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 조현우 독도와 동해의 진실 왜 사람들은 독도에 열광하는가?
목차 독도의 가치 독도의 진실 동해의 가치 동해의 진실 독도 거짓 표기 자료 동해 거짓 표기 자료 결론 저작권 및 출처 명시
독도의 가치 연어, 송어, 대구를 비롯해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 등의 물고기 6억톤 가량의 가스하이드레이트 매장, 한국에서 30년간 이용가능, 약 164조원의 가치 군사 및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가치,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의 요인 중 하나가 독도의 무단 점령이었다.
독도의 진실 1905년 단행된 일본의 독도의 강제편입. 1910년에 이뤄진 한일병합보다 5년 전 이루어진 일이기에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일 수 있다. 따라서 독도 편입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일본의 논리는 무너질 것입니다.
독도의 진실 1951년 발표된 러스크 서한(독도는 일본땅)은 독도가 시마네현 관할하에 들어간 1905년 이전에 독도가 한국의 일부분으로 취급됐다는 사실을 한국이 증명하도록 하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한국이 이런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독도가 한국에 포함된다는 점을 법적으로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독도의 진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1900년에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이다. 이 칙령에 나온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라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그렇다면 1905년 이전의 공식 문서가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독도의 진실 이 칙령에 대하여 일본 외무성은 이렇게 공격했다. 1. 한국 측이 다케시마(독도)의 옛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우산도’등의 명칭은 왜 칙령에 사용하지 않았는가? 2. 석도(石島)가 오늘날의 다케시마라고 한다면 왜 칙령에서 독도(獨島)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3. 독도(獨島)의 호칭은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가?
독도의 진실 1번,2번 질문에 대한 답. 1900년 우용정 등의 한국관리와 일본 부영사 등 일본 관리들과 객관성 확보를 위해 영국 출신 부산해관 세무사 라포트 등이 참가한 한일 합동 조사단이 부산을 출발해 울릉도에 5월 31일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우산도를 탐사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독도의 진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산도 대신 석도(石島)라고 보고하게 되었고 중앙관리들도 우산도 대신 석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칙령 제 41호에 우산도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여기서 대신 사용했다는 석도라는 명칭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는 점이다.
독도의 진실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를 시찰하고 조사한 보고서의 직업 분포도에 따르면 전체 140명 중 배를 만들고 미역을 따는 사람들이 전체의 92.2%인 129명이나 되었다. 뱃사람들은 배운 사람이 아니다. 고로 그들은 편의상 울릉도에 지명을 붙였다. 행정 기구의 관리들이 한자로 작명하기는 했지만 태반은 주민들이 붙인 우리말 이름이었다.
독도의 진실 한 연구자의 조사에 따르면 울릉도의 지명 199개 중 한자 지명은 85개 뿐이고, 지겟골 등의 순우리말 지명은 114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날 멀리 바라보이는 독도를 정착민들이 돌섬 또는 독섬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독도의 진실 이 때 독섬은 돌을 독으로 발음하는 전라도식 방언에서 나온 것이다. 이규원의 기록에 따르면 주민 140명 중 전라도 출신이 115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돌섬보다 독섬이 더 널리 통용되었다. 또한 밤섬은 율도(栗島), 꽃섬은 화도(花島), 닭섬은 계도(鷄島)라 하듯이 돌섬의 뜻을 옮겨 석도(石島)라 표기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독도의 진실 전라남도 해남 밑에 5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소안군도가 있는데 그곳에 ‘석도’라는 섬이 있다. 그런데 1899년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펴낸 조선수로지 제 2판의 ‘소안항’조에 보면 석도 옆에 가타카나로 ‘독쿠소무’라는 현지 발음을 병기한 것이 보인다. ‘독쿠소무’는 독섬의 일본식 표기다. 여기서 수로지를 펴낸 1899년이라는 연도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대한제국의 칙령 제 41호가 반포되기 1년 전이다. 당시 ‘독섬’의 한자표기가 ‘석도’였음을 일본의 해군 자료가 응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독도의 진실 따라서 한일 합동으로 탐색해본 결과 우산도의 실체를 찾지 못한 우용정 시찰단이 울릉도 주민들이 부르던 독섬(돌섬)을 무엇으로 표기했겠는가? 당연히 석도이다. 그렇게 석도로 표기한 보고서를 중앙정부에 올렸고 이것이 반영되어 울도군의 관할 지역에 석도가 기재된 칙령 제 41호가 반포된 것이다.
