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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1.2] 창조적 진화와 공화 1. 관계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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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 분리와 기계적 인과론 근대과학은 주관과 객관의 엄격한 분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대상으로서 물(物)이 정의되고 그 대척점에서 사유하는 존재 즉 주체로서의 정신(精神)이 정의된다. 전자는 뉴턴의 관성의 원리로서 “물”이고 후자는 데카르트의 절대주체성으로서의 “나”이다. 이 두 원리의 기초위에서 근대 기계론적 인과론이 완성되었다. 이 장에서는 이것을 검토해 보고 그것과 대비되는 연기적 인과론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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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뉴턴의 관성의 원리 근대과학에서 물(物)의 구성방식의 혁신은 물(物)에서 그 능동성을 탈색시켜 버린데 있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운동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과의 대결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을 가능태에서 현실태에로의 이행으로 정의했을 때 이 목적론적 과정은 비단 생명체의 운동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에 적용되는 기본원리였다.그러므로 물질도 그 예외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물질 자체는 능동성을 함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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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과학의 운동론은 이것을 관성의 원리로 대체한다
근대과학의 운동론은 이것을 관성의 원리로 대체한다. 갈릴레오에서 시작되어 데카르트를 거쳐 뉴턴에서 완성된 관성의 원리는 물을 철저히 수동화시키고 있다. 관성의 원리란 외부에서 원인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은 자신의 상태를 바꾸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외적 원인이 개입하지 않는 한 그 운동상태(등속운동)를 계속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관성운동이라고 한다. 물론 마찬가지 이유로 정지해 있는 물체는 외적 원인이 없는 한 그 정지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이것이 우주를 거대한 기계로 보는 기계론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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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연은 활성없는 기계로 간주되었으며 외양상 이 원리에 반하는 듯이 보이는 현상, 특히 생명현상 조차도 여기에 대한 예외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생명이 기계가 아니라기 보다 우리의 지식이 아직 부족해서 그 기계적 원리를 충분히 규명하고 있지 못한 ‘복잡한’ 기계일 뿐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업일 뿐이었다. 이제 이것은 시대의 주류적 추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무질서한 물질들의 운동이 어떻게 우리의 우주와 같은 합목적적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것은 물질 자체에 있다기 보다 그 바깥에서 강요된 것이다. 질서의 원인…그것이 바로 신이고 우리의 정신은 신의 물질세계에로의 현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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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한갖 수동적 존재라면 이 합목적적 우주는 그 논리적 필연으로 신의 존재를 전제한다.
말하자면 기계론적 우주론은 유신론과 한 짝을 이룬다!!! 거꾸로 물질의 합목적성을 주장하는 유기론적 우주론은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도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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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원자 모형은 데카르트-뉴턴의 기계론과 찰떡 궁합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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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말하자면 원자모형이다. 원자(atom)는 쪼갤 수 없다. 이것은 내부가 꽉 차있는 충만체(연속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a는 말하자면 원자모형이다. 원자(atom)는 쪼갤 수 없다. 이것은 내부가 꽉 차있는 충만체(연속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는 동일체적에 가장 적은 표면적을 가지는 도형이다. 논리적 관점에서 원자는 바깥이 없고(“창이 없다) 그러므로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완결된 체계이고 외부와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서양철학에서의 실체(substance)의 모형에 가깝다. b는 무한한 구멍들로 되어 있다. 그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으므로 논리적 관점에서 무한대의 바깥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다른 것과 접촉함으로서만 존립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의 관계없이는 단적으로 무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관계(relatives)의 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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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스스로 관계맺지 않으므로 그것이 어떤 집합적 조직을 만들고 있다면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다
