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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참전과 지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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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UN군 참전직전의 한반도 상황 미국 및 UN의 참전결정 한국군의 전력회복 과정 서부, 중부, 동부, 서남부지구 전투
지연전 결과 및 낙동강전선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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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 참전직전의 한반도 상황 초기 전투 현황 옹진반도 전투, 개성 문산 전투, 의정부지구 전투, 춘천, 홍천지구 전투, 동해안 일대 전투 등이 일어났음. 의정부 함락 이후 수도를 옮기고 대통령이 피난을 가는 사태가 일어남. (시민들을 위한 대책은 강구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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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 방어선(서울을 방어하는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북한의 전차로 인해 방어선이 무너짐.
북한군의 서울 진입 →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교 폭파 – 병력분산, 민간인들의 희생.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창설. 한강 방어선 구축(지리적 이점을 살린 방어선) → 한강 방어선 전투(북한군의 남하 지연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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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반도 전투 – 지휘체계의 미흡, 인접부대의 소식에도 어두웠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3일 이상 지연. 한국군 철수 시간 확보의 직접적 요인. 육군 총 참모장 교체 (채병덕 소장 → 정일권 소장(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 북한군의 전술적 실패 - 서울에서 3일 지체 → 한국군에게 병력을 수습할 여유를 주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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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및 UN의 참전결정 1950년 6월 24일 오후 9시경 트루먼 대통령→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집 → 한국에 대한 원조 찬성 공산 세력의 위협에 대한 단호한 조치 → 실질적으로는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한 실리주의적 성격이 강함 →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소식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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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엔군 사령부 편성 미국 정부의 입장 : 한국에서의 공산 침략 방관 X + 유엔을 통한 대처
2. 유엔군 사령부 편성 미국 정부의 입장 : 한국에서의 공산 침략 방관 X + 유엔을 통한 대처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요구 결의안 채택 → 배후의 소련을 향해 공격을 멈출 것을 요청 그러나 소련과 북한은 이 결의안을 무시 & 공격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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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한국 임시위원단(UNTCOK) : <북한이 유엔 결의안을 준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한국 정부의 조기 붕괴 가능> 보고서 제출 → 안보리는 긴급회의를 소집, <6.25 결의안> 통과 유엔 안보리의 한반도 문제 즉각 개입 가능 = 소련의 불참 때문에 가능 → 소련이 개입했다면 미국의 제안이 거부당하는 것은 물론 한국군의 사기 진작에도 악영향을 끼쳤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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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 가결 →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
1950년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 가결 →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 유엔군 사령부 설치 및 사령관 임명권을 미국에 부여, 유엔기 사용 승인 미국 =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 유엔군 사령부가 도쿄에 설치됨 ← 기존 극동군 사령부 + 한국 작전 임무. 7월 8일,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유엔군 지상군 사령관으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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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전력회복 과정 한강방어선 전투(6.28~7.4)
7월 3일 파괴된 한강 철교와 인도교를 북한군이 보수, 전차와 병력이 다리를 건너 남진시작 7월 4일 시흥에 있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수원을 거쳐 평택으로 철수 급조된 혼성부대지만… 북한의 남하속도를 최대한 늦춤 분산된 한국군의 전력을 수습할 시간제공 한국군과 유엔군이 안정적으로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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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방어선 전투 이후 한강방어선 붕괴 이후 수원으로 집결된 국군들도 부대별로 평택으로 철수
7월 4일 한강방어선 붕괴 이후 수원으로 집결된 국군들도 부대별로 평택으로 철수 주일미군 중 큐슈에 주둔해 있던 미 24사단의 전선배치(예하 21연대 1대대 스미스부대 선발대로 투입) ▷▶오산, 안성, 평택을 연하는 선에 배치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연합전선을 구축 ▶한국군의 단독작전→유엔군과의 연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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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전력회복 6개의 급조된 혼성사단으로 구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제 1, 2, 3, 5, 7, 수도사단)
