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일곱 교회들 (요한계시록 2:1~3:22) Ⅰ. 2장과 3장의 요약 1. 일곱 교회들 제 2장 일곱 교회들 (요한계시록 2:1~3:22) Ⅰ. 2장과 3장의 요약 1. 일곱 교회들 2장과 3장에 나타나는 일곱 교회들은 당시에 실재했던 교회들이다. 또 여기에 묘사된 교회의 형편도 여러 교회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당시의 상황 그대로였다. 그러면서도 이 일곱 교회들은 각자가 지니는 분명한 특징에 따라 교회사를 일곱 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상징적 역할도 했다. 그렇다고 이런 특징들이 반드시 각 시대에 절대적으로, 혹은 완전하게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사도 이후 시대의 교회를 에베소 교회와 더욱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며, 그 다음 세대의 교회를 서머나 교회에 비유하여 생각해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실상 사도 이후 시대의 교회가 나머지 여섯 교회의 형편을 모두 맛보았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2. 일곱 사자들 한 사람의 사자에게 한 통씩의 서신이 전달되었다. 우리들은 이 사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벌써 생각해보았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들어 당신의 사자로 삼으시기를 원할 뿐이다. 비록 그 편지가 사자들에게 전달되었지만 그것들은 교회들에게 보내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관계된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의견들로 충만한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을 모든 창조의 근본이 되신 분으로 확언하신 것이다. 3. 일곱 서신들 각 통의 편지에서 주님은 먼저 자신에 관한 어떤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각 교회의 형편에 알맞은 치유책을 언급하셨다. 예를 들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순교자들이 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버가모 교회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는 부패하고도 음란한 교회였다. 그래서 주님은 살펴 볼 수 있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시고 또 심판하기 위하여 빛난 주석같이 단련된 발을 가지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 즉 살리는 영과 또 빛나는 별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신실하게 진리의 말씀을 지켰으므로 주님은 자신을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으로 선언할 뿐만 아니라 수고한 그들을 위하여 문을 넓게 열어주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의견들로 충만한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을 모든 창조의 근본이 되신 분으로 확언하신 것이다. 4. 일곱 지역이 가진 명칭의 의미 에베소(Ephesus)라는 지역 명은 “욕망”, 혹은 “헐거워진”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는가를 잘 반영해준다. 서머나(Smyrna)는 “쓰다(bitter)는 의미를 가진 몰약(My-rrh)이란 말에서부터 왔다.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는가를 잘 반영해준다. 이것은 그들이 로마의 박해시대에 교회적으로 얼마나 큰 시련을 겪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각 교회에 보낸 서신들마다 “내가 아노니”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버가모(Pergamum)는 “높은 탑”이란 뜻을 가짐으로써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교회가 얼마나 큰 세속적인 권력과 지위를 확보했던가를 말해준다. 두아디라(Thyatira)는 “끊임없이 드리는 희생제물”을 뜻하는 말로서 특별한 제사장직과 우상숭배를 선동하는 가톨릭교회 조식의 신장기를 잘 묘사해주고 있다. 이 시대를 가장 부패했던 교회의 암흑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생각할 때 사데(Sardis)는 “부흥”, 혹은 “회복”이란 뜻을 가진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도 빈사상태를 벗어나진 못했다.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형제의 사랑”이란 뜻을 가진다. 이것은 수 백년 전에 어떤 신자들이 모든 이단들을 처음에는 배격하다가 후에 사랑으로 함께 연합하여 마침내 성경의 진리를 신실하게 따름으로써 교회가 놀랍도록 변화되었다는 귀한 모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라오디게아(Laodicea)는 “사람들의 의견들”이란 뜻을 가짐으로써 오늘날 인간의 의견들로 가득차 있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엄마나 적절하게 나타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5. 일곱 번 말씀하신 “내가 아노니” 각 교회에 보낸 서신들마다 “내가 아노니”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주께서 우리 행위의 옳고 그름을 아신다. 그래서 그는 선한 자에게 최고의 상급을 베푸시며 악한 자에게는 신랄한 책망을 던지신다. 이것이 바로 주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징이다. 6. 일곱 번 하신 권고의 말씀 주님은 각 교회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서 그들 각자에게 꼭 필요한 권고의 말씀을 주셨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여러 교회들을 향하여 그가 주신 권고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교회들을 향하여 그가 주신 권고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➀에베소 교회에게(2:4~5), ➁서머나 교회에게(2:10), ➂버가모 교회에게(2:14~16), ➃ 두아디라 교회에게(2:20~25), ➄사데 교회에게(3:2~3), ➅빌라델비아 교회에게(3:11), ➆라오디게아 교회에게(3:17~20). 7. 일곱 번 주신 약속의 말씀 주님은 당신의 증거를 지속시키실 목적으로 각 교회의 이기는 자들을 들어 칭찬하시고, 또 그들에게 특별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이 약속의 말씀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➀에베소 교회에게(2:7), ➁서머나 교회에게(2:10~11), ➂버가모 교회에게(2:17), ➃두아디 교회에게(2:26~28), ➄사데 교회에게(3:5), ➅빌라델비아 교회에게(3:12), ➆라오디게아 교회에게(3:21). 8. 일곱 번의 부르심 각 교회에 보낸 서신들 속에는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표현이 들어있다(2:7, 11, 17, 29 ; 3:6, 13,22). 일곱 편지들이 주님 자신에 의해서 명령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본문은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하는가? 주께서 요한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요한이 기록한 것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기록을 읽을 때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이다. 더군다나 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는 항상 자의에 의해서 말씀하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성령으로 더불어 말씀하신다. 다라서 그것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차례대로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하자.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1) 편지하기를: 요한은 지금 주님의 서기관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도록 명령 받은 것이다. II. 