독도의 진실 2번, 3번 문제의 답 이제 남은 것은 석도가 독도임을 입증하는 것 만이 남아있다. 독도(獨島)에서 독(獨)은 홀로 독이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 가사 중에는 외로운 섬하나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영국 BBC뉴스에서도 독도를 외로운 섬이라고 소개한 일이 있다. 허나 독도는 총 91개의 크고 작은 바위와 암초 또는 부속섬을 가지고 있다. 결코 외로운 섬하나가 아닌 것이다.
독도의 진실 문헌상 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4년이다. 그해 서해에서는 일본 해군이 기선을 잡고 있었으나 동해에서는 러시아 해군이 기선을 잡고 있었다. 이에 일본 해군은 전함 니이타카호를 울릉도에 보내 독도에 망루를 설치할 수 있는 지 알아보도록 했다. 이에 니이타카호는 울릉도에 가서 독도에 실제 가본 민간인들을 만나 여러가지 정보를 수집했다.
독도의 진실 니이타카호 행동일지 9월 25일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쓰시마(울릉도)에서 리앙코르도암(岩)을 실제 가본 사람들로부터 들은 정보. ‘리앙코르도암’.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국 어부들은 줄여서 ‘량코도’라고 호칭했다.” 여기서 일본 어부들은 “호칭했다”고 했는데 한인은 “쓰고”라고 한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왜 일본 어부들은 부른다고 했는데 한인은 쓴다고 했을까?
독도의 진실 이 정황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동영상으로 만들어보면 이렇게 된다. 우선 정보 수집에 나선 일본 군인이 독도 쪽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섬을 아느냐?”고 한인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 한인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한인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옆에 통역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독도의 진실 아무튼 그 한인이 “독섬 말이냐?”하고 되물었을 것이다. “도쿠소무? 그게 뭐냐?” “저 섬 이름이다.” “어떻게 쓰는가?” 그러자 한인은 생각했다. 상대는 한글을 모른다. 천상 한자로 써줘야 할 것 같은데 독섬을 한자로 옮기자니 딱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독’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홀로 獨 자를 손가락으로 쓰고 나서 ‘섬’자를 쓰려고 하니 이 글자는 쉬운 한자가 없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을 때 일본 군인이 다그친다. “도쿠(獨)는 됐고, ‘소무’는 무슨 뜻인가?”이에 한인이 섬 島 자를 써보였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앞의 독(獨)자와 합쳐 이렇게 중얼거렸다. “도쿠도(獨島)
독도의 진실 나이타카호의 행동 일지에 보면 그날은 “9월 25일”이었고 일지 담당자는 그날 오후 5시 이후 일지에 “리앙코르도암.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국 어부들은 줄여서 량코도라고 호칭했다”고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해서 ‘독도’의 명칭이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던 것이다.
독도의 진실 일본 해군 정보원이 독도를 행동 일지에 처음 문자화시켰고 , 일본 관리가 독도라는 명칭을 먼저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1906년 이전에 독도라는 호칭을 사용한 흔적은 없다. 문헌적 자료는 전무하다. 당시 살았던 주민들의 증언도 그렇고, 1947년 학자들의 현지 답사나 그 후의 현지 답사를 통해서도 그 섬은 ‘독도’가 아니라 ‘독섬(돌섬)’으로 불렸던 사실이 중첩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독도’라는 명칭은 사실상 일본이 만든 것이다.
독도의 진실 한일 병합 이후부터 독도라는 명칭마저도 세인들에게 까맣게 잊혀졌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유력지의 하나였던 동아일보에 창간호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독도 기사가 실린 것은 딱 한 번 (1937년 7월 13일) ↓ 이었는데 그나마도 독도가 아닌 죽도라 는 일본식 이름이었 다.
