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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 : Boltz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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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ltzman, Ludwig Eduard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통계역학의 창시자 엔트로피에 대한 새로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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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생애 ㄹㅇㄹㅇㄹㅇ 1844년 2월 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1866년 빈대학 졸업
1867년 그라츠에서 수리물리학의 교수로 임명 1870년경 분젠, 키리히호프, 헬름홀츠등과 함께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대학에서 같이 연구 1873년 빈대학에서 수학을 강의 1876년 그라츠대학에서 실험 물리학 교수 맥스웰의 이론을 확증하기 위해 여러 기체와 고체에 관한 중요한 측정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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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그라츠에서 뮌헨으로 옮김 1894년 빈 대학의 물리학 교수 슈테판 교수의 사후 후계자로 옮 1895년 뤼베크 회의 (오스트발트와의 논쟁)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김 1903년 빈대학으로 돌아감 (마흐의 후임) ‘자연과학의 방법과 일반이론’ 자연철학 강좌 1904년 미국 방문 세이트루이스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서 강연. 캘리포니아 여행. 여행기 작성 1906년 9월 5일 뒤노만에서 휴가중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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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평판 ㄹㅇㄹㅇㄹㅇ 엥겔베르트 브로다 - “과학연구에서의 대단한 성공, 자
연과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의 온전한 향유, 낙천 주의와 유머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맥스웰 - “볼츠만의 연구란 정말로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나의 논문이 짧아서 이해를 못하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반대로 나는 그의 논문이 너무 길어서 멈칫거리게 되는군요. 그래서 나는 그 찬탈자들의 영광스런 모임에 끼어들어서 모든 것을 6줄 정도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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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 “엔트로피의 의미를 실로 깊이 있게
이해한 사람” 학문적인 공격을 받는 것에 매우 민감하였으나 신랄한 논쟁에 끼어드는 것을 꺼리지도 않음. 쉴러를 좋아해서 쉴러 없이는 정신적 의미로서의 자기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 글을 대단히 잘 씀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모임 가족을 위해 오페라 극장에 고정적인 예약을 함 명강의자로도 유명 여러 대학을 옮겨다녔으며 여행을 많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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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의 이론 맥스웰-볼츠만 속도분포함수 볼츠만의 H-정리 볼츠만 상수 슈테판-볼츠만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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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세무공무원이셨다고 하는데 볼츠만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신건지는 잘 모르겠고 볼츠만이 어렸을 때는 나비나 풍뎅이를 잡으로 교외로 소풍을 떠났다고 하는 애기만 있는걸로 봐서는 신동소리들으면서 자랐던건 아닌 것 같고. 할아버지가 시계만드는 기술자 셨는데, 할아버지를 닮아 기술자의 소질이 있었다고 함 1866년에 기체분자운동론에 관한 연구로 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때 그의 교수중에 복사에 관한 연구를 한 요제프 슈테판과 유명한 선배중에는 분자의 크기에 관한 몇 개의 신빙성이 있는 값을 처음으로 알아낸 요제프 로슈미트가 있음. 1870년경에는 베를린 대학과 하이델 베르크대학에서 분젠 키리히호프 헬름홀츠등과 같이 연구를 했으며 1876년에 그라츠 대학에서 실험 물리학 교수로 왔으며 이당시에 유명해져서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 스반테 아우구스트 아레니우스등 많은 물리학자들이 함께 연구하기 위해서 그라츠로 모였다고 하네요, 원래는 이론물리학자였는데 맥스웰의 이론을 확증하기 위해 여러 기체와 고체에 관한 중요한 측정들을 수행하다가 1877년에 엔트로피를 확률로 나타내어 특정기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형상태로 접근하는 경향을 나타냄, 1890년대에 뮌헨으로 왔다가 1894년에는 다시 슈테판교수 대학시절 그의 스승의 사후 후계자로 빈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왔고 이 1890년대에 볼츠만이 마하나 오스트발트 같은 사람들에게 에너지와 관련한 문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하는 음속에 관한 연구를 해서 마하수를 도입한 사람이고 또 이사람은 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주로 