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의 정치과정
1. 개국에서 합병까지의 한일관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일본은 군사력에 의존하여 발전 도모 → 조선을 불법적으로 식민 지화하는 요인 1875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 강요
운요호 사건 무력 위협정책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연해에 파견, 8월 21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 을 정탐하면서 강화도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 → 양측의 포격전 발생 →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 측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힐문함과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 강요 강화도 조약 모두 12개의 조항으로 된 불평등 조약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를 개항 치외법권 인정, 해안 측량권 인정
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 배경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 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 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 하급군병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 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 규모 폭동으로 이어짐
전개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고 경기 감영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살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이 대원군에게 정권 이양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파견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 개 조항 요구
대원군은 일본의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에 상륙 중인 청군에게 일본을 견제해 줄 것을 요청 청군이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국에 저항 평가 개항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 일본은 공사관 경비를 이유로 조선에 군대 주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 강화
(2) 갑신정변 배경 임오군란 이후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띄게 되었고 청나라는 조 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 김옥균, 박영호, 홍영식, 서재필 등 급진 개혁파들은 일본 세력을 이용하 여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적인 혁신 정부를 수립하려 함
전개 청·프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급진개혁파 는 일본과 모의하여 1884년 11월 18일 우정총국의 축하연을 계기 로 정변을 일으킴 문벌타파,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 등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 정기구의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 선포 →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
평가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 초래 조선과 일본 : 한성조약 체결, 청나라와 일본 : 텐진조약 체결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틈바구니에 놓이게 됨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과 외 세에 기대에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반 근대적 운동 청일 양국 사이에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둘러싼 패권 다툼이 격화되었고, 그 귀결이 1894년 청일전쟁
3)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을미사변 명성황후는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함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경복궁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된 사건
(2)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가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친일 세력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 종이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이용 아관파천 당시 친일관료 체포령이 내려져 친일 내각이 청산되는 등 일본세력이 약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 에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 체결 러시아는 경원 경성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
4)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며 그 해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 문제와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 1898년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지배를 인정하는 대신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도록 러시아에 제안 → 러시아 거절 → 1902년 일본 은 영국과 영일동맹 체결하고 러시아와 전쟁 준비 → 고종황제가 전 시국외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강요·체 결
한일 의정서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과 영토 를 보전하기 위해 전쟁 수행한다고 선전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매수공작금을 투입하여 이 지용·민영철·이근택을 조종하면서 1904년 1월에 공수동맹의 성격 을 띤 밀약이 조인 직전에까지 이르렀지만, 러일전쟁의 발발로 실패 2월 9일 하야시는 고종을 만나 의정서 체결 강요 → 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던 탁지부대신(재무장관) 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 하고, 2월 23일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전문 6 조의 한일 의정서 체결
주요 내용 한일 양국이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일 본 정부를 믿고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할 것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 일본 정부는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이 때 대한제국은 일본 정부 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한 편의를 제공할 것, 또한 일본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 가능할 수 있도록 할 것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는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 3국과 체결할 수 없음
(2) 제1차 한일협약 1904년 8월, 일본이 내정개선이라는 구실 아래 고문정치를 실시하 기 위해 한국을 강압해서 체결한 협정 강압 하에서 외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일본인 재정고 문 1명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외교고문 1명을 초빙한다는 내용 의 의안을 제출 →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제 1차 한일협약 체결
