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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1강 개괄과 수도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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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중세의 개념과 시기 중세의 개념과 시기 Middle Age : 라틴어 media tempestas
. 14세기 르네상스에서 이 용어가 생김 1강. 중세교회사 개괄과 수도원주의 A. 중세의 개념과 시기 1. 중세의 개념 Middle age는 라틴어로 media tempestas 임. 이 용어는 라틴어 'medium aevum'이라고 말에서 유래되었음. 독일어로 중세는 '중간시대'(Zwischenzeit, Mittelalter)라는 뜻임. 이것은 고대의 라틴세계와 15.16세기의 새로운 것 사이에 중간시대를 의미하며, 그 시기는 대략 500년 혹은 600년부터 1500년에 이르는 기간임. 이 용어의 출현 배후에는 14.15세기 이태리 르네상스가 있음. 인문주의자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근원(ad fontes)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모토였음. 그들은 고전문화, 즉 그리스와 로마문명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문화요 문명으로 인정. 그러다 보니 고대와 그들이 살던 당대를 비교하여, 그 사이의 시대를 흉물스런 시대로 평가하였으며 이 시대를 중간기, 즉 매디움 에붐(medium aevum)이라 평함. 결국 중세를 암흑기라고 본 부정적인 시대규정은 르네상스(Renaissance)의 영향임. 또한 이 용어는 중세 후기의 묵시(Apokalyptik)문학에서 파생되기도 했음. 묵시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신적 계시들 사이의 시간을 '중간시대'(Zwischenzeit)라고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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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르네상스 역사가들 * Francesco Petrarca(1304-1374): 르네상스 최초의 역사서술가
* Joachim von Floris( ): 중세의 대표적 신비주의적 종말론자 * Giovanni Andrea( ): 교황청 도서관 사서이자 주교 * Hartmann Schedel( ): 뉘른베르그의 의사 * Francesco Petrarca( ): 르네상스 최초의 역사서술가 중세라는 용어는 그 부정적인 성격과 더불어 페트라르카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하였음 이태리의 시인이자 인문학자였던 페트라르카는 '인문주의 역사서술의 아버지'라 불리움. 그는「서정시」(Epistula metrica XXXI(III33)라는 글에서 중세를 "중간시대, 쓰레기인 우리의 추악한 시대"(in medium sordes, in nostrum turpia tempus)라고 표현. 고전과 당대라는 두 개의 참된 시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기는 그에 의하면 치워져야 하는 쓰레기와 같았음. * Joachim von Floris( ): 중세의 대표적 신비주의적 종말론자 이 용어를 동일하게 사용함 그 후에도 이 용어가 여러 인문주의자들에게 사용되므로 일반화되어 갔음.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표현은 어떤 특정시대를 지칭하거나 명확한 시대구분이 없이, 단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편의적 사용이었음. * Giovanni Andrea( ): 교황청 도서관 사서이자 주교 1469년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Nikolaus von Kues, )에 대한 찬가(讚歌)에서 니콜라우스를 "고대뿐 아니라 중세(medie tempestatis)의 새로운 역사적 저작까지 알았던 사람"이라고 묘사 * Hartmann Schedel( ): 뉘른베르그의 의사 안드레아가 사용한 이 표현을 뉘른베르크의 의사였던 쉐델이 1493년 발행한 세계사(Liber Chronicarum)에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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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gilio Poliziano(1454- 1494)
Lefvre d'Etaples( ) * Angilio Poliziano( ) * Lefvre d'Etaples( ) 불란서의 인문주의자였던 르페브르 드테쁠르(Jacques Faber Stapulensis라고도 부름)가 쿠에스의 전집을 발행하면서 그대로 사용하므로 일반적인 시대구분 형태로 자리잡았음. 하지만 이런 사용과는 관계없이 이태리를 중심으로 중세라는 표현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었음도 알 수 있음. * Angilio Poliziano( ) 15세기 말경에 안지올로 폴리치아노가 1489년 베네치아에서 펴낸「Miscellaneorum centuria prima」(복합의 첫세기)에는 중세라는 표현이 아주 다양하게 발견됨. 여기에서 사용된 표현들은 '중간 고대'(media antiquitas), '중간기'(medium tempus), '중간시간'(media tempora), '중간시대'(media aetas), '중간시기'(medium aevum), '속된 중간'(saeculum medium) 등임. 이것은 중세를 고대와는 분명히 다른 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임. 중세를 나타내는 많은 표현들이 하나로 좁혀진 것은 17세기의 일임. 특정한 시기나 짧은 시간적 거리를 의미할 수 있는 "시간"(tempus)보다는 거의 같은 표현이지만 오랜 기간, 긴 시대라는 뜻을 가진 "중간기간"(medium aevum)이 일반적으로 더 많이 쓰였음. 이것은 중세가 전환기로서의 특징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와 특질을 갖는 하나의 기간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 정형화 되어갔음을 보여주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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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자료를 구분하는 기준 고전문화의 재생을 강조하는 르네상스라는 배경에서 중세라는 표현은 역사서술이나 시대구분보다는 문학 작품이나 원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음. b. 자료를 구분하는 기준 고전문화의 재생을 강조하는 르네상스라는 배경에서 중세라는 표현은 역사서술이나 시대구분보다는 문학 작품이나 원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음. 즉 고전문화, 당대의 문화,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중세의 문화를 구분하는 이러한 사용 덕분에 시대를 셋으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 것임. 중세라는 개념이 문학사나 원전 분류의 기준에서 일반 역사의 시대구분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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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Canisius(1610년 사망). Georg Horn(1620-1670). G. W