전자는 스스로 관계맺지 않으므로 그것이 어떤 집합적 조직을 만들고 있다면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다. 그것은 설계된 것이고 각 요소의 전체와의 연관은 우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기계의 모델이다. 여기서 관계맺음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기계는 녹이 쓸지 않게 도색하고 도금한다. 외부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표면은 매끄럽다. 후자는 스스로 관계맺어 자기 조직화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거기에는 바깥으로의 설계자가 없다. 요소와 전체의 연관은 내재적 필연성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깥으로 자기를 열어놓고 있고 그래서 표면은 면적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울퉁불퉁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체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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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쯔의 모나드(단자)는 원자와 어떻게 다른가?-관계론으로서 라이프니쯔 철학의 재구성
그러나 원자는 쪼갤 수 없는 하나이다. 그러나 단자는 내부적으로 여럿의 다자이다. 단지 그것이 하나인 단자라 불리는 것은 그 바깥에서 볼 때 하나이기 때문이다.원자는 하나이지만 단자는 여럿의 하나이다. 라이프니쯔는 단자는 “창문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다른 것과의 관계를 맺을 필요없이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자(relatives) 보다는 원자와 같은 실체(substance)에 가까운 것 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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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자들이 창문이 없다면 그들간의 관계맺음도 없을 것이고 상호작용도 없을 것이다
단자들이 창문이 없다면 그들간의 관계맺음도 없을 것이고 상호작용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자들의 우주는 어떻게 합목적적인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가? 신에 의해 주어진 질서 소위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원자와 구분되는 단자의 개념을 도입했지만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의 기계론과 비슷해진다. [데카르트-뉴턴은 그 논리적 귀결을 철저히 밀어부치지 않았지만 그 논리적 귀결은 “예정조화”이다. 사실 뉴턴은 그의 저서 『 광학 』의 말미에 붙인 “질문들”이라는 글에서 이런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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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기계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라이프니쯔는 원자가 아닌 단자의 개념에 집착했을까?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기계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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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관계론과 실체론의 차이 실제 포켓볼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컴퓨터 게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차이는? 당구공의 운동은 공 사이의 관계맺음으로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렇게 하도록 규정된 프로그램으로 해서 일어나는가? 실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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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자론은 실체론과 양립할 수 없다. 단자에 실체 개념을 제거하면 관계론으로서의 라이프니쯔의 철학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라이프니쯔에 의하면 각각의 단자의 표상 속에는 일체의 다른 것과의 연관이, 즉 우주 자체가 그 속에 함유되어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하나의 단자는 극소로 압축된 우주, 즉 하나의 소우주(microcosmos)라고 할 수있다. “물질의 아무리 작은 부분에도 피조물, 생물, 동물, 영혼, 정신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질의 각 부분은 마치 식물로 가득 차 있는 정원이나, 물고기로 가득 차 있는 연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식물의 한 개의 가지나 동물의 한 개의 지체(肢體)나 그 물방울의 하나하나가 역시 한결 같은 정원이며 연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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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유사한 비유를 우리는 화엄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티끌속에서 무한량의 불국토와 수미산 금강철위산(金剛鐵圍山)의 세간을 나타내어도 좁지 않다.”(於 一微塵中 現無量佛國 須彌金剛圍 世間不迫착)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입론의 근거는 완전히 상반된다. 라이프니쯔에서 단자속에 전 우주가 압축되어 들어있다는 것은 단자가 “창문이 없기 때문에” 즉 실체이기 때문에 필요한 불가피한 요청이다. 화엄철학에서는 사(事)에 전 우주가 융섭해들어오는 것(사사무애,事事無碍)은 사가 자성(自性)-실체성-이 없다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화엄에서의 사는 창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창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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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쯔는 왜 화엄철학에서 보이는것과 같은 철저한 관계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라이프니쯔는 왜 화엄철학에서 보이는것과 같은 철저한 관계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벗어나지 못한데서 오는 한계로 보인다. 그래서 올바른 출발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으로 들어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 무한한 실체들의 존재를 승인한다는 것은 실체의 절대독립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상호교통할 수없는 창이 없는 무한한 실체들의 집합으로 된 세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질서를 만들기위해 전 우주가 각각의 단자들속에 압축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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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거꾸로 뒤집혀져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영향 -실체관- 을 벗겨냄으로써 뒤집혀진 라이프니쯔를 바로 세울 수 있다.
