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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회와 정치 제5강. 중국의 역사적 변천과정: 현대 이후 신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 동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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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사회와 정치 제5강. 중국의 역사적 변천과정: 현대 이후 신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 동 윤

2 1.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건국 ○ 중국에 있어서 국부(國父)는 쑨원(孫文: Sun wen, 즉 孫中山: Sun zhong
shan)이다. -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인 청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혁명을 시도 - 실패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중국동맹회’ 결성  - ‘삼민주의’(三民主義) 주창: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    ① 민족: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하고 한족에 의한 민족 정권 수립    ② 민권: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③ 민생: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경제정책 ○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과 중화민국 건립  - 1911년 호북성 무창(武 昌)에서 발생한 민중봉기의 성공 이후 한 달 만에 13개 성(省)을 접수  - 1912년 쑨원의 귀국 이후 중화민국을 세우고 대총통으로 추대  - 중국동맹회가 해체되고 국민당(國民黨) 창설  - 1912년 실시된 최초 국회의원선거에서 국민당이 다수의석 점유

3 ○ 1912년 위엔스카이(袁世凱)로의 권력 이동  - 당시 중국 전역을 통제한 능력이 없었던 국민당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위엔스카이의 보수파와 타협 및 권력 이동  - 1913년 의회 해산과 더불어 국민당 해체  - 이후 쑨원은 제2차, 제3차 혁명을 거쳐 1919년 국민당 부활: 군벌 세력과 지속적 전투 ○ 1924년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추진  - 1920년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된 쑨원은 군벌 토벌을 위한 북벌계획(北伐計劃) 추진  -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각지 10인의 대표들이 모여 중국공산당 발족  -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이 추진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하여 군벌에 대한 북벌 진행

4 2. 국민당․공산당 내전과 서안(西安)사건 ○ 1925년 쑨원의 사망 이후 장제스(莊介石)에 의해 권력 계승
 -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를 받아 군벌들에 대한 북벌작전 이후 공산당 토벌 감행  - 1927년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군사정변을 일으켜 공산당 체포 및 살해 추진  - 1927년 8월 강서성 남창(南昌)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Zhou en lai), 쭈더(朱德: Zhu de) 등이 모여 ‘팔일남창기의’(八一南昌起義) 주도  - 이후 이 부대는 중국공산당 최초 근거지인 강서성 정강산(井崗山)의 마오쩌둥 (毛澤東)이 이끄는 농민부대와 합류  - 국민당의 대규모 소탕작전에 밀려 공산당은 강서성으로부터 섬서성에 이르는 1만 2천 ㎞의 ‘대장정’(大長征) 수행 ○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과 서안(西安) 사건 발생  -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과 항일공동전선 구축 제안  - 장제스는 공산당의 제안을 거절  - 일본의 만주 침략은 국민당에 합류한 만주군벌 지도자 장쉬에량(張學良)은 서안 지역에서 공산당을 토벌하다 공산당의 제안을 수용

5 -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러 온 장제스를 강제적으로 구금
 -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사이의 극적인 담판으로 제2차 국공합작 추진  - 1945년 일본의 패망하여 물러나자, 국민당은 20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을 토벌하나, 일반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은 공산당은 1947년부터 전세를 역전하여 국민당 군대와 충돌 ※   쑹아이링(宋愛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자매  - 쑹아이링은 국민당 정부의 재무장관 공시앙시(孔祥熙)와 결혼  - 쑹칭링은 쑨원과 결혼하여 쑨원이 사망한 이후 공산당 혁명에 헌신  -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결혼 ※ 장쉬에량(張學良)은 제2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으로 복귀  - 장제스는 장쉬에량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장기간 연금  - 1949년 대만으로 퇴각 당시 그를 이끌고 가서 1993년까지 가택연금

6 3.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건국 ○ 마오쩌둥 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1949년 1월 공산당은 북경에 입성하고, 4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남경을 함락하였으며, 국민당 정부는 결국 12월 대만으로 철수  -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은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식을 거행,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국기로 채택  - 저우언라이가 중앙인민정부 정무원 총리, 마오쩌둥이 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쭈더가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 1949년 12월 국민당의 50만 자여 병력은 대만으로 철수하여 중화민국 재수립 -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장징구오(藏經國)이 총통으로 대를 이어 통치

7 ○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화 정책  - 1950년대 초까지 어느 정도 내전의 혼란이 진정되자, 공산당 정부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료자본의 몰수 및 관료자본기업 추진, 1951년 관료 자본법에 따른 재산몰수 단행  - 반공세력의 소탕을 위해 1950년 ‘반혁명활동 진압에 관한 지시’에 따라 잔존 국민당 세력에 대한 색출작업 추진  - 1951년 삼반(三反)․오반(五反) 운동을 추진하여 전후 무질서한 공직기강을 바로 잡고, 사회질서 회복     예] 삼반: 국가기관 기업의 반탐오,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통한 부패 근절          오반: 사기업에 대해 반뇌물, 반세금포탈, 반국가재산횡령, 반국가정보 유출금지 강화  - 1957년 중국공산당은 그동안 공산당 통치에 따른 당외 인사들의 불만 및 비판사항을 접수하였으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자 반우파 투쟁을 통해 이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물리적 보복 초래     예] 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불량자들과 함께 이들 비판자들을 ‘흑오류’(黑五類) 로 지칭