독도의 진실 해방 후 독도라는 이름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1947년 6월 20일자 대구시보였다. 이 기사가 실린 지 두 달 뒤인 8월 16일, 현지를 답사한 민속학자 송석하, 국어학자 방종현은 현지에서의 호칭이 ‘독섬(돌섬)’임을 증언했지만, 안타깝게도 해방 후 부활하여 통용되기 시작한 이름은 ‘독도’였다.
독도의 진실 그렇게 된 이유는 일본 관리의 말을 듣고 독도라고만 적은 심흥택의 보고서를 근거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이 독도라는 이름만 기사에 실었고, 이것이 해방 후 대구시보를 위시한 여러 신문이 독도라는 이름을 답습하는 근거 자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자화의 힘이다. 그 후 1948년 미군 폭격과 함께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독도는 원래부터 우리의 명칭이었던 것처럼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독도의 진실 문제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한제국이 문자화시켰던 ‘석도’가 증발해버렸다는 점이다. 칙령 제 41호의 석도가 살아 있어야 독섬이 우리 땅임을 쉽게 입증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동안 우리는 석도가 독도라면 왜 칙령에 독도를 사용하지 않았는가라는 일본 외무성의 질문에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독도의 진실 왜? 바로 독섬을 독도로 처음 표기한 것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섬을 석도로 표기했는데, 저들은 독섬을 독도로 표기했던 것이다. 따라서 칙령 제 41조의 석도는 독도이다.
독도의 진실 이것이 입증된 이상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은 불법적이었음이 밝혀진 것이고, 그에 따라 일본의 편입 논리에 기초했던 ‘러스크 서한’이나 이를 답습한 ‘밴 플리트 보고서’의 논리가 무너지고, 그 대신 “독도가 한때 조선왕국의 일부였다”는 스티븐스 서한이나 김채형 교수가 발견한 ‘1954년 8월 26일자 미 국무부 내부 보고서의 논리가 부활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더 이상 일본을 편들 수가 없고,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려고 해마다 문제를 제기해온 일본은 그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너희가 문자화시켜 놓고 왜 우리더러 그걸 입증하라는 것이냐? 독도의 진실 이제 우리는 “독도의 호칭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일본 외무성의 질문 따위에는 이렇게 반문하면 될 것이다. 너희가 문자화시켜 놓고 왜 우리더러 그걸 입증하라는 것이냐?
동해의 가치 많은 식용 가능한 어업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원적 가치가 풍부하다. (울산 앞바다의 천연가스, 독도의 가스하이드레이트 등) 해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국가적 전략적 요충지이다.
동해의 진실 만일 독도가 일본땅이라면 동해는 일본해일 것이다. 허나 독도는 명백한 한국 땅이다. 그 말인 즉슨, 동해는 일본해가 아닌 동해이다.
독도 거짓 표기 자료 울릉도는 한국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나 독도는 일본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동해 거짓 표기 자료 동해가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동해 거짓 표기 자료 동해가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동해 거짓 표기 자료 동해가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독도는 올바르게 표기 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동해 거짓 표기 자료 동해가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동해 거짓 표기 자료 동해가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동해 거짓 표기 자료 한국 문화란에 ‘황해와 일본해(한국인들은 동해라 고도 부른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책에서 발췌 → 한국 문화란에 ‘황해와 일본해(한국인들은 동해라 고도 부른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결론 독도와 동해에서 벌여지는 분쟁은 겉모습은 영토분쟁과 역사분쟁이나 내면에는 자원분쟁이 내장되어 있다. 역사적인 사실로 근거하였을 때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역사는 힘의 논리가 바탕되기에 우리가 더 정확하고 올바른 역사관으로 대항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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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및 출처 명시 출처 명시 독도의 가치 : http://www.dokdo.go.kr/Index.do?command=search 독도의 진실 : 책 독도의 진실 (강준식 저) ISBN : 978-89-7381-275-2 독도, 동해 거짓표기자료 : McGrawHill ‘JAPAN and the PACIFIC RIM’ ISBN : 978-0-07-3379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