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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부 작가, 반공 SED 친정부 작가 반정부 작가. 사회주의. 서독망명 작가 중립적. Stasi에 가담 구-동독 작가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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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정부 작가, 반공 SED 친정부 작가 반정부 작가. 사회주의. 서독망명 작가 중립적. Stasi에 가담 구-동독 작가의 유형
H. Kant 50년 이후 출생 작가 C. Wolf, 뮐러, 브라운 등 동독 작가들 R. Kunze 이주인가, 망명인가?

2 통독 이후의 구 동독 작가들 통일 이후에 구-동독 작가 가운데 국내에 머물러 있던 체제비판적 작가들이 비난을 당했다.
Christa Wolf, Heiner Müller 등 2. 동독 문학 논쟁 = 구동독의 문화적 청산을 계기로 시작 =>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비화. 3. 구-동독의 몰락 이후에 사회주의의 작은 장점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협동 교육, 협동 노동) 4. 몸젠의 블록을 통해 현대 작가의 영향력 그리고 문학의 본질적 의미 등을 숙고함 5. 테오도르 몸젠 (1817 – 1913)은 누구인가?

3 테오도르 몸젠은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나, 다섯 동생들과 함께 자랐다
테오도르 몸젠은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나, 다섯 동생들과 함께 자랐다.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들이 라틴어, 그리스어 , 고전 문학을 배우게 하였다. 1838년 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 1839년 그는 킬 대학교에서 테오도르 슈토름을 알게 되었다. 몸젠은 슈토름, 동생 티코 몸젠과 시선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선집은 문단에서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몸젠은 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몸젠의 관심사는 로마법으로 향하고 있었다.

4 몸젠의 고향은 북독의 가르딩이라는 지역이다. 덴마크와 인접해 있다.
몸젠은 학자로 성공하려 했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가정교사로 살아야 했다. 1844년 덴마크 공국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당시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덴마크 령이었다. 몸젠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연구 여행을 떠나, 나폴리의 비석을 연구하는 서적을 출판했다. 1847년 독일로 돌아와서 저널리스트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했다.

5 북독의 소도시 가르딩의 모습

6 몸젠의 고향인 북독의 가르딩의 정경이다. 이곳에는 몸젠의 이름을 딴 테오도르 몸젠 초등학교 가 위치하고 있다.

7 1848년에 몸젠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848년에 몸젠은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858년 몸젠은 프로이센 왕실 아카데미의 연구 교수가 되었으며, 1861년에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02년 몸젠은 『로마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8 사진은 베를린 마르크가 8번지의 건물이다.. 대학 교수로서 몸젠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인성이 유아독존적이었다고 한다. 제자 가운데에는 교수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서 배운 막스 베버는 역사학을 포기하고 사회학으로 전환하여, 나중에 대학에서 사회학의 거두가 된다.

9 19세기 여성들 가운데 가사 노동 외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몸젠은 이에 반대하였다
19세기 여성들 가운데 가사 노동 외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몸젠은 이에 반대하였다. 1854년 몸젠은 출판업자, 카를 라이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 16명을 낳았는데, 12명이 살아남았다. 몸젠의 딸은 6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4명이 직업을 선택하였다. 여성으로서 직업을 지니는 게 당시에는 힘이 들었지만, 네 명의 딸들은 교사 내지 간호사로 일했다.

10 사진은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에 세워진 테오도르 몸젠의 동상이다
사진은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에 세워진 테오도르 몸젠의 동상이다. “사회주의는 온통 거짓으로 명명되고 있다” (교재: 251쪽 인용문) Marx versus Mommsen: 원래 훔볼트 대학교에는 몸젠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1949년 동베를린 시 당국은 몸젠의 동상을 허물고, 거기다 마르크스의 흉상을 올려놓았다. 1991년 독일이 통일된 시점을 맞이하여, 사람들은 몸젠학회의 요청으로 “(마르크스의) 석상을 파괴”한 뒤, 다시 몸젠의 동상을 축조했다.

11 1992년은 뮐러에게 암흑의 해였다. 동독문학 논쟁 그리고 슈타지 연루 등으로 그는 구설수에 올랐다
1992년은 뮐러에게 암흑의 해였다. 동독문학 논쟁 그리고 슈타지 연루 등으로 그는 구설수에 올랐다. IM 이때 그는 우연히 몸젠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접하게 된다. .핍박당하는 작가에게 몸젠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현대에 지식인의 영향력은? 절필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에서 집필된 게 몸젠의 블록이라는 장시였다.

12 왼쪽은 몸젠의 딸의 전기 나의 아버지이며, 오른쪽 책은 지금까지 결본으로 알려진 로마사 4권의 필사본이다.
왼쪽은 몸젠의 딸의 전기 나의 아버지이며, 오른쪽 책은 지금까지 결본으로 알려진 로마사 4권의 필사본이다.

13 1. 역사학자 알렉산더 데만트는 고서점에서 필사본 하나를 발견했다
1. 역사학자 알렉산더 데만트는 고서점에서 필사본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몸젠의 로마사 제 4권에 해당하는 내용을 누군가 직접 필사한 것이었다. 2. 몸젠은 생전에 테오도르 은 몰래 어느 두 사람에게 로마사 4권에 해당하는 내용을 들려주었다. 로마사 제 4권은 비록 집필되지 않았지만, 두 명의 수강생에게 구두로 전달되었다. 제바스티안 헨젤과 그의 아들, 파울 헨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공무원이었는데, 예술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몸젠에게서 직접 개인 교습을 받았다. 3. 데만트는 필사본을 토대로 1992년 몸젠의 로마사 제 4권을 간행한다.