* Heinrich Canisius(1610년 사망) * Georg Horn( ) * G. W. Leibniz( ) * Christoph Cellarius( ): 문헌학자, 역사학자, 지질학자 * Heinrich Canisius(1610년 사망) 하인리히 카니지우스가 효시로서 그는 자신의 역사 서술에서 16세기까지를 중세로 분류했음. 이 결과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대-중세-새시대라는 역사분류의 새 프레임이 일반화되게 되었음. * Georg Horn( ) 이러한 도식을 전체 보편적 역사 구분에 사용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게오르그 호른임. 그는 1666년 출간한 자신의 책에서 300년까지를 고대로, 1500년까지를 중세로, 그리고 그 이후를 새로운 시대로 설명하고 있다. * G. W. Leibniz( ) 그 다음해에 라이프니츠는 그의 법률 책에서 로마-비잔틴 시대(Historia Romana), 유럽중세시대(Historia Rerum Germanicarum seu medii aevi) 그리고 현대(Historia Hodierna)로 나누었음. * Christoph Cellarius( ): 문헌학자, 역사학자, 지질학자 할레대학의 교수였던 크리스토프 켈라리우스는 1696년 할레에서 발간한 그의 세계사 교과서에서 시대를 '고대사'(Historia antiqua), '중세사'(Historia medii aevi a temporibus Constantini magni ad Constantinopolim a Turcis captam deducta: 콘스탄틴 대제로부터 터키의 콘스타티노플 함락까지의 중세사), 그리고 '현대사'(Historia nova, hoc est XVI. et XVII. saeculorum: 새로운 역사, 곧 16-17세기 역사)로 나누고 있음. 이렇게 해서 경멸적, 폄하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던 인문주의적 분위기의 중세라는 단어는 커다란 의미 변동 없이 일반 역사 개념으로, 시대구분에 대한 중요한 틀로 수용되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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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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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로마 카톨릭 b. 개신교 c. 인문주의자들 d. 평가 a. 로마 카톨릭
중세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함. 이들은 중세를 대략 로마의 함락으로부터 르네상스까지로 보고 있음. 이 기간 동안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했다고 간주하고 위대한 기독교 세계의 위 대한 시대로 평가함. 그 위대함은 당시의 신앙을 웅장하게 표현한 대성당의 건축양식과 회 화들, 음악과 문학 또한 신학적 저술들과 경건한 고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음. 결국 그들은 중세는 종교개혁으로 그 위대함이 퇴락한 비극적 시대가 아니라 사실은 승리 의 시대라고 주장함 b. 개신교 중세를 순수했던 고대 교회가 타락한 어두움의 시대라고 단언함. 이유는 중세가 단지 종교 적 통일성만 있었을 뿐 정치적, 경제적, 행정적, 법적 통일성이 없는 시대였기 때문임. 실제로 중세교회는 초대 교회의 성경적 전통과 사도적 유산을 포기하고 세속적으로 타락하 였음. 그러므로 존 낙스는 은총에서 멀어진 중세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 바 벨론의 창녀라고 묘사했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의 성직자들과 귀족들이외에 글을 읽지 못했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카톨릭 미사는 라틴어로 실시되었음. 이것은 다시 예배의 의미와 중요성이 약화되 었음을 의미하는 것임. c. 인문주의자들 그리스-로마적인 고대와 그 이후 고대의 재발견이 활발히 일어났던 문예부흥까지의 약 1000년간의 암흑기를 중세로 표현하였음. 이들은 사랑받던 철학과 법률정치의 그리이스-로마시대와 구분하여 중세는 야만적이고 저속한 라틴어가 사용된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평가 한 것임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이스와 로마의 지혜를 재발견하여 과거의 황금시대의 유산을 회복하 는데 관심을 가졌음 d. 평가 중세는 종교적 입장에서 볼 때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한 시대로 볼 수 있음. 성장과 타락이 반복되면서,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음 철학적 입장에서는 신학의 발전과 철학화을 들 수 있음. 큰 문제는 어거스틴 신학의 좌파 적 해석으로 인해, 결국 신인협동적 구원론으로 흘러갔다는 점임 정치적 입장에서 볼 때 교권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긍정적으로 평 가할 수 있음. 교황과 왕의 치열한 교권싸움으로 인해, 종교의 참된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시켜 줌 문화적으로 볼 때 중세만의 독특한 문화적 융성이 이루어졌음. 특히 이슬람권의 문화유입 으로 인해 새로운 중세문화가 생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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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세의 구분 켈라리우스: 콘스탄틴 황제(313)가 기독교를 공인한때, - 기독교의 자유시대 시작
유럽권학자: 476년 서로마제국이 오도바카르에게 멸망한 때 - 기독교의 정치적 변화 영미권학자: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때 - 새로운 종교적 변화(로마케톨릭 의 지배권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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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중세의 두가지 구분방식 1) 일반 역사학적 구분 Wolfgang Bienert 2) 기독교적 구분(종교적 구분)
* 벵트트 헤그룬트(Bengt Hegglund): 독일 역사학자 * 칼 호이씨(Karl Heussi): 독일 역사학자 * 칼 슈미트(K. D. Schmidt): 기독교 역사학자 1) 일반 역사학적 구분 * Wolfgang Bienert 다음과 같이 중세를 정의함 "중세가 지닌 독창적인 새로움이란 콘스탄틴 대제하의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나 또는 아 랍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후기 기독교 유산이 로마의 새 지배자로 등장한 게르만 종족과 만나서 독자적인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결과 기독교적 특징을 지닌 신성로마 제국(Sacrum Imperium)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 있다." 즉 중세를 기독교의 종교적 시각을 넘어선, 중세 자체가 갖는 특징을 근거로 이해하려 한다면 중세란 기독교란 종교를 몰랐던 게르만민족이 서유럽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와 종교적 영향들, 즉 교황이나 교회의 세속 지배, 나아가 기독교국가인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독특한 기독교 문화양식을 세워 간 기나긴 과정과 시대라고 이해해야 함.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중세는 사실상 서구유럽의 역사임. 중세란 서양의 역사발전 단계, 즉 서유럽이라는 공간적이고, 지정학적 조건을 전제로 함 2) 기독교적 구분(종교적 구분) * 벵트트 헤그룬트(Bengt Hegglund): 독일 역사학자 「신학사」(Geschichte der Theologie)에서 어거스틴( ) 이후부터 루터( )이전까지를 중세로 구분했음. 이것은 물론 신학사적인 구분임. 어거스틴 신학은 고대교회 신학의 총체라 할 수 있고, 중세의 신학은 고대교회의 유산을 기초로 제도적 교회가 만들어낸 도그마였음. 루터의 신학은 어거스틴보다는 바울적인 신학을 기초로 원형에 충실하려는 신학이었다고 볼 때, 중세와 더불어 어거스틴적인 신학이 극복되는 또 하나의 시대적이요 신학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것임. * 칼 호이씨(Karl Heussi): 독일 역사학자 중세라는 개념과 시대구분을 거부함. 그는 교회사의 전 시대를 두 개의 주요시대로 구분함. 첫째는 헬라적이고-로마적인 세계에서의 교회요, 둘째는 게르만적이고-로마적인 세계에서의 교회임. 그에 의하면 중세란 없음(Es gibt also kein Mittelalter). 다만 게르만적이고 로마적인 세계의 카톨릭 천년이라는 단편적인 것(Monographie)으로서 중세는 생각할 수 있음. * 칼 슈미트(K. D. Schmidt): 기독교 역사학자 게르만의 회심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고, 자신의「교회사 개요」2부에 중세교회사(Kirchengeschichte des Mittelalters)를 자리매김하고 있음. 그는 독창적인 성격을 지니고 전후가 분명히 구분되는 중세의 존재를 부인하는 호이씨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반박함. "중세의 성격에 대한 문제, 즉 그것이 정말로 역사속에서 자기고유의 기간이라고 평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가령, 호이씨(Heussi)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며, 그의 책 "Kompendium der Kirchengeschichte" 에서 실제적으로 다루 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옳지 않다. 최근 동.서 유럽의 역사를 비교 하였고, 그 결과 "서구는 중세를 가진 지역이다"라고 공식화하였다."(K.D. Schmidt,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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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틸리히(Paul Tillich) : 기독교 신학자 a. 이행기(600-1000) b. 중세초기(1000-1200)