‘힘’은 우선 관계의 개념이다. 절대 자립적 힘이란 형용의 모순이며 힘은 다른 것과 관계속에서 만들어지는 한 상태이다. 단자의 본질이 힘이라는 것은 이미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우주는 거대한 관계의 망상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가 현상한 것이 바로 -라이프니쯔가 옳게 통찰했듯이- 공간이고 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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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단자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단자는 세계와 그물처럼 얽혀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단자모형으로서 “노드”(node) [노드;도표나 그래프에서의 교차점 ] 이것을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세계가 단자속에 압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위 모식도를 통해 그것을 설명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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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를 먼저 상정하고, 그것의 상호작용을 물을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이 ‘실체’를 어떻게 현상하게 하는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쯔의 경우 그 탐구의 방식이 외양상으로는 전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후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단자를 먼저 상정했지만 이것은 상호작용의 실체화이다. 다음에 이 상호작용이 어떻게 ‘실체’(시간,공간,물체,정신)를 현상하는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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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자는 창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그 자체 바로 창문이다.단자는 그 자체 공(空)하다.(자성이 없다)
우리는 라이프니쯔에서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을 제거했기 때문에 “단자는 창문이 없다”는 그가 관계의 존재론에 실체의 존재론의 옷을 입히려는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가져온 그 임시변통적 설명(ad hoc explanation)을 제거할 수있다. 단자는 창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그 자체 바로 창문이다.단자는 그 자체 공(空)하다.(자성이 없다) 그러나 “이 공은 비누와 같아서 공이라는 비누로 분별의 때를 빨았으면 그 공의 비눗기도 다시 헹궈내야 한다.”(空空) 라이프니쯔는 비눗기를 미처 헹궈내지 못해 그것을 실체화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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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자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할 때 오히려 라이프니쯔의 의도가 더 분명히 밝혀지는데 그는 실체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의 존재론을 정립함으로써 데카르트와는 구별되는 물에 대한 새로운 구성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우리는 앞서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는 것이 관계망, 연결망의 철학적 메타포라는 것을 보았다. 라이프니쯔의 단자가 함축한 “티끌 속의 우주”, 역시 라이프니쯔의 철학이 관계의 철학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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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1] 관계론적 관점에서 “크다”,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의 항공노선..우측은 그것을 도식화한 것..허브공항(우측그림의 빨간색점)은 많은 노선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곳이며 로칼공항은 허브공항을 매개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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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터넷의 모식도이다. 중앙 부분에 밝게 빛나는 부분은 실제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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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2] 관계론의 관점에서 “죽음”이란 무엇일까?
node failure 죽음이 관계의 종말이라면 죽이기 위해 꼭 목숨을 끊을 필요도 없을 것인데…사실 그런 형벌이 우리나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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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형(烹刑)을 아십니까? – 죽음의 또 다른 형식
이 팽형의 행형이 끝나면 물에 젖은 죄인은 가마솥에서 끌어내서 죄인의 가족에게 인도된다. 인도될 때 이 죄인이 산사람처럼 행동했다가는 안된다. 마치 뜨거운 물에 삶아진 시체처럼 행세해야 한다. 인도받은 가족들도 호곡을 하며 마치 죽은 가장을 대하듯이 슬퍼해야 하고 또 상례에 준하여 인도받아야 한다. 이 살아 있는 시체를 집으로 운반할 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뒤따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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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집에 옮겨오면 그 살아있는 시체의 신분이나 지체에 알맞은 응분의 상례를 마치 죽은 사람과 똑같은 절차대로 치러야 한다.