예베소 교회(2:1-7) (1) 편지하기를: 요한은 지금 주님의 서기관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도록 명령 받은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교회에는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신비적인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교회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집이다. 2장과 3장에서 인용된 교회들은 지역개념에서의 교회들이다. 에베소 안에 있는 교회와 에베소 교회는 대단히 다르다. 에베소 지방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에베소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위 로마 가톨릭교회나 희랍정교, 그리고 중국의 경교 같은 것들은 매우 비성경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사자에게: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에게 전달되어졌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느 바울의 편지와는 전혀 다르지 않는가? 바울은 모든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편지를 썼으나, 본서는 오직 세속적인 생활을 떠나 신령한 삶을 추구하는 교회의 사자들만 받도록 되어 있다. 두 편지를 잘 비교해보면 당시와 현재의 교회적 상황이 매우 다름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에베소 교회는 매우 헐거워졌고 퇴보했으며, 또한 손상받은 것 같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심으로써 에베소 교회와 사자로 하여금 그가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교회들에게 행사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신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여기에서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는 바가 바로 그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 (3) 이 부분은 주께서 하신 칭찬의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될 수 있다. 첫째로 그들 자신에 관한 말씀이다. ① 행위 - 그들이 선한 행위를 했음에 틀림없다. ②수고 - 그들이 근면하게 일했음에 틀림없다. ③인내 - 그들이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약함을 돕고, 또 인내한 것이 틀림없다. 둘째로 교회의 행정에 관한 말씀이다. ①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고전5:2과 비교해보라). ②그들은 사역자들이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도들이라도 조심스럽게 시험해보았던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들은 그들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세상 일에 관한 말씀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인내함으로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술로 보아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참으로 완전했던 교회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4) 에베소 교회가 훌륭한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은 그 교회에 대하여 몇 가지 책망을 하셨다. 바로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일하는 교회가 어떻게 주님을 향한 내적 사랑 결핍을 보일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첫사랑을 버렸다 할지라도 외부적으로는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경험이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첫사랑이야말로 가장, 그리고 최고로 완전한 사랑이다. 어떻게 첫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로 주를 사랑하는 것보다 일하는 것에 더욱 강조점을 둘 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둘째로 주를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결과가 온다(요15:10). 여기에서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는 바가 바로 그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주를 위해 수고하고, 또 영적인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살전1:2, 고전13:2). 주를 위해 수고하고, 또 영적인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살전1:2, 고전13:2). ⑸ 주님은 그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첫째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원인을 반드시 추적하라는 뜻이다. 퇴행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서는 회복이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주께서 보실 대 에베소 교회가 외관상으로 완전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타락했던 것이다. 내적 타락은 외적 부패보다 앞선다. 둘째로 “회개하라”고 했다. 회개는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떨어지는 일이 있을 때마다 회개할 필요가 생긴다. 셋째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했다. 회개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이에 반해 처음 행위를 갖는 것은 적극적인 일이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 진실하게 실천했던 것을 지금은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추측해낼 수 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초기에 실천했던 일들은 무엇일까? 우리가 알기는 수고와 인내와 근면, 그리고 악한 자를 대적한 일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외에 자세한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에베소서를 조심스럽게 읽어본다면 그들이 실천했던 두 가지 일이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먼저 그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고(엡3:17). 그러므로 주님은 본문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회복의 길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처음 사랑을 찾는 방법을 제시해주심과 동시에 그렇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경고의 말씀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⑺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 자리에서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교회의 임무는 당연히 증거의 빛을 비추는데 있다고 보겠다.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는 말씀은 교회의 위치가 어디이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심사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말이다. 이 모든 촛대들이 원래 위치했던 곳은 바로 주님 앞이었다(1:12, 13 ; 2:1).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는 말씀은 그 주어진 교회가 주 앞에서 자리잡았던 원래의 자리를 상실할 것이고, 또 주께 버림받을 것을 뜻한다. 설 자리를 잃는 촛대는 더 이상 기름을 공급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와 같은 교회는 더 이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더 이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E라서 교회는 더 이상 주를 위하여 빛을 발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취급하고 있는 요점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요, 증거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의 면전에서 촛대를 옮기워버린 교회가 많은 현실이다. ⑹니골라당: 원래 정복자들을 뜻한다. 