d. 중세 후기( ) * 폴 틸리히(Paul Tillich) : 기독교 신학자 폴 틸리히는 "거룩한 단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제도 안에서 구체화된 초월적 실재가 문화를 형성하고 자연을 해석한 것"이 중세의 고유한 성격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시기를 넷으로 구분하고 있음. a. 이행기( ) 이행기는 옛것이 보존되는 보존의 시기요, 새것이 수용되는 수용의 시기이며, 동시에 타 문화가 그리스도교 문화속으로 유입되는 편입의 시대요, 옛것과 새것이 상충되어 부조화를 빗어낸 암흑의 시대임 b. 중세초기( ) 중세초기는 고대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시기로서 독자적인 문화가 이루어진 시기임. c. 중세 전성기( ) 전성기는 스콜라 신학과 대학의 발전, 봉건제도라는 사회질서의 형성으로 중세가 가장 꽃피운 시대임 d. 중세 후기( ) 말기는 문예부흥과 유명론의 대두,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여명을 맞이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음. 중세초기에 대한 시대구분에는 많은 이견이 있음. 영미권의 학자들은 초기를 5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대 로마의 유산이 무너지는 몰락의시대로, 중기는 8세기부터 13세기까지로 중세 문화가 꽃피는 재건의 시기로, 그리고 중세후기를 14-15세기로 석양의 시기라고 구분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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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대교회와의 관계 a. 연속성 1) 로마제국의 유산 2) 사도적 전통과 교회의 일치 3) 신학의 발전 a. 연속성
초대교회의 그리이스-로마적 문화 전통은 중세인들의 삶속에 그대로 전승됨. 그리이 스 문학과 철학서적들, 특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 어 동로마, 시칠리아, 스페인을 통해 서유럽에 전달되었음 12세기 대성당 성가대석에 모세와 이사야와 나란히 베르길리우스가 조각되었음. 베르길리우스 저작인 Art of Love을 Chretien de Troyes가 번역. Andreas Capellanus가 Art of Courtly Love를 저술. 당시의 방랑시인들인 트루벨르, 아벨라드, 엘로이즈가 그것을 인용함 키케로의 영향도 컸음. 그의 플라톤적이고 스토아적인 사상과 우아한 문체가 광범위하 게 칭송을 받았음 과학과 철학의 배경 역시 로마의 전통이 계승됨 이들은 위대한 진리는 신의 계시에 의해 실현되고 성경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았으 며, 또한 고대 그리스인이 창조한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사상을 공통적으로 수용 하였음. 마찬가지로 고대의 종교사상과 민간전승, 그리고 미신이 그대로 중세로 계승 되었음 2) 사도적 전통과 교회의 일치 중세교회는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통에 기초하여 세워졌음. 특히 베드로를 통한 교황제 의 기초를 놓으므로, 중세교회, 특히 서방교회는 튼튼한 교권의 단일화를 성취해 냈으 며, 중세교회의 1000년을 이끌어 갔음 3) 신학의 발전 라틴어의 전승으로 더욱 활성화됨. 적어도 중세초기만 해도 고대교회의 전승이 그대로 계승되었음. 대표적으로 보에티우스는 그리스 학문의 목록을 라틴어로 소개하기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완역하였음.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체 계의 운곽을 라틴어로 숙지하는데 성공하였음. 이를 기초로 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을 저술하였음 당시 수사학은 고대로마세계의 주요 학문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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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건제도(feudalismus)의 정착 5) 이슬람 태동과 기독교의 분열 6) 교회예배제도 7) 신학
b. 불연속성 1) 기독교와 게르만 2) 교황권의 신장 3) 교회의 국가통치 4) 봉건제도(feudalismus)의 정착 5) 이슬람 태동과 기독교의 분열 6) 교회예배제도 7) 신학 8) 성례, 성상숭배, 교황권 신장 b. 불연속성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등장으로 유럽의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함. 결국 유럽은 기독 교와 이슬람으로 재편되면서 성지순례를 둘러싸고 십자군 전쟁을 야기하였음 옛 그리이스-로마 문명은 게르만 민족의 등장과 함께 종식되었음. 중세교회는 초대교회와 달리 의회제도, 새로운 언어, 새로운 국가와 관습과 법률들, 건축 과 조각과 음악, 대성당, 기사문학, 스콜라 신학, 대학등의 독창적인 사상과 제도들을 양 산함 성직 중심의 교권 강화로 신앙의 귀족화 내지 종속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음. 또한 교회 의 제도 역시 의식화 혹은 제도화되어졌음 게르만족은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되었지만, 서유럽전역에 흡수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 으로 발전하여 서유럽의 정치와 종교를 지배해 갔음 중세는 로마제국의 토대위에 게르만 민족이 서유럽에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줌. 이 과정 에서 서유럽에 정착한 그들은 기독교와 접촉하여 개종함으로 새로운 중세를 열었음. 1) 기독교와 게르만 5-6세기경에 오면서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 의식이나 신학적 틀을 모방하고 답습하여, 8세기경에 이르면 샤를마뉴에 의해 카롤링가 르네상스를 이룩함. 그는 로마문 화, 기독교 및 게르만 문화를 융화시킴. 그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제도와 그가 창안 해 낸 순찰사 제도를 통해 중앙집권화를 꾀함. 학문에 대한 후원은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와 그의 손자인 대머리왕 샤를(Charles the Bald)에 의해서도 계속되었음. 10세기경에는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면서 유럽인의 기독 교가 형성됨. 또한 종교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여, 성직자수준을 높이는데 주력하였으며, 수도원, 대 성당, 학교들을 세우도록 명령하였음. 이것이 학문적으로는 스콜라 신학으로, 경건과 금욕적 삶은 수도원을 통해서, 교권과 제 도는 교황제의 이름아래, 평신도들의 신앙은 교권에 예속된 평신도 운동으로, 신비주의, 금욕주의 운동으로 서유럽 특유의 기독교 문화를 탄생시켰음 사도시대 이후 초대 교회는 부흥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직분자가 요구되었음. 이 직분들은 교회의 부흥과 함께 내적질서와 효과적인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필요하였음. 따라서 초기의 기독교회는 별다른 마찰없이 사도들의 감독아래 직분제가 잘 활용되었음. * 초대교회의 직분 2) 교황권의 신장 *중세의 변화 초대교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5개의 교구로 나뉘 어져 있었음. 이들은 로마의 박해시에 기독교를 수호하고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포교하는 데 큰 역할을 함 이 직분제는 로마의 박해시에 성도들을 위로,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음. 