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이슬람에 대한 예비 퀴즈 1. 인도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이슬람 국가이다. 2. 중동 인구의 10%정도가 그리스도인이다. 3. 프랑스 인구의 10%이상이 무슬림이다. 4.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대륙은 아시아이다.
이슬람 현황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1. 이슬람은 중동 지역의 아랍인들의 종교이다
중동인구는 이슬람 인구의 1/6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시아에 전 세계 무슬림의 62%가 있다. 중동 인구의 10%는 그리스도인이다.
2.이슬람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을 들고 세계를 정복해가는 종교이다. 호전적 테러리스트들이다.
이슬람은 스스로를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실제 근대 역사 가운데 있었던 서구와 이슬람권 간의 갈등 중 많은 부분은 기독교권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할 때 기독교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들은 무력으로 개종시킨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인두세라든지 세금을 부과하여서 차등을 주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중동지역에 아직도 많은 고대 기독 교회들이 남아있다.
이슬람이 기독교의 가장 큰 대적이 되는 이유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종교이다. 2. 기독교 이외에 세계 선교를 꿈꾸는 유일 종교이다
이슬람의 성장 2018년 중반 기준 18억 2093만 명 (전 세계 인구의 24.0%) 연평균 성장률은 2.17%로 아주 높은 편이다 참조 : 세계 인구 성장 1.39% 기독교 1.43% 힌두교 1.44% 전통민속종교 1.772%
이슬람은 특별히 20세기 급성장 하였다. 지난 100년 동안 594% 성장했다 (세계인구는 376%) 이중 후반기 50년에 400%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1930년 2억 돌파, 1980년 10억 돌파 기독교 선교가 뚜렷한 성장을 못한다면 2050년에는 세계 인구의 33%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1900년 기독교 34.4% 이슬람 12% 2000년 기독교 32.4% 이슬람 21% 2018년 기독교 33.0% 이슬람 24%
(프랑스는 현재 613만의 무슬림 인구로 전 인구의 10% 이상이 무슬림이다.)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1970 1990 2000 2010 유럽 720만 1300만 3700만 4400만 (프랑스는 현재 613만의 무슬림 인구로 전 인구의 10% 이상이 무슬림이다.) (EU) (426만) (752만) (1800만 2008년) 구 소련 3400만 5300만 아시아 4억2600만 7억 5000만 10억 세 계 15% 20% 22%
오늘날 무슬림 분포 상황 아시아 62.1% 중동/북아프리카 19.9% 아프리카 15% 유럽/러시아 권 2.7% 미주 0.3% (미국에 330만 명)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주요 종교인 국가는 33개 국 이슬람이 주요 종교인 국가는 22개 국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주요 종교인 국가는 5개 국 이슬람이 주요 종교인 국가는 27개 국 (총 48개국 중) 이슬람은 오늘날 전 세계 52개 국의 주요 종교이다.
대략 수니파가 85-90%, 시아파 10-15% 추정 2014년 중반 기준으로 16억 6000만 명의 무슬림 중 수니파 13억 8120만 명 (87.2%) 시아파 2억 1070만 명 (13.3%) 수피즘 2억 9460만 명 (18.6%) 대략 수니파가 85-90%, 시아파 10-15% 추정
이슬람 성장의 96%가 무슬림 가정의 높은 출산율 때문이다. 이슬람의 성장 요인(유럽의 경우) 급속한 인구 증가 이슬람 성장의 96%가 무슬림 가정의 높은 출산율 때문이다. 기독교는 개종 증가가 많고 이슬람은 출산에 의한 자연 증가가 많다. 매년 95만명이 기독교 등 타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 그러나 매년 2,700만명이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
2. 열성과 실천적 신앙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계율이 현실과 맞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철저히 따른다. 3. 오일 달러로 인한 경제력 제3국에 투자해서 교세 확장을 한다. 77개국 경제 그룹과 ECO(이슬람 경제 협력 기구)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4. 오늘날 유럽 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
20세기 이슬람의 변화 오스만 터키(1922)가 붕괴되자 20세기에 전 세계 이슬람은 극에서 극을 오가는 진자 운동을 보이고 있다. 1930년대는 이슬람에 대해서 부정적 예측 세속화 이슬람의 등장과 득세 1960년대까지도 이런 예측이 맞는 듯 했다. 중동 국가들의 세속화와 서구화 친 서구 세력들이 세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30여년 정도가 지나자 민심이 세속화 이슬람을 떠나게 된다. 1) 친서방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2) 중동전쟁에서의 연패에 따른 충격 3) 자연스럽게 급진파 근본주의로 민심이 이동