권력을 지극히 사모하여 마침내 지도적 위치를 점유하는 파당을 나타내기도 했다. 주님은 이들의 행위를 미워하셨다. 주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시기는 주님이 미워하는 바를 그들도 미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⑺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 말씀을 거듭 반복함은 이 편지가 단지 에베소 교회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이 말씀이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적다 이 말씀이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적다. “귀 있는 자”라는 말은 아직도 교회 중에 들을 귀 있는 자들이 심히 적다는 서글픈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다. 왜 주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는 말인가? 이것은 육체의 귀가 아니라 영적인 귀를 의미한다. 이 말은 마태복음서 13장 13~15절 말씀을 읽음으로써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귀를 갖기 못했을까? 이유인즉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영적인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은 주의 말씀을 사실상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기는 그에게”라는 어구 가운데 “그에게”라는 말은 단수이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은 여전히 승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곱 서신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님은 이기는 그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천국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되는 상급을 얻게 된다. 여기 나오는 천국, 혹은 낙원은 하나님 나라의 그것을 가리킬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기 2장의 회복된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에 기록된대로 에덴 동산이 이 땅위에 있었던 것처럼 하늘나라에 낙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기는 자는 주님과 더불어 낙원에 있을 것이니 얼마나 기쁠까! 낙원에서 살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Ⅲ. 서머나 교회(2:8~11) 서머나 교회는 2세기로부터 주후 313년까지의 교회들이 처하고 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베소교 회는 사랑이 식어져갔다. 반면에 서머나 교회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종종 냉냉해지거나 아니면 태만해지는 신자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⑻ 서머나라는 말은 몰약이란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짐으로써 “쓴 것”, 혹은 “고통스러운 것”을 뜻하고 있다. 몰약은 아주 귀한 물건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고통도 아주 값진 고통이다.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마다 진실로 귀한 존재들이다.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말은 주님은 변치 않으시는 바로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이야말로 서머나 교회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라: 이것은 주께서 땅 위에 계실 동안에 이미 경험한 사실이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첫째로 주님은 우리의 모범이시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가 이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둘째로 주님이 죽음의 고통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잘 이해하실 수 있다(히 4:15). 셋째로 주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며, 또 원수를 멸하기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넷째로 그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희망이 있다. 우리가 만일에 의하여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허사가 아니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서머나 교회가 겪은 고난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로 환난이었고, 둘째로 궁핍이었으며, 셋째로 훼방이었다. ⑼ 내가 아노니: 첫째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둘째로 그가 우리의 고난을 다 알면서도 그것을 물리쳐주지 않는 것은 그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고난을 아시므로, 그는 틀림없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상급이 어떠함도 아실 것이다. 서머나 교회가 겪은 고난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로 환난이었고, 둘째로 궁핍이었으며, 셋째로 훼방이었다. ⑴ 환난 - 환난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반대, 공격, 추방, 압제, 매질, 그리고 약탈과 같은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을 말한다. (2) 궁핍 - 사람들은 환난을 당하는 때에라도 재정적으로만 넉넉하다면 크게 낙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궁핍을 수반한 환난을 당하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주님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심으로써 참으로 귀한 칭찬의 말씀을 해주셨다. 사실 그러한 때에 교회는 신앙적으로 부요하면(약2:5),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된다(살전1:3).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러한 환경에 참으로 뛰어들 수 있겠는가? 서머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정반대되는 입장이었다(3:17). 아무도 주 앞에 서있는 서머나 교회처럼 되면서 동시에 세상 앞에 서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수는 없다. ⑶ 훼방 - 이 말은 우리를 명예스럽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환난과 궁핍을 참아내는 사람은 혹 있어도 자기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참아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 훼방이 원래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 훼방이 원래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주님이 이 땅 위에 계실 때에도 그토록 많은 훼방을 말했거늘 우리들이 어떻게 이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 훼방하는 자들이 무엇이라 훼방했는가? 