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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제대로 보기, (3/7~5/23) 매주 화_오후 19:00~21:00 총12회/ 강사_한양대 철학과 이현복 교수
서양철학 제대로 보기, (3/7~5/23) 매주 화_오후 19:00~21:00 총12회/ 강사_한양대 철학과 이현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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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날짜 내용 1회 3월7일 철학의 변형들: 위기는 변화를 산출한다 2회 3월14일 서구 중세의 빛과 그림자 3회 3월21일 르네상스: 가자, 아테네로! 4회 3월28일 종교개혁: 신은 어디에 있는가 5회 4월4일 과학혁명: 세계가 나를 부른다 6회 4월11일 새로움의 철학들 7회 4월18일 몽테뉴: 어찌 살 것인가 8회 4월25일 베이컨 그리고 홉스: 믿고 의지할 건 오직 감각뿐 9회 5월2일 데카르트: 그래도 믿을 건 이성뿐 10회 5월9일 파스칼: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11회 5월16일 스피노자: 신을 거부한 자, 신에 취한 자 12회 5월23일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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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중세적 인간의 조건 : “이젠 어찌 살아갈 것인가”
탈 중세적 인간의 조건 : “이젠 어찌 살아갈 것인가” 서양 고대의 아테네가 이상으로 삼았던 인간의 모습이 스스로 성찰하는 인간, 세상의 예속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었다면, 서양 중세의 로마가 최선으로 간주한 인간의 전형은 자신의 주인인 신을 흠모 봉사하고, 이로써 신의 은총으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이었을 것이었다. 이런 인간관이, 이런 세계관이 서구 천년을 지배했고, 이는 결코 거역될 수 없는, 결단코 좌절될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 유일무이한 굳건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고인물은 썩는다 했던가. 천년의 세월을 흔들림 없이 지켜 온 서구 로마의 신 중심의 사조는 내외부의 여러 요인들로 인해 흔들리고 말았다.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난장이, 중세라는 거인은 중세 이후라는 난장이의 돌팔매질에 의해 휘청거렸고, 급기야는 그 큰 몸체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본 강좌는 거인을 흔들었던 난장이들에 대해 말할 것이다. 곧 거인의 어깨 위에 있으면서 먼 세상을 바라다 본 난장이들, 그러나 이 거인을 보내버린 난장이들, 이 난장이들이 어떻게 이후의 삶을 꾸려갔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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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르네상스: 가자, 아테네로!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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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과학혁명 세계가 나를 부른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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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 일어나 요즘 베어 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 일어나 요즘 베어 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날은 얼마나 일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벌목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네. 그 축들이란 자기들끼리든 주변 사람들과든 언제나 무슨 말썽거리라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아닌가. ….숲은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렀다가 나는 새를 잡는 곳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체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한동안은 이러한 달콤한 상념들 속에 잠긴다네. 그 다음에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나 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 것 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에는 다시 그 술집으로 가는데, 그곳에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주한 한 사람, 방앗간지기 한 사람 그리고 가마 굽는 일을 하는 사람 들이 바로 그들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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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서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설들. 그뿐인가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서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설들. 그뿐인가. 돈 한푼을 두고는 종종 드잡이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 소리가 멀리 산카시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밝고 있지만, 그래도 여신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저녁이 오면 나는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나를 따뜻이 반겨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내가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물론 그들도 친절히 답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다네. 나 자신이 온통 그 시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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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 넣어 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기억 속에 넣어 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것을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De principatibus)』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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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Desiderius Erasmus 1466/1469년 - 1536년
에라스뮈스의 1523년 모습, 젊은 한스 홀바인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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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연보 ( * 위키백과사전 참조) 1466(or 1469)