7월 5일 한국군의 전력회복 6개의 급조된 혼성사단으로 구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제 1, 2, 3, 5, 7, 수도사단) →‘1군단 사령부’ (수도, 제 1, 2사단) 창설 ※7월 16일 상주에서 제 6, 8사단으로 구성된 ‘2군단’창설 →2개 군단 5개 사단으로 개편 최초의 군단편제, 전투력 또한 전쟁 직전 수준으로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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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원수의 지휘를 받음 반면에 한국군은 유엔군에 배속 안됨 맥아더 원수의 유엔군 사령부 편성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이양한다.“ – 이승만 대통령 7월 7일 맥아더 원수의 유엔군 사령부 편성 유엔군사령부 창설 이후 연합국의 병력들이 유엔군으로 편성 →맥아더 원수의 지휘를 받음 반면에 한국군은 유엔군에 배속 안됨 원활한 한국군 지휘를 위해 7월 14일 한국군 전 작권을 맥아더 원수에게 이양 지금까지 지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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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중부, 동부, 서남부지구 전투 서부전선의 지연전 죽미령 전투 미국의 지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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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의 지원이 시작되다 1950년 6월 30일 맥아더 원수는 한반도에 지상군 파병에 대한 승인을 얻게 된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을 통해 큐슈에 위치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제 24사단장인 딘 소장에게 대대 규모의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부산으로 공수한 후 사령부와 1개 대대를 추가적으로 공수하고 나머지 부대는 부산으로 수송하도록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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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일 대전에 입성한 스미스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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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미령 전투(6.25전쟁 중 미군의 최초 전투)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 중령은 처치 준장으로부터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향하고 가능한 부산에서 먼 북쪽에서 적을 지연함과 동시에 북쪽에서 주 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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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차고폭탄 발사를 시작으로 적 전차에 포탄을
3. 죽미령 전투의 과정 스미스 부대는 접근해오는 적의 전차를 기다렸다가 적합한 장소에서 기습 공격을 하기로 함. 7월 5일 오전 7시경 수원부군에서 북한군 제 4사단의 움직임을 목격함. 적의 전차 뒤를 따르는 보병부대와 싸웠으나 중대가 위험에 처하자 철수를 명령함. 대전차고폭탄 발사를 시작으로 적 전차에 포탄을 퍼부었으나 멈추지 않고 북한군은 스미스 부대의 진지를 공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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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5일 07시 30분, 미 제 52포병대대 소속 M2A1 105mm 곡사포의 방열 후 첫 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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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부대는 12시간동안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다 결국은 오산으로 철수
4. 죽미령 전투의 결과 스미스 부대는 12시간동안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다 결국은 오산으로 철수 스미스 부대는 440명 중 15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 참패 북한군 4사단은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 전차 4대를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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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죽미령 전투 후 미군과 북한군의 반응 <북한의 반응> <미국의 반응>
5. 죽미령 전투 후 미군과 북한군의 반응 <미국의 반응> - 북한의 남한침략은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사주하여 미국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미국은 죽미령 전투를 겪고 난 이후, 비로소 북한군에 대한 제대로 된 전력 파악을 하였다. <북한의 반응> - 북한군은 미국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당황. - 미군의 참전을 알고난 후 전쟁계획을 ‘빠른 공격’으로 수정하는 등 미군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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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방어선 구축 북한군에 밀려 후퇴한 미군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금강은 방어에 적합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 곳.
방어선 구축을 완료한 미군은 제 21연대를 예비대로 운용한다는 방침을 세운 후 지체 없이 금강의 모든 교량 및 도선장과 나룻배까지도 파괴시킴. 그러나 배치된 두 연대는 모두 2개 대대씩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에 비해 전투력이 매우 빈약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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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방어선 전투가 벌어진 금강에 대해서 알아보기!!
금강 방어선 전투가 벌어진 금강에 대해서 알아보기!!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거쳐 황해로 흐르는 강으로 강격에서부터 충청남도-전라북도 도계를 이루며 군산만으로 물이 흘러들어감. -총길이 km, 유역면적 9,912,15㎢인 강. 우리나라에서 세번째 로 긴 강. 옛날부터 농업생산과 해상교통의 발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의 발달로 일찍이 공주, 강경,부여 등 고도와 옛 상업도시가 발달함. -금강=호강(물살이 잔잔해서)=백강 -금강 상류에는 대청댐 위치, 하류에는 금강 하구 둑이 위치 해 있는 국가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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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및 대평리 전투 북한군 제3,4단 금강 북쪽 방면에 나타난것 은 7월 12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 사이 ≫제3사단: 대평리 부근의 미 제 19연대를 공 격. ≫제4사단:미 제34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공주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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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제4사단은 14일 오전 6시경, 제34연대의 주둔지에 포격을 가함과 동시에 목선을 이용하여 기습적인 도하를 시도.