그들은 구원의 말씀에 대하여 훼방했다(행 13:45 ; 18:6 ; 19:9 ; 28:22, 롬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1)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는 말씀이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의문을 풀기에 앞서 우리는 진정한 유대인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로마서 2:22~2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가 바로 진정한 유대인인 것을 쉽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닌 자들은 유대교에 진향한 개종자들과 더불어 육체의 예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대인 행세를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자칭 유대교라고 하는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소위 유대교적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데 일부는 율법에,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구원도 일부는 믿음으로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행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는 율법을 근거로 한 제사장적 카스트 제도라 하겠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자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때에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았으며, 그 후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들의 조직이 더욱 발전했고, 또한 체계를 갖추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사단의 회가 되어 이용당하며 전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⑽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고난에 첨가하여 그들이 장차 받게 될 또 다른 고난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진실로 고난에 고난이 덮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이 오기 전에 우리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첫째로 두려움은 패배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용기는 패배를 방지한다. 둘째로 주께서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우리가 비록 고난을 당하나 결과적으로 승리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처음에는 마귀가 반대하고 훼방만 하더니 결국에는 투옥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투옥의 목적은, 첫째로 그들로 하여금 밖에서 증거 할 수 없도록 만들므로 주의 진리를 묶어두려는 것이고, 둘째로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 놓음으로써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며, 셋째로 투옥된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들의 심령을 약하게 만들려는 속셈에 있다. 마귀의 간계여 참으로 악독하도다! 마귀가……받게 하리니: 다른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마귀를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 우리로 하여금 서로서로 원망하지 말고 마귀를 미워하며, 또 마귀를 알고 그를 대적하라는 데 있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말씀은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여기에 인용된 십일은 문자적으로 십일 십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받을 고난의 기간이 제한척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십대 황제들이 자행한 열 차례에 걸친 지독한 박해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먼저 “죽도록”이란 말에서 우리는 죽임당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투옥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 마귀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죽이는 일도 주저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너는••••••하라”는 표현이 명령문이기 때문에 우리는 벌써 한 명령이 내려졌음을 잘 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함은 죽기까지 자기 의 생명을 아끼지 말라는 뜻이다(계 12:11). 마귀의 공격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그처럼 충성한다면 마귀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귀중한 약속이며 복된 소망인가(약1:12). 여기에 약속된 것은 영생 뿐한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도 있다. 영생은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며, 생명의 면류관은 충성함으로 받는다. 면류관은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통치하며 얻게 될 영광을 말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말씀은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니라.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너무나 명백하다. 적극적으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며, 소극적으로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역으로 놓고 생각해보자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역으로 놓고 생각해보자. 정복당하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둘째 사망의 해에 대한 언급이 앞서 말씀은 승리와 패배가 어떤 것인가를 정의해준다. 승리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패배는 주를 위한 순교자가 되기를 꺼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며 주를 위하여 죽고자 아니하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요한계시록 20장14, 15절 말씀은 죽은 자가 부활한 다음에 영원한 지옥인 불못에 던져질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불못에 참여 하지 않는다(요 10:28). 둘째 사망의 해와 둘째 사망은 다르다. 영생이 둘째 사망과 반대 되듯이 생명의 면류관은 둘째 사망의 해와 대조를 이룬다. 영생과 생명의 면류관 사이에 차이점이 있듯이, 둘째 사망과 둘째 사망의 해 사이에도 다른 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찬송한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 순교의 제물되는 고통을 감수한 승리자들이 왕국시대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주를 위한 순교의 제물되기를 거부한 실패자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고통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왕국시대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을 것이며,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다. 현재 고난 받기를 기꺼워하지 않으면서 그 때에 영광 받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버가모 교회는 4세기로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교회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모형은 이 사실을 설명함에 약간의 도움이 될 줄로 믿는다. 소돔 사람들은 불로 멸망을 받았다. 이것은 둘째 사망과 흡사하다. 그리고 롯의 아내는 성 밖에서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둘째 사망의 해를 암시해줄 것이다. Ⅳ. 버가모 교회(2: 12〜 17) 버가모 교회는 4세기로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교회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헬라어로 “버가모”란 말은 첫째로 “결혼함으로 연합되었다”라 는 뜻을 가짐으로써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지적해 주고 있으며, 둘째로 “높은 탑”이라 뜻으로써 세상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의 위치를 지적해주고 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날선 검은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한다. 하나는 교회와 세상이 함께 어울려 연합된 것을 짤라서 갈라놓는 일을 하며, 또 다른 하나는 세상과 짝을 맺은 교회를 심판하는 일을 한다.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교회는 마치도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나그네로 계셨듯이 행인으로서 이 땅에 머물고 있다. 