하지만 중세로 넘어오면서 이것은 점점 세속화하여 지위와 권위의 상징으로 변질됨. 로 마는 제1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제2도시가 됨. 이같은 양상은 곧바로 로마교황에게 우위 권을 부여하여 교황권의 발전을 가져옴. -동로마제국 중세와 초대교회의 차이점은 정치와 사회구조에서 실질적으로 발견됨. 중세는 교황권의 확립아래 교회의 정치적 지배와 안정이 확고한 토대위에 발전되었음 3) 교회의 국가통치 황제는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요 최고 재판관이며, 유일한 입법자이며 교회 신앙의 보호 자였음. 황제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였으므로 군주이자 통치자이며, 신이 그에게 맡긴 기 독교 제국의 살아있는 상징이었음. 그러므로 그는 지상의 인간세계를 벗어나 있는 것처 럼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정치와 종교에서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 됨. 문화와 언어에서 동로마는 성공적으로 그리이스화회되었고, 실생활에서 교회의 지배력이 점점 강화되었음. 동로마는 황제권과 교권 사이에 밀접한 결속이 유지되었음. 즉 정통 국가와 정통 교회 가 광범위한 결속을 유지하면서 단일한 국가교회조직체로 성장하였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두 권력이 서로 연합하여 황제에 대한 안팎의 반대자들이건 혹은 교회에 적대적인 이단들의 파괴적인 세력이건 간에 신이 의도하는 세계질서를 위대롭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대항하였음. 이러한 필요 때문에 동로마교회는 불가피 하게 강력한 황제권의 비호를 필요로 하였음. 그 결과 동로마의 전시대 동안에 교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가 정상적인 관계로 지속되었음 - 서로마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공포하면서 제국을 영적으로 통치 하는 주인이 되었음. 476년 제국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기독교는 더욱 확산되어 갔음. 교권은 국가 통치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결국 황제와 교황의 갈등과 투쟁으로까지 연결되었음. 교황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순종하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처단하였음. 그리고 성사제도를 통하여 개인의 생활과 가족생활을 통제하였음. 결국 서로마교회는 통 제할 수 없는 하나의 국가였음. 교회는 근대 국가와 같은 개인의 최우선적인 충성심을 요구하였음. 고대사회가 노예제 사회라면 중세는 봉건제 사회였음. 이 봉건제도는 카톨릭 교회의 위계 조직을 모델로 형성된 사회 체제의 로마화, 로마적 사회 체제의 게르만화였음. 이는 대체 로 신분상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특징으로 함. 4) 봉건제도(feudalismus)의 정착 봉건제도는 게르만인의 주종제도와 로마 말기의 콜로누스(소작인)제도 아래 발전하였음. 즉 신흥 게르만 국가에서 양자의 새로운 종합이 새로운 중세적 수구적 사회 질서로서의 봉건제도를 낳은 것임. 이것은 샤를마뉴 대제 때 기초를 놓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서유 럽 전체로 확산되었음 봉건제도의 정착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현실적 불평등을 가져옴. 봉건적 질서 아래 최하층 의 농민은 농노로서 운명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었음 하지만 년 사이에 중간계급이 성장하면서, 서유럽은 통치와 전투를 담당한 귀 족계급, 기도를 담당하는 성직자, 그리고 토지를 경작한 농민들로만 사회적 계급을 분류 할 수 없게 되었음. 바로 도시민들이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했기 때문임 5) 이슬람 태동과 기독교의 분열 395년 로마제국의 분열이후 서유럽과 동방의 비잔틴 세계는 정치, 사상, 문화적으로 서 로 분리된 채 발전해감. 그 사이 7.8 세기 경 이슬람이 발흥하여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중앙아시아에서 서구 스페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함. 그 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십 자가와 초생달이 극도로 대치하기에 이름. 미사제도의 전승으로 초대 교회와는 다른 예배가 실시되었음. 바로 7성례중심의 예배임. 6) 교회예배제도 7) 신학 특히 중세에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든 사회, 사상, 문화, 종교가 통일되었음. 그러나 중세는 이렇다 할 신학적 전통이 없이 교권주의, 교회의식의 다양화, 신비주의와 공로사상이 급속히 확대되었음 초대교회는 로마와 이교도의 박해 아래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조같은 정통 신학 을 확립하였음 정교분리 -> 정교통합 민족적 질서 -> 기독교적 보편 세계질서 초대 중세 초대교회에는 죄를 회개하려면 대중앞에서 고해가 요구되었음. 회개한 후에 공동체의 일 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음. 대중앞에서 하는 공식적이고 변론적인 참회는 교회의 축제일에 실시되었음 - 성례 8) 성례, 성상숭배, 교황권 신장 중세에는 사적인 고해가 득세하고 고해신부하고만 은밀하게 이루어짐. 12세기에는 외적 이고 공개적 속죄가 내적 회개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고 인식됨. 1215년 라테란 공의회 를 통해 모든 신자는 매년 1회 이상 의무적으로 고해를 해야 한다고 규정함 초대교회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모습이었음 - 성상숭배 결국 신앙은 거의 개인주의화되었음. 초대교회는 직업과 신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 의한 신앙공동체만이 존 재함 - 교황권강화 중세에는 그림과 조각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정서적 고통과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의 모습이 강조됨. 즉 개인구원에 대한 추구, 하나님과의 개인적 내밀한 관계의 추구의 모 습으로 변화됨 중세카톨릭의 경우 신과 사람 사이에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매개로서 성직자 중심의 카 톨릭교회가 들어감. 여기에는 초대교회에서 볼 수 없었던 전문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즉 성직자가 있고 그들만이 Sacrament를 행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통해 신의 은총을 사람 들에게 나누어 주고 영혼을 구원하는 매개자가 됨 또한 마을 단위의 소교구의 정비, 교회와 수도원에 대한 세속 영주의 영지 헌납의 유행, 성지 예루살렘의 순례, 스콜라 신학의 융성등이 활발히 전개되었음. 그러나 이것은 점점 성상 숭배 혹은 성인숭배로 이어져 공로사상과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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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수도원 운동과 성 베네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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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의, 근원 및 중요성 필립샤프 “수도원 제도는 종교적인 성실, 열정 및 야망에서 생긴 것으로서 이 세상일은 허망한 것 이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육적인 생활과 유혹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조용하게 자유로 명 상함으로써 심령을 보다 고상하게 하려는 것이다.” 1. 의의, 근원 및 중요성 필립샤프 “수도원 제도는 종교적인 성실, 열정 및 야망에서 생긴 것으로서 이 세상일은 허망한 것 이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육적인 생활과 유혹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조용하게 자유로 명 상함으로써 심령을 보다 고상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금욕적 혹은 수도원적 생활은 대개 육적이며 세속적이고 또한 일시적인 것을 자제하고, 영적이며 타계적이며 영원한 것을 얻어 보려는 행동으로 나타남 그리고 이와 같은 수도원 운동의 출발은 금욕주의라고 보아야 함. 