선교사 입국 거부, 선교사 추방, 기독교 선교 금지령 1970년대 이슬람의 르네상스 도래 1973년 중동 전쟁 이후 국제 원유가 급상승 서구 국가들은 오일 쇼크로 큰 어려움을 겪지만 중동 산유국들은 7년 만에 3,500억 달라의 잉여 자산을 소유 이 막대한 돈의 20%를 이슬람 선교에 투자하게 된다. 이때부터 의도적인 세계 선교를 꿈꾸게 된다. 이슬람을 타종교로부터 방어 선교사 입국 거부, 선교사 추방, 기독교 선교 금지령 2) 이슬람 국가의 개혁 샤리아 율법 강요, 근본주의 세력 부상
이슬람의 세계 선교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 이슬람의 부흥과 세계 선교 (다와) 이슬람의 세계 선교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 외국에 가는 노동자들을 통한 선교, 이슬람 선교사 훈련 파송 이슬람 대학 설립, 이슬람 교사 파송, 이민자들과 다산 정책 1974년 이집트 대통령 자문이던 싸이드 하산 무함마드는 세계 무슬림 공동체 강화를 위한 3개 목표 제시 1) 모든 나라에 이슬람 지부를 설치 2) 디아스포라 무슬림 신학대학 설치 3) 전 아프리카를 이슬람 대륙화 한다.
1976년 런던 이슬람 국제회의 런던만 장악하면 서방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 이때로부터 10년 만에 런던에 400개의 모스크가 설립 현재는 영국 전체에 1,750개의 모스크와 수백개의 꾸란 학교가 세워졌다.
이들의 선교 목표는 이슬람화이다 이슬람 선교개념(다와)은 단순히 신앙고백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이슬람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선교한다”라는 요란한 선전 없이 조용히 아랍어 교육으로 시작해서 점차 이슬람 제국 건설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와의 개념 이런 특성은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1979년 이란의 회교혁명 – 근본주의 이슬람의 대두 친 서구적 성향의 부패한 팔레비 정권을 몰아내고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의 대표격인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란을 장악하였다. 이때로부터 중동의 많은 나라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이슬람은 원리주의적 성향으로 빠르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선교는 이때부터 거의 문이 닫히게 된다. 우주적 지하드 – 악의 축 서구 국가 (미국) 기독교 자본주의 이스라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 이라크의 반미 성향, 사담 후세인의 등장 이단아로 불리우는 리비아의 가다피의 등장 이런 흐름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전성기가 이루어지고 중동에서 기독교 선교는 암흑기를 경험하게 된다. 911 테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최고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이슬람이 강경해 지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원리주의자들이 정치적 세력을 얻고 테러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대 파괴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서구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일부 무슬림들 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호전적인 이들의 활동은 일반 무슬림 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 패트릭 존스톤
911 사태 이후 뜻하지 않게 이슬람 세계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오사마 빈 라텐과의 연관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의 붕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 가다피의 백기 항복과 친미적 전환 이는 원리주의적 이슬람의 붕괴의 시작을 시사함.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
세속적 요소들 종교적 요소들
이슬람에 영향을 미치는 동향 이슬람 진자 운동 세계화의 영향 석유 자원의 한계 서구지역에서 이슬람 신학의 변화
2014년 6 월 ISIS가 국가 선포와 극단적 테러 활동
ISIS의 등장과 존속은 중동 지역의 복잡한 정치적 산물이다. 1) 수니파와 시아파의 근본적 갈등 2) 이라크 전쟁의 여파 (몰락한 수니파의 반발) 3)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반군, IS의 정치적 균형과 갈등 (배후국가들: 이란, 미국, 러시아) 4) 이라크 내의 힘의 갈등 (수니, 시아, 쿠르드) 5) 알 바그다디의 광신적 종말론 6) McWorld vs. Jihad (해외 소외자들의 집합) 그러나 점차 이슬람 내에서도 반발이 심하다. 이슬람의 전도 성장에는 치명적 손상을 줄 것이다.
미국에 국한된 통계이지만 비 이슬람권에서는 비슷한 양상으로 추정된다.