교회가 체류자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아주 눌러앉아 자리를 잡아버리는 것은 참으로 가엾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버가모 교회가 어떻게 세속화되어 버렸으며, 또 어떻게 높은 지위와 영향력, 그리고 세상 영광을 취함으로써 높은 탑을 뜻하는 버가모라는 지역에 자리를 잡아 안주해버렸는지를 보여준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외적으로 판단해볼 때 버가모 교회는 가장 번영했고, 또 위치도 확보해놓았으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리고 세인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만한 교회였지만,실제로 그 교회 는 부패한 교회요 패배한 교회였다. 지상 교회가 마귀와 전투해야 될 임무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안주해버린 것이다. 환언하면 사단이 그 교회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사실인가!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일곱 서신들 가운데 안비다의 이름 외에 다른 성도의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확증해주는 축복이라 하겠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충성스럽게 이것들을 증거했기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안비다가 살아서 믿음의 자세를 견지하는 동안 모든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한 후에는 전 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리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 로 하여금 이방인들과 혼합하도록 가르쳤던 구약시대의 한 욕심 많은 선지자였다. 오늘날도 돈을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또 세상과 타협하도록 권장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발람이 발락에 의해서 고용 되었듯이 콘스탄틴 대제 이 후에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권력에 의해 매수당했던가. 발람의 교훈은 첫째로 다른 종교와 혼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우상제물을 먹게 하는 일과, 둘째로 세상과 짝을 짓는 것으로 볼 수 있는 행음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리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가 상징해주는 시기가 바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던 때요, 또한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영적 업무를 담당해야 될 책임은 소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계급구조가 필수불가결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 구조는 가르치는 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2절에 나오는 검은 세상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잘라버리시는 주님의 말씀의 검을 말한다. 알고도 회개하지 아니하며, 또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씀의 검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두아디아라 교회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회라고 볼 수 있다.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여기에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두 가지의 약속이 있다. 첫째로 감춰진 만나를 주신다고 했다. 만나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요6:49~51). 가시적인 만나는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이 나누어 먹었지만 감춰진 만나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들을 위하여 보존되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숨겨진 부분은 오직 이기는 자들만이 참여할 특권을 가진다. 둘째로 흰 돌을 주신다고 했다. 그 당시 흰 돌은 선거할 때 사용 되었다고 한다. 이 돌 윙에 후보자의 이름을 새겨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항아리 속에 담아두었다고 한다. 비록 어떤 승리자가 이 땅의 종교계에서는 뚜렷한 인물로 부각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께로부터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르 만족케 생각하심을 뜻한다. Ⅴ. 두아디라 교회(2:18~29) 두아디아라 교회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회라고 볼 수 있다.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은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먼저 모든 것을 살피며 분별하실 수 있는 불꽃 같은 눈의 소유자로 , 다음에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추앙하는 오류에 빠진 로마 가톨릭교회를 상기시키는 듯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의 발은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빛난 주석 같은 발이었다. 눈으로는 저주할 것이요, 발로는 심판하게 될 것이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렇게 부패한 교회가 이토록 많은 선한 일을 했다고 할 때, 우리는 아주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선한 일들은 진실한 소수에 의해서 수행되었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대다수가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실패하지 않는 뛰어난 소수가 있는 법이다. 이 사실은 교회사를 살펴봄으로써 입증할 수 있다. 심지어 로마 가톨리교회의 조직 내에도 그와 같은 몇 사람이 있음을 주님이 인정 하실 것이다. 마담 귀용(Madame Guyon), 프랑소와 훼넬롱(Francois Fenelon), 라 꼼브(La Combe), 그리고 요한 타울러(John Tauler)와 같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참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인물들이라고 보아진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꼭 기억하고 있어야 될 그 무엇이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좋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기에 나오는 이세벨은 누구인가! 이세벨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상한 인물로서 열왕기상에 그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이스라엘 왕 아합은 시돈 왕의 딸인 이세벨을 자기 아내로 맞아들였다(왕상16:31) 이스라엘 왕 아합은 시돈 왕의 딸인 이세벨을 자기 아내로 맞아들였다(왕상16:31). 그 여자는 백성을 꾀어 바알이라는 다른 신을 섬기고 또 경배하도록 했다. 그 당시에 야기된 문제는 단순하게 우상을 경배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바꾸었고 드디어는 바알을 그들의 신으로 삼은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아합 만큼 백성들을 범죄에로 인도한 왕은 없었다. 아합은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신을 섬기게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죄는 심지어 여로보암의 죄를 능가했던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여자는 바로 이세벨이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여자와 마태복음서 13장에 나오는 서말의 가루속에 누룩을 넣은 여자는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혼미케 하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우상을 가져오며 자칭 선지자라 부른다. 그 여자는 전파하기를 원하며 또 가르치기를 열망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이 여자의 자리에 서있다고 함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에게 가르칠 권세가 주어질 때마다 그 교회는 이세벨로 둔갑해버린다. 