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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영은 원 Modified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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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요약) 통일신라676~918 발해건국698~926 고려시대918~1392 신라,고구려,백제 건국 기원전 57~18년
조선시대1392 ~ 1945 대한민국1945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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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은나라) 1) 은 (BC1600~BC 1046) 은(殷)왕조는 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여겨지는 나라이다.
은나라 이전에도 하나라가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있지만 아직 그에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없어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이에 반해 은나라는 1899년 우연히 갑골문자가 발견된 후 은의 수도였던 은허의 발굴이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여기서 수많은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전설 상이 아닌 실재하였던 왕조였음이 밝혀졌다. 은나라는 역사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중국 최고, 최초의 왕조인 것이다.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 우라는 사람이 대홍수를 잘 다스려내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우임금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왕위세습제도를 마련하여 자신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하나라는 오래도록 우임금의 자손에 의해 통치되었다. 우임금의 17대 손인 걸왕이 전제정치로 민심을 잃게 된다. 그러나 탕은 덕이 많아 많은 사람이 따랐으며 탕의 세력은 점점 커지어갔다. 이에 걸왕은 탕을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탕은 살아남아 하 왕조를 치기로 하고 밖에서 여러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명조에서 걸왕을 퇴치하였다. 탕이 은을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발달된 청동기 문화였으며, 은의 건국으로 인해 북방 수렵종족의 약탈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은이 세워진 후 후대 왕들은 여러차례 도읍을 옮기다 20대 왕 반경이 은허(현재의 허난성 안양현 샤오툰촌)로 옮긴 후 주나라의 무왕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은 왕조 후기 주왕은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이라고 하는 동이민족의 국가를 정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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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주나라) 2) 주 (BC 1122~BC 256) 주(周) 왕조는 BC 1122~BC 256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덕치를 강조하는 천명사상과 가족제도 및 제례의식을 중시하는 예 사상을 중심으로 요순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의 치세라 불린다. 주 왕조 시조 후직의 13대손 고공단부는 덕을 쌓아 많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는데 훈육 융적의 공격을 받아 기산으로 옮겨가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백성을 다스렸으며 오관유사를 설치한 후 국호를 주라 하였다. 당시 주는 은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다. 고공단부의 손자 문왕은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은나라를 칠 준비를 하였으며 태공망 여상을 등용하여 덕치를 펼쳤다. 이에 수많은 제후들이 문왕을 따랐으며 결국 문왕의 아들 무왕이 목야에서 은의 주왕을 죽이고 주 왕조를 창시하였다. 주 왕조 창시 후 무왕의 동생 주공이 봉건제를 확립하고 정전제를 제정하여 실시하면서 주 왕조의 국력은 점차 번성되어 갔다. 주공은 봉건제에 따른 제후들의 반역 가능성에 따라 예사상을 확립하여 제례를 중요시 하였으며 왕실 제사에 제후들이 참석하도록 하여 통제하였다. 봉건제는 왕권이 닿지 않는 지방에 제후를 봉함으로써 통치를 용이하게 하였고 정전제는 지배층이 농민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무왕부터 소왕,목왕에 이르기까지 주 왕조는 전성기를 맞았으나, BC 9세기부터는 제후의 반란 및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11대 선왕이 융적을 퇴치하여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12대 유왕은 포사라는 미녀에게 빠져 정사를 멀리하고 급기야는 포사의 아들에게 세자의 자리를 주고 원래의 왕비를 폐하였다. 그러자 왕비의 아버지였던 신후가 견융이라는 유목민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유왕은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지 않아 수도 호경이 함락되어 유왕은 피살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이 동쪽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천도하기 전까지를 서주시대라고 하며 그 후부터는 동주시대라 하여 구분한다. 동주시대부터는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이름만 남아있는 왕조가 되었다. 본래 주 왕조의 제후였던 나라들이 각기 독립을 주장하고 국력을 발전시키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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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춘추전국시대 1) 3) 춘추전국시대 (BC 8세기에서 BC 3세기)
주나라가 도읍을 옮긴 후 철기의 발달과 현(縣)체제의 등장으로 각지의 제후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세력이 강해진 제후들은 서로 왕을 자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세력이 1000여개에 달하였다. 오랜 전쟁 후 중원의 제후는 1000여국에서 10여국으로 압축되는데 이중 강력했던 5명의 제후를 춘추오패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춘추오패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3명이 이에 들고 나머지 2명은 설에 따라 유동적이다. 여러 가지 설에서 나머지 2명에 들 수 있는 제후는 오 합려, 월 구천, 송 양공, 진 목공, 오 부차 등이다. 제의 환공은 포숙아, 관중 등 명재상의 도움을 받아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존왕양이를 내세워 첫 번째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제 환공 사후 패자의 자리가 비어있는 사이 19년 동안이나 망명생활을 했던 진의 문공은 호의, 조쇠 등 현신들의 도움을 받아 국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성복에서 초나라의 성왕을 꺽고 천토에서 회맹함으로써 두 번째로 패자가 되었다. 춘추초기 중원 강남에는 우수한 철기를 바탕으로 발전하던 초가 있었는데 주왕실이 약해지자 스스로 칭왕하여 초왕조를 창시하였다. 즉위 초기 방탕한 생활만 일삼던 장왕은 충신의 간언으로 국력을 급속히 신장시켰으며 BC 597년 즉위 17년만에 맹주의 자리에 올라 패자가 되었다. 그 후 BC 546년 송의 수도에서 미병회담이 열려 정전협상이 체결되고 한동안 중원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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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춘추전국시대 2) 3) 춘추전국시대 (BC 8세기에서 BC 3세기)