이슬람의 미래 자유주의적 이슬람 압둘 카림 소루쉬 (이란) -민주주의, 인권, 여성의 권리, 사상의 자유 추구 -시민사회, 독일식 세속주의 등 민주적 가치 지지 -종교가 기반을 가지되 개인적 자유의 세속적 권리는 유지하고, 엄격하지 않은 정교 일치 국가 지향
한국의 이슬람 역사 9세기 중엽 – 중국에 진출한 아랍-페르시아계의 무슬림들이 해로로 통일신라까지 진출 845년 기록된 “왕국과 도로 총람” 2. 이후 한국에 동화되어 영구정착한 무슬림들이 간혹 있었다. - 고려 흥렬왕 때 장순룡 (덕수 장씨) 3.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 군인인 주베르 코지와 압둘 라흐만이 천막으로 이슬람 성원 시작
4. 중동 건설 붐 –중동에서 개종한 사람들 5. 정부가 대 중동 전략으로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 인가 6. 1976년 서울 중앙 성원 준공 7. 1982년 이슬람 대학 설립 시작 - 아직 개교하지 못했음 8. 90년대에 이주 노동자 유입 현재는 15개 모스크(서울, 부산, 광주,대구,안양, 대전) 와 80개의 예배소, 이슬람 문화 센터가 있다. 20만 정도의 신자, 한국인 신자는 대략 3만 5000명 정도
Islamophobia 촉발 피터 와그너 - 유럽의 전진기지로 영국을,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한국을 삼았다. 1988년 사우디의 한 기자 – 한국은 차기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이다. 한국은 극동 지역 이슬람화의 전초기지로서 그만이다. 발전 2005년 11월 중동 이슬람 지도자 선교대회(서울)
2006년 1월 서울에서 OPEC 종교부 장관회의 2006년 9월 중동, 이슬람 문화 풍물 대전 2006년 11월 제4차 한, 중동 포럼 2007년 12월 제5차 한, 중동 포럼 한,아랍 소사이어티 설립이 결의됨 인천시가 인천에 이슬람 문화 센터 설립 2020년까지 20개의 모스크를 추가 건립예정
사우디나 파키스탄에서 전략적으로 유학생을 보낸다는 소문도 있다. 서울대에게만 1,000명을 보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외국인 근로자 중에 적지 않은 이슬람 선교사들이 섞여있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 대한 이슬람화 전략이 20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현지 결혼을 전략 중 하나로 장려하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대부분의 한국 이슬람 전략에 얽힌 이야기는 근거가 없거나 부족하거나 과장되었거나 확대 유추된 경우들이 많다. 반론 : 대부분의 한국 이슬람 전략에 얽힌 이야기는 근거가 없거나 부족하거나 과장되었거나 확대 유추된 경우들이 많다. 1. CIA보고서는 글자 그대로 “설”에 불과한 자료이다. 남아프리카의 “피터 하몬드”라는 한 개인이 저술한 책의 내용 2. 유학생의 경우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유학생 수는 해마다 준다. 지난해 국내 유학중인 사우디 유학생 숫자는 5명뿐이다. 3. 외국인 결혼 전략 현재 결혼을 유지 중인 이슬람과 결혼한 한국인은 여성이 900명, 남성이 2100명이다. 대부분의 국내 무슬림은 고립되고 외로운 상황이다. 교회가 적극 선교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최근의 할랄 식품 공단 논쟁 7,000명의 무슬림이 입국할 예정 이들에게 일인당 150만원의 정착금 지원 무슬림 전용 도축장 무슬림만 고용 가능하고 한국인도 개종해야 한다. IS의 동북아 기지가 된다. 현재 할랄 식품 김치, 김, 과일, 라면, 의약품, 떡, 통조림, 화장품
주의할 점 이들을 모두 원리주의자나 테러분자로 보는 것은 균형이 깨진 견해이다. 너무 공포의 대상으로 선전하면 대립각이 형성되고 더 고립되고 단단한 공동체로 결집될 위험이 있다. 한국인 신자들의 성장은 정체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의 역사
무슬림들이 이해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아랍인 이야기 이슬람 탄생 이전의 상황 무슬림들이 이해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아랍인 이야기 아브라함 – (이슬람의 주장) 본래 이라크인 이다. 아버지는 목수로서 우상을 만드는 직업. 아브라함은 어려서 부터 사람들이 만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이상히 여김. 그래서 신당의 우상을 다 부수고 신당의 우상이 다른 우상을 부수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 일로 자신을 죽이려 하자 아내인 사래와 함께 팔레스타인 땅으로 도주하였다. (수라 21:51 이하) 이집트에서 하갈을 선물로 받았다.