→전면에서는 포격만을 실시하면서 기습적으로 후방에 침투하려는 작전 한편 북한군은 중장비를 도하시키는 도구인 도선판 조립을 신속히 하지 못함으로써 16일까지 100%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유엔군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였음. 그래도 후방침투작전을 성공시킨 북한군은 제34연대를 혼란에 빠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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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34연대는 제대로 맞대응 한번 해보지 못한 채 15일 아침이 밝자 논산 방면으로 철수
결국 제34연대는 제대로 맞대응 한번 해보지 못한 채 15일 아침이 밝자 논산 방면으로 철수. 이후 다시 대전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 제19연대는 꼼짝없이 북한군에 노출되게 되어 14일, 대평리 정면에서도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이 시작됨. 결국 북한군이 공략하여 도로까지 차단해 버림에 따라, 제19연대는 고립. 미 제24사단에서는 장갑차를 동원하여 미 제19연대의 탈출구를 마련하려고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함 결국 금강 방어선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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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및 대평리 전투(4) -결과 유엔군의 두가지의 불리한 요인 ? 결과 1)전투력의 차이
-미국은 서부전선의 미 제24사단이 연이어 패배하자, 1개사단의 증원만으로는 북한군을 막아낼 수 없음을 인지하고 추가로 미 제25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증원을 서두르게 됨. 1)전투력의 차이 -각 연대마다 병력은 단지 2개 대대씩만 편성되어 있었음. -즉시 전투에 투입이 가능했던 부대는 딱 절반인 3개 대대 뿐이었음. 2)넓은 방어 범위 -애초에 보유하고 있던 병력이 적에 비해 현저히 부족했음. -가용병력이 겨우 절반뿐인 상황에서 정면 30㎞가 넘는 넓은 범위를 담당함. -북한군은 유연한 전술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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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지역에 매복중인 미군 멀리 금강교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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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역 전투 1950년 당시 대전의 중요성? -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고, 주변 도시로 바로 연결되는 5개의 도로가 놓여있는 등 교통의 요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 - 또한 당시에도 충남의 도청이 대전에 있었으며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 ⇒유엔군으로서는 반드시 대전을 지켜내야 했을 것이고, 반면 북한군으로서는 반드시 점령하고자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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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F. 딘 소장은 금강 방어선 붕괴와 함께 논산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해 온 미 제34연대에게 대전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림.
→그러나 전황은 미 제34연대에게 너무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음. 한편, 미 제34연대는 대전 외곽의 갑천 줄기를 따라 배치됨. 북한군이 7월 19일 아침에 공격하면서 대전지역 전투가 전개됨. 북한군의 위세에 다급해진 제34연대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반’을 이끌고 적 전차에 접근하여 사격을 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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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에게 큰 손실을 주었지만, 북한군 제4사단의 1개 연대가 보문산 남쪽으로 이동하여 금산 도로와 옥천으로 연결되는 대전터널을 점령.
결국 7월 20일이 되자 미 제34연대는 차량을 비롯한 중장비를 스스로 파괴한 한 후 소부대 단위로 분산되어 금산과 옥천 방면으로 철수함. 이 전투로 인해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됨. →철수 도중 딘 소장 실종. 1953년 포로교환으로 귀환. ‘북한군의 오판’은 북한군이 공격 시기를 놓침에 따라 미 제24사단은 1~2일에 걸쳐 지연전을 펼칠 수 있었음. 하지만 오랜 지연전 탓에 미 제 24사단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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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전투 당시의 대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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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3.5인치 로켓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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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전투 당시 윌리엄 F. 딘 소장(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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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부 전선의 지연전 1. 중·동부 전선의 형성 2. 진천·청주지역 전투 - 7월 5일, 미 제24사단이 서부전선에 배치됨
- 한국군이 중 ·동부 전선 담당 (서쪽 : 수도사단, 제1,2사단/ 동쪽 : 제6,8사단/동해안방면 : 제3사단) 2. 진천·청주지역 전투 - 7월 8일, 북한군 제2사단의 진천북단 공격 : 진천-청주를 지나 대전으로 진격 목적 - 진천북단에서 후퇴하여 남단으로 이동, 문안산-봉화산의 방어선 구축 - 9일 아침, 북한군 공격 재개 -> 문안산-봉화산 방어선 포기하고 후퇴 - 공격적 전술 운용으로 다시 방어선 탈환, 진천 탈환 계획 세움 - 10일 저녁, 청주로 철수 : 유엔군 F-51전투기의 엄호 - 청주의 미호천에 방어진지 편성하였으나 아군의 후퇴로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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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청주지역 전투 작전지도 진천 지구 전투 청주 지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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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중령 임부택)’가 맡고 있던 음성지역에 북한군 제15사단이 공격.
