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남북한정치쟁점 .
* 제2차 세계대전과 남북한분단의 관계? Q & A 질의 응답 독일은 베르사이유조약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www. 독일은 베르사이유조약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2. 파시즘의 발흥 이유와 그 성격은? 3. 대공항의 발생 이유와 유럽에의 영향은/ 4. 1939년 2차대전 전 독일의 대외전략 5. 2차세계대전과 연합국 회담/ 카이로, 얄타, 포츠담 등 * 제2차 세계대전과 남북한분단의 관계? cafe.naver.com/cyberpolitics
Contents Treaty of Versailles The Rise of Fascism in Italy Great Depression 연표 한반도 참고자료
Treaty of Versailles(Paris Peace Conference - 1919.01.18~06.28 ◦ Big 4 : U.S. President W. Wilson, British Prime Minister D. Lloyd George, French Prime Minister George Clemenceau, Italian Prime Minister Vittorio E. Orlando ◦ Wilson의 14개조(1918.01) : 비밀외교의 배척, 公海에서의 항해의 자유, 경제적 장벽의 제거와 무역의 평등, 군비축소, 식민지문제의 조정, 오스트리아 및 터어키帝國 그리고 발칸에서의 民族問題의 해결(民族自決主義), 國際聯盟의 창설 ◦ 주요 결정사항 ⇒ 해외식민지 상실 : 카메룬/나미비아/탄자니아, 파푸아뉴기니 동북부 등 ⇒ 영토 상실 : Alsace-Lorraine, Malmedy-Eupen, West Prussia/Upper Silesia, Memel, North Schuleswig ⇒ 군비 제한 : 해군/공군 해산, 육군 10만 이하 제한, 중포/탱크의 생산 및 사용 금지 ⇒ 전쟁배상금 : 1,320억 마르크 ~> GNP의 2배 가량(2010년 10월 3일이 완납예정일이었음) ◦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독일에 두는 보복적 조치 ~> 또 다른 (보복)전쟁의 遠因 [파리강화회의] 1919년 1월 18일 戰勝國 27개국의 대표로서 파리講和會議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강화회의의 내용을 결정한 것은 美·英·佛의 3국이었다. 표면상으로 전후처리와 평화수립의 大原則으로서 연합국이 내세운 것은 1918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월슨(Wilson)이 제시한 '14개條(fourteen Points)'였다. 그 주된 내용은 비밀외교의 배척, 公海에서의 항해의 자유, 경제적 장벽의 제거와 무역의 평등, 군비축소, 식민지문제의 조정, 오스트리아 및 터어키 帝國 그리고 발칸地域에서의 民族問題의 해결(이른바 民族自決主義), 國際聯盟의 창설 등이었다. 그러나 월슨의 이상주의적인 원칙이 파리강화회의에서 그대로 실천될 수는 없었다. 英·佛은 전쟁 중에 이미 여러 나라와 전후의 영토문제에 관하여 많은 비밀조약을 체결한 바 있고 또한 전승국의 현실적인 국가적 이해관계도 착잡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월슨의 14個條는 그 일부만이 실현되고 실제로 강화회의를 좌우한 것은 英·佛을 중심으로 한 전승국의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전승국이 전쟁 중에 체결한 비밀조약, 그리고 敗戰國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었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對獨講和條約인 베르사이유條約은 6월 25일,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하고 알사스·로렌地方을 프랑스에 반환하는 등 많은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군비도 극도로 축소되어 육군 10만, 군함은 36척으로 한정되고 잠수함과 공군은 금지되었으며 주된 무기생산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30년에 걸쳐 상환할 배상금 총액은 1,320億金 마르크라는 天文學的 숫자에 달하였다. 베르사이유조약에 이어 오스트리아(1919.10), 불가리아(1919.11), 터어키 (1920.8) 등 다른 패전국과의 평화조약도 개별적으로 체결되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帝國이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지고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Croatia) 등을 얻어 오늘의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터어키 帝國 또한 붕괴하여 아프리카와 西 아시아의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러시아의 소비에트政權은 강화회의에 참석이 허용되지 않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條約이 폐기되었으나 핀란드, 에스토니아(Estonia), 라트비아(Latvia), 리투아니아(Lithuania)가 독립하였다. 16세기말에 독립을 상실했던 폴란드가 옛 영토를 회복하여 독립하고 단찌히 (Dansig)는 국제연맹 관리하의 自由市가 되었다. 이렇듯 유럽의 판도는 전후에 크게 변하였다. 파리講和會議의 결과 탄생한 새로운 國際秩序를 베르사이유體制라고 한다. 이 베르사이유體制는 그후 20년이 못되어 파괴되고 第2次 世界大戰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여러모로 비난을 받았다. 특히 독일에 대한 평화조약의 가혹함과 많은 新生國家를 탄생시킴으로써 유럽 전체를 발칸화하였다(Balkanization of Europe)는 점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이유體制의 붕괴의 요인은 베르사이유條約 그 자체보다 오히려 전후 20년간의 유럽史와 世界史의 흐름 속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국제협조와 평화의 모색] 베르사이유體制의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은 國際協調와 平和摸索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것이 國際聯盟(League of Nations)의 창설이었다. 國際聯盟은 국제평화의 확립과 인류문화의 향상이라는 2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제협력 기구로서 창설되었으며 군비축소, 안전보장,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 문화 및 인도적 사업 등을 그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國際聯盟은 그 출발부터 차질이 생겼다. 國際聯盟의 제창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윌슨이 물러가고 共和黨이 정권을 잡고 孤立主義로 되돌아간 결과 國際聯盟에 가입하지 않았고, 독일과 소련 등의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큰 결함이 있었다. 즉 참가국에 대한 명령권을 가진 기구가 없어 임의로 탈퇴할 수가 있고, 특히 평화를 파괴하는 국가에 대한 制裁方法으로서는 경제적 봉쇄 정도로서 실효성이 희박하였다. 國際聯盟과 더불어 주목을 끄는 것은 그 보조 기구로서 설립된 國際勞動機構(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I.L.0.)의 창설이었다. 이는 노동자의 복지향상이 국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의 해결을 위한 국제적인 협력이 처음으로 모색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국제노동기구는 실제로 노동시간, 부인과 연소자의 근로, 야간노동, 실업, 공중위생문제 등에 관하여 많은 規約을 마련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世論을 환기시키는 때 공이 컸다. 유럽에서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佛·獨의 대립이었다. 1923년 독일이 배상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자 프랑스는 독일의 최대 공업지대인 루르(Ruhr)지방을 점령하였고 이로 인하여 두 나라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평화기운과 더불어 1925년 독일外相 스트레제만 (Stresemann)의 제의에 따라 로카르노(Locarno) 協定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獨·佛이 베르사이유條約을 준수할 것이며 協定國은 모든 문제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약속한 것으로서 대전 후 처음으로 유럽에 해빙무드를 가져온 것이었다. 