이 상례가 끝나면 이 독직죄인은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식적으로는 그는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가족 조차도 그와 대화하는 것 조차 금지된다. [참고 동영상] 두가지 죽음- 팽형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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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3] 6단계 분리의 법칙; 모든 의미있는 연결은 6단계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보충3] 6단계 분리의 법칙; 모든 의미있는 연결은 6단계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6단계 이내로 연결되면 그것은 하나(정확히 여럿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6단계 연결은 유효한 연결망의 지표다!!! “세상 참 좁다”는 말의 의미는? 여럿의 하나 크지만 작은 세상(small world); 이 지구상에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그래서 큰 세상) 6단계를 그치면 모두 연결된다.(그래서 작은 세상) 6단계를 넘어가면 ; 여럿 그것은 “큰 세상”(just big world) 의미있는 연결이 만들어지지 않는 세상 이전의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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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세상의 네트워크적 특성 Scale-free Network 포아송분포(Poisson distribution)
멱제곱분포(Power-law 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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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단지 6명의 타인들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단지 6명의 타인들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미국 대통령과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젓는 뱃사공도, 열대우림의 원주민과 에스키모도 여섯 사람만 매개하면 연결될 수 있다. [연관 동영상; 네트워크의 과학] 1967년스탠리 밀그램은 저간에 흘러다니던 이 “여섯단계 분리의 법칙”을 실험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 법칙이 유명해 졌다. [편지쓰기를 통해…오늘날 이메일전송방식으로 더 쉽게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항공망에서 인터넷망, 나아가 인체의 대사작용의 네트워크 까지 모든 유의미한 연결망은 6단계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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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베이컨 수 (Bacon number)라는 것이 있다.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Kevin Bacon)은 '청춘의 양지'와 '아폴로 13호'를 포함한 많은 영화에 출연한 중견배우. 베이컨과 함께 출연한 배우를 베이컨수 1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어퓨굿맨'에서 베이컨과 공연한 톰 크루즈는 베이컨 수 1이다. 베이컨이 출연하지 않았지만 베이컨수 1인 배우와 함께 출연한 배우를 베이컨수 2라고 한다. 더 높은 베이컨 수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마를린 몬로는 베이컨수 2이고 찰리 채플린은 베이컨수 3이다. 흥미롭게도 어떤 배우도 베이컨수 3을 넘지 않는다. 헐리우드 배우집단은 무질서한 모임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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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의 주문> 웹사이트 바로가기
찰톤 헤스톤 (Charlton Heston) <베이컨의 주문> 웹사이트 바로가기 Sylvester Stallone/ Ben Kingsley/ Vincent D'Onofrio/ Marlon Brando/ Charlton Heston /Marilyn Monroe /Tom Cruise/ Robert Wagner Joong-Hoon Park /Hyung-rae S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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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on 1 Robert Wagner Barry Norton
나를 쫓아온 스파이 Austin Powers: The spy who shagged me Let’s make it legal Barry Norton 왓프라이스글로리What Price Glory 살인광시대Monsieur Verdoux Robert Wagner 와일드싱Wild Things 마를린 몬로 마이크 마이어스 어퓨굿맨 A Few Good Man 톰 크루즈 케빈 베이컨 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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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관계론을 실체의 관점에서 보는데서 생기는 착시이다.
베이컨수는 마치 케빈 베이컨이 헐리우드 영화계의 중심인 것 같은 외양을 준다. 물론 그렇지 않다. 베이컨의 팬이 우연히 베이컨을 중심에 놓고 베이컨수를 헤아려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본데 기인한다. 이것은 관계론을 실체의 관점에서 보는데서 생기는 착시이다. 여기서 UK는 네트워크의 변방에 있는 노드에 지나지 않지만 마치 그것이 세상의 중심인 것 처럼 UK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BS의 UK수는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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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계의 존재론과 자기 초월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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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데카르트의 “코키토” 데카르트(R.Descartes)의 유명한 명제 cogito ergo sum 즉 I think, therefore I am 은 주체의 발견이라고 까지 치켜세워지는 것으로서 서양근대철학의 출발점으로 불린다. 그런데 문장을 자세히 보면 think의 문법이 맞지 않다. think는 분명 타동사이고 타동사는 당연히 목적어를 수반해야 한다. 무엇이 생략되어 있는 것일까? 적어도 I am 과 대귀를 이룰 그럴듯한 후보는 myself 이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하는 그런 존재..말하자면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런 존재만이 가상적으로가 아니고 "진짜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성립할 수 있을까? 다음 그림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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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가는 이 그림을 완결지울 수 있을까? 이것을 완결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가가 이 세계에 더 이상 속하지 않을 때이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그림 속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그리는 '주체'로서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의 '나'는 주체일 뿐 대상이 될 수 없다. 