에라스무스 연보 ( * 위키백과사전 참조) 1466(or 1469) : 로테르담에서 태어남. 어머니는 외과의사의 딸이었으며, 아버지는 이후 로마 카톨릭 신부가 됨. 에라스무스는 어린시절 여러 수도사 학교에서 수학함 1483 : 부모가 흑사병으로 사망 1492 : 에라스무스는 가난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가며, 25살에 카톨릭 사제로 임명됐고, 마지못해 아우구스티누스 교회법에 맹세.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명민함으로 주교의 비서로 일함. 이후 교황 레오10세가 그의 사제직을 면제해줌. 1495 : 에라스무스는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주로 파리, 루뱅, 영국, 바젤에서 활동했다. 주교의 동의를 받아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받으면서 파리 대학의 몬테귀 콜레주(Collège de Montaigu)에 유학했는데, 그곳은 프랑스 교회 개혁 운동의 중심지였다. 이전에 파리 대학은 스콜라 철학으로 유명했지만 당시에는 이미 르네상스 인문주의 영향에 놓여 있었다. 1498 : 영국에 건너가 토머스 모어 등과 사귀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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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 : 영국에서 에라스무스는 존 콜렛(John Colet)의 성서 연구법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콜렛의 연구법은 스콜라 철학보다 교부 철학과 유사했다. 불가타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더 심층적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에라스뮈스는 영국을 떠날 때까지 그리스어를 익혔다. 만성적인 가난에도 그는 3년간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그리스어를 성공적으로 익혔다. 그는 책과 돈을 보내달라고 친구들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곤 했다. 1504 : 《기독교 전사 필휴》집필 1506년부터 1509년까지 : 그는 이탈리아에서 학자들과 사귀고 있었다. 1506년에 토리노 대학을 졸업했다. 루벤에 머물렀을 때 에라스무스는 금욕주의적인 학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금욕주의자들은 문학 원리와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사고방식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그는 바젤에 조용한 집을 구했다. 스위스의 환대와 비호 덕분에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젤에 비교적 오래 머물렀다. 이곳에서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과도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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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 :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우신 예찬>을 써서 비상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에서 떠나 자연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권위주의에 빠진 기독교를 비판하고 직업적인 성직자를 비난하였다. 1516 : 그리스어판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에라스뮈스판 성서는 그리스어 원본과 라틴어 번역을 같이 달아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10여 개의 성서번역본을 참고했다. 《기독교 군주의 교육》출판 1524 : 루터를 비판하는 글인 《De libero arbitrio 자유 의지에 관하여》을 썼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신학에 대해서 핵심적인 비판을 했다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중년 이후에 당시 본격화되던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광신을 싫어하여 루터와 대립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에라스무스는 로마 가톨릭교회 내의 광신자들과 그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분노하는 개신교 측 광신도들 양자로부터 비난을 받고 곤경에 처한다. 1536 : 결국 스위스로 돌아가 바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라스뮈스는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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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년- 15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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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연보 ( * 위키백과사전 참조) 1483 :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남. 그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생계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상당히 검소했고, 부친은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양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 루터는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전해지며, 진로문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위해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루터는 1502년 9월에 문학 학사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 루터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하였는데, 수도회에서는 그를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요한 스타우피츠 교수는 루터를 성서학 교수사제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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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 : 루터는 10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1517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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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 : 슈타우피츠는 수도원에 대한 순종의 서약으로부터 루터를 배제시킴 :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종교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 지시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일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년)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는, 루터의 표현대로 수동적인 의인 칭의론(이신칭의)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1520 :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 선고, 파문을 당함. 6월 24일 발표된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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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 : 보름스 논쟁.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카를 5세 황제는 루터에게 신변의 안정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1521년 3월 6일, 초청장을 보내었다. 황제의 안전 보장은 믿을 바가 못되었지만 루터는 주위의 우려와 권고를 물리치고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서 보름스로 가 논쟁에 임한다. 1522 :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 그는 이 기간을 성서 주석,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번역에 사용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서(Septemberbibel)’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1520년 사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칼 슈타트, 토마스 뮌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1년-1525년), 다음으로는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년-1525년)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농민, 토마스 뮌처, 인문주의자들에게 루터가 외면을 받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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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 : 에라스뮈스의 공개적 비판에 대한 답변의 일환으로 집필된 「구속된 의지」(De Servo Arbitrio, 1525)는 루터 신학의 독자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년 년)였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1546 :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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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 경 Sir Thomas More, 1478~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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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 : 런던에서 법관 존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남.