다음 해(1926) 독일은 國際聯盟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평화기운은 1928년보다 규모가 큰 파리협정 또는 켈로그-브리앙 協定(Hellos-Briand Pact)으로 알려진 不戰條約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이 협정은 국가정책 수행의 수단으로서 전쟁을 적극적으로 배제하자는 것으로서 처음에 15개국이, 후에는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가 참가하였다. 전후에 있어 평화수립과 경제부흥에 직접 관련된 중요문제는 배상문제였다. 베르사이유條約 후에 결정된 독일의 배상금은 막대한 액수였고 패전의 혼란과 경제적 침체에 허덕이는 독일로서는 도저히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루르 地方을 점령하고 이로 말미암아 독일경제는 파탄 직전에 올리게 되었다. 독일경제의 파탄은 유럽경제의 혼란을 뜻하는 동시에, 戰勝國의 대부분이 미국에 빚을 진 債務國으로서 배상금을 받지 못하면 미국에 대한 부채 또한 갚을 길이 막연하였다. 이와 같이 배상금과 戰債는 미묘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4년 미국은 도오즈案(Dawes Plan)을 제시하여 2 億弗 의 차관으로 독일의 마르크貨를 안정시키고 앞으로 5년간의 배상액을 우선 잠정적으로 정하였다. 마르크貨의 안정과 더불어 독일경제도 부흥의 기미를 보였으나 배상금은 역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29년 미국은 다시 영 案(Young Plan)으로 배상금 총액을 4분의 1로 감소시키고 지불연한도 59년으로 연장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불어닥친 세계공황으로 그나마 지불이 불가능해지자 미국 대통령 후버는 1년간의 상환정지를 통고하였다(Hoover Moratorium). 1932년 관계국은 로잔느(Lausanne)會議에서 배상금을 44분의 1로 감소하고 그나마 경제회복 때까지 보류하기로 하여 실질적으로 이를 취소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에 대한 戰債償還도 흐지부지되었다. 배상문제보다 더 직접적으로 평화수립에 관련되는 문제는 군비축소문제다. 윌슨은 전후에 日本의 세력이 태평양지역에서 비대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워싱턴 軍縮會議(1921∼22)를 소집하여 앞으로 10년간 주력함을 건조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회의의 부산물로서 美·英·拂·日이 태평양지역에서의 기존 領土保有權을 서로 존중할 것을 약속한 四國條約과 이 회의에 참석한 모든 국가가 中國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 원칙을 존중할 것을 약속한 九國條約이 체결되었다. 워싱턴회의는 군비축소에 관한 한 주력함만 제한하였기 때문에 補助艦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자 제네바 軍縮會議가 소집되었으나(1927)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참석하지 않고, 美·英·日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1930년 세계공황 속에서 각국이 다 군비지출을 삭감할 필요를 느끼게 되어 런던에서 군축회의가 열려 美·英·日 사이에 보조함의 비율이 정해 졌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의견의 대립으로 협정에 참가하지 않았다. 1932년에는 제네바에서 國際聯盟 주도하에 국제적인 군축 회의가 진행중이었으나 독일의 再武裝을 주장하는 히틀러의 나찌스가 정권을 장악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국 대표는 하나 둘 빠져 나가버렸다. 얼마 안 가서 군비축소가 아니라 군비확장이 각국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戰後의 유럽과 美國] 1. 英 國 일찍부터 議會民主主義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1918년에 모든 成年男子에게, 그리고 1928년에는 모든 成年女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고 노동조합이 강화되어 1901년에 창설된 勞動黨이 눈부신 진출을 보여 정권을 잡는 등 民主主義가 크게 진전하였다. 그 결과 자유당이 쇠퇴하여 전후의 영국정계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좌우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전후의 영국경제는 큰 어려움에 당면하였으며 그것은 주로 수출무역의 부진으로 인한 산업의 위축이었다. 불황과 실업이 계속되고 부흥의 기미가 통 보이지 않고 실업자수가 100만 이하로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4년 맥도날드(MacDonald)가 노동당 내각을 조직하여 철도와 광산을 국유화하고 住宅資金의 放出, 養老制度와 失業保險制의 强化 등 과감한 복지정책을 밀고 나가려 했으나 短命에 그치고 정권은 보수당에게로 넘어갔다. 이로부터 1929년의 공황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안정된 번영의 시기였다. 한편 帝國의 編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아일랜드의 남부는 자유국이 되고 1937년에는 완전히 독립하여 國名도 에이레(Eire)로 고쳤다. 이집트는 전후(1922)에 입헌군주국이 되고 간디(Gandhi)의 지도하에 독립운동을 계속 하였던 인도는 自治領과 동등한 자격을 얻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가 영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서 독립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세변화를 감안하여 웨스트민스터憲章 (Statute of Westminster, 1931)이 제정되었다. 이 헌장은 1926년의 帝國會議의 결정을 성문화한 것으로서 本國과 自治領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영국聯邦의 一員으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독립적인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2. 프랑스 戰勝國 중에서 전쟁피해를 직접, 가장 많이 입은 것은 프랑스였다. 그래도 알사스와 로렌을 다시 찾고 독일을 응징할 수 있어 1870년의 굴욕을 씻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독일을 무력한 상태에서 고립시키려고 영국과의 동맹을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폴란드 및 체코와 이른바 小協商(Little Entente)을 맺었다. 전쟁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부흥비도 막대하여 인플레가 심해지고 경계상태가 악화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정세 또한 복잡하였다. 中間派政府는 極右와 極左로부터 공격을 받고 10 여개의 群小政黨이 난립하여 연 2회 꼴로 내각이 바뀌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도 프앙카레(Poincare)가 擧國內閣을 조직함으로써(1926) 어느 정도 안정되고 1928년 平價切下를 통하여 재정도 안정시켜 번영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황의 타격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늦게 받은 편이었다. 3. 美國의 繁榮 미국도 人的 ·物的 피해가 컸으나 피해보다는 혜택이 더욱 컸으며 영국을 능가하여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가장 부유하고 번영된 나라가 되었다. 1921년 윌슨 대신 대통령으로 취임한 共和黨의 하딩(Harcing)은 '正常 (normalcr) 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공황까지의 미국의 번영의 길을 열었다. 이 시대 는 企業의 전성기요 황금시대로서 기업가가 미국 정치와 경제의 최고 권위자로 군림하였다. 金保有高는 전후 수년간에 46億弗에 달하여 세계의 절반에 육박하고 세계 자동차의 80%, 전화의 61%를 점하고, 1923년의 石油 소비량은 프랑스인 1인당 37kg에 비하여 미국인은 956kg이라는 엄청난 격차를 보여 주는 번영이었다. 그리하여 하딩을 이은 공화당의 쿠울리지(Coolidge) 대통령은 영원의 번영을 구가하는 형편이었다. 전후 미국은 월슨의 이상주의와 국제협조 정신을 완전히 버리고 고립주의로 돌아갔다. 그것은 미국경제가 다른 지역의 경제에 의존하는 정도가 매우 적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전후 대부분의 나라가 허덕이고 있는 와중에 뛰어 들기 싫다는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국은 월슨이 제창한 國際聯盟 에도 가입하지 알았으나 완전한 고립을 지킬 수는 없었다. 4. 