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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월) 조직 신학 개론 과제 김병무 “Ⅶ. 인간에 관하여 (244~273)”를 읽고 [내용 요약] 예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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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20(월) 조직 신학 개론 과제 김병무 “Ⅶ. 인간에 관하여 (244~273)”를 읽고 [내용 요약] 예비 고찰 구약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살”(바사르)과 “생령”(네페쉬, 사 10:8)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인간은 “먼지”(아파르, 창 2:7)이지만, 그는 “생기”(네시마, 창 2:7)와 하나님의 “영”(루아흐, 욥 27:3)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사제 문서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아이콘)이고, 하나님의 모습(호모이오시스)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후에도 인간에게 보존되어 있다. 창세기 1장 26-28절의 문맥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결혼하고 짝을 맺을 수 있는 능력에 있고, 땅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것에 있기도 하다. 신약성서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형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전제하지만 (고전 11:7, 아이콘; 약 3:9, 호모이오시스), 다른 한편으로는 엄밀하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하나님의 형상(고후 4:4; 골 1:15)으로 인정한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롬 8:29) -1-

2 고대교회에서 그리스 교부들은 플라톤처럼 인간을 세 부분( 영, 혼, 몸)으로 이해했다면, 서구 신학에서는 두 부분(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인간학이 우세했다. 그리스 교부들은 하나님의 형상(아이콘)과 하나님의 모습(호모이오시스)을 구분했다. 여기서 형상은 “인간의 타고난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이해되었고, 모습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완전을 향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해되었다. 중세기 인간학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토마스주의가 인간의 이성을 더 강조했다면 둔스 스코투스와 그의 학파는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인간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다. 구개신교적 정통주의 인간학은 다음과 같은 도식을 말한다. 크벤슈타트에 따르면 인간의 상태는 댜섯 종류로 구분된다: 1.타락 전에 인간에게 존재했던 무죄의 상태, 2,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부패의 상태, 3.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사된 은총의 상태, 4. 구원을 받는 자들의 죽음 후의 영광의 상태, 5.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저주의 상태. 크벤슈테트와 홀라츠는 형상의 형태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1. 비본래적 또는 일반적 의미의 하나님 형상, 2. 본래적 또는 특별한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계몽주의 시대에는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억제된 르네상스의 인간적 경향이 되살아났다. -2-

3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인간의 자율적 이성은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 “정신”이기 때문에 동물과 구분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의식”개념으로부터 자신의 신앙론을 전개하였다. 관념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은 “영혼의 무한한 가치”(하르낙, 트뢸취)로부터 출발했다. 유물주의적 인간관(포이어바흐: “인간은 그가 먹은 바로 그것이다.”)은 과념주의와 계몽주의의 인간관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니체의 반인간주의(초인 사상)가 있다. 낙관주의적 인본주의자에는 레싱, 괴테, 쉴러가 있다. 현대인이 자의식은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동요되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은 충동과 감정의 조종을 받은 존재이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며, 무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이지 자의식에 의해 통제되는 존재가 아니다. B. 오늘날의 논쟁 1. 인간의 본질과 그의 신학적 비중 오늘날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다윈사상은 강한 영향을 끼쳤다. 유물주의, 쇼펜하우어, 니체, 다윈, 프로이트 등은 신학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브루너에 따르면 종래의 여러 가지 인간 이해 - 광물의 혼합물, 기계, 동물 등 - 는 진리의 요소는 갖추고 있지만, 인간성은 회복하지 못하며, 주관적으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문화의 창조를 통해 인간다움의 특징을 부여 받는다. -3-