전쟁은 장기화, 대규모화되었으며 주왕실의 제후국에 불과했던 나라들도 독립된 국가를 자처하며 영토확장을 위해 경쟁하였다.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각지에서 사상가, 병법가들이 생겨났으며 중국 사상계의 꽃인 제자백가 또한 이때에 생겨나게 된다. 전국7웅이 각축을 다툴 때 진의 효공은 상앙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강력한 법가개혁을 이루었으며 동부의 강국이었던 위의 수도 안읍까지 함락시켰다. 효공의 사후 상앙의 법가개혁이 추춤해지고 다른 6국이 진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하여 위기를 맞는 듯 하였으나 진 재상 장의의 연횡책으로 연맹은 내분으로 와해되었으며 진은 전국시대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BC 221년 경 재상 이사, 장군 왕전 등의 도움을 받은 진 정왕은 제나라의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므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진 정왕은 자신을 시황제라 칭하며 역사 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수많은 사상과 고사들을 탄생시켰던 춘추전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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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진나라 1) 4) 진 (BC 221~BC 207) 진(秦)은 주(周) 왕실 제후국의 하나로 출발하여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나라이다. BC 10세기경 서융을 견제하면서 일어나 주의 평왕이 견융의 침략을 피해 낙읍으로 천도할 때 이를 호위한 공으로 제후로 승격하였다. 춘추시대 목공 대에 이르러서는 서방을 통일하여 서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BC 362년 효공이 즉위하자 상앙이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강력한 법가개혁이 시행되었다. 그러자 도적들이 없어지고 백성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상앙의 법가개혁은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제후 및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시키고 통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앙은 공손고 일파의 모함을 받아 자신이 고안한 거열형(두 대의 마차에 사람을 묶고 양쪽으로 당겨 몸을 찢는 형벌)으로 처형된다. 진나라의 국력 신장에 적지 않은 위기의식을 느낀 연, 조, 제, 위, 한, 초 6국은 남북으로 길게 반진연맹을 구축함으로써 진에 대항하려 했다. 이를 합종책이라 한다. 이에 진의 혜왕은 공손연에게 합종책을 깰 방안을 구하라 명하고 마침내 진 재상 장의가 6국을 돌며 뇌물로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협박하면서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연횡"에 성공하였다. 이후 장군 백기의 도움에 크게 힘입어 초나라, 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서쪽에는 진, 동쪽에는 제가 맞보는 형국이 된다. 그쯤 주나라가 또다시 열국을 합종하여 진에 대항하려 하자 이를 이미 알아챈 진은 주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켜 버린다. 진의 정왕은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으나 외척인 재상 여불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왕이 22세가 되자 친정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외척 세력들을 숙청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법가 학자였던 그는 재상 이사, 장군 왕전 등을 등용함으로써 국력을 신장시켜 한나라를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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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진나라 2) 4) 진 (BC 221~BC 207) 그후 조, 연, 초, 위, 제를 차례로 쓰러뜨리고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루게 된다. 정왕은 자신을 시황제라 칭하여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중앙의 최고관리로 승상, 어사대부, 태위의 3공을 세우고 그 밑에 9경을 두어 정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전국을 36개의 군현으로 나누어 군수와 현령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것은 중앙의 관제와 지방 행정까지 황제가 모두 통괄하는 것으로 진나라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전국적인 도로와 관개수로를 건설하는 등 국가기반을 다졌으며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당시 진제국의 이름은 로마에까지 알려져 중국의 영문 표기인 china의 근원이 되었다. 진시황은 강력한 왕권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제국의 기틀을 만들었으나 크게 비판받는 일도 많이 행했다. 북방의 흉노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북방 5,000km에 이르는 성곽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거대한 궁전인 아방궁 축조, 진시황릉 축조, 병마용 축조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강행함므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또한 승상 이사의 건의에 따라 사상 통일을 위하여 법가 및 실용서적을 제외한 책을 모두 불태웠으며 수많은 유생들을 생매장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분서갱유라 한다. 말년에 진시황은 주술에 심취하여 불로초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많은 사람들에게 내렸지만 불로초는 찾지 못했고 BC 210년 지방 순시 중 죽었다. 시황제가 죽고 난 후 진 왕조는 서서히 몰락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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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한나라) 5) 한 진(秦) 말기에 진승, 오광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무장들이 봉기하였다.
한고조 유방도 이러한 무장 중 하나였다. 유방은 원래 농가태생으로 장년에 진의 하급관리가 되었으며 진시황릉의 공사에 인부 호송 책임을 담당했었다.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자 유방도 패땅에서 패공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후 항양(항우의 숙부), 항우와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진나라를 타도하였는데 항우의 군대가 진의 주력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유방은 항우보다 먼저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이른 항우는 홍문에서 유방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아방궁을 불태웠으며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유방은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 후 4년 동안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장양, 한신 등의 도움을 받아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에 도읍하였다. (BC 202년) 한 왕조의 통치조직은 대체로 진을 이어받은 군현제가 중심이었으나 한 왕조 건설에 공이 큰 공신들은 제후왕과 열후로 봉해졌다. 이것이 이른 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합시킨 군국제이다. 하지만 유방 생전에 공신들이 모두 멸망함으로써 제후왕은 모두 유씨가 봉해지게 된다. 그후 제후황은 한왕 일족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5대 문제는 여씨 외척세력을 모두 축출해내고 백성을 위한 통치에 힘써 사마천으로 부터 인제라는 평가를 들었다. 6대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내정이 안정되어 국고가 풍족해졌으며 조착을 등용하여 제후권력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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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한나라) 5) 한 이로 인해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으며 난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다.