8 4.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활동 ○ 대약진운동의 추진과 결과
 - 1858년부터 1961년 사이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모험적 경제운동 추진  -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정책노선으로 선정  - 1차 농업사회로부터 2차 공업사회로의 빠른 변신을 추구, 많은 지식인들이 근로 노동에 동원  - 대규모 인력동원을 통한 경제적 부흥을 목표로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목표치와 과거 잔재들 때문에 운동의 성과는 미진 ○ 인민공사화 단행  - 인민공사란 토지와 농기구를 비롯하여 모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함께 공유, 농촌의 모든 사무를 관리하는 제도  - 인민공사는 크게 공사 아래 생산대대, 생산소대를 조직, 노역 및 생산활동 투여  - 인민공사는 최초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통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도입과 농업 기반의 1차 산업으로부터 빠른 공업화를 목적으로 설정하였으나, 결과적 으로 정책적 실패 초래

9 5. 문화혁명(文化革命)과 사인방(四人幇) ○ 중국인들은 1966년부터 1976년 사이 10년 간 중국을 휩쓸었던 문화혁명을
‘10년 대재난’(十年 大災難)으로 지칭  - 중국공산당 내부에는 공산당 내부의 자유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와 마오쩌둥 측근의 4인방이 권력을 둘러싼 경쟁관계 형성  - 국가건설 문제에 있어 빠른 경제성장이 정치적 국면의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주장에 대해 마오쩌둥 등 일부 급진세력들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타파 우선  - 1965년『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희곡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정치적 혼란은 빠르게 확산되어 새로운 변혁을 초래  - 마오쩌둥의 추종자들과 홍위병(紅衛兵)들은 전국을 누비며 여러 가지 파문과 문제점들을 양산, 이른바 ‘사구’(四舊: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사상을 통해 지속적인 정치선전과 마오쩌둥 신격화에 동원되었다.  - 1978년까지 하향을 통해 동원된 젊은이들이 대략 1,623 만명

10 6. 화구오펑(華國鋒)의 권력 승계와 사인방의 몰락
○ 사인방과 임표 사건  - 문화혁명으로 유소기 등 실무파가 제거되고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당지도부의 새로운 개편 추진  - 임표 세력과 대응하는 사인방은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왕홍문(王洪文)이며, 이들은 실무파들이 밀려난 이후 또 다시 내부 갈등  - 이들 사이의 권력 갈등은 1971년 9월 마오쩌둥의 후계자라고 불리던 임표가 마오쩌둥의 암살 모의에 관련된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어 소련 땅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비행기 사고를 사망함으로써 알려짐. 6. 화구오펑(華國鋒)의 권력 승계와 사인방의 몰락 ○ 저우언라이의 재등장과 화구오펑의 권력 승계  - 저우언라이는 경제발전을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강조하여 사인방과 갈등  - 1976년 저우언라이가 암으로 사망하고, 사인방과 실무파 사이에 권력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과정에서 제1차 천안문 사태 발생  - 대자보와 소자보를 통해 당정을 비판, 사인방은 이것을 반혁명으로 간주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11 - 천안문 사태의 배후 조정자로 덩샤오핑(鄧小平)을 지목하여 당적만 남겨둔 채
모든 직위를 박탈  - 1976년 마오쩌둥은 문화혁명 당시 온건파이던 화구오펑을 국무원 총리 임명 하여 민심을 수습하는데 주력 ○ 마오쩌둥의 사망과 사인방의 몰락  -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상황은 급반전되어 화구오펑은 사인방을 긴급 체포하였으며, 덩샤오핑은 당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  -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 논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문화혁명은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1978년 중앙공작회의에서 화구오펑이 제거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새로운 변혁 모색  - 1978년 12월 공산당 제11기 제3차 중앙전체회의(3中全會)에서는 개혁개방을 위한 덩샤오핑의 밑그림이 발표되었으며, 측근인 후야오방(胡耀邦), 왕젼(王震), 쟈오즈양(趙紫陽) 등이 주요 요직을 차지

12 7. 중국의 개혁개방 ○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 1978년 제11기 제3차 중앙전체회의의 결과에 따라 경제개혁과 대외개방 기본전제 아래 광동성에 있는 심천(深川: Shenzhen)이 경제특별구로 지정 - 이후 주해(周海: Zhuhai), 산두(汕頭: Shantou), 복건성의 하문(厦門: Xiamen) 등 4개 지역이 특별구로 지정되었다.  - 1984년 중국 정부는 요녕성의 대련(Dalian), 하북성과 요녕성 사이의 접경 지역인 진황도(秦皇島: Qinhuangdao), 천진(天津: Tianjin), 산동성의 연대(煙臺: Yantai), 청도(靑島: Qingdao) 등 14개 도시를 연해개방도시 특별구로 지정 ○ 하나의 중심점과 두 개의 기본점  - 하나의 중심점이란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며, 두 개의 기본점이란 사회주의를 견지하며 개혁개방을 지속한다는 의미  - 경제특별구의 경우 서방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하여 발전을 유도하되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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