4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다윈의 이론처럼 동물로부터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르고 독자적인 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부르너의 견해와 일치한다.
부르너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그의 책임성에 있다. 하지만 책임성의 의미는 사랑이다. 사랑하도록 결정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여러 속성 중의 한 가지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체다. 인간은 사랑 가운데 있는 그만큼 인간이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정도는 그의 비인간성의 정도다. 자유와 정신적 창조능력 또는 이성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진정한 본질의 실현 조건들이다.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사랑이다. 다른 동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말씀 안에서 창조되었다. 고가르텐에 따르면 인간은 참으로 인간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생명은 항상 질문하고 의심을 품는 생명이다. 인간의 인격성은 하나님과 맺는 인간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부르너와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바르트는 인간의 “독자성”을 죄로 간주하였다. 그에 따르면 참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인격”이며, 인간은 인격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인격이 될 수 있다. 불트만은 인간의 “본질”이 그의 “의지”에 있다고 보았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를 “인간학적으로”, 또는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푹스에 따르면 “실존주의적 해석”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4-

5 틸리히는 인간의 “이성적 구조에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종의 차이를 본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에서 인간의 본질이 완전히 계시되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에 있다. 로마 카톨릭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보았다. 그러나 칼 라너는 인간의 “본질”은 그의 “기원과 목표”에 있다. 최근신학과 현대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은 20세기의 일반적인 정신셰계가 인간을 향해 방향을 전환한 결과로 일어난 것이다. 생명철학은 불합리성, 역동성, 일회성, 정신적인 것, 체험적합성을 강조한다. 대화철학은 인간은 오직 이웃과의 대화 속에서만, 그리고 이웃과 함께 있을 때에만 인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현존재(Dasein)를 이와 대립하는 본질(Sosein)로 쟁취함으로써, 본질(Essenz)의 억압적 구조로부터 자신의 실존(Existenz)을 해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세상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뮐러(M. Műller)는 “인간의 본질은 존재를 위한 그의 부단한 비움(Leere), 그의 개방성, 그의 추월 자체이며, 그래서 참으로 내용이 없음, 본성이 없음, 본질이 없음이다.”라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인간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로 정의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미리 결정하는 가치와 계명은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결정한다. 인간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없다. 실존보다 먼저 존재하는 본질은 없다. 오히려 실존이 본질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말한다. -5-

6 구조주의자 푸코에 따르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체계”는 인간의 실존보다 먼저 존재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성이 진리이다.”라고 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수정주의자 블로흐는 인간을 희망하고 거듭 자신을 추월하는 존재로 본다. 가르다프스키에 따르면 인간은 “열려있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테이야르 샤르뎅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의 가정의 작은 점”이다. 윙엘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한에서 나는 인간적이다. 2. 인간성의 위협 대중적 인간은 남다른 것, 인격적인 것을 모두 폐기해 버린다. 얼굴 없는 대중적 인간은 오늘날 인간성이 얼마나 위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라스만에 의하면 인간은 외부에 의해 끌려다닌다: 이데올로기, 남자의 독재, 매스미디어의식의 산업 독재, 텔레비전의 아편, 과대광고 심리학의 노예, 인간 거래, 휴가의 획일성, 행동양식의 획일화 , 공학기술 등. 부덱케는 생화학적 수단을 통해 동물적인 노예 인간을 온순한 작업 동물로 만들 수 있게 될 미래의 기술 지배를 염려한다. 융크에 따르면 생명공학, 물질공학, 사회공학에 의한 미래의 비인격화는 원자폭탄보다 더 사악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6-

7 테일러(G. R. Taylor)는 “만약 동물과 인간의 잡종을 만드는 것이 돈벌이가 된다면, 우리는 이런 일도 할 "이다
폰 오펜은 이 시대를 인격을 박탈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오직 하나님에 매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완전히 열린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3.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가? 벨렉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쥐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초기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후기 바르트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한다고 인정하였다. 슐링크도 바르트처럼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자연적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타락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틸리히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로고스와 유사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으로 출현하더라도 인간다움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 형상(우월성, 책임성, 언어성)과 실질적 형상(형식적 형상이 은총을 통해 성취되는 것)으로 구분한다. 알트하우스, 킨더도 자연적 인간에게서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7-