7대 무제 때에는 제후왕의 통치 권력이 완전히 없어지고 군국제는 군현제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7대 무제는 수많은 북벌을 단행하여 한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수많은 원정 끝에 흉노세력을 고비사막으로 내 쫒았으며 한반도에도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으로는 장건의 원정을 통해 서역제국들을 복속시켰으며 장건에 의해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많은 원정과 궁정의 사치, 토목 사업 등으로 문제, 경제 때 비축되었던 국고를 많이 소진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세, 화폐제도 개선, 소금, 철, 술의 전매제 등의 재정 정책이 취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어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 선제 때에는 내정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계속된 무제의 독재적 통치기간 동안 황제의 측근들은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10대 원제 이후 황실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하였으며 13대 평제는 외척 왕망에게 독살당하게 된다. 평제를 시해하고 실권을 잡은 왕망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신이라 함에 따라 한제국은 일단 멸망하게 된다. 이 때를 기준으로 AD 8년 이전의 한을 전한, 그 후의 한을 후한이라 하여 구분한다. 왕망 잘못된 이상주의 정치로 내부 모순은 극에 달하였으며 이에 각지에서 농민과 호족이 들고 일어선다. 이 반란 세력 중 6대 경제의 후손인 유수가 농민과 다른 호족 세력을 물리치고 25년 낙양을 도읍으로 하여 한 왕조를 재건하는데 이가 곧 광무제이다. 한 왕조를 재건한 광무제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여 통일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며 후한 2대 명제부터는 다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북으로는 흉노를 압박하고 서로는 카스피해 동쪽까지 세력이 미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외척과 환관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정치의 문란이 심화된다. 이를 현신들이 비판하자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당고의 옥이라 하며 이후 한 왕조는 국력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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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삼국시대-위 ) 6) 삼국시대 1) 위(魏, 220년~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당대의 숙적 원소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의 영토가 당시 중국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병력과 인구 면에서도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역사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5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6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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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삼국시대-위)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魏公),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 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환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 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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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위나라 ) 서력 사건 155년 조조 태어남. 189년 조조, 향리에서 동탁 토벌을 위한 의병을 모집함. 192년
연주목으로 영입되어 정예군 청주병을 조직함. 196년 헌제를 봉대하고 허창으로 천도함. 둔전제 실시. 200년 백마, 관도에서 원소군을 무찌름. 207년 오환을 정복하여 평정. 210년 구현령과 술지령 공포. 213년 조조, 위공이 됨. 215년 조조의 딸, 헌제의 황후로 세워짐. 한중을 평정. 216년 조조, 위왕이 됨. 219년 조조, 한중을 잃음. 손권과 연합, 관우를 격파함. 220년 조조 서거. 조비, 문제에 오름. 후한 황조 멸망. 226년 조비 승하. 조예 즉위. 234년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 237년 요동의 공손연이 반기를 듦. 238년 사마의, 공손연의 난을 진압. 239년 조예 승하. 조방 즉위. 249년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당을 처형함. 251년 왕릉의 사마의 타도 계획 실패.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뒤를 이음. 254년 사마사 주살 계획 실패. 조방이 폐위되고 조모가 옹립됨. 255년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뒤를 이음. 257년 제갈탄이 오나라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다음해 진압됨.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토벌하려다가 살해됨. 조환 즉위. 263년 사마소, 상국지공이 됨. 촉나라 정복. 264년 사마소, 진왕이 됨. 265년 사마소, 죽음. 사마염이 뒤를 이음. 위 황조가 망하고 진 황조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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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중국역사 (삼국시대-촉한 ) 2)촉한(蜀漢, 221년~263년)은 중국 삼국시대 때 유비가 지금의 쓰촨 성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으로도 불린다. 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가 헌제(獻帝)를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자, 당시 익주(益州)와 한중(漢中)을 점거하고 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역사적으로 “촉한”이라 불린다). 수도는 성도(成都)이다. 유비 사후 후주 대에 이르러 진지·황호와 같은 간신의 발호와 무리한 북벌로 점점 쇠망의 길을 걷다가, 263년 위의 대대적인 정벌에 멸망하고 만다. 서력 사건 161년 유비 태어남. 184년 유비, 황건적의 난 진압에 사설 군대를 이끌고 활약함. 194년 유비, 예주자사에 임명. 도겸 사후 서주목을 겸임함. 196년 유비, 원술 토벌 중에 여포에게 서주를 습격당함. 198년 유비, 조조와 협력해 여포를 멸함. 199년 유비, 조조의 명으로 원술을 멸하지만, 조조에게 반기를 듦. 200년 유비, 조조에게 패해 원소 밑으로 들어감. 201년 유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해 유표 밑으로 들어감. 208년 유비, 제갈량을 군사로 영입함. 적벽대전 승리. 209년 유비, 형주목이 되어 손권의 누이(손상향)와 결혼함. 214년 유비, 익주를 평정함. 219년 유비, 한중왕을 칭함.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김. 관우, 손권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함. 221년 유비, 촉한 황조를 세우고 황제에 즉위함. 장비 범강, 장달에게 살해 당함. 222년 유비, 이릉에서 동오와의 전투에 대패. 오나라와 국교 수복. 223년 유비 승하. 유선 즉위. 225년 제갈량, 남만 정벌. 227년 제갈량, 출사표를 올리고 한중으로 진군. 228년 촉군이 가정에서 위군에게 패함. 229년 조운 사망. 제갈량, 무도·음평 2군을 평정함. 234년 제갈량, 사마의와 대치 도중에 사망. 군 퇴각. 244년 비의, 위 조상의 촉 침공을 격퇴함. 249년 강유, 옹주를 침공하지만 위군에게 격퇴됨. 256년 강유, 위를 침공하지만 위군에게 격퇴됨. 263년 위의 침공을 받아 유선은 위나라 등애에게 항복. 촉한 멸망. 264년 종회와 강유가 촉한 부활을 위해 성도에서 쿠데타하지만 실패. 강유와 종회 참살. 반란 직후 유선, 안락공으로 봉해져 낙양으로 압송. 271년 유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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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오나라 ) 3) 오(吳, 229년 ~ 280년)또는 동오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의 하나로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재를 갖추었으며 적극적으로 군사 침공을 하지는 않고 방어에 충실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촉한, 위와 화평을 맺는 유연한 외교술을 펼쳤다. 위촉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다. 손견과 손책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마지막 황제인 손호가 진의 사마염에게 항복함으로써 삼국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연혁 오나라는 229년(황룡 원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280년(천기 4년) 진에 항복하기까지 4대 52년에 걸친 왕조다. 오나라의 손권은 위의 조조, 촉한의 유비와 비교하면 이미 손견과 손책이 쌓아올린 기반이 있어 처음부터 혜택받은 인물이었다. 오나라의 시조가 되는 손견은 일찍이 이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의 자손이며, 17살 때 해적을 퇴치해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가 되어 각지의 반란 진압을 맡고, 반동탁 연합군에도 가세하지만 192년(초평 3년) 유표를 토벌하던 중에 허무하게 죽고 만다. 당시 손견은 일개 태수에 불과해 손견이 죽은 다음에는 영지와 병사 모두 근처의 원술에게 흡수되고 만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세상에 손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황개, 정보, 주치 등과 같은 신하는 계속해서 맏아들 손책을 받들게 되었다. 손책은 실질적인 오나라의 창업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후 독립해 강동에 기반을 쌓고, 친구 주유와 협력해 세력을 확대해 갔다. 손책은 성격이 활발하고 기꺼이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그 당시 장소, 장굉, 태사자, 여몽, 주태, 장흠 등과 같은 문무 관리가 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손책도 200년(건안 5년) 허공 밑에 있던 객의 손에 의해 26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손책은 임종을 맞을 때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세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가 더 낫다.