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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어 음운 한국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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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10~14세기)의 언어 외적 사실 이기문의 시대 구분에서 고대국어(신라어)와 전기중세국어(고려어)를 구별 짓는 사건
이기문의 시대 구분에서 고대국어(신라어)와 전기중세국어(고려어)를 구별 짓는 사건 신라의 멸망 및 고려의 성립: 정치적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이동. 이에 따른 언어적 중심의 이동 (정치적 사건 자체가 시대 구분의 기준은 아님) 개성 지역어가 우리말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됨. 전기중세국어와 후기중세국어를 구별 짓는 사건: 모음추이 훈민정음의 창제 또는 조선의 건국이 아님 10세기 당시의 개성어는 어떤 언어였을까? 7세기 이후 신라에 편입되었으므로 신라어의 한 방언 단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고구려어 저층(기층, substratum)의 영향도 있었 을 것 그러나 지속적인 신라어/동남방언의 영향으로 고구려어의 흔적이 차차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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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어의 자료 鷄林類事: 1103-1104년. 鄕藥救急方: 13세기 중엽 大藏都監에서 간행. 몽골어로부터의 차용어
高麗에 사신으로 온 宋나라의 손목(孫穆)이 편찬. 鄕藥救急方: 13세기 중엽 大藏都監에서 간행. 몽골어로부터의 차용어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飜譯朴通事, 訓蒙字會, 鷹鶻方 당시 몽골어의 음운체계와 당시 한국어의 음운체계의 대응 양상을 바탕으로 당 시 한국어의 음운체계 재구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4년 二中曆: 일본 鎌倉시대(12세기 말)에 만들어진 백과사전. 전 13권 고려어 수사가 가타카나로 기록되어 있음. 고려가요: 樂學軌範, 樂章歌詞 수록. 후대의 변개가 많으므로 고려시대 자료로 이용할 때 주의 요망. 표류민 기록: 일본에 漂着한 고려 어민의 증언을 가나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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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표기의 성격 차이 鄕藥救急方은 고려인이 만든 것이고, 신라 때부터의 전통을 계 승한 차자표기로 기록되어 있음.
음독, 훈독, 음가, 훈가의 4가지 유형이 골고루 나타남. 鷄林類事는 중국인이 기록한 것. 고려인이 발음한 고려어 단어 들을 중국인이 듣고 당시 한자의 중국음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 기본적으로 한자의 音만 이용하고, 訓은 이용하지 않음. 단, 동일한 音의 한자가 여럿 있을 때 의미상 어울리는 한자를 선택하 는 일은 있을 수 있음. 계림유사에 수록된 고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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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음 체계에 경음이 발생했을까 본래 속격 ‘叱’이나 동명사 어미 ‘尸’ 뒤에서 ‘ㅂㄷㅅㅈㄱ’의 異音 (allophone)으로만 존재하던 것이 어두 위치에도 나타나게 되어 음소의 자격을 얻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음운화(phonologization), 음소화(phonemization) 그러나 고려시대 자료에서 경음이 음소로 존재했다는 명확한 증거를 찾기는 어려움. 15세기 중엽의 훈민정음 체계에서 독립된 문자로 표기된 것으 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이미 발생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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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성/어두 자음군의 발생과 변천 현대 한국어에는 어두 자음군이 없음.