8 로마 카톨릭 신학도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에게 형식적 형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로마 카톨릭 신학도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에게 형식적 형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오늘날 카톨릭 신학 쉐프초크에 따르면 자연적 인간의 형식상의 본질은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에벨링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다. 4. 인간은 자연의 폭군인가, 자연의 동반자인가?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위협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근대 개신교 신학은 “자연신학”을 간과하고 인격주의, 역사에 치중하였다고 본다.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안에, 그리고 모든 개별 피조물 안에 내주하고, 자신의 영의 힘을 통해 만물을 통일하고 보존하신다. 내주하심의 목표는 모든 창조물을 하니님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다. 독일개신교회(EKD)와 로마카톨릭 독일 주교회의가 채택한 공동 선언문에서 “새로운 생활 양식”과 “생태학적 의무를 감당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요청했다. 오스발드 바이어는 생태학적인 논쟁에 관해, 그는 한마디로 “염려하지 마라!”(마 6:25, 34)는 예수님의 말씀을 언급했다. 생태신학의 낭만주의적인 자연심취와 감상주의적인 자연미화는 경계되어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자연을 약탈하고 착취하고 파괴할 권리는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연에 대한 폭군적인 자세는 동반자적인 자세로 바뀌아야 한다고 저자는 기술학고 있다. -8-

9 [나의 생각과 느낌] 시대에 따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다양한 인간 이해들이 흥미가 있었다. 구약성서, 신약성서, 고대교회, 중세기, 종교개혁자들, 구개신교, 계몽주의, 관념주의, 자유주의 신학, 유물주의 인간관, 염세주의, 낙관주의, 다윈의 진화론, 니체, 프로이드 등의 인간이해가 계시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제시되어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현대인의 자의식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성서를 보는 눈에 변화를 주는 것 같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그랬고 다윈의 진화론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개념의 도입으로 심리학적인 새로운 인간 이해에 다른 관점을 하나 더 제시한 것 같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오늘날 제기되는 문제점들이 있다. ① 인간의 본질과 그의 신학적 비중, ② 인간성의 위협, ③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④ 인간은 자연의 폭군인가, 자연의 동반자인가?(생태학적 문제점)이 그것이다. 각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가 있다. 입장에 따라 다 부분적으로 일리(一理)가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과 주장한 사람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도 논의가 다양하다. 관계성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본질로 “이성과 의지”를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을 동물과 신과 구별하여 특성을 볼 때 관점에 따라 다양함을 분문에서 보았다. 인간의 본질을 한마디로 지금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9-

10 인간성의 위협에 관하여 현대의 과학기술, 대중성을 들고 있다. 이것은 인간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定義)가 전제된다
인간성의 위협에 관하여 현대의 과학기술, 대중성을 들고 있다. 이것은 인간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定義)가 전제된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구가 증가한 현대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다. 통신시설, 교통시설이 없다면 오늘날 어떻게 될까?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점도 있다. 즉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는 과학과 창조세계의 다양함과 신비와 아름다움도 볼 수 있고 외국의 이모저모도 눈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축복으로 받아들일 점도 있다. 세속화 문제와 더불어 논의해 봐야할 문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서 모든 개별적인 피조물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해 있다는 몰트만의 견해에는 의문이 간다. 생태계 문제에는 정보를 들어 알지만 근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세계 모든 나라와 사람들이 합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마 6:25, 34)는 오스발트 바이어의 예수님 말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들은 강박적인 염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한 성경구절이 생태계에 적합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경제 문제로 염려한 것에 관한 구절로 나는 인식 되기 때문이다. [질문] 몰트만의 “창조주는 자신의 창조의 영을 통해서 … 모든 개별 피조물 안에 내주하고”고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다. “모든 개별적인 모든 피조물 안에 내주하신다.”는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추가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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