주요내용 한국 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하 여 한국정부에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하 여 외부에 용빙하고 외교에 관한 요무(要務)는 일체 그 의견을 물 어 시행할 것 한국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즉 외국인 에 대한 특권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대해 일본정부와 사전에 합 의할 것
재정고문에 메카다 다네타로(自賀田種大郞), 외교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가 취임하고, 이듬해에는 한국정부가 자진 초청한다는 형 식으로 군사고문에 주한 일본 공사관 부무관 육군 중좌 노즈 진부, 경무 고문에 일본경시였던 마루야마 시케도시 취임 한국의 재정, 외교, 군사, 경찰 등 중요 정책이 일본인들에 의해 조 작
포츠머스 조약 일본의 조선 보호권 인정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와 미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회담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 대한 일본의 동의와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 감 독권에 대한 미국의 묵인
(3) 을사조약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는 강화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한 국에서 손을 때게 되고, 고종황제가 제1차 한일협약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 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제2차 한일협약 강요, 체결 11월 10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 평화 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 치하소서” 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 강압 적으로 요구 → 거부
11월 11일 하야시 곤스케는 외무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불 러 조약체결 강박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을 불러 조약 체결 에 찬성하도록 회유, 강압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에게 가부 물음 →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 등이 무조건 불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찬의 표시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한일협상 조약 체결 조선 외교권 박탈하는 동시에 외교문제 전담 명목 하에 통감부 설치
(4) 헤이그 밀사 사건 1907년 6월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 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을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상 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사건 만국평화회의 : 열강 간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 한 회의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개최, 40여개 국 대표 225명 참석, 중재재판·육해전 법규 등 논의 → 제국주의 열강 간 이해관계 상호 조종하는 국제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 호소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 으로 고종 폐위
7월 8일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 일 이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 협박 7월 20일 일본 군대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국민의 반일 감 정 촉발
(5) 기유각서 1907년 7월 12일 총리 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 사 이에 체결된 조약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 강제 박탈 대한제국의 사법부와 재판소 폐지되고, 그 사무를 조선 통감부의 사 법청 담당
(6) 정미7조약 1907년 7월 24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법령권 제정·권리 임명권·행정구의 위임 및 일본인 관리 채용 조선 군대의 해산, 사법권 · 경찰권 위임 일본인에 의한 차관정치 군대 해산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 발생
(7) 한일합방 1910년 5월 30일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 3대 통감 취임 6월 30일 한국경찰제 폐지 결정, 일본 헌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헌병 경찰제도 수립 7월 12일 일본 정부는 총독이 천왕 직속으로 조선에서 전권을 행사 한다는 내용 결정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안 통보 → 8월 18일 한 국 정부 각의에서 합병 조약안 통과 →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 이에 합병조약 조인 조약 : 전문 8조로 구성 조약문 :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천왕에게 양 도 통감부가 조선 총독부로 대치,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부임
2. 식민지 시대의 한일관계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 → 1919년 3·1 독립운동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 → 1919년 3·1 독립운동 1920년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방식 전환 => 조선사회의 내부개조와 조선인에 대한 차별, 공포의식 주입 조선 사회의 내부 개조: 일선동조론 유포->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 이 동일하다는 이론인 동시에 조선의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 의 일부분이며 조선인은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천황의 적자라는 것 민족문화말살정책과 동화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 + 조선인 에 대한 멸시와 경시, 일본의 우월의식
조선 정체론과 보복론 조선 정체론: 조선은 정체된 사회이며 외부의 충격 없이는 자력으로 발전할 수 없는 전근대사회이기 때문에 조선을 근대화하고 문명화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조선 지배 불가피 보복론: 일본 사회 내부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인의 불만 내지 보복을 과대 선전-> 조선인의 민족주의적, 저항적 이미 지를 보복적, 투쟁적인 이미지 상으로 왜곡->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건 1920년대 미영 양국과 일본의 대립 격화->기존의 구미 추수주의적 외교노선에서 아시아주의로 회귀-> 조선의 공업화 정책과 병참기 지화
1930년대 준전시·전시체제 → 조선인을 황국 신민화 하려는 동화정 책 본격화 → 신사참배 강용, 황국신민서사 암송, 1938년 제3차 조 선교육령을 통해 필수과목에서 한글 제외, 1940년 창씨개명에 관한 법률에 의한 일본식 ‘성’의 의무화 강제조치 1940년대 대동아 공영권 건설과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 하에 태 평양 전쟁 도발→ 병력 및 노동력 부족->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 을 통해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명분 하에 강제동원, 1943년 생산 증강노무강화요강을 통해 강제징병,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을 통 해 종군 위안부 제도 실시=>전체 조선인의 21.9% 희생 1945년 일본 패망 →19세기 말 제국주의적 국제관계 속에서 형성 된 한일관계 종결