영어의 strike를 외래어로 수용할 때 자음들 사이에 모음 삽입: ‘스트라이트’ 15세기 한글 자료에서 초성 합용병서로 표기된 것(ㅂ계: ㅄ, ㅳ, ㅷ; ㅅ계: ㅺ, ㅼ, ㅽ, ㅄ계: ㅴ, ㅵ)의 음운적 실체에 대해 논란이 있음. (米), (志), -(彈); -(敷), (女), -(吸), -(急); (隙), -(消), (時) 초기 학자들: 경음 표기였다 (세 계열 모두 자음군 아님) 이기문: ㅂ은 독자적으로 발음되었고 ㅅ은 경음 표기였다 (두 계열만 자음군) 허웅: ㅂ, ㅅ 모두 독자적으로 발음되었다 (세 계열 모두 자음군) 계림유사: 粟曰田菩薩(*X), 白米曰漢菩薩(*), 女兒曰寶妲(*) 15세기 한글 자료에서 초성 합용병서로 표기되던 단어들이 계림유사에서는 2음 절로 표기되는 경향이 있음. 향약구급방: 五得浮得, 烏得夫得’(䕡茹, *오부득) 15세기의 鄕藥集成方에 ‘吾獨毒只’(䕡茹), 鄕藥採取月令에 ‘吾獨毒只’(狼毒), 17세 기 초의 東醫寶鑑(湯液篇 3:19)에 ‘오독기’(어말의 ‘-이’는 접미사)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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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 자음군의 발생과 변천에 대한 이기문 교수의 설
알타이 제어에 어두 자음군이 존재하지 않음을 고려할 때, 원시 한국어 에도 어두 자음군이 없었을 것이다. 계림유사(12세기), 향약구급방(13세기)이 만들어질 시기에까지도 한국어 에는 어두 자음군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 14세기 무렵 弱母音 /ㆍ/, /ㅡ/가 탈락하고 그 앞의 자음이 뒤 음절의 초 성과 결합하여 어두 자음군이 형성되었다. 이 어두 자음군이 15세기 훈민정음에서 초성 합용병서로 표기되었다. (ㅅ계 제외) 17세기 문헌에서부터 초성에서 각자병서와 합용병서의 혼기, ㅂ계 합용 병서와 ㅅ계 합용병서의 혼기가 나타남. ~, -~-, ~ 이 시기에 어두 자음군이 경음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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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문 교수 설에 대한 토론 계림유사에서 한자 2자로 표기된 것이 고려어에서도 2음절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계림유사에서 한자 2자로 표기된 것이 고려어에서도 2음절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고려인이 어두 자음군으로 발음한 것을 손목이 한자 2자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 음. 이기문 교수의 답: 15세기의 중국측 자료인 朝鮮館譯語에서는 초성 합용병서를 가 진 음절을 일관되게 한자 1자로 표기. 계림유사와 대비됨. 탈락한 모음이 /ㅣ/일 수도 있다. 고려시대 일본에 표착한 고려인의 증언을 가나로 기록한 자료를 보면 ‘米‘를 의미하는 단어가 ‘ㇶサルpisaru’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ㅅ계의 ‘ㅅ‘도 독자적으로 발음되었고, 일부 초성/어두 자음군은 18세기까 지도 존속했다. 角干 ~ 舒發翰/舒弗邯: 15세기에 ‘’로 표기된 단어가 신라어에서 ‘스블‘로 발음되 었을 가능성을 시사. 18세기에 한국어를 일본의 가나로 기록한 자료(全一道人, 朝鮮語譯)에서 ㅅ계 합용 병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음: スト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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ㅿ 고려어에는 음소 /ㅿ/가 분명히 존재했던 듯. 계림유사: 弟曰了兒(아)(‘了’는 ‘丫’의 誤字), 四十曰麻刃(마)
향약구급방: 豆音矣薺’, ‘豆衣乃耳’(葶藶, 두루믜나), ‘漆矣母’, ‘漆矣於 耳’(漆姑, 오어) 15세기의 ‘ㅿ’을 가진 음절을 日母字(초성이 ㅿ인 한자)로 표기. 향약구급방: 兎絲子 鳥伊麻(새<*새삼), 苦參 板麻(너<*널삼), 黃蓍 數 板麻 又目白甘板麻(너) 15세기의 ‘ㅿ’을 가진 음절을 日母字가 아니라 초성에 [s]를 가진 한자로 표기. 이는 ‘ㅅ>ㅿ/ㄹ,ㄴ,ㅣ__모음’의 변화를 겪기 전 모습. 音節末의 ‘ㅿ’을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예도 있음. 鷄林類事: 剪刀曰割子蓋(애<*개) 鄕藥救急方: 蚯蚓 居兒乎(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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ㅸ 고려어 자료에서 ㅸ’의 존재에 대한 증거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음.
宋代 중국어의 脣重音(양순 파열음 [p], [b])과 脣輕音(순치 마찰음 [f], [v]) 이 있었음. (한국어의 양순 마찰음 ‘ㅸ’[β]을 순경음으로 표기할 법함.) 15세기의 ‘ㅸ’[β]에 해당하는 소리는 鷄林類事에서 중국어의 脣輕音이 아 니라 脣重音 [p], [b]로 표기됨. 二曰途孛(두을,둘<*두), 酒曰酥孛(수을,수울,술<*수), 袴曰珂背(외<*), 匱曰 枯孛(골<*고), 秤曰雌孛(저울<*저) 이것은 15세기의 ‘ㅸ’[β]에 해당하는 소리가 고려어에서는 마찰음이 아니 라 파열음이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ㅸ’에 해당하는 고려어의 소리가 15세기처럼 양순 마찰음이었다 하더라 도, 중국인의 귀에 순경음보다는 순중음에 가깝게 들렸을 가능성도 있음. 한국 한자음에는 순중음-순경음 구별이 없으므로 ‘ㅂ’과 ‘ㅸ’의 차이가 차 자표기에 반영될 수 없음: 鄕藥救急方 ‘熨斗 多里甫里(다리우리)’. 15·16세기의 ‘글’(文), ‘도톨왐’(橡栗), ‘갈웜’(虎), ‘대’(竹田), ‘대’(大虎), ‘메-’(袒) 등은 ‘ㅂ>ㅸ/ㄹ,ㅣ__모음’과 같은 변화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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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절말 자음 체계 音節末 자음의 內破化가 아직 그리 심하지 않았던 듯.
