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 이순신 리더십 )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 이순신 리더십 )
2 20 일 맑음 … 이 날 밤, 날씨는 몹시 차가운데 겨울 달 은 낮과 같이 밝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여 온 밤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했다. 온갖 근심이 치밀었다.
3 경제전쟁시대 왜 이순신 인가 ? 이순신의 정신, 리더십, 전략으로 무장하면 어떠한 경제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축구, 외채와 국제 경쟁력 ⊙ 1982 년 청소년 월드컵과 외채의 순위 Mexico (M) Brazil (B) Argentina (A) Korea ⊙ 2002 년 월드컵과 국제경쟁력 Brazil Germany Turkey Korea
5 청전 이상범 화백의 이 충무공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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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순신 장군의 전적 - ( ) 안은 나포한 적선의 수 시기해전전과 옥 포 합 포 적진포 사 천 당 포 진 해 당항포 율 포 (3).7 한산도 안골포 42(17) 42.9 부 산 웅 포 진 해 명 랑 절령도 예 교 노 량 200 계 794(20)
8 ⊙ 이순신 (1545~1598) 戰方急 愼勿言我死 ⊙ 넬슨 (Nelson, Horatio : 1758~1805) Now I am satisfied. Thanks God, I have done my duty.
9 시바 료타로 ( 司馬遼太郞 ) 의 글 세계 제일의 해장이라고 저자가 말한 이순신은 토요토미의 군대가 조선에 침입하였을 때, 해전에서 이들을 멋지게 무찌른 조선의 명장이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의 문무관리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너무도 청렴한 인물이었고, 군사통제와 전술능력,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 실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바다의 명장이라 하면 이순신을 빼놓을 수 없고,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 서는 그 후 잊혀져 버렸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하여 명치기에 해군이 창설되 었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하였다. 그 시대의 일본인은 러시아 제국이 동아시아 병탄의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동 진해 오는 발탁함대를 그 최대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을 한 척도 남기지 않고 쳐부수는 것이 동아시아 방위를 위함이라 확신하고 동아시아를 위한 일인 이상 옛날 동아시아가 낳은 유일한 바다의 명장인 이순신의 영혼에 빌었다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 근세 일본사에서의 평가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전쟁의 7 년간에 참으로 이순신 한 사람을 자랑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하였다. 그는 실로 조선전쟁에 있어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 국을 통하여 최고의 영웅이었다.
11 1. 이순신 정신 ⊙ 군인정신과 기업가 정신의 표상 Marshall : 기업가 정신은 산업사회의 기사도 정신과 같다. 빈손의 수군 재건 - “ 아직도 12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12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명시의 임금의 교지 짐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어허,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을 삼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아직도 화를 거두지 않아 … 3 도 수군이 한 번 싸움에 모두 없어지니 근해의 성읍을 누가 지키며, 한산진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릴 것이랴 ? 생각하건데, 그대는 일찍이 수사 책임을 맡던 그 날 이름이 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부터 업적이 크게 떨치어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별히 그대를 상복 입은 그대로 기용하는 것이며, 또한 그대를 백의 ( 白衣 ) 에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 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 3 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
13 운곡 하동 구례 압록 곡성 옥과 석곡 승주 낙안 벌교 조성 장흥 보성 강진 회진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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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선조에게 보낸 글 임진왜란이 터진 이래 5, 6 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충 청에 쳐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우리 나라 수군이 적의 수군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 척의 전선이 있으므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 수 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만일 지금 수군을 없 앤다면 적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며, 적은 호남과 충청의 연해안을 돌아 한강으로 올 것입니다. 신은 이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선의 수가 적고 미미한 신하에 불과하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 이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16 ※ 겸손과 끓임 없는 노력 오만과 자만의 경계 : 輕敵 必敗之理 필요는 경쟁력의 어머니 지적 재산과 경쟁우위 자원 = f( 기술 )
17 비바람 촉촉이 흩날리는 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 못 이룰 때 쓸개가 찢기고 가슴이 아프며 마음은 상하고 살을 여미는 듯 하네 산하는 참혹해라 물고기 새들도 슬피 우네 나라 일 어찌될지 모르는 판에 바로 잡을 사람 없어라 중원땅 되찾은 제갈량 생각나고 적을 무찌른 곽자의가 그립구나 오랫동안 방비를 했다지만 이제 보니 임만 속였어라 蕭蕭風雨夜 耿耿不寐時 懷痛如摧膽 傷心似割肌 山河猶帶慘 魚鳥亦吟悲 國有蒼黃勢 人無任轉危 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經年防備策 今作聖君欺
18 ⊙ 거북선과 창의성 혁신의 의지 혁신과 4 차원의 경쟁력 혁신의 성공조건 ⊙ 난중일기와 기록정신 고려자기와 암묵지 (tacit knowledge) 기록과 지식의 공유
19 2. 이순신 리더십 한바다에 가을날이 저무니 추위에 놀란 기러기 진지 위를 나네. 적정을 우려하여 잠 못 이루는 밤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누나.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愛心轉輾夜 殘月照弓刀 ⊙ 몰입과 솔선수범
20 수루에 걸려 있는 장군의 유명한 시조 현판
21 장부로써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여지면 죽기로 써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에 아부하여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청렴성, 부하사랑과 신뢰성 – 신뢰재 ( 信賴財 ) 의 부자 786 명의 스위스 용병 타이레놀
22 ※ 용기와 위기관리 능력 – 홀로싸운 장군선 울둘목에서의 방어 계획 적의 기습공격에 대한 대비 必死則生 必生則死 一夫當逕 足懼千夫
23 ⊙공정성과 신상필벌 - 부당한 인사압력의 거부 공평한 불평등 (Equal Inequality) ⊙핵심능력과 실적 – “ 장군이 다시 오시니 우리들은 이제 살게 되었다.”
24 3. 이순신 전략 ⊙ 철저한 정보의 수집과 활용 ▶경영정보시스템 (MIS) - 봉화, 고동, 연등을 통한 정보전달 ▶기본에 충실한 전략 (Hidden Champions) ⊙ 환경의 진단과 강. 약점 분석 한산대첩과 학익진 지형과 조류의 활용과 명량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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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순신 자살설 ▶고난의 일생 (3 번의 파직과 2 번의 백의종군 ) ▶의병장 김덕령의 옥사 ▶유성룡의 징비록 : 역사의 굴레 ? ▶이순신 생태계 조성
30 ⊙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 ( 陳璘 ) 추억하건대 평시에 사람을 대해 이르되 “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 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 삼도수군 통제사 유형 ( 柳珩 ) 이순신은 평소에 “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 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 될 일을 없애겠다 ” 는 말을 자주 했다.
31 ⊙ 대제학 이민서 ( 李敏敍 ) ……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 제장과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곽재우는 드디어 군직 을 떠나 생식을 하며 당화를 피했고, 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 ⊙ 영의정 이여 ( 李畬 )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얼마든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큰 공이 용납되기 어려움을 알고 드디어 싸움터에 이르러서 그 몸을 죽였다고 하였다. 장군의 죽음은 미리 결정된 것이다. 그가 처한 상황은 역시 이런 말에 가깝다. 오호 슬프도다.
32 선교사 겸 사학자 H.B. Hulbert “ 이순신은 노량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그는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이미 침략자들이 쫓겨 가는 것을 보았고 또한 조정에 있는 적들이 설령 그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고 하여도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