獨逸의 再建 전후 가장 어렵고 비참한 상태에 놓인 것이 독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19년 2월 바이마르 (Weimar)에서 男女를 불문하고 20세 이상의 독일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는 독일이 共和國聯邦임을 선언하고 노동자 출신의 투사인 社會民主黨의 에베르트(Ebert)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베르사이유 條約을 비준한 후 당시로서는 가장 民主的인 헌법을 채택하였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民主的인 바이마르共和國이 출범한 것이다. 바이마르憲法은 主權在民을 규정하고 20세 이상의 남녀의 평등한 선거로써 구성되는 國會와 직접적인 국민투표에 의한 임기 7년의 대통령을 두었으나 국회의 권한은 매우 컸고 국민의 노동권을 규정하는 등 매우 民主的인 것이었다. 그러나 共和國의 전도는 다난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그것은 敗戰의 산물이었고, 둘째로 독일국민은 패전을 시인하지 않고 "등에 칼을 맞았다" 즉 배반당했다는 神話에 매달릴 정도로 심한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셋째로 독일국민에게 있어 民主主義는 처음 대하는 낯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격심하였던 것은 경제난이었고 그것은 마르크貨의 下落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전쟁 전의 1마르크는 美貨 25센트였으나 23년 초에는 美貨 1弗이 5萬마르크가 되고, 프랑스의 루르占領으로 독일경제가 최악상태에 빠졌던 同年 11월에는 1弗에 25億 2,000萬마르크라는 경이적인 폭락현상을 빚었다. 우표 한 장이 5,000萬마르크였다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난은 자연 사회불안을 야기시키고 極右와 極左의 폭동이 연달아 일어났다. 히틀러(Hitler)의 폭동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래도 1924년에는 안정의 서광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國防相 제에크트 (Seeckt)의 노력으로 폭동이 진압되고 1兆마르크를 1렌텐마르크(Rentenmark) 로 환산하는 通賞改革으로 인플레를 잡고 新通貨는 도오즈 案의 채택으로 미국으로부터의 2 億弗의 차관이 뒷받침하여 안정지었다. 이 통화개혁을 단행한 스트레제만은 對外的으로도 온건한 국제협조의 외교를 펴서 로카르노條約을 체결하고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였다. 외국의 지원과 국민의 강한 재건의욕으로 독일은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과 기업형태를 자랑하는 자본주의국가로 부흥하고 20년대 후반의 번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民主的인 바이마르共和國의 앞날도 밝은 듯이 보였다. null
The Rise of Fascism in Italy ◦ 1919년 Benito Mussolini가 주장한 國粹主義的·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 ◦ 배경 ⇒ 18C 末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1차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과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사회적 불안 ⇒ 국제적 대립과 전쟁위기의 격화, 대량실업과 공황, 국내정치의 불안정, 기존 정당·의회 및 정부의 부패·무능·비능률, 각종 사회조직의 강화에서 오는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정치적· 사회적 집단 간의 충돌의 격화 등 ◦ 특징 ⇒ 비합리적, 감정적, 광신적, 독단적 ~> 적에 대한 폭력과 말살 ⇒ (계급/민족) 인간불평등 수용 ~> 엘리트에 의한 정치 ⇒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활 전반에 걸친 통제 ⇒ 1인과 1당에 의한 통치 ~> 선전과 검열, 반대/항의 불허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독일은 모든 식민지(카메룬/나미비아/탄자니아/파푸아뉴기니 북부 등) 포기, 모든 전쟁배상 비용 배상' '배상금(1,320억마르크)은 국민 총생산의 2배 (전쟁 배상금이 2010년 10월 3일 완납 예정일 이였다고 하니 정말 엄청남…)
The Rise of Fascism in Italy - Anti-Communism ◦ 공산주의 하에서 생산의 모든 수단인 재산, 미디어 등 사회의 모든 요소들이 정부에 의해 통제 ◦ But,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파시즘을 선택했고, 히틀러는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를 그의 권력 강화에 악용 A Battle for Germany Nazi anti-communist book, 1933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독일은 모든 식민지(카메룬/나미비아/탄자니아/파푸아뉴기니 북부 등) 포기, 모든 전쟁배상 비용 배상' '배상금(1,320억마르크)은 국민 총생산의 2배 (전쟁 배상금이 2010년 10월 3일 완납 예정일 이였다고 하니 정말 엄청남…)
Great Depression - 1차대전 후 유럽의 경제적 혼란은 미국의 호황으로 위기 모면 ◦ But, 1929년 미국의 주식시장 붕괴에 이은 경제공황은 유럽경제의 불안정성을 자극 ◦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된 경제 침체와 실업률 상승으로 인해, 국민들은 군사력 증강과 영토의 정복을 통해 성공을 약속 강력한 지도자와 정부에 열광 - 서유럽 ◦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방대한 식민지를 확보하고, 무역을 독점하는 블록화된 경제체제를 구축 ◦ 바이마르·伊·日 등의 후발국가들은 식민지가 충분치 않아 英·佛·美 등과의 무역에 의존 ⇒ 바이마르 :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인한 무리한 통화팽창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림 ⇒ 이탈리아 : 1차대전 승전국이었지만 英·佛에 밀려 영토(Dalmatia) 확장 실패하고 파시즘化 ⇒ 혁명 이후 위협적으로 성장하는 소련에 대한 경계심과 英·佛에 대한 반발심,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등의 결합
Great Depression - 동유럽 ◦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겪은 러시아는 발트 3국, Besarabia(Moldova)와 Bukovina(Romania 동북부 ~ Ukraine 서남부) 북부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확장해 나감 ◦ 발칸반도에서는 2번의 발칸전쟁 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된 여러 국가들이 각각 민족주의를 추구하면서 갈등 심화 ⇒ 1937.11. 나치독일,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합병 ⇒ 독소불가침조약(1939.8.23) 체결 ⇒ 폴란드 침공(1939.9.1) ⇒ 유고슬라비아 침공 ⇒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主軸國(獨·伊·日) 합류
Appeasement - Sudetenland ◦ [두산백과사전] 면적 2만 3000k㎢. 영토확장을 꾀하던 히틀러가 이 지역 독일인에 대한 차별을 이유로 割讓을 요구 ◦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야심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키려고, 체코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뮌헨회담 (1938)에서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 ⇒ 북부의 리베레츠와 야블로네츠나드니수, 서부의 카를로비바리, 마리안스케라즈네 등 ⇒ 체코는 산업의 40%(광업·유리·섬유·제지의 대부분)를 빼앗겼으며, 국경방비가 무너지고 주요 철도간선이 끊어졌음 ~> 나치스 침략의 제1보
Nationalism - 민족주의 ◦ 민족을 기반으로 국가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민족생활의 확립/발전을 정치∙문화적 최고목표로 함 ◦ 중세는 봉건영주와 국왕이 정치적 공간을 할거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교황이 통일하고 있는 도식 ⇒ 근대가 되자 민족을 '구축’한 지도자가 근대 민족국가를 정치적인 단위로 삼음 ◦ 민족주의의 기원은 Napoléon Bonaparte의 프랑스 ⇒ 프랑스혁명 후의 프랑스는 그 정치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아래서 중세적 세력을 분쇄하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일부에 큰 사회변혁을 초래하였으며, 그것이 후에 근대 독일국가, 근대 이탈리아 국가가 탄생하게 된 최초의 자극이 되었음 ◦ 19C 중반부터 말까지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과 미국을 재편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러시아제국과 터키제국의 붕괴와 많은 민족국가의 독립을 낳았음 ⇒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제국주의∙식민지주의의 붕괴를 촉진하고, 아시아∙아프리카∙카리브 에서 많은 민족국가를 탄생시킴 ⇒ 1800년에는 독립국가가 20개, 2000년에는 200개에 달함
