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의 희로애락 제 5 강 욕망의 밥상 - 탐식 GOOD JOB 식사하셨나요?
탐식 욕망의 밥상 욕망의 밥상: 탐식 ‘음식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몰두’ 즉 ‘탐식’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로 여겨질 만큼 동서고금을 떠나 언제나 사회의 대표적인 화두로 역할 하였습니다. 지나친 욕망을 항상 경계했던 성리학 이념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잘 차린 ‘밥상’에 대한 크나 큰 욕망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던 인물들이 존재했답니다. 이번 ‘욕망의 밥상: 탐식’ 에서는 탐식가로 유명했던 조선 사대부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만나보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함께 알아볼 것입니다. 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는 차원에서, 내 탐식의 근원은 무엇일지 그리고 탐식’이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욕망의 밥상 탐식
1. 들어가기 천재 시인이자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 그는 실제로 조선 제일의 탐식가 였습니다. “나는 일평생 음식만을 탐했다.” (한석봉에게 쓴 편지에서) “가림은 바닷가에 있어 궁벽한 지역이기는 하나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1607년 10월, 최전건에게 쓴 편지에서) 천재 시인이자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 그는 실제로 조선 제일의 탐식가 였습니다. 우리에게 <홍길동전>으로 익숙한 허균(1569~1618)은 사실 탐식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라 하며 성리학의 심성론에 반기를 들고, 물산이 풍부한 고을에 부임하려고 로비를 벌였을 정도로 맛 좋은 밥상에 열광하는 ‘탐식가’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허균은 어떻게 이러한 ‘탐식가’가 되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균의 어린 시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먹을 복이 많았습니다. 부친 허엽(1517~1580)이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진귀한 음식이 선물로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본가 역시 강릉의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던 탓에 동해의 해산물을 고루 맛볼 수 있었다고 하네요. 게다가 “잘사는 집에 장가들어서 산해진미를 다 맛볼 수 있었다.”라고 그가 직접 밝혔듯 안동의 유력 가문 출신인 부인 덕분에 여러모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좋은 음식으로 식탐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허균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그의 삶은 가족들 간의 불화와 불운으로 굴곡과 그늘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허균의 식탐의 배경이 되는 요소들을 다른 곳에서 찾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령,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를 쓴 심리학자 김태형은 허균의 심리적 불안정의 원인을 ‘어린 시절의 불우함’에서 찾았습니다. 허균의 집안은 쟁쟁하기로 유명했지만, 철저한 자기관리와 공직자로서의 냉철함을 지닌 아버지 허엽은 허균을 포함한 자식들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했고, 부인 김씨와의 금슬도 좋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삼 남매의 막내였음에도 불구하고 허균은 아버지의 사랑도, 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방치 상태로 자랐습니다. 유복한 환경과 애정 결핍이라는 부조화가 그를 탐식형 인간으로 만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허균은 관료사회의 위계질서와 성리학의 도덕주의 등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서자와 천민 출신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비주류 인생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종류별로 음식 이름을 나열하여 기록해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허균과 주류 사회와의 불화는 그로 하여금 조선 최초의 ‘음식 칼럼니스트’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만약 허균이 어려움 없이 현실에 적응하고 충실한 관리로서의 역할에 안주했다면 <도문대작> (1611)을 쓸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마침내 종류별로 음식 이름을 나열하여 기록해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허균은 관리로 재직하던 중 주류 사대부들과의 불화로 난생 처음 전라도 익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궁박한 처지에 거친 음식만 먹게 되자 이전에 즐기던 산해 진미 생각이 간절했겠지요. 그는 마침내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탐하던 호시절을 떠올리며, 눈 앞에 어른거리는 음식의 맛을 하나하나 반추하면서 책을 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탄생한 책이 바로 <도문대작>입니다. 조선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음식에 얽힌 추억부터 당시의 풍습까지 기록한 데다 음식 맛도 맛깔나게 표현해, 조선 최고의 별미 노트라고 평가 받고 있지요.