14 알렉산더 데만트 (1937 - )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역사학, 문화사학 교수였다
알렉산더 데만트 ( )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역사학, 문화사학 교수였다. 그는 몸젠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1992년에 로마사 제 4권을 책으로 간행하였다.

15 어째서 몸젠은 로마사 제 4권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몸젠의 로마사는 가운데 4권만 완성되었다. 1, 권은 로마 초기에서 공화정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제 5권은 로마 속국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제 4권은 로마 왕정의 시기 (BC.27 – AD. 476)인데, 결본이다.

16 로마사 제 4권을 집필하지 않은 세 가지 이유: 사진은 기원 후 117년 시대의 로마의 영토이다.
프로이센을 은근히 미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용지식인이기를 거부함) 집필에 신명을 느끼지 못했다. 황제 시대의 역사는 착취, 암살의 연속이었다. 공화정 시대를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17 몸젠은 1844년에서 1845년 사이에 로마롷 여행한 바 있는데, 이때 느낀 바 그리고 학문적 계획 등을 일기에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다. 몸젠의 “이탈리아 여행”은 나중에 로마사를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

18 3. 추악한 역사를 비판하고 싶지 않았다. 로마 역사는 몰락으로 치닫는 역사였다. 그러니 절필이 차라리 더 낫다.
1. 집필에 신명을 느끼지 않았다. 몸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로 여겨 그를 높이 평가했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그는 역사 서술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2. 어용 지식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몸젠의 로마사 서술에는 프로이센 당국의 간접적 억압이 작용했다. 가련한 대리작업자 (a poor sustitute). (교재: 237쪽) 3. 추악한 역사를 비판하고 싶지 않았다. 로마 역사는 몰락으로 치닫는 역사였다. 그러니 절필이 차라리 더 낫다.

19 로마의 원로원 시대 로마의 왕정 시대 동독이 사라진 통일된 독일 동독이 존재하던 분단 시대 (BC. 27 – AD. 476)
(BC. 358 – BC. 27) 로마의 왕정 시대 (BC. 27 – AD. 476) 과두 제, 허나 원로원의 합의 정치, 독재의 정치 황금만능주의, 역사로부터의 외면 지식인, 사회주의, 평등 동독이 존재하던 분단 시대 동독이 사라진 통일된 독일

20 Rom 통일된 독일. 걸프전 뮐러는 어째서 테오도르 몸젠을 자신의 동지라고 간주했는가?, 카프카, 베르길리우스
고대 로마 사람들은 네로 치하에서 행복했는가? 독재, 부패, 살인의 역사 몸젠은 프로이센에서 로마사 연구 제 4권을 완성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뮐러는 어째서 테오도르 몸젠을 자신의 동지라고 간주했는가?, 카프카, 베르길리우스 통일된 독일. 걸프전 Rom 프로이센 (1871 – 1900)

21 로마의 티투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돈은 썩지 않는다. “ 그만큼 돈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티투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돈은 썩지 않는다.“ 그만큼 돈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1990년 이후로 황금 만능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돈이면 뭐든지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사람들은 이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자고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맑은 공기, 맑은 물, 단잠, 사랑과 평화, 여유 그리고 우정 등입니다.

22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길리우스는 유언으로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라고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길리우스는 유언으로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후세에 잘못 활용되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절필하려는 몸젠 그리고 뮐러에게 좋은 자극제로 작용하였다.

23 문학과 예술에 대한 외면: 연극예술은 국가의 지원이 없으면 유지되기 어렵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외면: 연극예술은 국가의 지원이 없으면 유지되기 어렵다. 특히 극장을 마련하는 것은 모든 극작가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통일된 독일에서 극예술에 대한 지원은 대폭 삭감되었다. 사람들은 잘 살게 되어 더 이상 예술과 문학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지 않는다. But Show must go on. 사진은 마그데부르크에 새롭게 건립된 극장을 보여주고 있다.

24 1990년 걸프 전이 발발하며,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을 때 어느 리포터는 극작가 하이너 뮐러에게 물었다
1990년 걸프 전이 발발하며,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을 때 어느 리포터는 극작가 하이너 뮐러에게 물었다. 전쟁에 즈음하여 당신 무얼 할 수 있는가요? 이때 뮐러는 답했다. TV를 시청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식인의 시대는 끝이 났어요. 시니칼한 발언으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식인에 대한 외면: 뮐러는 분단의 시대에 핍박을 당했고, 통일의 시대에 세인들의 외면을 당했다. 그는 끽연, 절필만 할 수 있었다. 맨홀에서 빠져 나오는 극작가 – 이것은 과히 상징적이다.

25 작가의 시대비판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보수적 세계관: 사회주의가 몰락하여 „더 나은 세계를 갈구하는 인간의 공동적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독문학의 공개적 처형에 대한 분노: 학문과 예술은 제각기 권력과 금력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 외면당하는 지식인의 발언: 사회주의의 이상은 더 이상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만물의 근원인 돈 (Nervus rerum)이 모든 가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황금 만능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의 발언은 더 이상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연극 예술을 매도하는 기술문명 사회: 본격 예술로서의 연극 작품은 더 이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문학의 영향력의 쇠퇴를 말하는 것이다. (교재: 217쪽) 그렇다면 뮐러의 대안은 무엇인가? -> 우이독경은 불필요하다. 절필이 더 낫다. 침묵은 기록되지 않은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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