자신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순간 화가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은 무한 퇴행을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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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은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제 데카르트의 명제 I think...에서 think 뒤에 myself가 생략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나는 대상화되고 무한퇴행에 빠져 버린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주어로서만 있고 목적어가 될 수 없다.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대상화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는 이 세계 속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나'는 세계의 바깥에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발견한 '주체'(subjec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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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서 화가의 예로 돌아가서 세계를 그리려는 화가의 기획은 화가가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 X1으로 완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의 경우 think는 타동사일지 몰라도 나 자신을 사유하는 "I think"에서만은 think는 자동사나 다름없다. 그것은 "I am"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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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화이트헤드의 자기초월적 주체 [교재,17~24쪽] 주체와 객체의 분리, 기계로서의 세계 이것은 근대과학과 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체계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까지 강고한 도그마로 자리 잡았다. 이 일단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이 패러다임의 주류적 위치에 있던 물리학에서부터였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관찰자가 관찰대상의 바깥에 있다고 간주하고 있는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부정이고, 코키토의 절대주체성에 기초한 데카르트 테제의 균열이었다. 균열을 넘은 철저한 해체와 재구성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화이트헤드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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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A. N. Whitehead)에 있어서 존재는 항상 주체이면서 객체라는 점이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객체라는 뉘앙스를 피하기위해서 객체를 ‘자기초월체’(superject)라고 부른다. 그래서 존재는 단순히 주체나 자기초월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초월적 주체’(superject-subject)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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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체’,‘객체’라는 것은 이 생성의 과정을 임의로 단절시킨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체’,‘객체’라는 것은 이 생성의 과정을 임의로 단절시킨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생성의 과정 속에 주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완료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객체로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도 아니다. 그것은 수학에서의 극한값과 같다. 말하자면 그것은 주체와 객체 간의 극한값이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고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그 극한 속에 있다. 나는 앞서 절대주체성이란 데카르트의 테제를 "세계를 그리고 있는 화가"로서 보여주고자 했다. 이제 주체이면서 객체인 화이트헤드의 테제를 '우로보로스'(Ouroboros)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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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그림은 '우로보로스'라 불리는 것으로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좌측 그림은 '우로보로스'라 불리는 것으로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이 우로보로스에는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따로 있지 않다. 그것은 먹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먹히는 객체이다. 이 우로보로스는 사물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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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 화랑》 ; 한 청년이 화랑 안에서 어떤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에셔의 《 화랑》 ; 한 청년이 화랑 안에서 어떤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그림이란 다름아닌 청년이 화랑 안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청년이 그림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림 밖으로 나와 있고 그림 밖으로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림 안에 들어가 있다. 이 청년은 그림을 감상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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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조직화의 과정에서 산출되는 주체가 바로 자기초월적 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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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생의 과정 속에 과거의 다자는 새로운 일자 속에서 소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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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합생의 과정에서 그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관계맺음을 통해서 더 높은 레벨에서 그 주체성을 이양한다
새로운 합생의 과정에서 그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관계맺음을 통해서 더 높은 레벨에서 그 주체성을 이양한다. 화이트헤드는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한다고 했지 ‘주체성’을 상실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창조의 장에 들어있는 상위레벨에 대해서는 주체성을 잃었지만 하위레벨에서는 여전히 주체성이 살아있다. 단지 그 ‘직접성’을 잃었을 뿐이다. 외교권은 상실했지만 지방내의 통합에 필요한 내적 자치권은 보유하고 있는 연방국가의 지방정부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자체 여전히 복잡한 전체(일자)이면서 상위레벨의 전체에 대해서 모듈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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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바이츠체커의 ‘새로움’과 ‘확인’