연표 1932년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36.8%의 득표율로 패배했지만, 시 기 내 용 1931년 9/18 만주사변 발발 1933년 1/30 히틀러, 獨逸의 총리로 임명됨(힌덴부르크) 3/1 만주국 성립 선언 3월 日本, 만주국 승인거부 이유로 국제연맹 탈퇴 10월 獨逸, 제네바 군축에 반대하여 국제연맹 탈퇴 1935년 獨逸, 재군비 선언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침입 1936년 2월 스페인에 인민전선정부 성립 6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 성립 7/17 스페인 내전 발생(~39. 3. 28.) 12/12 中國, 서안사건 발생 12/25 中國, 제2차 국공합작, 항일민족통일전선 수립 1937년 7/7 중일전쟁 발발(2차대전 개전, 아시아) 1938년 獨逸, 오스트리아 병합 9월 獨逸, 체코슬로바키아 일부(수데텐 지방) 병합 시 기 내 용 1939년 9/1 獨逸, 폴란드 침공(2차대전 개전, 유럽) 9/3 英國·프랑스, 독일에 선전포고 9/28 獨逸·蘇聯, 폴란드 분할 11/4 美國, 중립선언 11/28 蘇聯, 핀란드에 개전(~40. 3.) 1940년 4월 獨逸, 덴마크 점령, 노르웨이 침공 5/10 英國, 처칠의 거국내각 조직 獨逸, 베네룩스3국 침입, 서부전선 공격개시 6/22 獨逸, 프랑스와 정전협정, 영국전쟁 돌입(~9월) 8월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 3국동맹 가입 9월 日本, 인도차이나 침공(프랑스, 네덜란드) 10월 이탈리아, 그리스 침공 1941년 獨逸, 유고·그리스 점령(발칸지역 제압 완료) 4/13 蘇聯, 스탈린 수상 취임 獨蘇戰爭 개시 1932년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36.8%의 득표율로 패배했지만, 당시 86세의 고령이던 대통령 당선자 힌덴부르크는 젊고 강력한 독일의 지도자에게 총리라는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획책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데, 10년 만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얻었고, 곧 독일국민들은 그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두고 있었다.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하는 것 등이었다. 거기에다 어려서부터 체질화된 광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현실화되었다. 600만 명의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다가 대부분 군대와 직장으로 돌아갔다.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우토반이 건설되었고, 비틀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결과 자국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능멸하면서 군비를 증강해나갔다. 그러나 이웃국가들은 항의하는 흉내만 냈다.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1939년 8월 23일) 히틀러-스탈린조약
日本, 마닐라·수마트라·자바 점령(네덜란드) 연표 시 기 내 용 1941년 7월 日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美國, 대일 석유 금수조치 8/9 美·英 대서양 헌장 채택 10월 日本, 도조 히데키 내각 수립 12월 蘇聯, 독일에 대해 역습 시작 12/7 日本, 진주만 공습(2차대전 개전, 태평양) 12/8 美國, 일본에 선전포고 12/11 獨逸․이탈리아, 미국에 선전포고 12/23 日本, 필리핀 공격 12/24 日本, 웨이크섬(하와이-괌 사이 위치) 공격 1942년 2월 日本, 싱가포르 점령(영국) 3월 日本, 마닐라·수마트라·자바 점령(네덜란드) 6/4 日本, 미드웨이 전투에서 패배 8월 美國, 과다카날에 상륙(~43. 2.) 英國, 북아프리카에서 반격개시(~43. 5.) 시 기 내 용 1943년 1/14 美·英, 카사블랑카 회의(~26.) 2/2 蘇聯,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 5/13 북아프리카 연합국승리 6/10 聯合國, 시칠리아 상륙 9/3 이탈리아, 무조건 항복 12/1 카이로 회담, 카이로 선언 발표 1944년 2/20 聯合國, 독일 공습 3월 日本, 미얀마에서 인도로 침입(7월 패배) 6/6 聯合國, 노르망디 상륙 7월 美國, 사이판 섬 점령 8/25 파리 해방 9월 루마니아, 독일에 선전포고 10월 불가리아, 독일에 선전포고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군, 베오그라드 해방 10/20 美國, 필리핀 상륙
원폭(리틀보이, little boy) 히로시마 투하 연표 시 기 내 용 1944년 12/16 獨逸, 발지전투 개시 1945년 1월 헝가리, 독일에 선전포고. 蘇聯, 바르샤바 해방 1/28 발지전투 종료(반격 시도 좌절) 2/4 美·英·蘇, 얄타회담 2/19 美國, 이오섬 상륙 3/9 美國, 일본 본토 폭격 4월 美國, 오키나와 상륙 4/12 루즈벨트 서거 4/25 蘇聯, 베를린 침입 4/28 이탈리아 파르티잔, 무솔리니 저격 시 기 내 용 1945년 4/30 히틀러 자살 5/2 베를린 함락 5/8 獨逸, 무조건 항복 ⇒ 유럽 전쟁 종식 7/26 美·英·中, 포츠담 선언(대일 항복권고) 8/6 원폭(리틀보이, little boy) 히로시마 투하 8/8 蘇聯, 일본에 선전포고 8/9 원폭(팻맨, fat man) 나가사키 투하 8/15 日本, 무조건 항복 ⇒ 아시아·태평양전쟁 종식 8/30 美國, 일본 본토 점령 9/2 日本, 美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
연표 독일,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대전 발발) 獨·伊, 美에 선전포고. 日, 진주만·필리핀 공격 일본, 미드웨이해전(42.6.5~7) 패배 스탈린그라드전투(42.8.21~43.2.2), 쿠르스크전투(43.7.7) 미드웨이해전 6월 5일 일본군은 야마모토[山本] 해군대장이 지휘하는 전함 11척, 항공모함 8척, 순양함 18척 등 연합함대 주력과 나구모[南雲] 중장 지휘하의 기동부대를 합친 350척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미드웨이섬의 미군기지 공격과 미해군 기동부대를 유인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일본으로서는 이 작전을 입안중이던 4월에 J.H.둘리틀의 폭격기대에 의하여 도쿄[東京]가 첫 공습을 받자 이 작전에 제해수역(制海水域)의 확대까지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색적(索敵)을 게을리한 것과 암호가 미국측에 해독된 탓으로 대기중이던 미국의 급강하 폭격기대의 급습을 받고 나구모 함대는 주력 항공모함 4척과 병력 3,500명, 항공기 300대를 상실하는 참패를 당하였으며, 제공권 상실로 작전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태평양 ·인도양에서 우위를 지켜 온 일본의 해군 기동부대는 이 해전의 패배 이후 전국의 주도권을 미군측에 내주게 되어 전쟁 수행상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출처] 미드웨이해전 [─海戰, Battle of Midway ] | 네이버 백과사전 쿠르스크 전투 (1943년 7월 4일) 소련군이 독일 전격전(Blitzkrieg)의 공포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뒤 독일군 수뇌부는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인들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와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결과 쿠르스크 시의 소련군을 목표로 다방면에서 공격을 퍼붓는 "치타델레(Zitadelle, 독일어로 '보루'라는 뜻)"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80만 명의 병사와 2,700대의 전차, 그리고 1,800대의 공군기로 구성된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최대 규모의 공격군을 조직했다. 