하나님의 교회는 스스로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환언하면 교회는 스스로의 교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만이 진리요, 또 진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홀로 말씀하신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어떻게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이세벨로 둔갑하여 성경이 말씀하시거나, 혹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제쳐놓고서 교회가 말하는 자신을 세상에 내맡겨버린 것이다. 이것은 야고보서 4장4절에 나타나는 말씀대로 지나간 천 년이 넘는 동안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대대적으로 행음한 사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그의 순결성을 상실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와 같은 음행의 결과는 우상숭배를 초래한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누구보다 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왜 이세벨이라고 하는가? 바로 그 여자가 이방신을 전하며, 또 로마 가톨릭교회를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방신들을 섬기면서도 신자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마리아 상이다. 헬라사람들은 비너스 여신을 가지고 있고, 동양사람들은 자비의 여신을 모시고 있으며, 애굽사람들은 하계의 여신을 섬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여신을 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신을 모시기 위해서 마리아가 소개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음행에 덧붙여진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아디라교회의 실패는 바로 이러한 교훈들을 받아들여 마침내 자신들을 지배하도록 방치햇다는 사실이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전 세계에서 선지자들을 죽인 여자는 오직 한 여자, 곧 이세벨밖에 없다. 중세기에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손에 의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어떻게 적그리스도와 그의 무리들을 들어 로마 가톨릭교회를 멸망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이 결정하거나, 혹은 재판한 것이 모두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또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통제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라고 억지를 쓰면서 결코 회개할 줄을 모른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이것은 침상일 뿐이지 결코 관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그 여자의 운명이 지금 생의 기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세를 보고서 한계에 도달했다고 선언하는 일과 같다. 그 여자의 상태는 결코 호전되지 못할 것이다.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어떻게 적그리스도와 그의 무리들을 들어 로마 가톨릭교회를 멸망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24), (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집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두아디라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돌려보자.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다. 그 때에 엘리야는 무척이나 당황했으며, 또 두려워하여 잠적해버린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질문하실 때에 그는 자기만 홀로 남아 있으며 더군다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불평했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이것이 첫 번째의 약속이다. 장차 올 왕국에서 오늘 이기는 그 사람이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이스라엘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왕상19:18). 두아디라에 남아 있었던 자들도 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시아(bathea)란 헬라어가 영어로는 “신비”, 혹은 “깊은 것”으로 번역되었다. 만일에 당신이 가톨릭교회의 사제에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논하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성경은 너무 신비스러운 말씀이어서 교황 외에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당신이 듣게 될 것이다. 그 교훈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미 가르침을 받은 것 외에 어떤 다른 짐 을 부과하지 않으신다. 그가 재림하실 때까지 있는 그것을 굳게 잡아 보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6), (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이것이 첫 번째의 약속이다. 장차 올 왕국에서 오늘 이기는 그 사람이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은 돌이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토기에 불과하다. 바벨탑을 쌓던 그 때로부터 디모데후서가 기록되던 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은 질그릇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까지 하나씩 하나씩 부서지고 말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이것은 두 번째로 주시는 약속이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하늘에 떠 있는 새벽 별을 비너스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새벽에 가장 먼저 하늘을 수놓는 별이란 점이고, 둘째로 그것은 밤에도 역시 제일 먼저 출현하는 별이란 사실이다. 주께서 나타나실 때 온 세계는 그를 볼 것이다(말4:2). 그러나 새벽 별을 보는 자들은 대다수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이를 시간에 깨는 사람들이다. 새벽 별을 보는 자들이 바로 이기는 자들이다.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주님은 로마 가톨릭교회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에게도 말씀하신다. 앞서 나오는 세 교회에 보내는 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기는 자들이란 칭호가 항상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니라”는 표현에 있어서 나오는데, 두아디라 교회를 시작으로 해서 이 순서는 바뀌어지고 있다. 이것은 처음의 세 교회가 같은 부류에 속하고 또 나중에 나오는 네 교회들이 또 다른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서머나 교회의 역사는 에베소 교회의 뒤를 이어서 시작되었고, 또 버가모 교회의 역사도 서머나 교회가 막을 내린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물론 두아디라 교회도 버가모 교회의 뒤를 따라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두아디라교회는 사데 교회가 등장했을 때에 막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는 모두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Ⅵ. 사데 교회(3:1~6) 사도시대 니골라당의 행위로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지자 이세벨의 득세에 이르기 까지 교회가 점차적으로 타락해지자 하나님은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에 사데 교회가 등장한 것이다. “사데”란 말을 헬라어로 회복을 뜻한다.