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ation is loading. Please wait.

Presentation is loading. Please wait.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Similar presentations


Presentation on theme: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Presentation transcript:

1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福沢諭吉は韓国侵略論者ではない 静岡県立大学 平山 洋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第34回韓国日本近代学会国際学術大会発表 於立命館アジア太平洋大学・2016年10月29日

2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 침략 주의자가 아니다 시즈오카 현립 대학 히라야마 요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제 34 회 한국일본근대학회 국제 학술 대회 발표 리쓰메이칸 아시아 태평양 대학 년 10 월 29 일

3 「福沢は韓国侵略論者ではない」ことを 証明するための三つのアプローチ
(1) 福沢存命中に刊行された著作物中で、福沢は韓国( 朝鮮)の独立を支持するとの発言をしているが、その領有 については言及していない (2) 『福沢先生哀悼録』(1901)に収録されている韓国留 学生帝国青年会総代金祥演の弔辞で、福沢が朝鮮独立 の支援者であったことが讃えられている (3) 福沢が韓国侵略論者であるという風評は、死後30年 、韓国併合後20年も経過してから突然表明された

4 “후쿠자와는 한국 침략 주의자가 아니다”를 증명할 수 있는 3개의 근거
(1) 후쿠자와 생전에 간행 된 저작물 내에서 후쿠자와 는 한국(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 만 그 영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2) 『후쿠자와 선생 애도록』(1901)에 수록되어있는 한 국 유학생 제국 청년회 총대 김상연(金祥演)의 조문 (弔文)에서는 후쿠자와가 조선 독립의 지원자였던 것을 칭송한다. (3) 후쿠자와가 한국 침략 주의자이라는 풍문은 죽고 나서 30년후, 한일병합 20 년후에 갑자기 나타났다.

5 (1)-1 福沢署名著作に韓国領有の言明なし ①慶應義塾HP「デジタルで読む福沢諭吉」を「朝鮮」の語 彙で検索しても、結果は単なる独立国の扱いである ②「独立国にして著名なるものを計れば波斯(ペルシャ)、 暹羅(シャム)、支那、朝鮮及び日本国のみ」『時事小言』 1881年 ③「(壬午軍乱での)朝鮮為支那之所属の論は必ず一場 の問題となりて日本政府は固より大に関係し(つまり反対 し)」『兵論』1882年

6 (1) -1 후쿠자와 서명 저작 내에 한국 영유 선언이 없다
① 게이오 대학(慶応大学) 홈페이지 「디지털로 보는 후쿠자와 유키치」 에서 「조선」이라는 단어로 검색해 보면 단순하게 독립국으로서 인정한 기사들밖에 안 나온다. ② 「독립국으로 유명한 국가들을 세어 보면 페르시아( 波斯), 시암(暹羅), 시나(支那), 조선과 일본 만」 『시 사소언(時事小言)』1881 년 ③ 「(임오군란 때) 조선은 청나라에 소속한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문제가 되므로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몹시 관계해서(즉 일본 정부가 조선 청나라 속국론에 반대해서)…」 「병론(兵論)」1882 년

7 (1)-2 甲申政変後の亡命独立党員の保護 ①署名著作中には独立党や金玉均への言及なし
(1)-2 甲申政変後の亡命独立党員の保護 ①署名著作中には独立党や金玉均への言及なし ②無署名社説と書簡により、1885年以降1894年までの金 玉均らへの支援は明らか ③直筆社説「土地は併呑す可らず国事は改革す可し」( 1894年7月5日付)を石河幹明は全集に収録せず ④晩年にいたっても福沢は朝鮮独立の希望を捨てず(全 集未収録社説「朝鮮独立の根本を養う可し」1898年5月4日 付)

8 (1) -2 갑신정변 후 망명 독립 당원의 보호 ① 서명 저작중에 독립당과 김옥균에 대해 언급이 없다.
② 하지만 무서명 사설 기사와 서간들을 통해 1885 년 이후 1894 년까지 김옥균들에 대해 지원한 것은 분명 히 알 수 있다. ③ 후쿠자와가 서술한 서명 사설인 “토지를 병탄하지 말고 국사(国事)를 개혁해야 된다”(1894 년 7 월 5 일)라고 하는 기사를 이시카와 칸메이가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④ 말년에 이르러서도 후쿠자와는 조선 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후쿠자와 전집 미수록 사설 “조선 독 립의 근본을 키워야 한다” 년 5 월 4 일).