독일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독일군의 공격 목표가 되리라고 예상되는 지점에 철저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선 엄청난 면적에 지뢰를 묻어놓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일의 제4 기갑군은 7월 4일 남쪽에서, 제9군은 7월 5일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기갑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독일군 기갑 부대와 보병대는 어느 정도 진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 마을 근교에서 벌어졌다. 독일의 제2 SS 판처 군단과 소련의 제5 기갑 수비대가 맞서 싸웠다. 7월 20일, 히틀러는 전투를 중지시켰다. 미국군과 영국군 사단이 시칠리아를 침공했기 때문에 군대를 옮겨 동맹인 이탈리아를 지원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굳이 따지자면 무승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소련 사령관들은 독일의 전격전을 어떻게 가로막아야 하는지를 증명하였다. 1943년 한 해에 걸친 반격으로 소련은 독일군을 러시아 중부와 남부 너머로 몰아낼 수 있었다. ============================================================================= 스탈린 그리드전투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된 전투중 하나입니다. 스탈린 그라드전투:1942년8월21일~1943년2월2일 동부전선에서 가장 혹독한전장. 이전투에서 7초마다 군인 한명이 죽었다고하며 소련군의 평균 생존시간은 24시간이였다고한다. 승리한 국가:소련 참전병력 추축군: 독일[이탈리아,루마니아,헝가리] 약50만명+지원군 독일 제 6군 독일 제4 기갑군 이탈리아:제 8군 루마니아:제 3군 루마니아:제4군 헝가리:제 2군 연합군:소련 170만명의 보병투입 스탈린 그라드전선군 남서 전선군 돈 전선군[소련군은 방위 위치에 다른 부대가 있었습니다.] 손실 독일:40만명[포로9만1000여명]루마니아군:20만명,헝가리군:13만명,이탈리아군:12만명 총사상자;85만명[포로포함] 소련:약 113만명사상 전사 및 포로:약47만8천명부상:65만 민간인 피해:최소 4만여명 사망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 - 주요 내용 ①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 ② 야만적인 적국에는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 ③ 일본의 침략을 저지·응징하지만, 3국 모두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음 ④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를 박탈하는 동시에 만주·타이완·펑후제도(澎湖諸島·타이완해협)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함.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조항을 넣어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고 명시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받았음. - 이상의 목적으로 3국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천명하였는데,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이 조항들이 재확인되었음. - 개요 : 1943년 11월 27일 美·英·中 3개 연합국이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 5일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 등이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하였음. cafe.naver.com/cyberpolitics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 - 개요 : 1945년 2월 4일~11일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美·英·蘇의 수뇌가 모여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 - 주요 내용 • 美·英·佛·蘇 4국이 독일을 분할점령하되, 독일인에 대해 최저생 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 일체의 의무를 지지않는다는 데 합의 합의 •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몰수하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 •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임함. • 패전국 또는 광복을 맞은 민족의 모든 민주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뜻과 합치되는 책임있는 정부를 수립토록 함. • 극동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를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게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해준다는 것임. 또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함. - 성공적인 협상? or 늙은 대통령의 실책? • 소련 동유럽권 장악 → 냉전체제의 시발 cafe.naver.com/cyberpolitics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 - 개요 : 1945년 7월 26일 美·英·中의 수장이 독일 포츠담에서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와 전후 일본 처리문제를 논의한 정상회담으로, 합의내용은 포츠담선언으로 공포됨. 트루먼·처칠·장제스가 선언에 서명하였고, 그 후 8월 8일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선언에 서명하였음. - 주요 내용 •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 • 모두 1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5항 : 서문.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민과 일본 인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 제6항 : 군국주의 배제 제7항 : 일본 영토의 보장 점령 제8항 :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제9항 :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 : 전쟁 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 존중의 확립 제11항 :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 :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 철수 제13항 :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라고 명시 ◎줄거리 "전쟁을 위해선 무엇이든지 한다. 군대와 천황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국민들이 외쳤던 말이다. 이렇게 맹렬하게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저항하던 일본군과 국민들은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자 공포와 긴장 속에 빠지고 만다. 당시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끈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의 임무는 천황의 공개 재판과 일본에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3일 후 일본은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게 되고, 1945년 9월 11일에는 전범 체포령이 떨어진다. 이 일로 인해 군국주의자들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당시의 수상이었던 東條英機를 비롯한 9,000여명의 전범이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히로히토천황은 9월 27일 맥아더를 찾는다. 그 이유는 천황 자신과 일본황실이 보호받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천황은 상당히 긴장하며 맥아더에게로 갔지만 맥아더 장군은 의외로 천황을 대환영했다. 그 이유는 천황의 힘, 즉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천황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권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것을 이용해 일본인들을 통솔하기 위해 천황을 살려두었다. 