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반작용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부흥의 역사는 신적 반작용의 역사다. 하니님께서 부흥의 역사를 d일으키시고자 하실 때마다 그는 항상 과거의 상태에 다한 반작용으로써 시작하신다. (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에베소 교회에서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셨는데, 사데 교회에서도 역시 그는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 나타나신다. 에베소 교회가 사도시대의 타락기였다고 볼 때,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의 상태에서부터 회복되지 않으면 안될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고 본다. 사랑없는 행위가 에베소 교회의 특징이었다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상태가 사데 교회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교회는 같이 짝을 이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곱 영들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또 에베소 교회에서 일곱 별들은 사자들을 가리켰으나 여기에서는 빛을 발하는 그들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부흥의 역사는 영과 빛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데 교회가 종교개혁으로부터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개신교회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루터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이 신적 반작용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회의할 사람도 없다. 루터가 개혁을 주도할 때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마치도 사데 교회와 비슷했다. 그 분의 동기는 전적으로 회복시키는데 있었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 하였노니: 하나님은 지금 루터의 일을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작은 잘 했다가 끝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완전치 못함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완전할 것을 촉구하신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또 열려진 성경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이 초대교회의 형태로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회를 답습하고 있는 실점이다. 이것이 역사에 나타난 현실이다. 종교개혁은 교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겨 두었다. 루터 자신도 칭의 교리만을 가지고 종교개혁이 완성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교회문제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해결해야 될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비록 우리가 처음 성도들이 전해준 믿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교회의 위치 문제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들은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었다. 두아디라 교회가 세상과 짝을 맺은 것처럼 사데 교회는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18세기에 들어와서 분파운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분파운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특정한 국가의 노선을 따르기 원치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설정한 노선을 교리처럼 믿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과, 또 열려진 성경을 말한다. 사데 교회의 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다 죽게 된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또 남은 바를 굳게 하라고 성도들을 권고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개신교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이다. 오늘날 개신교는 마치도 컵과 같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직도 풍성하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제한시켜 버린다. 처음 세대에는 그 컵이 넘치도록 채워졌으나 그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절반으로 줄어 들고 만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확실하게 되어 간다. 결국 세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세대에 이르면 이물은 다 없어지고 빈 컵만 남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아무 마실 것도 들어 잇지 않은 빈 컵만을 가지고 누구의 컵이 가장 고가품인가를 토론한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또 다른 반작용으로 응답하실 것이며 결국 또 다른 사데 교회가 생겨날 뿐이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려고 한다. 그가 만든 컵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결코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개혁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또 다른 한편으로 개혁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결코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꾸중을 듣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 생명수이며, 또 무엇이 빈 컵인지를 그들 스스로가 전혀 분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낡은 컵은 계속해서 새로운 컵으로 교체 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개신교가 항상 개혁을 경험하고 있는 바이지만 주님은 아직도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선언하신다. 거의 완전한 상태에 이르긴 했지만 아직도 멀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에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문제는 지금 어떻게 받을 것이며, 또 어떻게 들을 것이 아니라 그 때에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우리가 교제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교제를 뜻한다. 만일에 그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면 사실상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잘못은 스스로의 가르침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르침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적은 없다. 지나간 20세기 동안에 우리는 진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어떤 진리를 창안해낼 수는 없다.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도적이 오는 것을 임한느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도적이 바로 곁에 온다는 표현이며 그러할지라도 도적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많은 형제들이 전에 도적이 들어와서 가장 좋은 것을 훔쳐갔던 경험을 갖고 있을 줄 안다 많은 형제들이 전에 도적이 들어와서 가장 좋은 것을 훔쳐갔던 경험을 갖고 있을 줄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지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가시겠다고 한다. 가장 좋은 것만이 그의 손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리라”(마24:40, 41).