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리스어·라틴어·신학 등을,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배웠다. 그때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졸업 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504 : 하원 의원에 선출 1505 : 27살의 모어는 그보다 열살 어린 첫 번째 아내 제인 콜트와 결혼.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세 딸과 아들 하나,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고아 소녀 마거릿 긱스를 입양. 1510 : 런던 부시장·하원 의장 등을 역임 1510~1518 : 시티 오브 런던의 주 장관 대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책무를 지닌 자리에 있는 동안 공정하고 유능한 공무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513 : <리처드 3세사>를 집필함 1516 :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으며, <유토피아>를 출판함 1517 : 모어는 왕의 조력을 위하여 임시 섭정과 ‘개인 공무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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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 :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게 파견되는 외교 사절을 맡은 모어는 1521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모어는 헨리 8세의 비서와 조언자가 되면서 정부의 유력자로 떠올랐으며, 외국 외교관, 왕실 회계국 부장관 그리고 왕과 그의 대법관이자 요크 대교구장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1522 : <네 가지 마지막 일들>을 집필함 1523 : 모어는 잉글랜드 하원의 의장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의장으로서는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위한 청원을 표명하였다. 1525 : 그는 나중에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집사장으로 근무하려고 하였지만, 1525년 북잉글랜드의 행정을 수반한 사법을 감독하는 직책인 랭커스터 공령 상서에 위임되었다. :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헨리 7세의 결혼무효 요청을 거부한 토머스 울지 대신 대법관 자리에 오른다. <이단에 대한 대화>를 출판함 1530 : 모어는 헨리 8세의 혼인무효요청 편지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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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 : 년에 책 행상인 리처드 베이필드를 스미스 필드에서 화형에 처했으며, 개신교 신자들을 화형으로 죽이는 탄압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을 “그리스도의 법이 허락하는 만큼” 잉글랜드 교회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선언한 왕위지상령의 서약을 강요당하자, 물러나려고 하였다. 1532 : 그는 왕에게 자신의 사임을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헨리 8세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틴들에 대한 반박>을 집필함 1533 : 헨리 8세가 벌이는 행동을 더는 참지 못한 모어는 잉글랜드 왕비로서 앤 볼린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앤의 왕비 신분을 인정하고 그의 행복을 바란다는 글을 보냄으로써 반역 혐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옛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우정 때문에 승리감에 도취한 앤을 은밀히 방해하였다. 대관식 참석 요청에 대한 그의 거절은 앤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1534 : 모어는 의회에서 제정한 계승법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어는 앤을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왕비로 인정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의회의 인가를 받아 법률로 제정한 종교적 문제에서 교황권을 부정하는 조항의 머리말에 대해서는 서약을 거부하였다. 4일 후 런던 탑에 수용되었고 그는 거기서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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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 : 모어는 앤 불린의 아버지, 남동생과 삼촌뿐만 아니라 신임 대법관 토머스 오들리를 포함한 재판 심사단 앞에 온갖 심리적 압력을 받았다. 그는 계승법의 정당성을 부정한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되었고, 반역법에 따라 그의 유죄가 인정되었다. 판결을 받기 전에 그는 “세속인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며 자신의 신념을 자신 있게 말했다. 처음에 그에게 거열형이 선고되었지만, 왕의 요구에 따라 참수형으로 바꾸었다. 처형날짜는 7월 6일이었다. 처형대에 올라간 그는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좋은 신하이기 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또 다른 말은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도끼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한 농담이다. 그에 따라 불편하지 않으려고 모어가 처형대의 받침 위에 놓인 자기 수염을 치우자 도끼가 그의 목을 내리쳤다. 모어의 시신은 쇠사슬의 성 베드로 경당에 묻혔고, 머리는 템즈 강에 내던져지기 전에 그의 딸 마거릿 로퍼에 의해 구출되어 런던 브리지 위에 놓였다. 캔터베리의 세인트 던스탠 성당에 그의 두개골이 안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위안의 대화>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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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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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 :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남. 아버지인 베르나르도 디 니콜로 마케아벨리는 법률 고문이었으며 독서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94 : 메디치가가 몰락할 무렵 공직에 입신하여 피렌체의 공화국 10인 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외교 사절로서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외국 군주들에게 사절로 파견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견해를 구축하였다 :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제2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1500 : 마키아벨리가 속한 군사 위원회는 피사를 공격하나 용병에 실패에 재정만 낭비하게 되자 국민군대를 키울 것을 주장 1502 :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만난다. 