바이츠체커(E.Weizsäcker)가 생명의 진화를 위해 가져온 “새로움”과 “확인”의 개념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보다 높은 의미론적 수준의 새로움을 끌어들이게 되면 하위수준에서의 새로움은 줄어들게 되고 규격화되는데 이것이 “확인”이다. 이것은 생명의 진화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지구에는 수백만 종의 원핵생물이 있지만, 진핵세포 안에 형성된 세포소기관들(원시 원핵생물의 후손들)은 고도로 규격화되어 있다. 이것은 원핵생물이 진핵생물속으로 유입됨에 따라 규격화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낮은 수준의 새로움을 감소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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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2] <논어>의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학과 습의 차이는?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유붕자원봉래 불역낙호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 학이(學而)편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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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3] 스포츠에서 선수들의 단순반복연습은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 손목을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좋은 선수가 되었을 때는 그러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을 때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를 빌리면 그것이 ‘죽은 여건’-바이츠체커의 규격화-이 되었을 때이다. 선수들의 끊임없는 단순반복 연습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며 그럼으로써 실제 시합에서 고차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멸되었는가? 그렇지 않다.그것은 하위차원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높은 수준의 새로움 속에서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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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기적 인과와 기계적 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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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림이다. 나는 역사를 만드는 자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산물이다. 위 그림은 A는 a1과 a2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A는 a1과 a를 만들고 있다는 도식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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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모델에서는 주체는 객체와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데카르트 모델에서는 주체는 객체와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주체는 객체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객체가 다시 주체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주체는 객체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개한 새로운 모델에서는 주체가 객체에 영향을 주는 순간 그 바뀐 객체가 주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데카르트-뉴턴의 고전과학은 원인에서 결과에로의 일방향적인 흐름만을 허용한다. 여기에 대해 다시 결과의 원인에로의 되먹여침을 허용하는 새로운 과학이 출현한 바 이것이 바로 과학의 새로운 모형으로서 혼돈이론(chaos theor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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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뉴턴 과학에서는 원인이 규정되는 순간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기계적 인과”이다
데카르트-뉴턴 과학에서는 원인이 규정되는 순간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기계적 인과”이다. [또는 선형적 인과라 불린다] 그러나 새 과학에서는 원인이 규정된다고 해서 그 결과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데카르트-뉴턴 과학에서는 원인에서 결과에로의 방향이 일방향적이지만 새 과학에서는 쌍방향적으로 결과가 다시 원인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온다. [혼돈이론은 이것을 비선형적 인과라 부르는데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나는 “연기적 인과”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의 한 모형으로서 로지스틱맵을 보자.[교재,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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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간단한 예로 페어홀스트(P.F.Verhulst)의 식 -통상 로지스틱 사상(logistic map)이라 부른다- 의 경우를 보자.
Xn+1 = B Xn(1-Xn) 간단한 직관상을 얻기 위해서 B를 2로 두고 계산해 보자. Xn+1 = 2(Xn - Xn × Xn) Xn이 두번 곱해져 있다. 여기서 패턴의 반복을 찾아낼 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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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다시 식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계산을 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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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2. 3일 경우 9회째 0. 5652(약 57%)에 정착하고 그 이후의 반복계산에서는 더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r=2.3일 경우 9회째 (약 57%)에 정착하고 그 이후의 반복계산에서는 더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r=2.4일 경우 10회째 에 정착한다. r을 높이면 이 값은 점점 높아져 r=2.5일 경우 25회째 0.6(60%)에 고정된다. r=2.98일 경우 처음에는 일정한 수렴을 보이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다가 354회째에 에 고정된다. 결론적으로 r이 2이하일 경우 특정값에 수렴되는 일정한 규칙성을 보인다. 그러나 r=3일 경우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에 있던 끌개(attractor)가 불안정해져서 불규칙적인 값을 산출하다가 1683회 반복후 과 의 두개의 끌개로 나뉘고, 그 이후는 이 두 값 사이를 교대로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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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3.2가 되면 21회째 부터 , 사이를 진동한다. 