초기 기독교 이전이나 당시 금욕주의의 특징을 보면 주로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인 사상에 근거를 두었음. 이것의 목표는 도덕적 완성을 달성하기위해 정신과 육체에 큰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함. 그리고 이러한 금욕주의는 잘못된 금욕주의로 흐르게 됨 이것에 대해 필립샤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함 “그릇된 금욕주의는 육신에 관한 일은 다 무시하고 사람은 오직 신에 속해야 된다는 범신 론적인 사상에 빠지지만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육신을 영화하여 그리스도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다” 즉 잘못된 금욕주의는 이분법적 사고, 즉 영과 육의 분리를 통해 이 세상속에서의 삶과 육신적인 삶에 대한 부정의 방향으로 흐르게 됨. 하지만 건강한 금욕주의는 육과 영의 일체화를 통해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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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원인 a.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1)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아주 분리하려고 하는 경향에 대한 반동
2) 교회의 도덕적 표준이 저하된 것. 이 표준은 260년부터 303년 사이의 평화기간,특히 콘스탄틴이 개종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들자 그 기준이 약화됨 3) 교회 안의 도덕을 정화시키기 위해 4) 교회의 규율이 문란해짐 a.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1)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아주 분리하려고 하는 경향에 대한 반동 2) 교회의 도덕적 표준이 저하된 것. 이 표준은 260년부터 303년 사이의 평화기간,특히 콘스탄틴이 개종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들자 그 기준이 약화됨 3) 교회 안의 도덕을 정화시키기 위해 4) 교회의 규율이 문란해짐 5) 순교하는 일이 없어지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은 금욕생활 로 전환된 것 6) 신비적이며 명상적 덕이 실제 생활보다 더 귀하고 요긴하다는 편견 7) 오리겐이 찬양한 희랍 철학 곧 극기적이며 금욕적 육신의 생활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 고 강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 8) 몬타누스파와 같은 종파의 주장처럼, 육신과 정신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사상 9) 3세기 말 이후 교회에 있어서 굳어버린 형식적이고 엄격한 공중 예배보다 수도원 생 활을 함으로, 더 자유롭게 하나님께 접촉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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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교하는 일이 없어지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은 금욕생활 로 전환된 것
6) 신비적이며 명상적 덕이 실제 생활보다 더 귀하고 요긴하다는 편견 7) 오리겐이 찬양한 희랍 철학 곧 극기적이며 금욕적 육신의 생활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 고 강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 8) 몬타누스파와 같은 종파의 주장처럼, 육신과 정신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사상 9) 3세기 말 이후 교회에 있어서 굳어버린 형식적이고 엄격한 공중 예배보다 수도원 생 활을 함으로, 더 자유롭게 하나님께 접촉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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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도원제도 발달의 4단계 a. 1-2세기 b. 3-4세기 c. 4-5세기 d. 6세기 이후 2. 수도원제도 발달의 4단계
첫째 단계는 금욕생활로서 아직은 조직체를 따로 가졌거나 교회에서 분리되지 않은 때임. 엄격한 금욕생활은 하지만 아직도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임 윌리스컨 워커는 다음과 같이 말함 “제3세기 말 훨씬 전부터 동정의 청년 남녀는 교회의 빛나는 존재로서 이들은 가정에 그 대로 있으면서 금욕생활을 하고 있었다” b. 3-4세기 이 단계는 은둔생활로서 이것은 Paul of Thebes 와 애굽에 살던 성 안토니에 의하여 들어온 것임. 이들은 인간사회에서 은토ㅚ하여 무덤, 모래바닥, 굴, 가시덤불 따위에 살면서 가끔 바깥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였음 c. 4-5세기 이 단계는 공주수도(共住修道)생활임.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수도생활임 이 형태는 먼저 애굽에서 시작되어 Pachomius에 의해 동방에 소개됨. 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에 의해 서방으로 들어가게 됨. 이것은 금욕생활의 한 형식으로 일반 사회적인 형식으로 조직되었음. 이것은 동성의 은둔 생활자들이 여럿이 모여 살면서 서로 금욕적인 거룩한 생활을 권장하면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었음 d. 6세기 이후 이것은 수도원의 일정한 규율 밑에서 하는 금욕생활임. 이것은 훨씬 조직적이며 사회화된 은둔생활 양식임. 이 규율이 수도원 제도는 기독교의 발 전과 성장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로마 케톨릭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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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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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 Anthony 1) 헌신과 순종 2) 고행생활 a. St. Anthony
그는 기원 250년즈음 이집트에서 콥트 인 그리스도가정에서 태어남 은둔생활의 장점을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일반 사회에서 은퇴해 은둔생활을 하게 한 사람임. 그는 천성이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음 그는 어릴 때에도 친구들과는 따로 지냈으며, 모든 고등학문을 경멸하였음. 그는 자기의 동족인 콥틱 사람의 서적만 읽고, 희랍의 문학이나 과학에 관한 책은 읽지 않음. 예배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으며, 성경낭독은 너무 집중해서 들었으므로, 거의 외울지경이었음. 1) 헌신과 순종 말씀에 대한 순종과 헌신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았음 그는 마19:21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듣고 300에이커나 되는 기름진 토지와 자기 누이가 살기에 넉넉할 만큼 남겨 놓고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음 쉬지 말고 기도하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을 듣고는 계속하여 기도하는 규칙과 자신이 노동하므로써 자활하는 방침을 세우고 생활하였음 그의 삶은 신실함과 온순함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었음.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극기생활을 하려고 하였음. 그러나 보다 깊은 은둔생활을 위해 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은둔생활을 하였음. 한동안 무덤속에서 살다가 그 후 20년동안 나일강 동쪽에 잇는 델 엘 메문산 위에 있는 옛날 성터에서 살았음. 그는 여기세 독거생활을 하고, 일년에 2차례만 음식물을 얻기 위해 산을 내려와 마을에 들르는 정도였음. 2) 고행생활 그의 고행생활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음 그는 하루에 한번 끼니만 먹고, 그것도 가끔은 금식으로 넘김. 주로 빵과 소금을 먹었으며 가끔은 야자를 먹었음. 마시는 것은 대부분 물이었고, 잠은 땅바닥에서 자고, 잘해야 짚을 깔고 자는 정도였음. 그는 가끔 온밤을 지새며 기도하였음. 그의 옷장에는 머리털로 짠 내의, 양의 가죽 하나, 따 하나 밖에는 없었음. 그의 은둔생활에 있어서 거의 일과처럼 흔히 있었던 것은 마귀 또는 그의 반대자들과의 싸움이었음. 그러나 대부분 의와 사랑으로 승리함 그는 356년 105세를 일기고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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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Symeon과 주상성자 필립 샤프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