무섭게 세력을 키워 가고 있던 20대 후반의 젊은이 보르자는 피렌체에 큰 위협이었다. 그의 세력을 무마하려고 파견된 마키아벨리는 그에게서 약육강식인 현실에 맞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발견한다. 뒷날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군주론》의 모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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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 :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스페인의 침공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이때 그는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1513년 발표한 이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 사상은 일찍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513 : 메디치 군주정에 대한 반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교황 레오 10세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위대한 창작에는 약간의 불행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 뒤 시골 산장에 틀어박혀 지낸 14년은 마키아벨리에게 괴로운 시기였지만, 인류에게는 행운이었다. 《군주론》, 《로마사론》과 같은 그의 대부분의 저작들, 《만드라골라》 같은 유명한 희극 작품들이 모두 이 시기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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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 메디치 가는 마침내 쉰한 살의 마키아벨리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낸다. 그는 몇 가지 외교적인 임무를 맡기도 했고 점차 커져 가는 전쟁의 위협에 대비한 성벽 보강 작업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의 정치 생명을 끝내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1527 : 메디치 가의 후원자였던 교황이 몰락하고 스페인 군대가 진주하자 피렌체는 다시 공화제로 복귀한다. 마키아벨리는 제2 서기관으로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이번에는 메디치 가의 가신으로 간주되어 선거에서 큰 점수 차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527년, 마키아벨리는 쉰여덟 살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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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와는 다르므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행해져야 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고집하는 군주는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선하게만 행동하려는 사람은 전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패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권력을 보존코자하는 군주는 비록 선하지 않은 방법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쓸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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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ticelli_ La Primavera_ 1476_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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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후반 스콜라철학 소멸 14세기 논리학쇠퇴, 물리학 발전 1453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터키에 함락 1460 구텐베르크 성서 니콜라 오레즘 피치노 다빈치 에라스무스 마키아벨리 코페르니쿠스 1543년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 출간. 1492 콜롬버스 아메리카 발견 미켈란젤로 파라켈수스 루터 몽테뉴 브루노 베이컨 갈릴레오 , 1633 종교재판 1560년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번역 케플러 홉스 메르센 가상디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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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년 파리대학 창설, 옥스퍼드대학. 문헌발굴에서 문헌탐구로 이행 1277년 파리주교 허용불가한 219개 명제제시 저주, 아베로에스주의겨냥. 아베로에스적 접근은 이성의 핓으로 각주제 겸토, 이후에 진리의 어디에 신을 위치시킬 것인지 사유. 아베로에스 147명제. 무엇이가(무엇인가?) 자연에 대립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면 신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신의 절대적 권능의 그리스적 신개념과 기독교적 신개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1200?-1280, 8천쪽 주석. 아퀴나스 1224/ , 아리스토 검열. 1274 수용 가톨릭공식철학. 지금의 철학은 중세에 논리학, 신학, 자연철학이라는 과목으로 강의. 1277 파리주교 불가한 219개 결론 제시. 단테 둔스 스코투스 오캄 , 신의 자유성찰, 옥스퍼드대학 강의, 논리학연구, 1326 파문, 오캄의 면도날, 꼭 필요하지 않은 엔티티를 늘려서는 안된다. 1327 장미의 이름 1348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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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서로마제국 멸망 보에티우스 529 아카데미아 폐쇄 암흑시대 유스티니아누스대제 무함마드 샤를마뉴대제 8세기말, 기독교 제국 에리우게나? ~870후반 인구증가, 부의 도시집중, 사학활동, 법학의학설지, 라틴어요구, 논리학 연구. 안셀무스 , 이성과 신앙 조화시도 1077 카노사의 굴욕, 황제를 굴욕시킨 교황 아벨라르 , 최초의 중세철학자, 논리학, 도덕철학. 연인 엘로이즈, 12세기 중엽, 희랍어 아랍어 유대어로 된 윤리학 논리학 의학 점성설 연금술 수학 자연과학 넘쳐남. 서구학문 비약적 발전. 스페인이 아랍권에서 기독교 국가들에 수복이 계기. 두 탁발수도회 프란체스코, 도미니코수도회 1차 십자군전쟁 , 거지십자군 4차 십자군 1204 콘스탄틴 점령 아베로에스 , 위대한 주석가. 아랍 아리스토 학자 철학이 진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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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우스 99-55 스토아 제논 크뤼시포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ad 에픽테토스 세네카 bc 4 -ad 65 퓌론 bc270 아르케실라오스 bc , 아카데미아 회의론. 카르네아데스 , 아카데미 아이네시데모스 bc 1세기 안티오쿠스 bc86-68 아카데미아 원장, 절충주의 키케로, 플라톤, 스토아, 회의주의 절충주의 알렉산드리아 필론 bc 25-ad 45, 유대주의 알키누스, 플라톤-아리스토 절충 누메니우스, 플라톤이 그리스의 모세가 아니면 누구? 플로티누스 포르퓌리오스 215 마니 313 밀라노 칙령 325 니케아 공의회 330 콘스탄티노플, 로마수도. 아우구스티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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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 1475년– 1507년)는 르네상스 시대, 발렌티노와 로마냐의 공작이자, 안드리아와 베나프로의 군주이며, 디오이스의 백작, 피옴비노·카메리노·우르비노의 지배자인 동시에 교회군의 총사령관이자 장관이면서,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용병대장이며, 전직 추기경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대사관 겸 비서로서 체사레를 만나 협상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그는 체사레를 크게 존경하게 된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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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1502년 10월 7일부터 1503년 1월 18일까지 보르지아의 저택에서 지냈다