하갈과 이스마엘 이스마엘이 17세때 이삭을 이스마엘이 혼내는 것을 보고 사라가 분노하여 모자를 구박하고 쫓아낼 것을 요구.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기로 작정하고 함께 남쪽으로 여행하여 메카 계곡에 이르렸다. 이곳은 대상들의 통로였다. 아브라함은 약간의 양식과 물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하갈은 이곳에 오두막을 짖고 살았는데 어느 날 물과 양식이 떨어졌다. 당황한 하갈은 카바 신전 앞의 두 언덕을 일곱번이나 뛰어 다녔지만 물을 구하지 못하여서 알라에게 부르짖었다. 이때 아들 이스마엘이 땅을 발로 헤집자 발 밑에서 물이 솟았다. 하갈은 기뻐서 “물아 멈추라” (잠잠)이라고 외쳤고 이 우물을 잠잠 우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카와 카바 신전 메카는 6세기 경 시리아를 오가는 상인들이 반드시 거치는 교통 중심지였다. 많은 부가 축적된 곳이고 다신교의 중심지였다. 전설에 따르면 카바의 흑석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날 때 알라에게 받은 흰돌이었는데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검은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따금 아들 이스마엘을 만나러 메카로 왔는데 아브라함이 메카에서 카바를 발견하고 이 카바를 모시는 신전을 만들었다. 신전을 만들 때 천사 가브리엘이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다신교 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카바 신전은 360개의 우상들이 모인 만신전이 되었고 아랍의 모든 부족 들이 일년에 한번은 방문하는 성지가 되었다.
카바 신전으로 말미암아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아랍 부족은 서로 상대방을 습격 약탈하면 살아가는 부족 국가 상태였는데 신전 순례를 서로 보장하기 위해서 신성월(神聖月)을 만들었다. 신성월에는 모든 전투 행위가 종교적으로 금지되었다. 나중에 이 카바 신전은 메카 지역의 유력 부족이었던 쿠라이쉬 부족이 신전 제사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이 쿠라이쉬 부족에서 탄생한다. 실제 성지 순례의 관습은 이슬람 이전부터 있었던 아랍인의 관습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상황 비잔탄 제국과 사산 왕조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를 자힐리야 (無智의 시대)라고 부른다. 70년 예루살렘 성 파괴 이후로 많은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 주로 메디나와 예멘에 정착하였다. 반도 북부에는 기독교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왔다. 중부의 히자즈 지방과 남부의 나즈란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착하였다. 메카에는 하니프(재래 종교에 속하지 않은 금욕적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모하메드는 하니프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무함마드의 탄생과 생애 탄생 쿠라이쉬 부족의 하심가에서 탄생 아버지는 압둘라였고 주흐라 부족장의 딸 아미나와 결혼 압둘라는 시리아로 대상무역을 떠났다가 귀로에 죽음 이때 아미나는 무함마드를 임신하고 있었다. 유복자로 570년에 출생 조부 무탈립이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의미는 “찬양하는 자” 사막에서 유모에게 키움을 받았는데 2살 반 때 유모의 아들들이 와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눕히고 배를 갈랐다고 소동을 침. 귀신들린 것이 아닌가 염려하였다. 5살때 조부의 집으로 왔으나 곧 어머니가 죽음. 이때부터 조부가 모함마드를 양육하였다.
8세 때 조부마저 죽자 삼촌이 아부 탈립에게 맡겨져서 양육. 이슬람에 전해오는 많은 전설적 이야기들이 있다. 12세에 시리아로 대상여행을 떠나는데 사막에서 무함마드 위로는 구름이 져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쉬려하자 나무가 가지를 내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등등 15세에 전쟁에 참전, 이후 목동 생활도 하고 여러 경험을 함 20세 이후에 쿠와일리의 딸인 미망인 카디자의 대리인으로 대상 무역을 함. 시리아로 가서 무역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이 성공으로 카디자에게 부를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25세에 무함마드는 40세의 카디자와 결혼을 하게된다.