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낫다”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내정에는 장소, 군사에는 주유를 각각 보좌역으로 선정해 손책의 유언대로 오나라가 운영되어갔다. 이리하여 겨우 19살 때 손권은 오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흔히 정권 교체기에는 휘하의 신하가 무더기로 퇴출당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손권은 손책의 신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중요 인물인 주유가 솔선수범해 손권에게 충성을 바친 것도 이유였지만, 역시 젊은 손권이 위업을 이룰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권의 치세에는 노숙, 제갈근, 감녕, 서성 등의 인재들도 가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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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오나라 ) 208년 유비와 연합해 천하 통일을 노리는 조조의 야망을 적벽에서 분쇄하였다. 그 뒤 유비와 형주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219년에는 관우를 공격해 형주를 평정하였다. 그 사이 조조에게 순응해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221년 촉한이 오나라를 침공하자 육손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지만, 다음해에는 유비와 화해해 국교를 수복했다. 권모술수가 팽배한 당시의 난세에서 손권의 이러한 유연한 외교술은 오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229년 손권은 마침내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오나라는 또한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후계자 선정 실패로 오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태자 손등이 손권 재위 중에 죽자 손권은 손화를 새로운 태자로 내세우지만, 동시에 동생 손패도 아껴 노왕으로 봉하고 태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신하들도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게 된다. 당시 승상인 육손이 “적자와 서자 사이에는 마땅히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간언하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오히려 손패파의 참언을 믿어 육손은 유형에 처해지고 곧이어 분사하고 만다. 이 권력 투쟁에서 유능한 신하 수십 명이 방출되거나 처형되었다. 250년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동시에 태자로 즉위하려고 한 손패에게 자결을 명해 결국 막내아들인 손량을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2년 후 손권은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남기고 죽고 만다. 그후 손량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한 제갈각이 손준에게 살해되었고, 손준은 오의 실권을 쥐었다. 손준이 죽자 그 권세는 손준의 종제 손침에게 넘어갔다. 258년 손량은 실권을 장악한 손침을 주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손침은 손량을 내쫓고 폐제의 형이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 손휴를 황제로 옹립하니 곧 오 경제(景帝)다. 경제는 손침의 쿠데타를 알고 그를 체포해 처형한다. 264년 경제가 죽고 때마침 촉한의 멸망과도 겹쳤기 때문에 이 기회에 훌륭한 황제를 세워 거국일치로 오나라를 융성시키려 했다. 이때 지목된 사람이 바로 앞서 태자에서 폐위된 손화의 아들 손호다. 그런데 다음 황제가 된 손호는 성질이 포악하고 오만방자해 대사면을 연발하는 한편, 손휴의 아들 4명을 체포해 위로 2명을 죽였다. 더구나 연회 자리에서 신하들을 취하게 만들어 허튼 언동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안면을 벗겨내거나 눈을 도려내는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또 환관 금혼을 총애하고, 백성들을 가혹한 노역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심은 급속도로 나빠져갔다.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호는 어이없이 그대로 항복하여, 중국대륙은 통일되어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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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오나라 ) 서력 사건 156년 손견 태어남. 184년 손견, 황건적을 토벌함. 190년
손견,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 192년 손견, 유표 공격 중 전사. 아들 손책이 뒤를 이음. 194년 손책,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함. 197년 손책,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절교. 200년 손책,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음. 동생 손권이 뒤를 이음. 208년 손권, 유비와 합심해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 209년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음. 213년 조조와 유수에서 전투를 벌임. 215년 합비에서 장료의 기습을 받아 대패. 217년 손권, 조조와 화전함. 219년 손권,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평정. 221년 손권, 오왕으로 봉해짐. 222년 촉한과 국교 수복. 223년 위나라와 국교 단절. 228년 육손, 석정에서 조휴를 격파. 229년 손권, 황제를 칭함. 241년 태자 손등이 죽음. 손화를 태자로 책봉. 250년 태자 손화를 폐하고, 손량을 태자로 책봉. 252년 손권 승하. 손량 즉위. 257년 제갈탄의 반란에 원군을 보내나, 진압됨. 258년 손량 폐위. 손휴 즉위. 264년 손휴 승하. 손호 즉위. 280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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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진나라 ) 진(晉, 265년 ~ 419년)은 사마염이 세운 통일 왕조인 서진(西晉, 265년 ~ 316년)과 남북조 시대의 남조 왕조 중 하나인 동진(東晉, 317년 ~ 419년)으로 이루어진 왕조이다.(서)진이 동진으로 된 이유는 북방민족들에게 화북지방을 빼앗겨 하는 수 없이 강남으로 내려오게 되어서이다.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은 중국의 왕조이다.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중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했다. 건국 초기 무제 사마염은 안정적인 정치로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져나갔으나, 말년에 사치에 빠져 온나라가 향락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국장의 문란이 더해가던 혜제 때에 이르러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들이 팔왕의 난을 일으켜 국운이 기우고 만다. 무려 16년 동안 팔왕의 난이 중국을 휩쓸고 있던 중에, 중국 내륙에 이미 정착해있던 많은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영가의 난을 초래하게 되었고 서진은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나라에 건국 52년 만에 멸망했다. 황실의 일족인 사마예가 당시 건업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중원의 호족과 강남 토착 호족들의 추대에 힙입어 317년 동진을 세워 진나라의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은 중국의 서진 왕조가 유연(劉淵)의 전조(前趙)에 의해 멸망한 후, 사마예에 의해 강남(江南)에 세워진 진(晉)의 망명 왕조이다.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른다. 306년 서진 말기에, 영가의 난(永嘉의 亂)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었고, 회제가 포로가 되어 사실상 서진은 멸망하였다. 진의 낭야왕(琅邪王)인 사마예는 건업(建業)으로 피하여 낭야의 호족 왕도의 힘을 빌려 이 땅에 동진을 건국했다. 약 100년간 11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화북으로부터 피해 온 북쪽 세력과 강남 토착의 호족 세력과 협력으로 운영되었다. 현대와는 달리, 당시의 화남 지역은 중국 대륙 안에서는 인구가 희박하고 낙후된 지역이었으나 화북지방으로부터 온 피난민은 초기에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세제상 혜택을 주어 적극적으로 유랑민을 받아들이고 미개지 개간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로, 원래 습기가 많아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여, 경제적으로 당시의 화북 지방과 겨룰 정도로 번영하였다. 제 9대 효무황제때 전진의 남하정복 전투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383년 비수 대전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넘기지만 이때부터 농민 반란이 잦아지자, 무장 환현이 반란을 탄압한다는 명분하에 거병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유유가 이를 진압하고 이에 대한 명분과 북벌 성공으로 새로이 집권에 성공한 뒤 아예 새로 왕조를 세워 왕위에 오르면서 동진은 멸망하게 되었다. 유유가 새로 세운 나라의 이름은 송이며, 이는 남북조 시대에 강남에 세워진 남조의 첫 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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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오호16국)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는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5개의 비한족을 비롯한 16개의 국가가 회수(淮水)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前趙)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5호(五胡)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 등 다섯가지의 오랑캐(胡: 비한족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를 가리키는 말인데, 갈족은 흉노의 일파로서 따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갈족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을 건국한 것이나 선비족에서 탁발부(拓跋部), 모용부(慕容部), 독발부(禿髮部), 걸복부(乞伏部)가 각자 독립적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북방 민족의 구체적 수를 헤아리는 데 별 의미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5라는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오호는 “비한족계 여러 민족”이란 말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16국이란 말은 북위 말엽의 사관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 서진 말기에 일어난 황위 계승 다툼은 엄청난 규모의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진은 황족을 왕으로 봉하며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그 결과 황위 계승권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 여럿 존재하였다. 