마키아벨리는 1502년 10월 7일부터 1503년 1월 18일까지 보르지아의 저택에서 지냈다. 이 기간에 그는 정기적으로 급송 공문서를 피렌체에 있는 상관들에게 보냈고 그 문서들은 대부분 오늘날까지 남아 마키아벨리의 작품집으로 출판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에서 체사레의 공적과 전략을 다수 인용하였고 그를 본받을 것을 권고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체사레의 두 가지 무용담은 마키아벨리에게 매우 큰 인상을 남겼다. 첫 번째 무용담은 체사레가 로마냐를 진압한 과정으로 《군주론》의 제17장에 기술하였으며, 두 번째 무용담은 1503년 새해의 밤에 체사레가 세니갈리아에서 자신의 정적들을 암살한 이야기이다. 보르자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찬사는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다. 어떤 학자들은 《군주론》이 20세기 범죄의 선구자 노릇을 했다고 주장하며, 맥컬리와 액턴을 포함한 다른 학자들은 시간에 따른 타락과 일반적인 범죄의 영향과 같은 폭력에 대한 찬사를 설명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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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 보르자(Lucrezia Borgia, 1480년 ~ 1519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반노차 카타네이의 외딸이다
루크레치아의 가족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의 특색이라고 주장되는 냉혹한 마키아벨리주의의 정치와 성적 타락의 전형이다. 루크레치아는 팜므 파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수많은 미술품과 소설, 영화 등이 존재한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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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1473년 - 15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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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천제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 실린 태양중심체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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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과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한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 1495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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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 이탈리아 유학시기 접한 플라톤주의와 고대문헌 조사의 영향으로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을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그 후 1510년에 태양 중심 천문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요약본 형태의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렸다. 1529 코페르니쿠스는 대주교 비서직, 참사원 임무 등으로 바빴으나, 경력이 높은 회원이 되어 할 일이 감독과 조언 등으로 줄어들면서 1530년대,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29년 그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533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Ⅶ) 와 여러 추기경들이 참석했던 바티칸의 강연에서 교황의 비서였던 로마의 요한 비드만스타트(Johann Albrecht Widmannstetter)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의 대략적인 내용을 강의 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 이론에 관심을 가졌으며 1536년 11월 1일, 바티칸 강연에 참석했던 추기경중 하나인 니콜라스 폰 쇤베르크(Nicolas von Schönberg)는 코페르니쿠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 책의 출간을 재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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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 [짧은 해설서] 발표 후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한다.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을 하나, 하나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로 보아 행성간의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다. 이 해에 코페니르쿠스는 사망한다. 1616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금서목록에 추가되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위키백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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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보냈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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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전술한 이론을 말이나 글 등 어떤 방식으로든 옹호하거나 가르치려 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명령을 이 성청(聖廳)이 저에게 사려있게 암시한 뒤에도, 그리고 전술한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저에게 통보한 뒤에도, 저는 이미 단죄된 이 교리를 논의하고 이들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주장을 도출하는 한 권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원인이 되어 저는 이단, 즉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한 의심을 성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해 정당하게 제기된 이 강력한 의심을 추기경 예하와 믿음 있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앞서 말한 과오와 이단, 교회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과오와 교파 전반을 포기하고 저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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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신 추기경(벨라르미노)은 위의 갈릴레이에게, 전술된 견해는 오류이며 그와 같은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다