그 날 천황과 맥아더의 만남이 끝나고 난 후 함께 찍은 사진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키가 크고 아주 여유로워 보이는 맥아더에 비해 천황은 작고 주눅들어 마치 아버지와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천황의 권위는 크게 훼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사진에서 좀더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맥아더와 천황이 나란히 섰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습으로 나란히 선다는 것은 '내가 너를 지지한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때 맥아더는 천황과 일본 황실의 생명을 보장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천황의 처벌이 미루어지자 언론들은 신속한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당시의 미국대통령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빨리 천황을 기소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두 달이 지난 다음에야 대통령에게 답신을 보낸다. 답신의 내용은 천황을 처벌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946년 4월 29일 A급 전범 28명은 모두 기소되었지만 천황은 기소되지 않는다. 그 뒤 B,C급 전범들도 기소되었지만, 이 때 많은 조선인들이 전범의 누명을 쓰고 싱가폴 장기 형무소에 감형된다. '상황이 급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처형하라' 고 적혀있는 일본의 포로정책문서를 발견하게 되지만 연합군 측은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누락하고, 포로들의 인터뷰도 금지했다. 천황의 처벌은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 아니면 천황을 이용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미국은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검사들에게 비밀문서를 통해 천황을 재판하지 말고 불기소방침을 내리라고 명령한다. 1946년 5월 3일 전범재판이 시작되었지만 결국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관대한 지배자로 맥아더를 좋게 평가한다. '파란 눈의 천황' 이라 불리며 천황의 권위는 맥아더에게로 가게 된다. 미국내의 여론을 잠식시키기 위해 GHQ(연합국군총사령군)은 천황에게 '인간 선언'을 하게 한다. 이것은 GHQ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선언이었다. 그 뒤 맥아더는 천황의 권위를 무효화하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1946년 11월 3일 일본의 신헌법이 발표된다. 이것에는 일본이 영원한 전쟁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제9조 전력 비보유와 전쟁포기). 그 뒤 미국 측은 천황불기소 방침을 언론에 발표하고 이에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이에 반대하지만 판사들이 미국 정부에 의해 선발돼 있는 상황에서 반대의견은 무시된다. 천황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측의 공작으로 인해 결국 천황의 죄는 무죄가 되고, 소련·중국·호주 등 많은 동맹국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11월 12일 마지막 전범자들의 판정이 내려졌다. 전쟁의 책임자였던 東條英機에게는 교수형이 선고된다. 하지만, 그 후 맥아더는 한국인 전범자들을 무관심으로 대한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은 'B,C급 재판은 보복재판' 이라고 주장한다. 맥아더는 "이 비극적인 사실로서 모든 국가가 전쟁을 포기하길 바란다" 는 말을 남긴다. ◎감상 맥아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였는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는지 알 순 없지만 아직도 살아서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는 천황의 모습은 많은 전쟁 피해자들에게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되살리게 한다.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많은 전범이 처벌 받지 않은 상태이고 그 피해국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 천황의 처벌을 바라지는 않지만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 그리고 전범의 누명을 쓰고 많은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올바른 보상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맥아더를 나라를 구해 준 훌륭한 사람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진실을 철저히 규명하여 맥아더와 같은 거짓 영웅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 • 일본이 수용하지 않자 히로시마(8/6)와 나가사키(8/9)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도 선전포고(8/8)와 동시에 한반도 진격(8/9) •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여 10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였으나, 지도부의 분열로 항복 결정을 번복 • 결국 1945년 8월 14일 수락을 통보하고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종료 little boy cafe.naver.com/cyberpolitics
토론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전선의 終戰의 차이는? - 유럽전선 • 독일 동부전선(獨蘇戰爭) : 스탈린그라드전투(1942.8.21~43.2.2)와 레닌그라드전투(1941.9.8 ~44.1.27)를 기점으로 소련의 역공이 전개되고, 이 전선의 패배로 독일의 실질적인 패전으로 이어짐. 소련군은 역공에서 베를린 점령(5.2)까지 이루어 냄. • 독일 서부전선(英獨戰爭) : 영국에 대한 독일의 침공은 유럽대륙 점령(프랑스 항복) 이후 가속화 되었으나, 開戰 초기 영국 해군에 의한 독일 해군 괴멸로 인해 주로 공중전을 줌심으로 치러졌고, 終戰期까지 계속됨. 영국 해군의 제해권 확보와 프랑스 서부 해안에 대한 연합군의 장악은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6)을 이끌어냄. • 독일 남부전선(북아프리카 전쟁) : 영국의 식민지(특히, 이집트)에 대한 공격과 유전지역 점령을 위해 진행되었지만 1943년 5월 롬멜의 공석(요양)을 이용, 몽고메리의 승리로 이어짐. 북아프리카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 제해권을 확보하고 이탈리아 등 남유럽 지역에 대한 상륙과 공격이 원활하게 진행 됨. cafe.naver.com/cyberpolitics
토론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전선의 終戰의 차이는? - 아시아·태평양 전선 • 일본 북부전선(중일전쟁) : 가장 오래된 전쟁이며, 중국의 처절한 저항으로 일본군의 주력인 관동군과 만주국 병력 120만명이 종전까지 아무런 성과없이 발목을 잡히게 되는 전쟁. 종전 이후까지도 일본 관동군은 연합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무장해제 등)였음. ⇒ 미군이 관동군을 독자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1년 이상, 그것도 100만명 이상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예상 • 일본 남부전선(동남아시아 전쟁) :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의 식민지(핵심은 인도)에 대한 일본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인도차이나는 점령하였으나 인도는 계속되는 침공실패로 전력만 낭비하게 됨. 태평양 제해권이 상실된 후 보급선이 끊겨 거의 자멸하는 와중에 종전. • 태평양 전선 :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해 미국의 석유금수조치가 내려지고 일본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 진주만 기습은 성공하였으나 이후 전쟁의 핵심전력으로 부상한 미군 항모전단이 진주만을 비운 상태에서 진행되어 진주만 기습에 대한 반일 감정과 온존한 항모전단의 전력을 바탕으로 미군이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퇴하여 남부일본 전 지역에 직접 공습이 가능한 상황에서 종전. cafe.naver.com/cyberpolitics