8명의 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벌인 이 내란을 팔왕의 난이라 부른다. 팔왕의 난은 306년에 끝났지만, 이로 인하여 서진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8왕의 난 당시 왕족들이 전투를 위해 중국 내지에 정착해 살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써 이들의 입지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때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서진의 쇠퇴를 호기로 삼아 304년 병주(并州 ; 지금의 산서성)에서 자립해 한(漢)을 세웠다. 같은해 사천(四川)에서도 이웅(李雄)이 자립하여 성한(成漢)을 건국하였다. 감숙(甘肅) 지방에서도 서진의 양주자사였던 장궤(張軌)가 독립적인 정권{전량(前凉)}을 세웠으며 탁발부는 대(代)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연은 갈족 출신의 석륵과 한인 출신 장군 왕미(王彌)를 시켜 병주 일대를 공략하고, 308년 황제를 칭했으나, 310년에 죽고 아들 유화(劉和)가 이를 계승하였다.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 유총(劉聰)이 제위를 찬탈했다. 유총은 311년에 낙양(洛陽)을 함락하고 서진 회제(懷帝)를 붙잡았다. 이것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후 장안에서 민제(愍帝)가 옹립되었으나, 316년에 유총에게 패하여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에 서진의 왕족이었던 사마예가 남쪽의 건업(建業)에서 진을 재흥시키니 이 나라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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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오호16국) 한은 유총 사후 후계자 쟁탈전에서 유요(劉曜)가 승리하여 즉위하였으며 국호를 조(趙)로 고쳤다. 그러나 하북 정벌에 나섰던 석륵이 자립하여 하북·하남·산동을 장악하여 낙양을 경계로 유요 정권과 화북을 양분하게 되었다. 석륵 또한 국호를 조(趙)라고 하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유요 정권은 전조, 석륵 정권은 후조(後趙)라고 불렀다. 328년 유요가 낙양을 탈환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석륵의 조카 석호(石虎)에게 대패하여 포로가 된 뒤 살해당하니, 전조는 국력이 쇠퇴하여 후조에게 멸망하였다. 화북 대부분을 장악한 후조에서는 333년 석륵이 죽고 석홍(石弘)이 즉위했으나 석호가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석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석호는 수도를 업(鄴)으로 옮겼고, 이 시기가 후조의 최전성기였다. 349년에 석호가 죽자 석륵의 양자 석민(石閔)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즉위하였다. 석민은 이후 본래 성인 염씨(冉氏)로 돌아가고 염위(冉魏)를 세웠다. (염위는 워낙 단명한 왕조라 16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후조는 351년에 염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염위는 이민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였고 다수의 한인이 갈족을 상대로 대량의 학살을 벌였다. 한편, 337년 요서(遼西)에 근거지를 둔 모용부가 모용황(慕容皝)을 중심으로 전연(前燕)을 세우고, 349년 이후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타 중원에 진출하였다. 전연은 352년에 염위를 멸망시켰으며, 같은 시기 섬서(陝西) 지방에서 저족의 부건(苻健)이 장안에서 전진(前秦)을 건국(350년)하였다. 화북이 혼란해지자 동진의 실권자 환온(桓溫)은 347년, 성한을 멸망시켜 촉(蜀) 지역을 장악하고 북벌을 감행하여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전진의 국력이 증가해 360년에는 화북을 전연과 양분하였다. 부건의 뒤를 계승한 부견(苻堅)은 뛰어난 인물로 한인 왕맹(王猛)을 등용해 국력을 키우며 대대적인 정벌로 각 나라를 정벌해 376년 화북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진 정벌을 계획하여 100만이라 부르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가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군에게 대패한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은 단번에 쇠퇴하고, 각 민족이 제각기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북·하남·산동 일대에는 후연(後燕)이 건국되고, 병주에는 대(代 ; 북위(北魏))와 서연(西燕)이 세워졌다. 섬서에는 후진(後秦)과 서진(西秦)이 생겼고, 감숙에는 후량(後凉)이 태어났다. 그 외에도 감숙 지방에는 여러 민족에 의해 약소국가들이 할거하였다. 이들 가운데 모용수(慕容垂)의 후연과 요장(姚萇)의 후진이 가장 강력했다. 후연은 서연을 멸망시키고, 후진은 전진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하였고 다시 화북을 동서로 양분하였으나, 탁발부의 북위와 흉노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국한 하(夏)가 이들을 누르고 강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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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오호16국) 후진 또한 하에게 공격을 당해 영토를 빼앗기다가 417년 동진의 유유(劉裕)에게 멸망 당했다. 유유는 410년에 남연도 멸망시켰고, 그 공적으로 선양을 받아 송(宋)을 건국한다. 하는 유유가 물러간 뒤 장안을 탈취해 북위와 함께 화북을 양분했으나, 427년 북위에게 패한 뒤 쇠퇴를 거듭하다 431년에 멸망 당하고, 북위는 436년에 북연을, 439년에 북량(北凉)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니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는 끝나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시작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사회 화하족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민족적 자아의식은 없었다. 한대에 이르러 중원의 사람들이 국가 강역 내 일개 공동 민족이며, 그 외 지역의 민족은 오랑캐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한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생겨났다. 중국 사학자들은, 오호십육국시대는, 중국의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대량 유입된 시기로서, 이후 중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대규모의 민족 융합이 일어난 시기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동북쪽에는 오래된 유목 민족 두 개가 존재하였다: 흉노족과 동호족이 그것이다. 흉노족의 한 갈래는 한대에 유럽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갈래(갈(羯) 포함)는 오호십육국 시기 철저하게 한족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 북방 유목 민족이 중국 중원으로 진출한 시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 당시 수 년간 이어진 전란 때문이었다. 익주(益州) 사천(四川) 지방, 전량의 하서주랑, 전연의 요하 유역으로는 대량의 중원 난민이 이주해왔다. 실크로드가 이어진 하서의 고장(姑臧) 지방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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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남북조 시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589년)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 강남에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또한 같은 건강(建康; 건업(建業)의 새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동진, 수나라까지 합쳐 육조(六朝)라고 불러 이 시대를 육조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주로 문화사를 다룰 때 쓰이는 시대 구분이다. 이 시대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문화와 불교 등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여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했다.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北魏)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제을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거한 중국적인 국가로 탈피했다. 북위는 육진의 난(六鎭之亂)을 거치면서, 534년에 동위(東魏),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동위는 550년 북제(北齊)로 정권이 바뀌고, 서위는 556년에 북주(北周)가 대신했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 후 581년 수나라의 양견이 북주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른다.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화북의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의 5개 왕조를 가리켜 북조(北朝)라고 불렀고, 여기에 수나라도 합쳐야 한다는 설도 있다.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에는 수나라를 북조에 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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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수나라) 수나라 화북을 통일한 북주를 대신해 정권을 차지한 수나라의 문제는 통일을 향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북쪽의 돌궐에 대해 만리장성의 복구를 실행했고, 장강에 버려진 운하를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괴뢰국가였던 후량을 멸망시켜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준비가 끝난 문제는 588년 차남 양광(楊廣; 후에 양제)를 총사령관으로 한 총병력 51만 8천 명의 대군을 보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해 우물 속에 숨어 있던 후주를 사로잡으면서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서진이 멸망한 때부터 273년이란 긴 분열의 시대였고, 서진의 짧은 통일기간을 제외하면 400년에 가까운 분열을 겪었던 중국은 재통일에 이르렀다. 