‘존엄하신 추기경(벨라르미노)은 위의 갈릴레이에게, 전술된 견해는 오류이며 그와 같은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경고했다. 그 직후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명령했다. 그(갈릴레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돌지 않으며 지구는 돌고 있다는 견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그는 지금부터 말과 글을 포함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그 견해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추기경위원회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지시에 따르고 순종할 것을 약속했다.’ 교황청 추기경위원회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는 갈릴레이(오른쪽.1857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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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피사에서 출생하였으며 11세에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가졌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의학을 배우기 위하여 피사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맥박계를 고안하였다. 피사 대학을 중퇴한 후,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589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또한 높은 곳에서 무게가 각각 다른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여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의 낙체 실험'이다. 1600 비록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지만,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바(Marina Gamba)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셋을 두었다. 그들은, 아들과 두 명의 딸로 1600년에 비르지니아(Virginia)를, 1601년에 리비아(Livia)를 낳았고, 아들 빈센초(Vincenzio)를 1606년에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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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 망원경을 개량하여 이것을 천체 관측에 응용하여 '목성의 위성',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하였다. 이듬해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1610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들에 대한 그의 천체 관측 사항들을 이용해 태양중심설, 즉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인 지구중심설에 대항하는 우주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책을 펴냈다. 1616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는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면서 그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지도, 가르치지도 말 것을 분부하였다. 갈릴레오는 1623년에 승인되고 간행된 그의 첫 번째 책 《분석》(Il Saggiatore)을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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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열과 심계 항진을 겪고 죽을 때까지 계속 손님을 접대했다고 한다.
1630 갈릴레오는 1632년에 피렌체에서 인쇄된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를 출판하기 위한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그는 로마의 신성재판소에 설 것을 명령받았다. 1634 가톨릭 교회의 단죄에 따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행동도 제한되었다. 이때부터 쭉, 그는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물렀다. 1638 그는 이 해에 완전히 실명했으며, 고통스러운 탈장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 때문에 그는 의료적인 차원에서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 1642 발열과 심계 항진을 겪고 죽을 때까지 계속 손님을 접대했다고 한다. - 위키백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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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에켐 드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프랑스 철학자, 사상가, 수필가. 몽테뉴 몽테뉴의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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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테뉴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권)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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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놓고 후회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써놓고 후회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글에서나 인생에서나 어떤 일이 벌어지든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모르 파티' 신조를 굳게 지켰다. 몽테뉴의 이런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과거에 저지른 악행을 뉘우쳐야 과거의 일을 말끔히 백지로 돌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몽테뉴는 자신이 과거에 한 일 중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때에는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 모습이 파티 석상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처럼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과거에 보여준 다양한 모습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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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조각 한조각 잇대어 만든 조각보와 같아서 일정한 모양도 없고, 구성도 다양해서 한조각 한순간마다 각기 나름대로 행동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소신이 있었지만, 자신의 저서를 다시 일고 글을 덧붙이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펜을 내려놓고 '이제 나 몽테뉴는 말하고 싶은 것은 모두 말했다. 나 자신을 종이에 모두 보관해놓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글을 계속 써야했다. 그 과정은 영원히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잉크와 종이가 있는 한, 멈추지않고 힘들이지않고 나는 그저 내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갔다고 생각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마침내 그를 멈추게 한 유일한 사건은 그의 죽음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적한대로, 에세는 "결말에 도달했기 때문에 글쓰기를 멈춘 것이 아니라 삶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멈춘 것이다.”(어떻게 살것인가, 사라 베이크웰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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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 :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출생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증조부 라몽 에이퀨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1544 :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 :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1569 :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 :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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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