실증론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험할 수 없는 원자를 부정하였으며 오스트발트 같은 사람은 1895년 뤼베크회의에서 원자론자에 대해 과학자들이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연구해야 하고 자연에 관해서 이러저러한 공상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며 원자라든가 분자와 같이 확실치도 않은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연구를 하는 것은 유령을 만든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이라고 볼수 없다고 했다고 하고 볼츠만은 이런 말에 대해 과학사에 있어서 원자론은 큰 성과를 거두고 한 몫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오스트발트의 말을 자연의 참모습을 머리속에서 그리면 안된다고 하는데 과학자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는 과학연구를 해나갈수 없다고 반박하였고 원자론에 대해서 다른 가정이 현상을 더 잘 표현하게 된다면 혼퀘히 원자를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자론은 단순히 볼츠만의 이론만은 아니고 이미 돌턴이 원자론을 이 때로부터 100년 전에 내놓았다고 하는데 이때까지 원자나 분자는 그저 생각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없으며 보이지도 않는 원자를 있다고 믿는 자체가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1903년에는 빈대학으로 돌아가 정밀과학의 역사와 이론이라는 강좌를 맡았던 E.마흐의 후임이 되어 자연과학의 방법과 일반이론이라는 강좌를 맏았다고 하는데 추측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 때 마흐의 추종자들이 빈대학에 많아서 볼츠만이 꽤 비판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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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강연을 하고 5년에 캘리포니아등을 여행하고 독일신문에 엘도라도의 독일교수라는 제목으로 유머가 가득한 여행기를 썼다고 합니다. 엘도라도는 전설로 내려오는 황금의 땅을 얘기하는 건데 이당시에 이때 원자에대해 입증하기 위한 실험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다고 하는데도 이러한 글을 남긴 것을 보면 볼츠만은 원자에 관한 실험에 실패와 별개로 여행을 즐긴 것 같습니다. 여행기를 찾지는 못하였고요, 제자들이 볼츠만을 풍자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카우보이 복장에 쌍권총을 찬 배불뚝이로 그린 것으로 봐서는 제자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또 조교들도 볼츠만의 원자론이나 그에 바탕을둔 이론들에대해 이의를 많이 제기하고 토론을 벌임 볼츠만은 말년에 천식 편두통에 걸리고 눈도 거의 안보여서 책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할 정도였다고 하며 역시 몸이 안좋아지니까 마음도 안좋아진건지 신경쇠약에도 걸렸으며 1906년 9월 5일에 자살을 했는데. 이때 아내와 딸은 수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서도 안남겨서 그런지 자살의 이유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의 업적이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속 거부되는 고립감이 원인이 되어 자살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죽기 전까지도 볼츠만이 학회에서 권위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걸 보면 거부당하기만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오스트발트나 마흐등도 그의 원자론에 대해 반박을 하면서도 그를 존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이론들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컸던가. 아니면 혼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볼츠만이 죽고 1908년 프랑스의 장 페랭에 의한 콜로이드 용액에서의 침강 평형 및 브라운 운동 이론에 의해 원자가 존재함이 증명되었고 원자를 입증할 실험들이 나와서 오스트발트나 마하등도 그들의 주장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볼츠만이 이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거라고도 합니다., 볼츠만을 맥스웰을 대단히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의 연구도 주로 맥스웰이 한 기체분자운동에 관련되 것이기도 한데 맥스웰은 그의 논문이 너무 길어서 멈칫거리게 된다고 하며 6줄 정도로 만들어버리고 싶다고 하였고 또 다른 볼츠만의 논문에 대한 평에서는 인간의 과학에 대한 무지와 유한성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여왕의 말로 할수 없는 속성으로 몽롱한 표현형식이 가득하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볼츠만은 1년에 3~4편의 논문들을 썼는데 그것들이 다 어려운 수식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또 맥스웰은 볼츠만의 논문들을 읽다가 포기했으며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학문적인 공격을 받는것에 매우 민감하였으나 또 논쟁에도 잘 끼어들었다 또한 쉴러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쉴러의 작품들은 내적 자유를 추구하여 숭고하고 유구(Ωφ╬∙)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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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신의 집에 서 정기적으로 음악인들이 모이고 가족을 위해서도 오페라 극장에 예약을 했다는 것을 보면 생활에서의 여유도 잘 즐기고 가족과 시간을 잘 보냈던 것 같습니다.
