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작성자:김성민
1.안중근에 대한 소개 (1879.9.2~1910.3.26)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2. 안중근의 업적 1909년 10월 이토 저격.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안중근이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3. 안중근의사의 손가락과 태극기 우선 안중근 선생님께서 손가락이 잘린 이유부터 말씀 드립니다. 안중근 선생의 손가락은 왼손 4전째 손가락의 마디하나가 없는데 그건 고문에 의해서 그렇게 된것이 아니라 선생이 31세에 노령 카리에서 결사동지(독립운동 비밀결사동지) 11명과 함께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했기때문에 손가락 한마디가 없는것입니다. 그리고 그후부터 글을쓰면 손바닥을 찍어 남기셨습니다.
4. 안중근의사의 유언 안중근은 을사조약이 쳬결되자 자신의 상점을 팔아 돈의 학교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다. 4. 안중근의사의 유언 안중근은 을사조약이 쳬결되자 자신의 상점을 팔아 돈의 학교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9년 하얼삔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해 항일 운동에 큰힘이되었다. 안중근은 두아우에게 " 내 천국에 가서도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것이니 너희는 나를위하여 동포에게 말하되, 각기국가에 대한책임을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해 뜻을 이루어 대한독립의 높은소리를 천국에까지 들리게 한다면 나는 춤추며 만세 부르리라" 라는 결연한 유언을 남기고 사형을 받았다.
5. 안중근의사 기념관 소개 안중근의사의 애국 애족 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고자 1970년에 건립되어 40여 년간 그 소임을 다 해온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민의 성금과 국고를 들여 새로이 건립, 2010.10.26일 개관하였다. 안중근의사께서는 1910년 3월 만주 여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순국하였으나, 우리 정부는 조국이 광복을 이룬 후에도 6.25전쟁과 4.19혁명, 5.16군부 쿠테타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안중근의사에 대해 이렇다 할 위훈을 기리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기념관은 우리의 젊은 세대와 후손들이 국가와 민족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지사를 민족의 긍지로 여기며, 스스로 삶의 표본과 중심을 일으켜 세우는 산교육의 마당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91 (남대문로5가 471-2번지 관람시간하절기(3월~10월) / 10:00 ~ 18:00 동절기(11월~2월) / 10:00 ~ 17:00 종료 1시간 전 입장 마감 관람료무료 휴관일매주 월요일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