3. 전후 한일관계 1945년부터 1965년 국교수립까지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적대적이던 한일관계 새로운 전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근본적인 변화 초래 → 1951년 9월 8일 샌 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한 일본의 독립 + 한일관계 정상화의 필요성 대두 1951년 10월 예비회담 형식으로 시작된 한일회담은 1965년 6월 관계정상화에 관한 기본 조약과 4협정에 조인, 결착 관계 정상화에 장시간이 소요된 원인 → 정치적 목적과 과거사에 대한 역사인식 차이
한국정부 정치적 : 한반도 전체의 관할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일본에 대해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것 주장 경제적 :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 확보 => 한국 정부의 대일 자세는 저자세 일본정부 : 수출시장과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교두보 마 련 +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에 따른 미국의 일본에 대한 대한관계 정상화 필 요성 설득 → 식민지 지배에 대해 종속적 발전론을 주장하면서 식민지 지배 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기 보다는 정당화 하려는 입장 피력 ☞ 시기에 따라 형식적 내용을 달리 하면서 반복되었고 망언과 역사인식의 근간 형성 → 1953년 제3차 회담에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의 망언
구보다 발언의 주요 내용 36년 간 일본의 한국 강제점령은 한국인에게 유익 한민족의 노예화에 대해 언급한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이 흥분한 상태에서 쓴 것으로 지금의 연합국이 썼다면 그러한 문구는 사용치 않았을 것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 제33호에 따라 처리한 것은 국제법 위반 대일 강화조약 체결 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 연합국이 일본인을 한국에서 송환한 것은 국제법 위반
2) 국교수립에서 1980년대 말까지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한일관계 :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못함 1966년 요시다 전 수상의 망언 : 한국인을 위하여 일본은 선정을 베풀었는데도 불구, 전후 한국인이 일본인을 증오하는 것은 매우 유감 1973년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 사건과 1974년 재 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에 대한 저 격 사건 → 반한 감정과 반일 운동 발생
1974년 1월 24일 다나카(田中角栄) 총리의 망언 : 일본의 한국 지 배가 한국의 정신적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1982년 역사교과서 왜곡과 마쓰노(松野幸泰) 국토청장관의 망언 :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1983년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총리의 한국 방문과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방문, 그리고 쇼와 천황의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유감 발언 → 한일관계 진전 1985년 나카소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1986년 일본 문부상 의 역사왜곡 발언 → 대립 반복
(2) 안보적인 측면에서의 한일관계 냉전기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은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종속되어 그 범주 안에서 전개 → 1960~70년대 동서냉전 격화기의 일본의 대 한 반도 정책은 한국 일변도 정책 → 일본이 독자적인 전략 하에 한일 안보관계를 형성, 유지하기 위한 노력 없음 1969년 11월 닉슨-사토 공동성명 제4항의 한국 조항 → 한국의 안 전은 일본의 안전에 긴요하다 ☞ 일본은 한국의 안전이 일본의 안전에 직결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 었고, 이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 일변도의 대 한반도 정책을 취하 게 함
1970년대 동서 화해무드 → 일본은 한국 일변도의 한반도 정책을 정경분리 정책이라는 원칙을 적용, 비정치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촉 시도 1974년 8월 기무라(木村俊夫) 외상의 발언 : 북한으로부터의 군사 적 위협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며, 한반도에서 한국만이 유일한 합 법정부는 아니다 1975년 포드-미키 공동선언의 신한국조항 채택 → 한국의 안전이 한반도의 평화 유지에 긴요하며, 또한 한반도의 평화유지는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안전에 중요하다 ☞ 한국의 안전이 한반도의 안전으로 대체 + 한반도에서 북한을 주 권의 실체로 인정
1980년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형성된 제2 의 냉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안보적 유대 강화 1985년 소련의 개혁, 개방 → 한국: 북방외교 본격화(한반도 문제에서 소련,중국의 영향력 증대) 일본 :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움직임 본격화
(3)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한일관계 : 경제력 협력 급증 1960년대: 미국의 매개적 역할 1970년대: 한일 간 본격적인 경제관계 구축 1980년대: 한국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70년대 한일밀착관계 탈피+ 미국과의 관계 중시
3) 1990년대 이래 한일관계 1990년대 일본의 정치변동에 따른 역사인식의 전환으로 커다란 진 전 1993년 8월 미야자와(宮沢喜一) 내각 하의 고노 담화 : 종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군의 관여 인정-> 2007년 3월 16일 고노 담 화 부정 1993년 호소카와(細川護熙) 총리 : 창씨개명과 징용, 종군위안부 문 제에 대해 사죄
1995년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 : 과거 침략 행위를 국책의 잘못으 로 인정하는 국회결의 채택,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설립 ☞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과거사 인식 개선 1998년 김대중, 오부치의 한일공동선언으로 새로운 전기 2001년 새 역사 교과서의 과거사 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 등을 계기로 재차 냉 각
4.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정책기조, 그리고 전망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근대 이전 : 중국과 한국의 선진문명을 입수하기 위한 문명의 수입 창구 근대 이후 :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중국 등 대륙침략을 위 한 전초 기지 제2차 세계대전 후 : 소련의 위협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
2)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의 기조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유지→ 한반도 현상의 지속적인 유지가 일본 이 바라는 최상의 정책 한국과의 우호, 협력 증대를 통한 신뢰관계 구축과 북한과의 관계개 선을 통한 국교정상화 달성 목표 추구 미국이 주도하는 대 한반도 정책의 기조에 순응하면서 대처
3)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에 대한 전망 단기적 : 한국과의 우호협력 체제를 유지시킴과 동시에 북한과의 수 교를 통한 두 개국의 한국정책을 취할 것 → 남북한 양국에 대한 등 거리 외교를 구사하여 한반도에서 영향력 확대 추진 장기적 : 일본 국내 정치 상황의 향배 + 미국의 동북아 정책의 내용 변화에 의해 영향
4) 일본의 한반도 통일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는 공식적인 입장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일본내의 입장 긍정적인 시각 남북한간의 군사 대치 상태의 해소는 일본의 안보환경에 유리 일본경제에 플러스적인 요소
부정적인 시각 통일 한국의 군사력이 일본에 커다란 위협 통일 한국의 경제력이 일본에 커다란 위협 통일 한국이 대일 견제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