鷄林類事에서 음절말의 ‘ㅊ’이 ‘翅’로 반영됨: ‘皮曰渴翅(갗)’, ‘面曰捺翅()’, ‘問題多少曰密翅易成(몇)’. 鄕藥救急方에서 ‘ㅈ,ㅊ’과 ‘ㅅ’이 각각 ‘次’와 ‘叱’로 엄격히 구분됨: ‘茺蔚子 目非也次(눈비옂)’, ‘薺苨 獐矣加次 獐矣皮(놀갗)’, ‘桔梗 刀次 道羅次(도 랒)’, ‘天南星 豆也味次 豆也亇次火(두야맞)’, ‘郁李 山叱伊賜羅次(묏이랒)’; ‘柴胡 山叱水乃立(묏미나리<*묏믈나리)’, ‘白蘞 犬伊刀叱草(가톱, *가히돗 플)’, ‘燕脂 你叱花(*닛곶)’, ‘雞冠 雞矣碧叱(볏)’. ‘ㅈ’과 ‘ㅊ’이 구별 표기되지 않은 것은 古代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표기의 조잡성 때문일 수도 있고 평음과 격음의 中和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음. 음절말 ‘ㅎ’의 표기: 鷄林類事 ‘尺曰作(잫)’, ‘索曰那(놓) 又曰朴(밯)’; 鄕藥救 急方 ‘薯蕷 亇支(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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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탈락 15세기에는 舌音(ㄷ), 齒音(ㅅ, ㅈ) 앞에서 ‘ㄹ’이 탈락하는 현상 이 있음: 알+디->아디, 놀+져->노져 고려시대에는 舌音, 齒音 앞에서의 ‘ㄹ’ 탈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듯. 鷄林類事 ‘柴曰孛南木(*블나모)’ 鄕藥救急方 ‘麥門冬 冬乙沙伊(*겨사리>겨사리)’, ‘牡蠣 屈召 介(굴조개>구조개)’, ‘苦參 板麻(*널삼>너)’, ‘柴胡 山叱水乃立(* 묏믈나리>*묏므나리>묏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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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어 차용어 고려말에 우리 민족이 몽골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면서 언어적으로도 몽골어의 영향을 받게 됨.
고려말에 우리 민족이 몽골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면서 언어적으로도 몽골어의 영향을 받게 됨. 특히 관직, 군사, 말, 매 등 특정 의미 영역에서 차용어가 많이 들어옴.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몽골어 차용어는 특정 영역에 치우쳐 있지만, 당시에 몽고어의 영향력은 지금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컸 을 것. 高麗史에 ‘華言’이라고 한 예들은 대개 몽골어 차용어. 한글 창제 이후 한글로 표기되기도 함. 간쟈 線臉馬, 몽골문어 qalʤan 졀다 赤馬, 중세몽골어 ʤe'e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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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어 차용어 예 (1) aʤirγa>아질게()(兒馬), aγta>악대(騸), qara>가라()(黑馬), qalʤan>간쟈(),간 져()(線臉馬), baγudal>바오달(營), taraγ>타락(酡酪), qatar>가탈(點的), ʃirγa,ʃarγa> 셜아()(銀褐馬), qaliγun>가리온,가리운(黑鬃馬,海騮), γanʤuγa>간지개(稍繩), saŋγasun>상가손(鷹跳) (2) olaŋ>오랑(肚帶), γodoli>고도리(화살), ʃiŋqor,ʃoŋqor>숑골(海靑), bora>보라 (매)(秋鷹), onu,oni>오뇌,오(筈), qoŋγor>공골()(土黃馬) (3) qula>고라()(土黃馬), turumtai>도롱태(鷂子), sa'uri>사오리(凳), qudurγa>고개 (鞦皮), tuiγun>튀곤(白黃鷹), ba'atur>바톨(勇士), mundaγa>몬다가(迎鞍頭) (4) ʤe'erde>졀다()(赤馬), terlig>텰릭(帖裏,武官服), degelei>더그레(塔護), temür(鐵)>터물,터믈, ebʧi'ün>업지운(胸肉) (5) kögsin>궉진(白角鷹) (6) küreŋ>구렁()(栗色馬), ʃülen>슈라(水剌,御膳)) (7) naʧin>나친(鴉鶻), itelgü>익더귀(兎鶻), qarʧiγai>갈지게(黃鷹), biʧeʧi>必者赤(비 쳐치,비져치)>非赤(비치,빛), ʧidür,ʧider>지달(絆), silügüsün>시라손(土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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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어 차용어를 통해 본 몽골어-고려어 음운 대응