하지만 수나라의 통일도 2대 양제의 시대에 빠르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 뒤를 계승한 당나라는 다시 중국을 재통일 한 후 약 300년간 지속하였다. 이 기나긴 분열의 시대에 생겨난 유형무형의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분열을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수(隋, 581년 ~ 618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서진이 멸망한 후 분열되었던 중국을 약 300년 만에 재통일한 왕조이다. 그러나 2대 황제 양제 때 폭정(暴政)으로 인해 멸망하고, 그후 약간의 혼란기를 거쳐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 수도는 대흥성(大興城: 현재의 시안(長安))이었다. 양씨는 북위(北魏)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楊堅)의 아버지 양충(楊忠)에 이르게 되었다. 무천진은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을 북쪽의 유연(柔然)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던 군사기지중 하나였다. 북위 황실인 탁발씨(拓跋氏)를 원씨(元氏)로 바꾸는 등 선비풍(鮮卑風)의 이름을 중국풍으로 고치는 정책이 진행되었으나, 북주시대에 이르러 이에 반발하여 이것을 다시 선비풍으로 고쳤다. 이때 한인이었던 양씨도 보육여(普六茹)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제 양씨는 선비족 출신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기에, 본래 성씨가 보육여라 생각되어, 북위의 한화정책시에 내려진 성씨가 양씨라는 견해도 있다. 수나라 건국 양견의 부친 양충은 북위가 서위(西魏), 동위(東魏)로 분열될 때(후에 각각 북주(北周), 북제(北斉)로 교체되었다.) 우문태(宇文泰)를 따라 서위을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수국공(随国公)의 지위를 얻었다. 568년 양충이 죽자, 양견이 대장군-수국공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북주의 무제(武帝)는 숙적 북제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남쪽의 진(陳)을 멸망시키기에 앞서 북쪽의 돌궐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576년에 병사(病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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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수나라) 수나라 무제의 뒤를 계승한 선제(宣帝)는 기괴한 인물로 5명의 황후를 가졌다. 그중 한명이 양견의 장녀였던 여화(麗華)였고, 여화는 우문 (宇文闡)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후에 정제(静帝)였다. 선제의 기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재위 8개월 만에 퇴위하며 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하며 정무를 내팽개쳤기에 정제의 뒤를 보살피던 양견에 대한 성망(聲望)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580년 선제가 죽자 양견은 섭정으로써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무천진 군벌내 실력자들은 양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 위지동(尉遅迴)에 의한 것으로 한때 양견이 장악한 관중지역 이외 모든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양견은 교묘하게 이것을 각개격파하여 북주내에서 패권을 확고히 다졌다. 그해말에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이윽고 다음해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양견은 제위에 오른 뒤 문제(文帝)라는 시호를 사용하였다. 중국 통일 이미 북주 무제에 의해 중국 통일에 대한 진행이 이루어진적이 있었으나, 신중한 문제 양견은 세밀하게 준비를 진행해 나아갔다. 즉 북쪽의 돌궐에 대해선 장성(長城)을 복구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그리고 회하(淮河)와 장강(長江)을 연결하는 한구(邗溝)를 개착(開鑿)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곧이어 남조(南朝) 양(梁)으로부터 분열되어, 북조(北朝)의 괴뢰정권이라 할 수 있던 후량(後梁)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588년 문제는 기어코 진나라에 대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楊廣; 후에 양제(煬帝))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과장되었다고 생각되는 대군 앞에 다음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은 손쉽게 함락되어, 진나라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우물에 숨어 있다가 사로잡혔다. 이로써 서진 멸망 이후, 혹은 더 넓게 보면 184년 황건적의 난 때부터로 보면 약 405년이라는 기나긴 분열시대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즉위한 직후부터 내정면에서 다음과 같이 개혁을 진행해 나아갔다. 《주례》(周禮)와 선비 회복정책을 진행하던 북주의 노선을 중지하고, 북제의 제도를 참조하여 개혁을 진행해 나아갔다. 581년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하였는데, 이 율령에서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법을 간소화시켜 알기 쉽게 고친것으로 후에 당의 율령도 또한 이 개황율령을 답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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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수나라) 관리제도도 대개혁을 시행해, 최고기관으로써 상서성(尚書省), 문하성(門下省), 내사성(内史省;당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의 3성을 설치하고, 상서성 아래에 문서행정기관인 6부(六部), 말하자면 인사담당인 이부((吏部), 재정담당인 도지부(度支部), 의례(儀禮)담당인 예부(禮部), 군사담당인 병부(兵部), 법무담당인 도관부(都官部), 토목담당인 공부(工部) 등 6개였다. 그 아래에 실무기관인 9사(寺), 또 이것을 별도로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인 어사태(御史台)를 설치했다. 지방에 대해서도 이때까지 쓰여오던 주(州)->군(郡)->현(縣)이란 구분을 없애고, 주->현이란 2단계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치적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 칭해지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과거(科挙;정식으로는 공거(貢挙)의 실행이었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때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에 의해 관리 임명권이 귀족세력의 손에 있었다. 과거는 지방호족의 세습적인 임관이 아니고, 실력시험의 결과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한다는 매우 개방적인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여 관리 임명권을 황제의 손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이점도 노렸다. 이렇게 문제에 의해 정비된 여러 제도는 거의 대부분이 후에 당나라가 물려받아, 당나라 300년의 역사를 지탱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를 그 원호(元號)에 의거해 개황의 치 라고 불렀다. 양제의 치세 문제의 황후였던 독고황후는 매우 강한 성격의 여성으로 문제에게 자신 이외의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라고 서약을 맺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 황제로써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거기에 독고황후는 문제 주위를 엄격하게 감시하여 문제가 어떤 여성을 가까이 하는지를 경계하였다. 문제와 독고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양용(楊勇)이 처음엔 황태자가 되었으나, 양용은 놀기를 좋아하고, 여색을 즐겼기에, 검소함을 즐기는 문제, 정조를 중시한 황후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를 대신에 양친의 기분에 맞게 비위를 맞춘 차남 양광이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604년 문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양광은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양제였다. 양제는 즉위 후 즉시 동생들을 계략으로 살해하여 라이벌을 없앴다. 이때문에 문제의 죽음에 대해서도 양제의 모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생겨났다. 양제는 검소함을 즐기던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사치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기피하던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진행하여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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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수나라) 주요한 것으로는 수도 대흥성 건설과 대운하(大運河)를 대폭으로 연장하여 하북에서 강남에까지 서로 연결하게 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중단한 고구려원정을 3번에 걸쳐 실시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여러차례 진행된 대규모 토목과 군사행동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일어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확대되었다. 양제 자신은 순례행차중에 강도(江都)에 머물면서 반란진압 지휘를 맡았으나,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반란이 확대되면서 패권을 잡으려는 군웅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양현감의 참모를 맡았던 이밀(李密)은 북주 8주국(八柱國) 이필(李弼)의 손자로써 관롱귀족집단(関隴貴族集団)중에서도 상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양현감의 전사후 낙구창(洛口倉)이란 수나라의 거대 식량저장기지를 손안에 넣는 데 성공하여 대규모의 백성을 모았다. 이밀과 격렬하게 항쟁한 사람은 서역출신으로 수나라 장군을 지냈던 왕세충(王世充)이었다. 고구려원정군에서 탈주하여 같은 탈주병들을 모아서 하북에서 세력을 키운 인물은 두건덕이 있다. 그리고 수나라의 태원(太原)태수로 있던 이연(李淵;후에 당나라 고조)은 대흥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 대왕(代王) 양유(楊侑;공제유(恭帝侑)를 옹립했다. 잇단 보고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술에 취해 듣지 않다가, 618년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군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근위군단은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주도하에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옹립하고 북쪽으로 귀환하는것을 희망했으나, 도중에 두건덕의 군에게 대패하여 소멸하였다. 