토론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전선의 終戰의 차이는? - 유렵과 아시아·태평양의 차이 • 유럽은 독일에 대한 역습이 서·남·동에서 차례로 이루어져 육군병력(소련)에 의해 베를린이 점령되고 히틀러는 자살(추정)하고, 점령 이후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짐. • 아시아․태평앙은 일본에 대한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었으나, 종전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소련군의 개입 등으로 북부지역에서 균열이 발생하였고, 일본이 포츠담 항복권고안을 받아들일 당시 연합군은 오키나와(미군), 한반도(소련군)에 까지 접근해 있었던 상황임. • 결국 독일은 점령, 일본은 항복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유럽 곳곳에서 이루어진 해방군(연합군)에 대한 환영물결과 전범재판(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이 아닌 지역 곳곳에서 이루어진 민중에 의한 자발적 재판 등)이 독일이 점령될 때까지 지속되었지만, 아시아에서는 해방군을 만난 지역은 만주지역과 한반도(북부)가 유일함. 결국 종전 이후 유럽은 발자국(보병의 점령을 의미)에 의해 양분되었고, 아시아는 지도(정치적 의도)에 의해 양분됨. cafe.naver.com/cyberpolitics
토론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점령되었다면? - 만약 독일이 유럽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일본이 점령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종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중국 본토에서 싸우던 중국군, 동남아시아에서 싸우던 영국군, 남태평양 의 미군,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얄타회담 결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 중 일본 수도에 가장 근접했던 병력은 소련군(1945.8.11, 한반도 진입, 약 150만?)이었음. ⇒ 미군은 1945년 2월에 이오섬, 6월에 오키나와를 각각 점령(그 대가로 미군은 상륙전에 투입된 병력의 35%를 상실)하였으나,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은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음. • 섬에서의 일본으로 상륙하기보다는 한반도에서의 일본 상륙이 성공확률이 높아 보임. ⇒ 대규모 육군병력을 보유한 소련군과 절대적인 해상병력을 보유한 미군의 전력상의 성공확률은 비슷해 보이지만, 만약 일본이 점령되었다면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것이고, 중국 본토와 동남아시아 등에 남아있던 병력은 항복하거나 계속 저항을 했을지도 모름. ⇒ 종전 이전에 어떠한 합의(유럽전선에서 얄타와 같은)가 있었을 것이고, 결국 일본은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임. 소련 극동군의 한반도 진주 일정 1945년 8월 11일 소련해군 보병여단 웅기상륙작전 1945년 8월 12일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샤치코프) 소속 393보병사단 웅기 도착 1945년 8월 13일 393사단 나진 점령 1945년 8월 16일 소련군 25사단 청진 점령 1945년 8월 19일 극동군 제1방면군 제 5군이 중국 길림 점령 1945년 8월 21일 태평양함대 소속 제13해병여단 원산 점령. 1945년 8월 21일 소련군 25군 선발대 할빈 도착 소련군 15군 선발대 함흥 도착 1945년 8월 24일 25군 사령관 치샤치코프 비행기로 함흥 도착. 25군 소속 공수부대 함흥 도착 1945년 8월 말 소련군 북한 전 지역 공제 ====================================== 오키나와전투(45.4.1~6.23) 83일에 걸친 전투에서 미·일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측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자는 10만 2000명, 미군 전사자는 4만 7000명이며, 미군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는 6만 5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1933명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오키나와 본섬의 주민들로, 사망자가 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출처] 오키나와전투 [沖繩戰鬪(충승전투) ] | 네이버 백과사전 cafe.naver.com/cyberpolitics
토론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점령되었다면? 일본 분할점령안 독일 분할점령안 cafe.naver.com/cyberpolitics
토론 프랑스는 어떻게 승전국이 되었나? - 프랑스는 현재 2차 세계대전 승전국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 현재 상임이사국인 미국(부정할 수 없는 승전국), 영국(독일·일본과 전세계에서 싸움),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장 많은 피를 흘린 유럽에서의 승자, 최종적으로 일본에 선전포고 후 한반도까지 진출), 중국(일본과 1931년부터 싸웠고, 카이로·포츠담 등 중요한 연합국 회의에도 참석)은 2차 세계대전 전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프랑스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개전과 동시에 패전을 경험한 프랑스는 독일에 기생한 비시정권과 영국으로 도피 후 망명정부를 세운 2개의 프랑스로 나뉘어지고, 전쟁 기간 내내 숨어지내게 됨(망명정부와 레지스탕스 모두 숨어지냄). • 유럽에서 프랑스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또 그 활동이 얼마나 강력하고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는 미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1944.8.24)된 후 갑자기 유럽에서의 연합국의 ‘강력한’ 일원으로 등장하여 독일의 분할점령(미·영·프·소 4개국)에도 참가하게 되고, 현재의 상임이사국 지위도 확보함. 결국 상임이사국 공통의 권력인 핵무장(1960년) 까지 하게 되고, 오늘날 열강 반열에 올라서게 됨. 미국에 작전권 이양하여 프랑스의 2차대전이 된 영웅 드골 | 다큐멘터리 동영상 http://blog.daum.net/sionvoice/8285858 1945년 8월 25일 프랑스가 나치군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프랑스 국민에게 드골 장군은 프랑스의 영웅이요 자존심이었다. 그는 개선 장군으로서 본국에 입성하였다. 그러면 독일 침략군에 나라를 빼앗기고 영국에 망명해 있었던 드골이 개선 장군으로서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그 비결은 두차례에 걸친 그의 작전권 이양이었다. 영국에서 망명 임시정부를 구성하였으나 임정은 사실 상징적 의미를 제외하면 국민도 정부 예산도 없었다. 영국으로 철수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지휘와 관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영국 역시 자국군에 지급할 군수품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군이 2차대전에 참전하자 연합군이 구성되면서 프랑스군의 작전권이 다시 미국 연합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임정 수반이자 망명 프랑스군 최고 지휘관이었던 드골 장군에게 노르만디 상륙작전 전날에 작전 지시 명령이 하달되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은 전세를 일거에 바꾼 대성공이었으며, 연합군의 승리는 드골 인솔 하에 상륙작전에 참여한 프랑스군이 공유할 수 있는 승리였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때 미국의 참전에 대해 자발적 파병으로 보은한 바 없었다. 그런데 드골의 위대한 점은 노르만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 방미하였을 때 프랑스군 파병 선물을 가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드골은 연합군의 베를린 공격 때, 그리고 미군의 일본 공격 때 프랑스군을 파병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사실, 프랑스 망명군의 병력수나 군사력이 그리 대단하였을리 만무하였으므로 프랑스군 파병은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노무현이라면 왜 프랑스군 작전권을 넘기면서 파병하느냐는 생각밖에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프랑스 국민은 국가의 자존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았다. 