“새롭고 상당히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주상성자의 원조인 시므온에 의하여 깨 뜨려지고 말았다. 이 주상성자란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비고 오든 햇볕이 내 리쪼이든 서리가 오든, 날이 덥든, 그것을 가리지 않고 기도와 참회로 여러해 동안을 아 무것도 가리지도 않은 높은 기둥 위에 앉아서 기도와 참회로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삼 는 사람은 말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그처럼 전례가 없는 극기생활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바라보기에도 아찔할 만한 높은 기둥위에서 고행생활을 함으로써 만족하였던 것이다” 5세기가 되면서 수도원 제도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됨 필립 샤프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 “새롭고 상당히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주상성자의 원조인 시므온에 의하여 깨 뜨려지고 말았다. 이 주상성자란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비고 오든 햇볕이 내 리쪼이든 서리가 오든, 날이 덥든, 그것을 가리지 않고 기도와 참회로 여러해 동안을 아 무것도 가리지도 않은 높은 기둥 위에 앉아서 기도와 참회로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삼 는 사람은 말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그처럼 전례가 없는 극기생활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바라보기에도 아찔할 만한 높은 기둥위에서 고행생활을 함으로써 만족하였던 것이다” 주상성자(Stylite) 시므온은 388년 북부 수리아에서 출생함 그는 15,6세쯤 되어 수도원에 들어가 아주 엄격한 규율 밑에서 고행생활을 함. 일주일에 한번밖에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사순절마다 해마다 40일씩 금식하였음. 그리고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음 그 후 얼마동안 산에 올라가 은둔생활을 하였음. 그런데 그의 훈계의 말과 기도를 받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할 시간을 빼앗기게 되므로 새로운 수양방법을 고안하였음. 그것이 바로 주상생활임. 그는 423년부터 죽을때까지 36년 동안을 높은 기둥 꼭대기에 마련해 놓은 좁은 마루바닥에서 살았음. 그가 처음에 세워 놓은 기둥의 높이는 9자였음. 그런데 차츰 높은 기둥으로 바꾸어 그가 죽을때에는 지면에서 50자가 넘은 기둥에서 살았다고 함. 이기둥 위에 깔은 마루의 넓이는 3자밖에 안되고 둘레에는 난간이 있어서 그 난간에 몸을 기대고 겨우 잠을 자고 쉬기도 하였음. 필립샤프는 다음과 같이 말함 “이 기둥위에서 성 시므온은 여러 해 동안을 내리쪼이는 햇볕, 쏟아지는 비, 서리, 사나운 폭풍을 가리지 않고 날마나 죽음의 생활, 곧 순교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생활은 그 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를 힘입어 얻게 되는 영혼의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얻는 생활이 아 니라 죄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생활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함으로써 초인간적인 거룩한 생활을 하여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고, 지상에 있어서의 영원한 명예를 얻으려 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69세되던 459년에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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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Pachomius 4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수도원제도가 점점 더 본격적인 수도원 생활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여기에 있어서 처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파코미우스임 수도단 구성 4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수도원제도가 점점 더 본격적인 수도원 생활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여기에 있어서 처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파코미우스임 그는 남부 이집트 나일강 언덕에 있는 타벤나 사람임. 그는 292년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20세에 기독교로 전향함 그는 개종한지 얼마 후부터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절대로 배불리 식사하지 않았으며, 또 여러해 동안 돌위에 앉아서 잠을 잠 하지만 이러한 불규칙한 은둔생활이 그에게 별 만족을 주지 못함. 나아가 고독한 은둔생활보다 수도원 생활이 훨씬 유익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됨 1) 수도생활로의 전환 결국 은둔 생활 12년째 수도사(修道士)단을 구성함. 이들은 과거에 고독한 은둔생활을 하던 사람들로, 그에 의해 한단체를 이루어 한 수도원장의 지휘를 받아가며, 같은 의복들을 입고, 서로 접근해 있는 방에서 살면서 일정한 노동을 하고 또한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공동생활을 함. 한방에는 3사람씩 살았음 그는 수도원장으로 엄격한 규율밑에서 모든 수도사들의 생활을 감독함. 새로 수도원에 들어오려면 3개월 동안의 시험 기간을 거친 후 허락됨. 아직은 엄격한 맹세를 하는 법은 생기지 않았음. 이들은 많은 시간 노동을 하면서 번 돈이나 곡식으로 병자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사용함 346년 그가 죽던 떼에 이집트에 파코미우스의 남자를 위한 수도원 9개, 여자를 위한 수도원 2개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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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향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제도는 동방쪽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감. 그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들로 카파도기아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네스토리우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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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서방의 수도원제도와 제롬 d. 서방의 수도원제도와 제롬 서방에 수도원 제도를 수입한 사람은 아타나시우스임.