이것을 ‘갈래질’ 또는 ‘분지’(分枝;bifurcation)라고 하는데 여기서 두개의 가지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r=3.5로 높이면 이 두 값이 다시 불안정해지면서 불규칙적 양상을 보이다가 31회째 부터 ,0.3828,0.8269,0.5008사이를 진동하는 4개의 새로운 갈래질이 발생한다. 이것이 3.56에 이르면 또다시 불안정해져서 8개의 갈래질이, 3.567에서 16개의 갈래질이 발생하고,뒤이어 32,64,128...의 갈래질이 나타나는 소위 ‘주기배증’(週期倍增;period-doubling)이 가속되다가 3.58 부근에서 갈래질은 무한대가 된다. 이것이 바로 혼돈상태(chao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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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점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검은 부분은 한 계가 발견될 수 있는 상태가 무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혀 예측할 수없는 혼돈의 상태임을 의미한다. 결정론적 계라 하더라도 자기되먹임의 과정은 비결정론적인 혼돈적 거동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에 영향을 주지만 이것은 선형적 인과가 아니고 비선형적 인과 말하자면 “연기적 인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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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강의 소프트웨어\연관 소프트웨어\IAChaos_javaVersion\Chao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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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불교의 인과응보, 업보는 결정론인가? 불교는 현생의 행,불행은 모두 전생의 업보의 결과라고 한다. 이것이 만일 기계적 인과론이라면 현생의 노력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내가 선행을 해서 업보를 줄일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도 이미 전생에서 결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업보론이 기계적 결정론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업보의 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부처님이 사해대중들의 깨우침을 위해서 도를 가르쳤다는 것은 그가 가르친 업보가 기계적 인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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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적 인과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쉘드레이크와의 대화에서 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현재의 형태와 과거의 형태와의 관계는 사실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시간의 전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내함하고 있는 총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시점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나의 용어로 펼침(unfoldment)-은 일자(whole)의 유출이다. 즉 일자의 어떤 양상이 어떤 순간에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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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계기는 그것의 선행계기와 닮았다. 그러면서도 그것과는 다르다
각 계기는 그것의 선행계기와 닮았다. 그러면서도 그것과는 다르다. 나는 이것을 ‘방출’(projection)과 ‘유입’(inje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해 왔다. 각 계기는 일자의 방출이다. 다음 그것은 다시 일자 속으로 유입된다. 다음 계기는 이 유입의 재유출이고 이것은 무한히 계속된다.” 봄의 방출과 유입은 상입(interpenetration)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상입을 능동적 작용에서 보면 방출이고 수동적 작용에서 보면 유입이기 때문이다. 화엄의 입장에서 보면 방출과 유입은 관점을 달리한 동일한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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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선행사건이 후행사건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행사건은 일단 일자 속으로 유입된 다음 후행사건으로 방출됨으로서 영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전체(일자)와 매개된 부분이 부분속으로 유입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본질적인 것은 자기자신이 일단 일자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자기자신으로 유입되어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로지스틱 맵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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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단한 비유로 바다와 파도간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파도는 바다 전체에서 방출되어진다
그 간단한 비유로 바다와 파도간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파도는 바다 전체에서 방출되어진다. 그 다음 그것은 다시 전체속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이 다음 파도를 일으킨다. 후행파도에 가해지는 선행파도에 의해 영향은 그것을 포함한 바다 전체이다. 여기에는 인과적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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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도a가 파도b에 주는 영향은 “선형적” 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파도a가 파도b에 주는 영향은 “선형적” 인 것이 아니다. 파도a는 바다 전체속에 도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파도b에 영향을 준다. 봄의 용어로 말하면 파도a의 유입의 재방출이다... 봄도 어떤 유형의 “인과성”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함축적 바다의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one that is mediated via the totality of the implicate ocean)이다. 그것은 분리되고 고립된 "외연적 파도"(explicate wave)들간의 인과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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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의 개화원인? 機械的 因果; 물, 공기, 햇빛, 영양소 등..
緣起的 因果; “함축적 바다의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도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의 “국화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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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적 인과와 업보에 대한 나의 해석 봄의 방출과 유입의 개념을 통해서 업보에 대한 가능한 한 해석을 시도해 본다.