카디자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였다. 자식 복은 없었다. 세 아들을 낳으나 모두 어릴 때 죽었다. 카바 신전 중건시 카바돌을 운반하는 자로 선정되어서 부족 가운데 유력한 자로, 믿을 만한 자로 인정되었다. 아들이 없자 삼촌인 아부 탈립의 아들 알리(Ali)를 양자로 받아들인다. 노예 출신인 자이드도 양자로 받아들인다.
계시를 받음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된 무함마드는 혼자 메카 북쪽의 히라 산에 가서 혼자 묵상과 기도의 삶을 즐겼다. 때로는 한달 씩 체류하며 기도의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무함마드는 당시 아라비아의 여러 사회 현상들, 다신교 상황, 심각한 빈부 차이 등에 관심이 많았다. 610년 무함마드가 40세 때 라마단월에 히라 산의 한 동굴에서 기도하던 중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어떤 영적 존재가 자신에게 임해서 목을 조르면서 “읊으라”라는 말을 세번 하였다. 무함마드가 “무엇을 읊으라는 것입니까? 나는 읽을 줄을 모릅니다.” 라고 하자 그가 “창조주가 당신의 주님의 이름으로 응혈(핏덩어리)로 부터 인간을 만들어 주였다.”(수라 96:1-5)고 하였다. 그리고 목을 조르던 것이 풀려서 무함마드가 고개를 들고 보니 먼 하늘에 거인과 같은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 체험을 할 때 그는 육체적 고통을 느꼈고 취해서 땅에 쓰러진 자 같았으며, 마치 낙타 새끼처럼 신음을 하였다고 한다. 이 체험을 한 후에 처음 무함마드는 자신이 귀신들린 것이 아닌가라는 혼동에 빠져서 집에 돌아와서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었다. 궁금히 여긴 카디지가 이유를 묻자 이를 설명하였다. 카디자는 자신의 사촌인 와라끼에게 이 이야기를 한다. 와라끼는 독특하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자였다. 와라끼가 이 체험을 계시의 수혜라고 해석하게 된다. 카디자와 무함마드에게 알라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삼아서 자신의 말을 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무함마드는 이후로 자신이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초기에는 그가 자신이 알라를 보았다고 생각햇으나 메디나 이주 이후로 인간은 알라를 볼 수 없다는 유대교 교리에 따라서 자신이 본 것은 알라가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천사는 가브리엘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무슬림의 탄생 무슬림은 이슬람 (항복한다)의 분사형으로 항복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무함마드의 계시 전달을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첫 무슬림은 카디자 이고 이어서 아브 바크 등의 사람들이 추종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감을 살까 봐 처음 계시를 무함마드가 숨기고 있었지만 3년이 지난 후 다시 계시를 받게 되고 공개적으로 이를 선포하게 되었다.
메카에서의 포교 활동과 박해의 시작 614년부터 무함마드는 대중 전도를 시작하였다. 당시 39명 신자 무함마드 가르침의 내용은 강력한 우상 숭배 거부, 특히 조상 전래 신 에 대한 반대, 사회적 정의감 강조 등이 중심이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선지자(Rasul)이라고 선포하였다. 와라끼에 의한 기독교적 영향으로서 심판 개념을 선포하고 믿음 없이 죽은 모든 쿠라이쉬 부족 조상은 실패자라고 선포하자 부족 내에서 반발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의 사회 정의감 강조는 지배 계층에 위협이 되었다. 최초의 신자 무리에는 노예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결국 핍박으로 인해서 615년 에디오피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619년에 가장 큰 후원자인 카디자가 죽고 무슬림은 아니었지만 큰 바람막이 역할을 하던 삼촌 아브 탈립이 죽고 나자 쿠라이쉬 부족 내에서 박해가 더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결혼으로 교우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카다자가 죽자마자 친구인 아부 바크의 딸 아이샤 (8세) 에게 결혼을 요청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밤 하늘의 여행 621년 조카 힌드의 집에 묵던 무함마드는 자신이 천사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다녀 오는 밤 하늘의 여행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시내 산 정상으로 가서 가브리엘을 만나 예배 – 이슬람 성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으로 가서 아브라함, 예수, 모세를 만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야곱의 바위 – 사닥다리로 천국에 올라감. 첫번 천국에서 아담을 만나고 여섯번째 천국에서 노아, 아론, 모세,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에녹, 침례요한, 예수 등을 만났다. 천국에서 알라를 만나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 – 매일 50번씩 예배. 모세의 권유로 줄여 줄 것을 요청하여 하루 5번으로 감해 주었다. 황금 돔 사원 내부의 야곱의 바위
이 자리에 황금돔 사원 (아쿠사 모스크)이 세워졌다 – 천국의 계단 오늘날 이슬람의 제1 성지가 메카, 제2 성지가 메디나, 제3 성지가 예루살렘의 황금돔 사원이 된 기원이다. 이 이야기가 전파되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고립되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동족인 쿠라이쉬 부족 보다는 카바에 순례오는 다른 부족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게 된다. 황금 돔 사원
히즈라 (hijra) 고립되기 시작한 무함마드는 카바에 순례오는 다른 부족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620년 야스리브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접촉 시작 야스리브는 현재 메디나로 불리는 지역 유대인이 실권을 장악 유대인 영향으로 유일신에 대한 개념에 매력을 느낌 메디나 지역인들의 지지를 얻게 되자 핍박을 받던 모함마드는 자신의 거점을 메디나로 옮기기로 작정 여러 차례에 걸쳐 추종자들을 메디나로 이동시키고 자신도 마침내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게 된다.