그는 성 안토니의 식객이자 제자였으며, 안토니의 전기를 기록하였음 그에 이어 이 제도를 서방에서 발전시킨 사람들로 암브로스, 어거스틴, 제롬등이 있음. 특히 제롬은 매우 중요한 인물임 그는 340년 달마티아 스트리돈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남.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카톨릭교회의 젖을 먹고 자라났으며, 한번도 이단에 빠진 일이 없었으니까 아직 교직자보다 더 정통적이다”라고 고백하였음 그는 지방학교에서 유년교육을 받은 뒤 12세 때 로마에서 8년동안 공부 그는 라틴어와 희랍어에 다 능통하여, 키케로, 비길, 플라톤 그 밖의 어려 이교도 작가들의 저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작품도 많이 탐독함 19세때 교황에게 세례를 받은 후, 까울로 들어감. 그곳에서 2,3년동안 모든 문화와 인간 사회를 움속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듯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은둔자들을 본 후, 그들의 생활을 추종하기로 결심함 그는 로마 근처의 아퀼레아라는 읍에서 반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함. 이때 고전들을 읽으며 진리탐구를 계속함. 그러다 중병에 걸려 성경에 눈을 돌리라는 계시를 받고 그때부터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함 그는 은둔생활속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함. 그 이유에 대해 “사막에 있는 동굴이 제롬에게 향기를 피워주지 못하였다. 그는 동료인 은둔자들이 말다툼하는 데 싫증나서 동굴에서 떠나기로 결심하고, 377년에 책 보따리를 지고서 하늘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안디옥으로 갔다” 고 전함 그는 안디옥을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감. 그곳에서 얼마 후 교황의 서기로 부름을 받아 382년 교황청으로 들어감. 그는 교황의 요청으로 베들레헴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제롬역을 완성함 베들레헴에서 그는 386년부터 420년까지 36년간 살았음. 그는 이때 명상과 연구, 저술을 하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훈련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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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t. Benedict of Nur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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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 가지 서약 - 각 수도사는 다음의 세 가지 맹세를 한다. a) 수도원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킨다.
수도원생활방침 4부분 1. 조직 - 수도원에는 한 원장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수도원을 처리하며 그 수 도원 구의 한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2. 세 가지 서약 - 각 수도사는 다음의 세 가지 맹세를 한다. a) 수도원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킨다. b) 자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며(재산의 공유)순결한 생활(독신생활도 포함됨)을 한다. c) 절대적으로 원장의 명령에 복종한다. 480년 Umbria의 누르시아에서 그는 로마 귀족의 아들로 태어남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음. 그가 살던 당시 유럽의 정치, 사회, 도덕 및 종교의 상태는 최 악이었음. 그는 15세때 금욕적 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함. 그래서 Subiaco에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동굴로 들어감 그의 전기를 쓴 대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함 “그는 공부를 중단하고 또한 아버지의 집과 재산을 다 저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자기의 거룩한 목적을 달성할 만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는 이와 같이 함으로써 학문을 닦는다는 것이 오히려 무식을 초래한다는 것도 깨달았으며, 배우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그는 3년동안 동굴에서 생활하였으며, 이웃의 수도사가 약간의 음식을 제공하였음. 그러나 그는 금욕적 생활을 통해 큰 실망을 하게 됨. 왜냐하면 금욕을 하면 할수록, 더 강한 유혹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임 그에게 일어난 유혹은 너무 무거워서 그는 좀더 강한 씨름을 하기 위해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벗은 다음 알몸둥이가 되어 가시와 찔레밭으로 뛰어 들어가 불순한 육체적 정욕이 다 사라질때까지 자기의 몸을 찢기도 하였음 결국 그는 이 생활을 접고, 수도원 생활로 방향을 바꿈. 그는 12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각 수도원에 12수도사와 한 사람의 감독자를 배치해 놓고, 자기는 그 모든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을 돌봄. 그는 수비아코에서 수도원 생활을 하다가, 여러 일로인해 그곳을 떠나 로마와 내플스의 중간쯤 되는 네아폴리탄 섬에 한 경치 좋은 산을 발견하고, 그곳에 539년 Monte Cassino 수도원을 건설함 이 수도원을 건설한 후, 베네딕트는 이때까지의 단순한 수도생활을 끝내고 최초의 위대한 수도단의 지도자가 되었음 필립샤프는 베네딕트 수도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 “베네딕트 수도단이라고 불리워진 성 베네딕트가 세운 수도단은 수도원 역사에 있어서 새 로운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이 수도단의 규율은 얼마 안되어 당시까지 채용되고 있던 모 든 규율 대신에 채용되었으며, 유명한 종파의 수도원들은 대개 이것을 채택하였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을 수도원 생활의 기초로 삼게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 규율은 7 3장으로 되었는데, 서론 다음에 도덕, 사회, 예배, 징벌등에 관한 규율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빈 구석이 없고 엄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온정미가 있고 겸손 하면서도 굴종함이 없는 아주 치밀하고 통일된 기관으로서의 수도원 생활의 전반을 규정 지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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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천 - 수도원 생활은 정신생활과 육체생활을 지혜롭게 일치되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3. 실천 - 수도원 생활은 정신생활과 육체생활을 지혜롭게 일치되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곧 예배, 명상, 진리탐구 등을 힘쓰는 동시에 육체적인 노동과 교육에 힘 써야 한다. 4. 