양제의 죽음을 들은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한다. 같은 시기 양제의 죽음을 알게되어 618년 낙양에 있던 월왕(越王) 양동(楊동)는 신하들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나, 619년 왕세충에게 찬탈되어 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양제의 양(煬)의 한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한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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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당나라) 당(唐 618년 - 907년)은 수나라(隋) 이후 건국된 중국의 왕조이다. 당나라는 선비족 계열의 귀족인 이연(李淵)에 의해 세워졌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을 세워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건국 당시 당나라는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려 돌궐의 요구에 여러 차례 굴복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창국과 비단길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도 정비하였다. (조용조)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당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태종의 이러한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후 잠시 쇠퇴 하였다가 현종이 즉위하자 당나라는 다시 전성기를 누리는 데 이를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한다. 이 시기는 서방의 조로아스터교, 경교가 전래될 정도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또한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토번(吐蕃),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당의 멸망 토번, 돌궐 등의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국력이 약화된 당나라는 현종 재위 말기부터 귀족들의 장원토지가 증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755년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 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3성 6부제를 실시하여, 3성은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尚書省)으로 나누고, 6부는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로 나누었다. 율령 체제는 당나라의 행정법으로써 당나라 통치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다. 3성 6부로 이뤄진 통치 조직과 지방에 설치된 주,현 체제로 인해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지방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였다. 토지제도는 균전제였고 조세제도는 조용조, 군사 제도는 부병제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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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당나라) 당나라는 귀족중심 사회였고 그들은 과거와 음서라는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당나라 때는 차가 처음으로 재배되어서 해외로 많이 수출됐다. 또한 화북 지방에는 2년 3모작이 가능하게 되어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고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비단길을 통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상업이 발달하고 양저우 같은 도시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화폐 유통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어음인 비전이 사용되었고 행이라는 상인 조합도 생겼다. 문화 과거 제도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학 역시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매우 발전하였고 현장이 지은 대당서역기라는 책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 때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마니교 등도 전파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 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수입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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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송나라) 송나라 세종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겨우 7살의 시종훈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북한은 요나라의 후원을 얻어 후주를 침공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이 세종의 제일 측근이었으며,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금군사령관)이었던 조광윤(후에 송나라 태조)이었다.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조광윤을 강제로 옹립하였다.(진교의 변) 수도에 돌아온 조광윤은 시종훈을 보호하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태조는 이때까지 군인이 정치를 맡았던 오대의 경향을 고치고 문치주의를 내세웠다. 과거의 정비 및 지방군대의 약체화와 중앙군의 강화, 절도사직의 무력화등을 진행해 내부를 튼튼하게 한 태조는 후주 세종의 노선을 물려받아 통일에 대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즉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그때 10국은 동서로 분열되어서 단결하여 송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어려웠다. 뒤이어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하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이 죽음에 태조의 동생이며, 2대 황제 태종이 된 조광의에 의한 독살의혹이 있었다.(천극불결의 의) 태종은 태조의 방침을 이어받아 통일을 진행해 978년 오월을 멸망시키고, 979년 북한을 멸망시킴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멸망 후 약 70년 만의 일이었다. 오대 십국 시대는 심심찮게 각종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어떤 탐관오리는 자신이 타 지방으로 발령될 때 백성들이 휘파람을 불자 몇 개월 후 다시 돌아와서 휘파람세 수백 냥을 징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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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요나라) 요(遼, 916년 년)또는 거란국은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엘리아바오지(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엘리아바오지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요나라가 이때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하지만 120년 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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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송나라) 송(宋, 960년~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 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전의 왕조들과는 달리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 시기 당나라 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 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사회 과거제도는 수나라의 문제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과거가 실제적인 의미로써 효력을 발휘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대 어느 시대보다도 매우 왕성하게 과거제도가 이루어진 시기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하였고, 1번에 약 3~400명이 합격하였다.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위병제(傭兵制;모병제)였다. 태조는 금군(禁軍)의 제도를 고쳐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장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명에 달했으나, 숫자만 많을뿐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다. 사료에서도 중국 통일후의 송나라군의 전력(戰歷)은 승리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또한 보병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기병을 주력으로 한 요나라 및 서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 140만에 달하는 막대한 병사를 고용하기 위해 쓰이는 군사비나 외세(요나라,서하,금나라등)하고 평화유지를 위해 많은 세페를 바쳐야했기에 국가예산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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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송나라) 8대 황제 휘종(徽宗)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써, 그의 회화는 북송시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로써 한 일은 채경(蔡京), 고구(高俅), 이언(李彦), 동관(童貫)등 황제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측근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을 위해 거대한 정원석 및 정원목을 먼 남쪽에서 운반하는 데 거액의 국비를 사용하고(화석망),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신법을 이용하여 증세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민중반란이 빈발하고, 군대는 이들을 진압하기에 바빴다. 이 시기 반란중 한 가지에 힌트를 얻어 이야기를 부풀리고, 강담으로써 널리 퍼져, 후에 이것을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수호전(水滸伝)』이다. 