연합군의 베를린 공격은 사실 전적으로 미군의 군사력에 의해 행하였지만 적은 수의 병력이나마 프랑스군도 참전하였기에 드골 장군 역시 개선 장군으로서 독일 수도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승전국의 대열에 합세하게 됨으로서 4년전 나치군 군화 밑에서 패전국이 되었던 수치감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25일 다시 개선 장군으로서 드골이 조국 파리에 입성하였을 때 그에 대한 프랑스 국민은 열광적인 환호는 그를 프랑스 국가 원수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이름 없는 장교였던 그가 2차 대전 중 미군의 작전 지시를 받으며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참여한 경력으로 일약 프랑스의 20세기의 나폴레옹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국민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한국의 노무현이 드골에게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노무현식 논리라면 프랑스군 작전권을 영국에도 미국에도 넘기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망명중인 자국 군대가 군수품 지급을 받지 못해 전멸하든 그리고 영영 조국을 되찾지 못하든 노무현은 "주권, 주권"만 떠들어 댈 것이다. 그러나 나라 없이 주권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프랑스군이 미군의 작전에 협조하지 않아 미군 단독의 힘으로만 프랑스에서 나치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면 프랑스는 승전국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바로 이런 정세에서 무엇이 국익이었는지를 드골 장군은 현명하게 판단하였다는 데서 그 지도력이 노무현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cafe.naver.com/cyberpolitics
참고자료 - Nazi(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에 대한 지지율의 증가 Election date Votes in millions Share May 20, 1928 0.81 2.6% September 14, 1930 6.41 18.3% July 31, 1932 13.75 37.3% November 6, 1932 11.74 33.1% March 5, 1933 17.28 43.9% cafe.naver.com/cyberpolitics
참고자료 - 식민주의의 전개 : 1754 ~> 1800 ~> 1914 ~> 1938 ~> 1945 ~> 1959~> 1974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포르투갈어: Guerra Colonial Portuguesa)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포르투갈 군과 앙골라와 기니비사우,모잠비크등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간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초기 전세는 포르투갈군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들을 경영해온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오랫동안 경영해오는 등 식민지 지역에 철저한 기반들을 구축해놓은 상태였는데다 막대한 양의 국가예산을 전쟁 비용으로 쏳아부으며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강력하게 진압했다.그러나 식민지 반란 저항군들도 게릴라 전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초기 식민지 반란 진압에서 시작했던 전쟁의 양상은 사실상 장기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전쟁 과정에서 포르투갈군과 식민지 반군 모두 수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단적인 흑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국민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억누르고 소수의 백인들이 통치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 지역에서 백인 통치를 고착화하려는 계산 아래 포르투갈을 지원하고 소련과 중국, 쿠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제리, 탄자니아, 기니, 소말리아, 콩고, 리비아, 자이르, 잠비아등 공산권 국가들과 발칸반도의 슬라브국가들,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등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반군들을 지원하면서 이 전쟁은 사실상 국제 대리전의 양상을 보였다.미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지 지배를 포기 안하려는 포르투갈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앙골라의 앙골라해방민족전선만 지원했다. 결국 이 전쟁은 1974년 포르투갈의 이스타두 노부 정권이 카네이션 혁명에 의해 붕괴됨으로써 종결된다. 이후 들어선 포르투갈 임시 정부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대해 독립을 허용하고, 식민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포르투갈군의 철군을 단행했다. 그와 동시에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등 옛 포르투갈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는 1999년 중국으로 반환되는 마카오만이 유일하게 남게되었다. ======================================================================================================= 수리남 : 종족구성은 인도계 힌두스탄이 37%, 흑인계 크레올족이 31%, 인도네시아계인이 15.3%, 흑인이 10.3% 등이다. 언어는 네덜란드어와 토착어인 타키타키어가 널리 사용되며, 종교는 힌두교 27%, 이슬람교 20%, 가톨릭교 23%, 개신교 25% 등으로 다양하다. : 이 지역은 1581년 이후 400년 가까이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아오다 1975년 11월 25일 독립하면서 기존 지배계층이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1980년 11월 군사쿠데타로 헌법이 정지되고 의회가 해산되었다. ====================================================================================================== 프랑스령기아나[출처] 프랑스령기아나 | 두산백과 1667년 이후 프랑스령이 되었으며 1853년 금이 발견된 이후 식민이 시작되었다. 인구의 50% 이상이 카옌에 거주한다. 사탕수수·카카오·바나나·옥수수 등이 재배되며 금·보크사이트 등 미개발 광물이 풍부하다. 금·럼주(酒)·목재를 수출한다 cafe.naver.com/cyberpolitics
참고자료 스탈린그라드전투 cafe.naver.com/cyberpolitics
참고자료 Atomic bomb Fat man (20KT) 39,000명 사망, 25,000명 부상, 도시 40% 이상 파괴 Little boy(15KT) 66,000명 사망, 69,000명 부상, 도시 67% 이상 파괴 cafe.naver.com/cyberpolitics
참고자료 Atomic bomb cafe.naver.com/cyberpolitics
참고자료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점령되었다면? - 가이텐(回天)특공대 오키나와전투(45.4.1~6.23) 83일에 걸친 전투에서 미·일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측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자는 10만 2000명, 미군 전사자는 4만 7000명이며, 미군 추산으로 일본군 전사는 6만 5000명, 미군 전사자는 1만 1933명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오키나와 본섬의 주민들로, 사망자가 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출처] 오키나와전투 [沖繩戰鬪(충승전투) ] | 네이버 백과사전 cafe.naver.com/cyberpoli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