3. 음성지역 전투 -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중령 임부택)’가 맡고 있던 음성지역에 북한군 제15사단이 공격. - 7월 5일 ‘무극리’와 ‘동락리’에서 첫 전투 -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의 경계 소홀 - 7월 7일, 동락초등학교 김재옥 선생의 제보에 북한군의 경계소홀 사실을 확인하고 기습공격계획 세움 - 한국군 제6사단 7연대 2대대의 공격을 받고 달아난 북한군 노획한 북한군의 소련제 장비 및 무기 -> 소련이 북한을 지원하였다는 사실 확인 - 계속적인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 -> 결국 철수 전투이후 제 6사단 제 7연대 모든 장병들이 1계급 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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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지역 전투 작전지도 무극리전투 동락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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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계속되는 지연전의 전개 충주 – 제 6사단 2연대와 북한군 제 1, 12사단의 전투
제천 ·단양 – 한국군 8사단과 북한군 8사단의 전투 - 상부의 잘못된 명령 - 통신망 두절로 명령 진위확인이 늦어진 한국군 ->결국 제천을 포기하고 단양으로 후퇴 - 북한군의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한국군의 기습공격 - 북한군의 방어선 공격 -> 죽령 부근으로 철수 동해안전선의 상황 - 전투가 지역적으로 제한된 형태 : 해안선을 연한 동해안 도로가 유일 한 통로였기 때문에 - 제 3사단 23연대의 투입 - 북한군의 공격 (제 5사단 945 육전대) - 제 22연대 복귀 요청, 결국 23연대 단독 방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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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덕 탈환작전 6. 미 제25사단 투입 7. 미 제1기병사단 투입
- 제3사단, 예하 제23연대와 독립 1대대로 이 지역을 방어 - 7월 17일, 북한군의 영덕 점령 - 7월 29일, 영덕을 다시 탈환 6. 미 제25사단 투입 - 미 제25사단, 예하에 제24, 27, 35연대 - 사단장 킨(Kean)소장의 지시로 부산상륙 7. 미 제1기병사단 투입 - 기병사단 : 메이커부대 (신뢰할 수 있는 부대라는 인식) - 7월 18일부터 22일 동안 일본에서 포항으로 상륙하여 지연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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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부전선의 지연전 1. 전선의 형성 및 상황 미 지상군은 서부전선, 국군의 주력은 중·동부전선에 투입.
호남지역의 방어를 위해 광주에 5사단, 전주에 7사단을 새로 편성(열악한 상황 및 환경/장병의 20%만 개인화기 지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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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규모는 2개의 정예사단 (제 4사단, 6사단 :군산, 전주, 광주까지 진격) 상대적으로 막아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병참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군은 목포, 여수를 거처야 했고, 그 사이 미 제25사단이 신속히 마산으로 이동, 방어선 구축에 성공(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신속한 이동이었다고 평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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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군 우회기동에 따른 조치 한국군 : 채병덕 소장을 영남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방어토록 함. 미군: 미 제24사단을 진주-함양-거창 축선에 투입하여 방어(19연대-안의, 진주 34연대-거창 21연대-합천) → 그러나,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은 갖추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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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전 결과 및 낙동강전선 형성 한국군 제1군단의 철수 - 미 제8군사령관 측의 북한군 규모 파악 미흡
(7월31일에 2개 사단 규모라는 것을 인지 후, 급히 낙동강 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 - 제1군단 철수 명령 접수 및 토의 (아군의 제공권 확보 후 야간 철수, 기도비닉유지 등을 토론, 8사단과 수도 사단 모두 서로 먼저 철수할 것을 주장해 시간 지연) - 결론적으로 8사단이 먼저 철수, 수도 사단이 이를 엄호한 후에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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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 & 피해 ①8사단 10연대 - 안동교 통과 철수, 후방에 있던 2대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혼란 16연대 - 철수 중 교전, 병사 대부분이 신병이고 패배감에 젖어 있는 등의 이유로 와해, 도하 후 약 250여명만 남음 21연대 - 추격에 대비해 교전을 수행하며 더디게 철수, 1,3대대 철수 중 안동교 폭파, 남은 2대대 낙동강 도하 시도를 하였으나 북한군의 사격으로 전력의 77%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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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수도 사단 - 사단전술지휘소 의성으로 이동, 엄호 임무를 수행하며 철수
- 결과적으로 도하를 완료하였지만 피해가 매우 큼,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와 전의를 다지며 낙동강 방어진지를 편성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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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한국군 및 유엔군의 총 연장240Km의 ‘낙동강방어지역’ 형성
8월 1일부로 낙동강으로 집결해라. -당시 미 제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8월 3일 한국군 및 유엔군의 총 연장240Km의 ‘낙동강방어지역’ 형성 ‘부산교두보’, ‘워커라인’ 이라고도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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