(4)로 미루어 당시에는 /ㅓ/가 전설의 [e]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5)로 미루어 당시 국어에는 중세몽고어의 [ö]에 가까운 단모음이 없었음 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2), (3)과 (6)의 대응이다. (6)으로 보아 당시의 /ㅜ/는 후설이 아니라 중설 내지 전설의 [ü]였음을 알 수 있다. (2), (3)에서 중세몽고어의 [o], [u]가 모두 /ㅗ/에 대응하고 있으므로, 당 시 국어에는 후설 원순모음이 /ㅗ/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 2 3 4 5 6 7 中世蒙古語 a o u e ö ü i 借用語 ㅏ ㅗ ㅓ ㅝ ㅜ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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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유사의 모음 표기의 특징 ‘ㅗ’와 ‘ㅜ’는 구별되지 않고 중국어의 [u]로 표기되는 경향
‘百曰醞(온)’, ‘今日曰烏捺(오)’, ‘後日曰母魯(모뢰)’, ‘石曰突(돓)’, ‘花曰骨(곶)’, ‘猪曰突(돝)’, ‘猫曰鬼尼(괴<*고니)’, ‘客曰孫(손)’, ‘手曰遜(손)’, ‘身曰門(몸)’, ‘鹽曰蘇甘(소곰)’, ‘魚肉皆曰姑 記(고기)’, ‘來曰烏羅(오라)’, ‘凡呼取物皆曰都羅(도라)’, ‘雲曰屈林(구룸)’, ‘雪曰嫩(눈)’, ‘二曰途 孛(둘)’, ‘井曰烏沒(우믈)’, ‘問你汝誰何曰僂箇(누고)’, ‘眼曰嫩(눈)’, ‘酒曰酥孛(술)’, ‘珠曰區戌 (구슬)’, ‘匙曰戌(술)’, ‘鼓曰濮(붚)’, ‘炭曰蘇成()’. 소수이지만 ‘ㅗ’가 [o], [au]로 표기된 예도 있음 ‘索曰那(놓)’, ‘高曰那奔(노)’, ‘黃曰那論(노)’; ‘九曰鴉好(아홉)’, ‘苧曰毛施(모시)’. 이러한 양상은 15세기의 朝鮮館譯語에서 ‘ㅗ’, ‘ㅜ’가 엄격하게 [o], [u]로 구별되 어 표기된 것과는 사뭇 다른 것. ‘ㅗ’, ‘ㅜ’의 음가가 15세기와 달랐을 것을 시사. ‘ㆍ’는 중국 근고음의 [o], [a] 등으로 표기됨 ‘一曰河屯(*)’, ‘胡桃曰渴來(래)’, ‘袴曰珂背(*)’, ‘馬曰末()’, ‘剪刀曰割子蓋(*개)’; ‘船曰 擺()’, ‘梨曰敗()’, ‘面曰捺翅()’, ‘月曰妲()’; ‘風曰孛纜()’; ‘叔伯母皆曰了子彌(아미)’, ‘弟 曰了兒(아)’, ‘四十曰麻刃(마)’ [o]보다는 원순성이 약한 모음 [ɔ]로 추정됨. ‘ㅡ’는 순음 뒤에서는 [u]로, 그 외의 환경에서는 [ə]로 표기됨 ‘火曰孛(블)’, ‘水曰沒(믈)’; ‘大曰黑根(큰)’ ‘ㅓ’의 표기는 다양하지만 저모음은 아니고 [e]에 가까웠던 듯 ‘十曰噎(엻)’, ’秤曰雌孛(저울)‘, ’昨日曰於載(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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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어 차용어, 계림유사로부터 귀납된 모음 체계
15세기와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음. 신라어와 비교하면 ‘ㅏ’, ‘ㅓ’의 위치만 약간 다름. 신라어 고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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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母音推移(vowel shift) 假說
鷄林類事가 보여주는 12세기초의 모음체계나 몽골어 차용어들이 보여주는 13세기의 모음체계는 신라어와 별 다름없이 전설:후설의 대립을 근간으로 함 ‘ㅓ’와 ‘ㅏ’의 위치가 약간 전설 쪽으로 이동했으나 체계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큰 변화가 아님. 그런데 15세기의 朝鮮館譯語나 訓民正音이 보여주는 모음체계는 이와는 사뭇 다르고 現代國語와 비슷함. 그렇다면 이 두 시기 사이에, 즉 14세기에 국어 모음체계에 一大 連鎖 推移 (chain shift)가 일어났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변화는 당기는 연쇄(drag chain)가 아니라 미는 연쇄(push chain) 이 연쇄 변화의 결과 ‘ㆍ’의 조음 공간이 좁아져 그 뒤 결국 ‘ㆍ’가 음소로서의 지 위를 잃게 됨. 전기 중세국어와 후기 중세국어를 구분하는 것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王朝가 바 뀌었다는 언어외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모음추이라는 국어 音韻史上 一大 사건을 근거로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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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추이 가설에 대한 비판 1: 개념적 문제 이런 변화는 미는 연쇄로서 별로 있을 법하지 않은 변화.