이때 북쪽의 숙적이던 요는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진족은 요의 착취에 대항해 부족이 단결하여 1115년 스스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금이었다. 이 여진족을 주목한 송 정부는 금에 대해 공동으로 요를 공격하자고 약속하였다.(해상의 맹세) 1121년 금과 공동으로 출병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연운십육주의 일부를 되찾았으나, 반환 전에 연운십육주 전 지역은 금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북방으로 강제 이주 당했기에 당분간 이 지방에서 세수를 바라지는 못했다. 이 금에 대항하기 위해 요의 잔당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금의 분노를 사게 되어, 1127년 개봉을 함락당하고, 황제 흠종, 상황 휘종을 북쪽으로 연행해 갔다. 이것을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지형 및 기후 관계로 금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던 회하 이남의 땅을 확보하여 송을 재흥하였다. 이때부터 송을 남송이라고 불렀다. 당이 각지에 군벌이라고 불리는 절도사의 할거를 용인하여 이윽고 오대십국 시대의 병란까지 이르는 것을 본 태조 조광윤이 세운 송 왕조는 각지의 유력자 세력을 전시(殿試)를 실시하는 등, 과거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해 명실 공히 문신 관료체제가 완성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진나라 이전, 오호십육국 시대, 남북조 시대, 오대십국 시대의 군웅 할거 상황은 이 이후 중화 왕조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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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금나라) 금(金, 1115년~1234년)은 북방 유목 민족 중 하나인 여진족 아구다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구다가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中都)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金)왕조는 거란족의 요를 합병(거란족 중 왕족의 한 명인 야율대석은 거란족을 포섭해서 서요를 세우나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중도 북쪽에 대도(大都)를 건설하였다.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요나라의 지배(동단국)를 받았다. 하지만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지리적 요건과 시간적 요건(오대 십국시대))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115년 아구다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정안국이라는 나라안에서 지배를 받던 피지배층이였기 때문에 통합이 잘 될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2대 태종 때인 1125년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를 멸망시켰다. 1126년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 성의 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에 송나라의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점차 스스로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중국 한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1189년에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년 ~ 1223년)은 1214년에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34년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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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원나라) 원나라(元 ; 중국 대륙에 있던 국가로서는 1271년~1368년, 유목국가로는 1271년~1635년)는 일반적으로 중국이 몽골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몽골족의 정복 왕조 원나라는 중국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한 영역을 지배하다가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 뒤 ("북원"),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존속한 몽골인 왕조로서, 몽골 제국의 대칸 직할 세습령이었다. 정식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 원나라는 송나라 를 멸망시킨 이민족의 정복 국가이며, 중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이후 명나라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물려주게 된다. 원나라는 중국을 지배했으되 한족화 되지는 않았으며, 지배층뿐 아니라, 제도 및 문화에서도 기존 몽골 제국의 유목 국가적인 특성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원나라라는 호칭 대신 유목민의 나라를 가리키는 울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원 울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다. 그러면서도 중국화된 명칭과 제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원나라가 성립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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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명나라) 명나라의 건국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왕통은 단절되었다. 명(明, 1368년 년)은 중국 역대 왕조중 하나로써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의 왕조이다. 대명(大明)이라고도 불린다. 멸망 후에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재건을 목표로 한 남명(南明)정권을 제압하여 중국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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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청나라) 청나라의 건국 1616년 만주족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때 청의 팔기군이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發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의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을 받았는데, 이들을 기선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이 때 학살당한 인원수는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됬다는 주장도 있다.3 이 주장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어도,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정복 초기에만 학살이 있었을 뿐, 이후에 체제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 하면서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청나라의 쇠퇴와 멸망 강희제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더러는 직접 지배하고 더러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렸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백련(白蓮, 1796년-1804년),·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쇠퇴로 기울었다. 한편, 영국은 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기무렵에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했으나, 청조는 이를 반대하여 아편 무역을 금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1840년-1842년)을 시작하여 승리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넘어갔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이 쇄도해옴으로써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내면에서는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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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 또한 당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이 일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제2차 아편 전쟁이후, 청나라는 휴전에 중재역할을 한 러시아 제국에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지방을 할양해야만 하는 서구 열강세력들로부터 이권 침탈이 더욱 심화되어갔다. 태평천국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과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앞세운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天京:태평천국이 난징을 고쳐 부른 이름)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洋務)은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일어났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켜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여 무술개혁(戊戌)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西太后)· 이홍장 등 기존세력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과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체결하며 청조는 쇠퇴해갔다. 또한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서태후는 유학생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낡은 과거 제도 대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최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인해 1912년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그 영토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 1949년에 중국 본토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타이완 섬은 분리되어 중화민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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