간소한 생활 - 음식과 의복을 간소하게 하며,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 옷도 자기가 입 을 것 외에는 갖지 않는다. 외계와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 베네딕트 수도원 생활에 대한 방침은 다음의 네부분으로 요약됨 1. 조직 - 수도원에는 한 원장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수도원을 처리하며 그 수 도원 구의 한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2. 세 가지 서약 - 각 수도사는 다음의 세 가지 맹세를 한다. a) 수도원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킨다. b) 자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며(재산의 공유)순결한 생활(독신생활도 포함됨)을 한다. c) 절대적으로 원장의 명령에 복종한다. 3. 실천 - 수도원 생활은 정신생활과 육체생활을 지혜롭게 일치되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곧 예배, 명상, 진리탐구 등을 힘쓰는 동시에 육체적인 노동과 교육에 힘 써야 한다. 4. 간소한 생활 - 음식과 의복을 간소하게 하며,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 옷도 자기가 입 을 것 외에는 갖지 않는다. 외계와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 이상은 수도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들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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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수도원생활의 특징 1) 복종 2) 겸손 3) 이웃사랑 b. 수도원생활의 특징 1) 복종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을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였음. 복종은 청빈, 노동과 함께 가장 중요한 원리였기 때문임 수도원 입회는 쉽지 않았음 수도원에 가서 문을 두드림. 수도사가 되려고 왔다고 하면 안됐지만 우리는 수도사 될 사 람을 원치 않는다고 하고는 문을 닫아버림. 그리고 4,5일정도 문을 열어주지 않음. 이때 낙심하고 떠나면 그것으로 끝이 남.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문을 두드리고 애원하면 일차 관문을 통과함. 이것은 끈질긴 성품을 시험하는 것임 받아들여지면 또 4,5일간 손님대접을 받은 뒤 수련이 시작됨. 최소한 일년이상 고참 수도사 밑에 들어가 모진 수모를 받아가며 신참으로 훈련을 받아야 함. 이과정을 통해 그의 성실성, 열정, 인내심, 그리고 재능등을 평가받게 됨. 나아가 험난한 수도사의 삶을 체험하는 기간이기도 함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수도사로 남기를 원할 경우 베네딕트 수도원 규칙을 읽어줌. 이것은 4개월 마다 한 차례식 진행됨. 이과정을 모두 통과할 경우 그 후로는 수도원을 떠날 수 없음. 2) 겸손 수도원의 새동료를 맞는 예식은 매우 엄격하였음. 세가지의 서약을 함 : 절제, 복종, 변화된 삶 이 서약은 수도사 자신이 써서 수도원장 앞에서 성자들의 유물과 뼈가 안치된 단위에 놓음. 그리고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시119:116)하고 간절히 말할 때 모인 회중은 그 말을 세 번 반복함. 이때 만약 그에게 재산이 있을 경우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함. 이것은 그 시간부터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그의 몸과 마음까지도 하나님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음. 그리고 그 상징으로 자신의 옷을 벗고 수도원에서 주는 누더기를 걸침. 수도원에서 개인소유는 전혀 없었음. 책한권, 펜한자루, 종이 한 장까지도 허용되지 않음. 음식은 단 두가지였으며, 고기도 네발달린 짐승의 고기는 제외되었음. 독주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으며, 포도주도 가능하면 안마시는 것이 좋다고 지도함.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적은 술취함과 게으름이었기 때문임 하지만 피곤한 여름 일과후에는 조금씩 포도주가 허용됨 먹는 것과 소유외에 또 다른 요구는 침묵과 노동이었음.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아야 했음. 특별히 밤에는 무언의 훈련이 요구됨. 저녁식사 후엔느 교부들의 글을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는 않아서 들었음. 이것은 침묵훈련과 함게 주어지는 교육이었음. 읽기가 끝나면 거기에 화답하는 교독문을 함께 낭독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말아야 했음. 수도사들은 침묵속에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했음. 그들의 얼굴은 가리워야 했고 눈은 땅에 고정되어야 했음. 또 노동은 게으름을 가장 미워하는 수도사들에게는 필수적이었음. 더욱이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하였음. 3) 이웃사랑 이러한 엄격한 규칙에도 예외는 있었음.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되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것이었음 규칙의 예외는 손님을 맞이할 때와 병자가 생겼을 때임. 물론 병자란 수도사뿐 아니라 전염병이 돌때 주위 마을의 환자들도 포함됨. 만약 수도사가 병이 들면 모든 규칙은 잠시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게 됨. 그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도 주어지며, 고기도 먹을 수 있었음. 손님이 올 경우에도 예외 조항이 적용되었음 도착순간부터 떠날때까지 손님은 극진히 대우를 받았음. “손님들은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맞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가 영접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손님들을 최고의 예우로 하되 믿음의 종 들이나 순례자들에게 하듯 하라” 피곤한 방문객을 대할 때 그에게 고통이 되지 않도록 손씻을 물을 주고 발은 수도사들이 씻어 주었음. 수도사들이 금식중이라고 해도 손님들에게는 최상의 음식이 제공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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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베네딕트 수도원 규칙 대 그레고리는 이 수도원 규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음
“하나님의 사람 베네딕트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그분 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려고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직접 생활하셨던 것과는 다 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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