를 찾았던 콜치스 왕국이 지금의 그루지야. - 아에테스 왕의 딸인 메데아 공주가 이아손의 문제 해결을 도와왔지만 그에게 버림받자 그를 저주하고 자식들을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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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그루지야 대지의 비옥함 - 신이 세계의 모든 민족들에게 토지를 분배할 때 그루지야인들은
그 자리에 없었고, 나중에 오자 어디 있었는지의 물음에 신을 위 해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대답하여 신이 감동 - 이 위대한 민족에게 토지를 주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자신이 갖기로 한 작은 땅을 줌 토지 규범이 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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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연회와 파티가 중요한 민족 문화 전통 - 연회는 하차푸리(둥글고 평평한 치즈빵), 로비오(콩),
사찌비(호두와 마늘로 양념한 닭고기), 또는 하르초(매운 소고기 스튜), 마쪼니(요구르트)로 차림 양고기가 가장 대중적인 요리 재료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100세 이상의 장수자들이 많음 - 이들은 장수 원인을 지역의 적당한 기후와 일상 운동, 다양한 음식(견과류, 딸기류, 마늘, 야채, 과일, 와인, 고기)을 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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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하차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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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포도로 와인을 빚어, 매일 상에 올림 - 예술로 승화시킨 건배가 축하의 필수
- 타마다(연회사회자)가 건배를 하지 않을 때까지 마실 수 없음 - 타마다가 허용하지 않으면 다른 건배를 제안할 수도 없음 대부분의 그루지야 가정에는 칸찌라고 하는 양이나 염소 뿔이 있는데, 만찬도중 술을 채워 손님이 다 마시도록 함 - 여자들은 남성들의 회합에 참여하지 않음 주말에는 고향이나 여름 별장에서 지냄 - 이런 생활은 트빌리시 시민들이 꽃밭 가꾸기 와 과수재배를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더위를 피하게 해주는 데 이 때문 에 도시는 텅 빔 - 흑해와 여타 휴양지역도 연중 인기를 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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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 칸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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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1월 7일 성탄절 신년, 부활절이 가장 큰 경축일 신년은 잘게 부순 견과류와
꿀로 만든 고지나키라는 캔디로 테이블을 꾸미는 것이 전통 1월 2일은 베도바(Bedi의 의미는 운명)로서 이날 문을 통해 제일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 주인의 운명을 만든다는 전설 교육을 매우 중요시. 많은 수의 주민이 대학교육을 받아 소련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았는데, 도시민의 70%가 대학을 졸업 - 독립 이후 터키가 중요한 무역상대국으로 터키어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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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명인 가장 유명한 그루지야인은 스탈린과 비밀경찰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야
19세기 미술가 니코 피로스마니슈빌리는 낭만적 기행으로 유명 - 영국의 카바레 가수 마르가리타와 사랑에 빠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한 방을 채울 수 있는 장미를 선물 - 그의 그림들이 미국 국립박물관에 소장 오페라 계에서 유명한 파타 부르츌라제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많은 공연을 한 탁월한 베이스 미국 뉴욕시 발레단 감독인 조지 발란친, 통합참모본부(JCS)의장 존 샬리카슈빌리도 그루지야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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