이슬람歷의 탄생 히즈라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인정한다. 서기 622년 6월 25일 (혹은 7월 16일) 이유 – 이슬람은 순수한 종교라기 보다는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움마(umma)의 탄생 – 초기 메카에서 이주한 그룹과 메디나 원주민을 묶기 위해서 출생지와 상관없이 “무슬림은 하나이다”라는 헌장 선포 이슬람 달력 – 6개월은 29일, 6개월은 30일 1년은 354일 100년에 3년 정도 서력과 차이가 난다.
유대인과의 관계 3개의 유대 부족 바니 나드르, 바니 카이누카, 바니 쿠라이자 초기에는 유대인도 이들을 환영하고 좋은 관계 유대 관습을 수용하였다 –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 유대인의 금식일에 금식, 성경의 선지자들을 인용 유대인이 아닌 아랍인 거주자는 점차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결속하게 된다. 갈등의 시작 – 무슬림 세력이 커지게 됨. 무함마드의 왜곡된 구약 해석에 유대인들 반발
아이샤(11세)와 결혼한 후 유대인과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 히즈라 이후 17개월만에 기도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바꾸게 되고 유대인들과의 밀월 관계는 끝나게 된다. 생계 수단과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메카의 대상 무역 들을 공격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클라 원정 (624) – 압둘라가 이끄는 원정대가 나클라로 진격하여 메카에서 떠난 대상을 공격하고 물건을 약탈. 압둘라는 약탈물의 1/5를 무함마드에게 바침 문제 발생 – 신성월에 전쟁을 함. 무함마드는 계시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 “알라의 길을 방해하는 것이 더 큰 죄악이다”
바르드 전투 (624년) 나클라 원정 이후 두 달 후 다시 메카의 대상을 공격 무함마드는 계시로서 이슬람 군의 승리를 약속 실제 전투에서 이슬람 군은 자신들 보다 3배나 많은 메카의 병사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약탈하고 전리품을 얻는다.
유대인 바니 카이누카와의 전투 유대인과의 갈등 고조 이후로 계속되는 긴장 특히 바르드 전투 이후로 유대인들은 두려움이 커짐 이때 유대인들이 무슬림 여인을 조롱한 사건이 벌어 지자 무슬림들과 유대인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무슬림들이 전투에 승리하고 유대인들은 학살을 면하는 대신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메디나를 떠나게 된다.
우흐드 전투 (625년) 보복을 벼르고 있던 메카 군대 3000명이 700명의 무함마드 군과 전투. 이 전투에서 무함마드 군은 패배하게 된다. 궁지에 몰린 무함마드는 신앙의 부족으로 패전했다고 해석하고 책임을 회피 그러나 메디나에 고립되기 시작하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됨
마우라 우물 전투에서 회복 유대인 바니 나드르와의 전투에서 승리 - 회복 제 부족 연합군과의 전투 (627) 계속 커지는 무함마드의 세력을 방관할 수 없게 되자 1만명의 연합군이 메디나로 진격해 옴.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한 살만 알파리시의 참호 전략으로 승리 – 참호, 겨울 날씨, 사막의 비와 강한 바람의 덕 유대인 바니 쿠라이자의 도움과 배반 이후 무함마드는 바니 쿠라이자를 멸절 시킴
메카로의 재입성 (630) 메카로의 재입성을 위하여 무함마드는 628년 신성월에 검으로 무장한 1,000명의 추종자와 함께 성지 순례 명목으로 메카로 진격 곤경에 빠진 쿠라이쉬 부족은 협상을 통해서 다음 해 신성월에 성지 순례를 약속하고 돌아가게 함 – 후다이 비아 조약 629년 무함마드는 조약대로 2,000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메카의 카바신전을 방문 규범대로 성지순례를 행하여 우호적임을 보이려고 노력
다음 해인 630년에 1만명의 무슬림을 이끌고 메카로 진격 – 무혈 입성 Allah Akbar를 외치면서 카바 신전에 입성 신전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신정 통치를 선포함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의 10년 동안에 70여 차례의 전쟁을 치루었고 자신이 직접 지휘한 것도 27차례였다.