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가 만일 깨어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3, 마24:42, 43). (4) 그러나 사데에 그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주님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옷 입을 터인데 이유인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세마포 옷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설 때 우리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다.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다(계19:8). 여기에서 “옳은 행실”이란 말은 복수로 사용되었다.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여기에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부활시에 천사들도 참여할 것이다. 주께 시인을 받는 자마다 천국에 참여할 수 있지만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영원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할 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는가!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은 헬라어 “필로”와 “아델포스”. 두 낱 말의 합성어이다. VII. 빌라델비아 교회(3:7~13)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은 헬라어 “필로”와 “아델포스”. 두 낱 말의 합성어이다. “필로”는 사랑이고 “아델포스”는 형제이다. 따라서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이란 뜻을 가진다. 이제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곱 교회 가운데서 다섯 교회는 책망을 들었으며, 오직 두 교회만이 꾸중을 듣지 않았다. 이 두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서머나 교회가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듯이 빌라델비아 교회도 같은 고난을 당한 것이 사실이다.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너희가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내가 너희를 지키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이 두 교회에게 면류관을 약속하신 것이다. 서머나 교회에게는 “내가 너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셧고,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교회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같은 노선, 즉 사도들이 걸었던 정통적인 노선 위에 서있다고 하겠다. 바록 사데 교회가 진실하게 회복을 추구한 교회이기는 했지만 완전한 결론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다르게 사데 교회는 책망을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다르게 사데 교회는 책망을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교회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사도들의 정통적인 노선을 더욱 더 확대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요전번 세기가 막 지나갈 무렵에 바로 그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능가할 만한 위대한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리하여 빌라델비아 교회는 종교개혁이 제공하지 못한 그 무엇을 우리들에게 만족시켜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기는 그 교회가 초대교회의 형제운동을 통하여 교회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거의 완전하게 회복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운동에 대한 평가는 종교개혁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종교개혁이 총, 칼의 도움을 얻어 세상을 공격한데 반하여 형제운동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 전파에만 의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빌라델비아는 우리가 이미 아는대로 형제의 사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특별하게 칭찬했던가? 바로 그들의 형제적인 사랑이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 짓는 중간계급이 완전하게 철폐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 교회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자유인이나 노예로 나누이는 일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형제일 뿐이었다. 우리들이 눈을 들어 이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형제 사랑은 가능케 된다. 구별되는 것이 세상에서는 영광스러운 일일지 모르나 교회에서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는 특권의식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을 기초로 하여 세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주는 거룩하시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요전번 세기가 막 지나갈 무렵에 바로 그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능가할 만한 위대한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리하여 빌라델비아 교회는 종교개혁이 제공하지 못한 그 무엇을 우리들에게 만족시켜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기는 그 교회가 초대교회의 형제운동을 통하여 교회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거의 완전하게 회복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운동에 대한 평가는 종교개혁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종교개혁이 총, 칼의 도움을 얻어 세상을 공격한데 반하여 형제운동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 전파에만 의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빌라델비아는 우리가 이미 아는대로 형제의 사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특별하게 칭찬했던가? 바로 그들의 형제적인 사랑이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 짓는 중간계급이 완전하게 철폐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 교회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자유인이나 노예로 나누이는 일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형제일 뿐이었다. 우리들이 눈을 들어 이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형제 사랑은 가능케 된다. 구별되는 것이 세상에서는 영광스러운 일일지 모르나 교회에서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는 특권의식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을 기초로 하여 세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주는 거룩하시다. 아니 주님 자신이 바로 그 거룩함의 본체가 되신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거룩한 실체이신데, 이유인즉 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의 열쇠는 권세를 뜻한다. 그리스도가 바로 결론이요 모든 문제들이 또한 그 안에서 해결된다. 그것은 그가 폭력을 쓴다거나 아니면 광고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바로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 요한계시록 강해 (워치만 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