우선 현생은 전생의 인과적 결과, 즉 업보라는 불교적 교리를 받아들이고 시작하자. 우리는 앞서 이 전제에 서게 되면 숙명론에 빠지게 되고 업보를 줄이거나 제거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무의미해짐을 지적했다. 논점은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업보를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해석을 찾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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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인 해석에서는 업보를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통상적인 해석에서는 업보를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전생에서 현생에서 다시 후생에로의 이행 속에서 나를 나로 만드는 정체성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본래 자성이 없으며 그것은 현생의 삶에 부과된 우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멸과 함께 나를 나로 만드는 자성은 소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전생의 업이 어떻게 현생에 유전되는가? 그렇게 되기위해서는 적어도 업을 담은 ‘나’가 일정한 정체성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개인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도 업의 유전을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전생의 업이 살아있는 유정물 전체에 담긴 채 후생에 유전된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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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업은 총량으로 유전된 다음 후생에서 각 유정물들에게 임의로 배분된다고 전제한다
이 업은 총량으로 유전된 다음 후생에서 각 유정물들에게 임의로 배분된다고 전제한다. 이것이 업이 개체단위로 주어진다는 것과는 다음 점에서 다르다. 후자의 경우 현생에서 주어진 것은 전생의 결과물이다. 내가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면 그것은 전생에서 선업을 쌓은 결과이고 보잘것 없는 존재라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나의 전생의 타락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업이 총량으로 유전되고 임의로 배분된다면 나의 뛰어난 자질은 나의 공이 아니고 행운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되돌려 주어야 할 부채이다. 이 자질은 선업을 쌓는데 쓰이도록 요구받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후생에서 업의 크기를 줄이도록 하는 과업이 주어져 있다.[물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경우 후생에서 죄업의 총량은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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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을 쌓고 덕을 행하는 것은 나의 업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선을 쌓고 덕을 행하는 것은 나의 업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전생에서 현생으로 그리고 후생으로 이어지는 ‘나’라는 것은 없다면 이런 주장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유정물의 죄업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나의 삶은 전생의 인과의 결과이자만 그 인과는 불변적 정체성을 통해서 전생의 나에서 현생의 나로 연결되는 직접적 인과가 아니고(이럴 경우 전생이 현생의 나를 결정하는 기계적 인과가 될 것이다.) 전생의 ‘나’의 업보가 다른 모든 유정물들의 업보와 함께 한덩어리가 되어 후생으로 유전되어 현생의 ‘나’에게 영향를 미치는 간접적 인과, 봄의 말을 빌리면 “총체적 바다의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 말하자면 연기적 인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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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에 선다면 인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업을 줄이려는 우리의 노력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렇다고 이것이 결정론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원인이 주어지면 결과는 결정된다는 기계론적 인과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든 그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임을 함축한다. 그러나 인과적 과정을 인정한다더라도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는 일정한 조건에서는 비결정성을 허용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앞서 검토한 로지스틱맵이 함축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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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적 인과와 비결정성 그리고 자유 앞서의 로지스틱 맵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그림에서 수직으로 나타나는 흰 띠들을 볼 수있을 것이다. 이것은 혼돈속에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규칙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r=3.835에서 50회 정도의 반복계산 동안 예상대로 혼돈의 양상을 보이다가 57회째 갑자기 ,0.4945,0.5863이 차례로 반복되는 셋갈래질의 질서가 출현한다. 그리고 r=3.739에서 혼돈 후에 119회째 갑자기 ,0.4996,0.9347,0.2280,0.6582이 차례로 반복되는 다섯 갈래질의 질서가 출현한다. 이것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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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질서가 결정론적 인과의 영역이라면 혼돈은 비결정론의 영역이고 이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질서는 바로 연기적 인과의 영역이다. 그것은 단순한 질서의 영역처럼 인과적 과정 속에 있으면서도 혼돈의 영역 처럼 비결정론적 자유를 허용한다. 여기가 연기적 인과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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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잡성의 질서를 확대하면 우리는 놀랍게도 자신을 포함한 전 계가 자신속에 상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복잡성의 질서를 확대하면 우리는 놀랍게도 자신을 포함한 전 계가 자신속에 상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논해왔던 그 특성, 一微塵中含十方 즉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있는 연결망의 세계이다. 이 복잡성의 질서는 단순한 질서-기계적 질서-의 형태를 시늉내고 있다. 즉 그것은 상주(常住)하는 법칙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서를 단순한 질서와 혼동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쯔가 옳게 통찰했듯이 그것은 기계적 질서로 치환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기계라면 그 부분 조차도 기계인 그런 기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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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 보자!! 실체 – 관계 절대적 주체 – 자기초월적 주체 기계적 인과론 - 연기적 인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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