1577 :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 :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腎臟結石) 치료를 겸하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 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1581 :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1581년 말 귀국하였다. 1583 :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1586 :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3권)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結緣)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出仕)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 가필(加筆)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1592 : 사망 - 네이버 백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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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베이컨 그리고 홉스: 믿고 의지할 건 오직 감각뿐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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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
잉글랜드 왕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최초의 민주적 사회계약론자이다. 서구 근대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책 《리바이어던》(1651)의 저자로 유명하다. 홉스는 자연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상정하고, 그로부터 자연권 확보를 위하여 사회계약에 의해서 리바이어던과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토마스 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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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공 인간의 성질을 서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 ‘재료’는 무엇이며, ‘제조자’는 누구인가? 둘 다 ‘인간’이다. 둘째, 그것은 어떤 ‘신의계약’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나, ‘주권자’의 ‘권리’ 및 정당한 ‘권력’ 또는 ‘권위’는 무엇인가, 또 그것을 ‘유지’하거나 ‘해체’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기독교 코먼웰스’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어둠의 나라’란 무엇인가? 첫째 문제에 관해 최근 사람들이 자주 들먹이는 격언이 있다. 인간의 ‘지혜’는 ‘책’을 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연구해야 얻어진다는 것이다. 이 격언을 따른답시고 남의 등 뒤에서 무자비한 비난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기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과시하면서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남을 험담하는 일 이외에는 자신의 현명함을 달리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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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하나, 요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 요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이 격언대로 하지만 하면, 그렇게 노력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진실로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격언은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연구하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용법처럼, 이런 말로 권력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야만적 태도를 취하도록 장려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때 건방지게 행동하도록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격언이 가르치는 바는 사람의 사고와 정념은 누구나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언제 ‘사고하고, 판단하고, 추론하고, 희망을 품고, 공포를 느끼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곧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사고와 정념을 가지게 될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말은 정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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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성, 즉 ‘욕망’과 ‘공포’와 ‘희망’ 등의 정념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지, 그 정념의 ‘대상’의 유사성, 즉 욕망과 공포와 희망 등의 대상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정념의 대상은 개개인의 기질이나 각자가 받은 교육에 따라 극히 다양하며, 우리의 지식으로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위장과 기만과 허위와 오류의 학설들로 오염되고 혼란해져 있는 사람 마음의 특성들은 오로지 마음을 탐구하는 자만이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자기 마음과 비교해 보지 않으면, 또한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사정이 동일한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암호를 푸는 열쇠도 없이 암호문을 해독하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대체로 읽는 자 자신이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에 따라서 과신하거나 혹은 불신이 지나쳐 오해하게 된다. 사람의 행동을 보고서 그 사람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친한 친구인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친구는 몇 되지 않는다. 전 국민을 통치하는 사람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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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마음에서 어느 특정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마음에서 어느 특정인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 어떤 언어나 학문을 배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읽은 내용을 정연하고 명쾌하게 기술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마음속에도 같은 것이 있는지 어떤지를 찾아보는 수고만 치르면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학설은 달리 논증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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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 잉글랜드 윌트셔 웨스트포트에서 교구 목사(Vicar)의 아들로 태어났다. 