9 (2)-1 金祥演の弔辞  ①金祥演(1874~1941)当時早稲田大学に留学。帰国後は 1906年法官養成所教官、韓国併合後は1917年平安北道 地方土地調査委員会臨時委員、1931年漢陽醸造合資会 社代表等。日本政府より勲五等瑞宝章受章。 ②「先生清操義侠」「先生精霊昭如日星化作金玉」弔辞より ③後年の併合支持派も1901年当時は愛国者だった

10 (2) -1 김상연(金祥演)의 조문(弔文) ① 김상연(金祥演 : 1874~1941). 당시 와세다 대학 유학 생. 귀국 후 1906년 법관 양성소 강사, 한일병합 후 1917년 평안북도 지방 토지 조사위원회 임시 위원, 1931년 한양양조합자회사 대표 등.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서보장(勲五等瑞宝章) 수장. ② “先生清操義侠” “ 先生精霊昭如日星化作金玉” (조문 ) ③ 후년 병합지지자도 1901년 당시에는 애국자였다.

11 (2)-2 福沢は朝鮮国の「外臣」だった ①1897年5月20日付朝鮮国宮内大臣李載冤(大院君の長 男)宛書簡(写)で、福沢は「外臣」と自称
(2)-2 福沢は朝鮮国の「外臣」だった ①1897年5月20日付朝鮮国宮内大臣李載冤(大院君の長 男)宛書簡(写)で、福沢は「外臣」と自称 ②書簡の内容は、日本に留学中の義和君(李岡公)の教 育係を仰せつかって名誉と思っていたところ、自分に断 りもなく米国への留学が決定されたのは不満だ、という もの ③福沢は義和君の教育係となったことを「大君主陛下より 重き勅旨を蒙りたる名誉」と表現している

12 (2) -2 후쿠자와는 조선국 “외신(外臣)” 이었다
① 1897 년 5 월 20 일, 조선 궁내대신 이재면 (李載冤 : 대 원군 장남) 에 보낸 서간에서 후쿠자와는 “외신 (外臣) ”이라고 자칭했다. ② 서간 내용은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의화군(義和君: 이강 李堈)의 교육 담당자가 된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 했는데, 자신에게 알림도 없이 갑자기 미국 유학이 결정 된 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③ 후쿠자와는 의화군의 교육 담당자가 된 것에 대해 “대 군주 폐하로부터 막중한 칙지(勅旨)를 받은 명예"라고 표현했다.

13 (3)-1 井上角五郎の暗躍 ①井上角五郎は福沢の弟子で、甲申政変時には『漢城旬 報』編集員としてソウルに滞在.
(3)-1 井上角五郎の暗躍  ①井上角五郎は福沢の弟子で、甲申政変時には『漢城旬 報』編集員としてソウルに滞在. ②当初は政変への関与を強く否定、ところが韓国併合後 には福沢の指示により自らも政変に参加したと表明. ③井上は立憲政友会(伊藤博文総裁)所属の国会議員と して長く日本政界に影響力を有した.

14 (3) -1 이노우에 카쿠고로의 암약 ① 이노우에 카쿠고로는 후쿠자와의 제자. 갑신정변시 에는 『한성순보(漢城旬報)』 편집 위원으로 서울에 체류했다. ② 당시 정변에 참여를 한 것을 몹시 부정했다. 하지만 한일병합후에 갑자기 변해서 후쿠자와의 지시에 따 라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고 표명하게 됐다. ③ 이노우에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 : 총재 이토 히 로부미伊藤博文)에 소속한 국회의원으로 오랫동안 일본 정계에 영향력을 가졌다.

15 (3)-2 石河幹明の『福沢諭吉伝』 ①福沢が韓国併合派であったと最初に明言したのは弟子 の石河幹明著『福沢諭吉伝』(1932)である.
(3)-2 石河幹明の『福沢諭吉伝』 ①福沢が韓国併合派であったと最初に明言したのは弟子 の石河幹明著『福沢諭吉伝』(1932)である. ②その証拠として使われているのは時事新報無署名社説 であるが、「対韓の方針」(1898年4月28日付)など傍証 とされる社説は石河自身が書いた可能性が高い. ③つまり、韓国併合を謀っていたのは福沢ではなく石河だ ったと推測できる.

16 (3) -2 이시카와 칸메이의 「후쿠자와 유키치 전」
① 후쿠자와가 한일병합론자였다고 언급한 처음의 기 사는 후쿠자와의 제자 이시카와 칸메이(石河幹明) 가 서술한 「후쿠자와 유키치 전」(1932)에서 볼 수 있 다. ② 증거 자료로서 사용된 것은 신문 『시사일보(時事新 報)』의 무서명 사설 기사이다. 「대한(対韓)정책」( 1898 년 4 월 28 일)등 방증으로서 인용되는 사설들 은 이시카와 자신이 서술한 가능성이 높다. ③ 즉 한일병합을 도모한 사람은 후쿠자와가 아니라 이 시카와였다고 추측 할 수가 있다.

17 ご清聴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들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ご清聴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들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Download ppt "The university of Shizuoka, Hirayama Yo, PhD"

Similar presentations


Ads by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