2. 들여다보기 모두가 ‘검소의 아이콘’ 다산 정약용의 밥상처럼 소박한 식사 문화를 주장하진 않았습니다. 맛있는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책까지 쓸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허균을 참 대단한 탐식가였다고 평하고도 남겠죠? 오늘날에는 그를 뛰어난 음식 칼럼리스트에 견주어지도록 이끈 ‘탐식’이지만, 허균이 살았던 당시 조선시대에서는 ‘탐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검소의 아이콘’ 다산 정약용의 밥상처럼 소박한 식사 문화를 주장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탐식을 경계했죠. 탐식을 ‘일곱 가지 대죄’ 가운데 두 번째 최악으로 꼽으며 가장 근원적인 죄악으로 규정했던 중세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에 비해, 조선은 탐식에 비교적 관대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한 때 음식의 가짓수와 상차림의 격식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고, 그 규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겠노라고 공표한 적이 있지만, 실제로 규제를 강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에서 역시 탐식을 부도덕으로 여기긴 했지만 죄악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탐식은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망가뜨려 불효를 하게 된다거나 집안 살림을 거덜 내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조선시대 사회는 목소리 높여 경고했습니다. . 우리 몸에 가장 좋은 약은 음식이라는 한의학적 생각이 음식을 귀하게 여기는 풍토를 만들었고, 지나친 식사는 도리어 건강에 해가 된다는 말이 탐식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성호 이익은 “부호들은 하루에 일곱 끼니나 먹는다.”라고 개탄했고, 이덕무와 정약용 역시 음식의 맛을 따지며 먹거나 사치스럽게 먹지 말라고 훈계했습니다. 많이 먹지 말라는 말은 선비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었던 것이지요.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모든 욕구를 억압하면서도 유독 식욕만큼은 제동을 걸지 않는다. 시대를 옮겨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탐식’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오늘날 ‘탐식’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현대사회에서의 ‘탐식’ : 부추겨지는 욕망?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맛있는 식당, 즉 ‘맛집’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 식당들은 색다른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온종일 북적거린다.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욕망이 더 이상 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현상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먹는 것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지금은 대량소비와 탐식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거대한 식품기업과 언론이 가르쳐 준 ‘맛집’의 충실한 고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모든 욕구를 억압하면서도 유독 식욕만큼은 제동을 걸지 않는다. 도리어 더 많이, 더 맛있게, 새로운 맛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 - 김정호 <조선의 탐식가들>
2. 현대사회에서의 ‘탐식’ : 금기되는 욕망? 건강한 식단, 날씬한 몸매를 예찬하는 현대사회가 탐식하는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탐식의 죄가 돌아왔다” 오늘날에도 많이 먹는 행위 “탐식”은 자기자신을 관리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로 비추어진다. 영양학적 견해 때문에 탐식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이 남겨지고, 사회적 · 도덕적 약점이 되기도 한다. 과거 종교의 교리가 “소식”을 권하였다면, 오늘날에는 “문화와 의료”가 소식을 권장한다. 마른 몸매가 건강함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담백하고 적당한 요리가 다시 부각되는 “웰빙시대”인 오늘날에도 “탐식”은 환영받지 못하는 죄악이다. - 플로랑 켈리에 <제 7대 죄악 탐식> 서양엣서는 제 7대 죄악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문제시 되었던 ‘탐식’. 우리나라에서 역시 경계해야 할 욕망으로 여겨졌던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는 해석을 읽을 수 있었지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탐식은 현대사회에서 부풀려지고 부추겨지는 욕망일까요? 아니면, 과거에 그러했듯 죄악시되고 금기시되는 욕망일까요?
<밥상의 희로애락> 3. 돌아보기 제 5 강 욕망의 밥상: 탐식 끝 식사하세요!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탐식가 허균의 경우를 살펴보고,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사회에서 ‘탐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장을 마무리하며, 생각해볼 거리 두 가지를 던져보려고 합니다. 먼저, 허균이 탐식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 원인이 감정적 결핍과 어긋남이었다는 해석 기억하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본인이 탐식하는 데 대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혹은, 기억에 남을 정도로 탐식했던 경우가 있나요? 스스로의 생활을 한 번 찬찬히 되돌아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현대사회에서 탐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앞서 다룬 견해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도 좋고, 아예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어도 좋습니다. 그럼, 식사하세요! <밥상의 희로애락> 제 5 강 욕망의 밥상: 탐식 참고도서 : <조선의 탐식가들>,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제 7대 죄악, 탐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