홉스는 가난한 집안의 칠삭둥이였고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았지만, 부유한 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홉스는 말름스버리 학교(Malmesbury school)에 입학하여 언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열네 살의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의 청교도적 학풍을 자랑하는 마그덜린 단과대학(Magdalen Hall)에서 5년간 공부하며 학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마그덜린 단과대학의 교장이자 진취적인 청교도인 존 윌킨슨은 홉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608 1608년 옥스퍼드 졸업하고 윌리엄 캐번디시 데번셔 백작의 가정교사가 됨. 1610 백작의 두 아들과 5년가 유럽여행. 이 여행에서 프랜시스 베이컨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와 갈등을 빚었고, 보일의 실험주의를 비판했다. 또 보일의 진공 실험을 비난하며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기도 했는데, 이 일로 결국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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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는 캐번디시 가의 가정교사로 지내면서 그 집안의 후원으로 유럽 여행을 하며 폭넓은 학문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이시기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 기하학의 논증적 방법을 자기 학문의 주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1642 <시민론> 출판 1651 <리바이어던> 출판 1655 <물체론> 출판 1658 <인간론>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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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1년 1월 런던에서 <리바이어던> 발표. 홉스는 사회계약에 대해 명확하고 자세하게 말한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이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이기적 본성을 지닌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한없이 추구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한다. 그는 서로 다투던 자연상태 속의 인민이 그들 개인이 가지던 개인의 권리를 양도하여 주권을 창조했다고 보았다. 국가에 의해 개인의 권리는 억류되었고, 그의 방어와 좀 더 기능적인 사회를 위해 그의 권리가 돌아왔으므로 사회계약은 실용주의적 자기 이익 추구의 바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홉스는 국가의 이름을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국가가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리바이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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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st Viscount of Saint Alban, 1561년 1월 22일~1626년 4월 9일)은 영국의 철학자, 정치인이다. 영국 경험론의 비조이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세 철학의 개척자로 알려진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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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의 모든 지자가 함께 힘을 합해 돕는다해도 예단(anticipation) 가지고는 학문에 진보가 있을 수 없다
낡은 것에 새것을 더하거나 잇대어 깁는 것으로 학문이 크게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한 지점에 뱅뱅 돌거나 대수롭지 않은 진보에 그칠 뿐이다. 혁신은 근본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고대의 철학 창시자들 또는 모든 창시자들의 명예가 손상될 것은 없다. 우리 관심사는 그들의 지능이나 능력을 우리와 비교하자는 게 아니라 방법을 비교하자는 것이며,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재판관이 아니라 안내자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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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문에 종사한 사람들은 경험에만 의존했거나 독단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경험론자들은 개미처럼 오직 모아서 사용하고 독단론자들은 거미처럼 자기 속을 풀어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꿀벌은 중용을 취해 뜰이나 들에 핀 꼿에서 재료를 구해 자기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한다. 철학의 참된 임무는 바로 이와 비슷하다. 참된 철학은 오직 혹은주로 정신의 힘에만 기댈 것도 아니요, 자연이나 기계적 실험을 통해 얻은 날 것 그대로 기억 속에 비축할 것도 아니다. 그것을 지성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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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이 그저 의견 표출이 아니라 행해져야 될 위대한 과업으로 간주되길 바란다. 여기서는 어떤 학파나 학설이 아니라 인류의 복리와 존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관건임을 세인들은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는 각자 자기자신의 이익과 ... 공동의 안녕을 생각하고 ... 이 과업에 참여하게 되리라 믿는다. 끝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의 이 '혁신'에 대해 믿어서 좋은 것은, 이것이 무한하고 초인간적인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혁신'이야말로 한없는 착오를 종결짓는 동시에 착오의 합당한 한계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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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의 우상(The idols of the tribe)
인간은 어떤 것을 한번 믿으면 이와 일치하는 사실만 받아들이고 어긋나는 사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믿음에는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특징이나 사회적 정서 및 편견들이 포함된다. 베이컨 시대의 사람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거나 또한 자연을 의인화하여 본다거나 혹은 인간 자신이 목적적 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자연에서도 목적을 찾는것이 종족의 우상이다. 동굴의 우상(The idols of the cave) 인간은 개개인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성향이 다르다. 이러한 성향들은 사람들이 지식을 받아들일때 자신이 원하는 것만 걸러 듣게 만든다. 이는 빛(진리)을 차단하는 동굴과도 같아 동굴의 우상이라 한다. 시장의 우상(The idols of the marketplace) 사람들은 운명이나 실체라는 단어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런 단어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붙인 단어일 뿐이므로 쓸데없는 논쟁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서로 교역하며 관련을 짓는 시장에서 사물들에게 적합치 못한 단어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모양이라 시장의 우상이라 부른다. 극장의 우상(The idols of the theater) 자신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기존 학문의 권위만 따라서 생겨나는 편견을 말한다. 관련 없는 내용에 플라톤의 이데아같은걸 운운하는 철학들이 이에 속한다. 베이컨이 살던 시절은 극장은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런것을 극장의 우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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