무함마드의 사망 632년 비잔틴 제국을 경계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시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지병이 발하였다. 결국 632년 6월 8일에 애처인 아이샤의 품에서 숨을 거둠.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함으로 이후 이슬람에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무함마드의 결혼 생활 무함마드는 아랍 유목인의 배경과 부족 간의 정치적 결합을 위하여 결혼을 정략적으로 사용하였지만 때로 그의 지나치게 많은 부인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 하기도 하였다. 총 15명의 부인을 두었다. 1. 카디자 2. 미망인 사우다 3. 아이샤 (질투) 4. 하프사 (오마르의 딸) 5. 자이납 (양아들 자이드의 처) 6. 주와리야 7. 롸하나 (유대인) 8. 마리아 (이집트) 9. 사피아 (유대인) 10. 움무하비바 11. 마이무나 (기독교인) 이외에도 4명 유대인이 2명 (1명은 개종을 거부) 기독교인이 한명
무함마드의 결혼은 당시 중동 결혼 문화의 산 물이다. 2. 그의 개인적 욕심도 작용했다 – 자이납 중동의 결혼 문화 – 종족 내 결혼, 정략 결혼, 일부 다처제
이슬람의 확장
1대 칼리프 – 아브 바크르 (632-634) 무함마드의 친구, 장인 꾸란의 1차 집결 – 왈라드 전투 이후 위기 2대 칼리프 – 오마르 (634-644) 아라비아에 2개의 종교를 용납하지 말라 는 무함마드의 유언을 성취 군사적 팽창을 이룬다
639년 점령 636년 점령 페르시아 637년 점령 638년 점령 640년 점령
이슬람 군은 사기 왕성 주인 노예의 차이가 없고 장군 졸병의 차이가 없었다 현지인들이 이슬람의 평등통치를 환영하였기 때문 딤미는 인두세를 물고 개종자는 의식주와 연금을 받음. 딤미는 토지 매매를 금지 무력으로 개종시키기 보다는 비개종자가 무슬림을 먹여 살리기를 원한 것이 오마르의 꿈이었다 오마르는 기독교인이었던 페르시아 노예에게 살해 당함 (644년)
3대 칼리프 – 오스만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 아랍인들은 자유스런 기풍으로 세습은 드물었다 무하지루 – 메카에서 이주해온 원 무슬림 안사르 – 메디나에서 협력하게 된 무슬림 제3의 세력 – 메카 재점령 이후 귀의한 메카 명문 출신의 무슬림들 – 이들이 우마이야 쿠라이쉬 부족의 우마이야 파가 오스만을 세움
오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였으나 유약한 지도자로 70세 고령으로 취임 무함마드의 양자였던 알리의 추종자들에게 위협 받았다. 내부에 칼리프를 둘러싸고 갈등과 긴장 이 고조되었다. 656년 자기 집에서 기도하던 중 죽임을 당함 651년 중국 당나라에 사신을 파송하기도 함
오스만 死後 4대 칼리프 자리를 놓고 암투 알리의 추종자들은 선지자의 직계후손인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이샤와 오스만의 조카 사위인 무아위야는 오스만의 암살 배후로 알리를 지목하며 암투 이 암투에서 알리가 승리하고 4대 칼리프에 등극 등극하자 마자 수도를 메디나에서 이라크의 쿠파 로 옮김
657년 무아위야와 전쟁 시작 무아위야가 승리하고 661년 알리는 쿠파로 퇴각하였다가 쿠파에서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함 무아위야는 자신을 5대 칼리프로 선포하고 수도를 다시 다마스커스로 옮김 무아위야가 다시 우마이야 왕조를 계승하지만 알리의 추종자들은 무아위야와 우마이야 왕조를 부인하고 분리하여 자신들의 칼리프를 세우고 시아파로 분리된다.