볼츠만은 대학을 꽤 옮겨다니고 여행도 많이 하였다고 함 그라츠대학에 있다가 하이델 베르크대학, 베를린대학등에서 객원 교수로도 있고 또 빈으로 갔다가 그라츠대학 뮌헨, 다시 빈, 라이프치히, 마지막으로 빈대학에 돌아왔고 미국여행도 세 번씩이나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미국여행 세 번은 이례적이라고 함) 이것이 볼츠만이 역마살이 꼈다는 말처럼 돌아다니길 좋아한건지 자신의 이론에 대한 비판 때문에 우울증으로 옮겨다닌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볼츠만의 이론들이 대부분 볼츠만에 의해서 확정된 것들이 아니라 볼츠만이 과도기적인 역할을 해서 내놓은 의견들을 나중에 수정되어져서 완성된 것 볼츠만 당시에는 과학자들이 원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기능성의로서의 원자와 실제 존재하는 원자 두가지로 생각했는데 마흐나 오스트발트등은 원자라는 것을 단순히 물질을 쪼개다 보면 계속 작아지다가 더 이상 깨지지 않는 상태까지 갈 터인데 그상태를 원자라고 생각했고 물질을 이루는 기본요소로만 생각하였으며 이들을 일원론자라고 함. 볼츠만은 원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물질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지금의 원자론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볼츠만은 에너지가 원자들의 역학적에너지로부터 생겨난다고 보았고 다른 일원론자들은 에너지의 흐름에서 에너지를 일종의 유체로 생각하였습니다. 또 당시에 뉴턴역학에서 하나의 현상이 가역적이라고 보아서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가역적인 현상들을 설명할 수가 없었는데 이 비가역적인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엔트로피의 증가를 볼츠만이 확률적으로 나타내어 자연현상들을 설명한 것입니다.. 기체분자운동론은 기체가 다수의 분자로 이루어졌다고 하고 분자 개개의 역학적 운동에서 출발하여 기체의 열적 성질이나 점성 ·확산 등의 거시적인 성질을 설명하는 이론체계이며 맥스웰의 기체분자 운동론을 설명하기 위해 볼츠만이 속도 분포 법칙을 더욱 엄밀히 증명하여, 분포 함수에 시간적 변화를 주는 볼츠만 방정식을 만들어낸 것 또 이것을 기초로 열현상의 비가역성의 역학적 증명을 얻고자 노력하여, 1872년 H정리를 제시하여 비가역성을 증명하였으며 엔트로프의 증가가 분자수준의 무질서도 증가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며 당시의 비판과 토론등을 통하면서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확률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굳혀서 현재의 통계역학 - 원자·분자 등의 미시적세계의 역학(양자역학)에 입각하여 통계적으로 거시적 세계의 법칙을 이끌어내는 이론을 이끌어내게 되었고. 엔트로피의 증대가 단순한 역학적 법칙이 아니고 확률적 법칙 이라는 것을 밝히고, 엔트로피를 상태 확률의 함수로서 파악하는 방법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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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 상수는 물리학에서 보편상수의 하나인데 기체상수 r을 아보가드로 수로 나눈 것입니다
슈테판-볼츠만의 법칙은 그의 스승이었던 슈테판이 복사에 관하여 연구한 복사에너지의 온도 의존성을 이론적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볼츠만의 연구는 주로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된 것이고 에너지가 일종의 유체가 아닌 원자수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볼츠만의 엔트로피는 확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서 음의 엔트로피를 나타낼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엔트로피는 볼츠만의 연구를 깁스가 더 연구하여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서 개념이 거의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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