모음추이에 대한 일반언어학적 연구에 따르면 긴장모음(tense vowel)들은 고위· 전설 쪽으로, 이완모음(lax vowel)들은 저위·후설 쪽으로 추이를 겪는 강한 경향 이 있음(Labov 1994). 이기문이 상정하는 모음추이는 이런 일반적 경향에 비추어 매우 특이하고 복잡 한 변화의 패턴을 보임. 또한 ‘ㅓ’의 中舌化에 밀려 ‘ㅡ’가 高位로 올라갈 때 ‘ㅜ’가 다시 ‘ㅡ’에 밀려 後舌 쪽으로 이동한다고 했는데, ‘ㅡ’가 ‘ㅜ’와 조음 위치가 완전히 겹치더라도 이 둘은 입술의 모양(원순성)에 의해 구별되므로 ‘ㅜ’가 뒤로 밀릴 이유가 없음. 현대어에서도 ‘ㅡ’와 ‘ㅜ’는 조음위치보다는 원순성을 변별 자질로 하여 대립하고 있음. 이것은 15세기도 마찬가지. 15세기에 ‘ㅗ’와 ‘ㆍ’, ‘ㅜ’와 ‘ㅡ’는 조음 위치는 거의 겹치며 원 순성에 의해 대립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완진 1978). 이것은 訓民正音 解例의 설명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15·16세기 문헌에 흔히 보이는 원순성 동화 현상(주위에 원순모음이 있을 때 ‘ㆍ’가 ‘ㅗ’로, ‘ㅡ’가 ‘ㅜ’로 바뀌는 현상)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13세기와 15세기 사이에 모음 음소들의 音價에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 변화가 하나의 연쇄 추이를 이룬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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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추이 가설에 대한 비판 2: 자료 해석 문제 전기 중세국어의 모음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 가장 결졍적인 역할을 한 것은 중 세 몽골어로부터의 차용어 계림유사의 모음 표기는 약간 조잡한 일면이 있어 이것만 가지고는 당시의 모음체계를 수 립하기가 어려움.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용된 중세 몽골어는 華夷譯語와 元朝秘史를 대표로 하는 東方 中世 몽골어 자료에 입각한 것 Muqaddimat al-Adab을 대표로 하는 西方 중세 몽골어의 모음체계는 동방 중세 몽골어와 좀 달랐으며, 한국어가 동방과 서방 두 방언 중 어느 쪽으로부터 차용 했는지 확실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가 진행되었으므로 이 논의는 그 기반이 취약한 상태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기문(1994)에서 당시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몽골어 차용어들이 동방 중세 몽골어로부터의 것임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중세 몽골어의 모음들의 음가가 정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근 거로 국어의 모음체계 추정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위험함(服部四郞 1975, 1978). 현대 몽골어에서 [ü], [u]로 轉寫되는 모음이 사실은 각각 현대국어의 ‘ㅜ’, ‘ㅗ’에 가까우며 몽골어의 역사에서 모음추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때, 전기 중세국 어의 ‘ㅜ’, ‘ㅗ’ 역시 그 음가가 [u], [o]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 다면 국어에서도 모음추이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된다(김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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