그래서 4대 칼리프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하고 5대 칼리프 이후를 분파시대라고 한다. 5대 칼리프 무아위야는 비잔틴을 7년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6대 칼리프는 첫 세습 칼리프로 아들 야지드가 등극 (680-683) – 5년 간 내전에 빠짐 혼돈의 시기로 2년 동안 2명의 칼리프가 등극
9대 칼리프인 압둘 말리크가 685년에 등극하나 7년의 기간을 걸쳐서 왕권을 세우고 안정함 압둘 말리크에 의해서 북아프리카 지역을 점령 버버족을 축출 10대 칼리프인 왈리드(705-715)가 용병 타리크의 지도 아래 711년과 712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침공
715년 슐레이만이 등극하여 이슬람 군대는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북부 연안, 북인도까지 확장 732년 투어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프랑스의 찰스 마르텔에게 패배하여 유럽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후 100년만에 피레네에서 히말라야까지 대서양에서 인도양 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중앙아프라카까지의 대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 – 762년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천도 이후로 이슬람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869년 흑인 노예의 폭동이 14년간 지속 압바스 왕조 – 부와이 왕조 – 파티마 왕조
부와이 왕조가 945년 압바스 왕조 공격 실제적 지배 맘묵 출신의 투르크족이 지역 세력을 얻어감 이중 셀주크 투르크가 부와이 왕조를 몰아냄 술탄 칭호를 받음 압바스 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 사라센 제국 – 우마이야와 압바스 왕조 시대를 지칭 10세기 경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 장악
십자군 전쟁 이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 1096년 시작 1099년 예루살렘 점령 잔혹한 학살 – 1,000명의 수비대 이외에 50,000 ~ 70,000명의 무슬림을 학살 유대인은 산 채로 화형
압바스 왕조의 몰락 이후 울라미/수피 시대 도래 울라미 – 법률학자 마드라사 설립, 꾸란 암송을 중심 수피즘 – 수도승, 신비주의 세이크 중심, 후에 세이크가 성자로 숭배됨 울라미 이슬람이 채워주지 못하는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슬람 선교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알 가잘리 – “종교에 대한 학문의 재생”
몽골의 침입 (1219-1260) 중동을 징기스칸의 손자 훌라구칸이 침입 1258년 바그다드 함락 – 60만명 학살 1260년 몽골 군을 처음으로 물리침 이집트의 맘룩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물리침 이후 시리아, 이집트에서 물리침 그러나 이 지역에서 몽골인이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많이 개종 인도에서는 몽골인들이 무굴 제국을 건설 최종적으로 1492년 유럽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슬람 제국은 초토화 된다.
오스만 터키의 등장 몽골의 점령 기간 중 1258년 이슬람의 부흥이 터키 지역에서 일어남 터키 용병 출신인 오스만이 이슬람의 재건을 외치고 세력을 규합 비잔틴 제국의 경계에서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까지를 지배권에 두게 됨
1453년 무함마드 2세 비잔틴 함락 1514년 페르시아 점령 1516년 시리아 점령 1517년 이집트 점령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1922년까지 지배
서구의 식민 통치 하에서의 이슬람 국가들 18세기 이후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대거 북아프리카로 진출 1789년 나폴레옹이 인도와 이집트까지 진출 프랑스 –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영국 – 이집트, 수단, 수에즈 운하 이탈리아 - 리비아
1922년 오스만 터키의 지배가 끝나자 중동은 종족, 부족 간의 수많은 전쟁터가 되고 이 틈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강대국이 들어와서 지배권을 장악해 가게 된다. 1932년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건립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1915년 영국이 아립인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을 전쟁 후 아랍인에게 주겠다고 약속 - 맥마흔 서한 1917년 유대인에게는 다른 약속-벨푸어 선언 정작 전쟁 후에는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1947년 유엔이 팔레스타인에 아랍, 유대인 두 나라의 독립을 결정 – 결국 불씨가 됨
이 결정에 따라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 지속적인 중동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20세기 무슬림들의 패러다임 시도 1) 범 이슬람주의 2) 범 아랍주의 3) 이슬람 원리주의 4) 사회주의 이슬람 5) 세속주의 6) 자유주의 이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