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회의 이해 한국사의 이해1 6주 건양대 2011.04.04
고대국가의 성립 고대국가의 성격 ① 지방의 족장 세력 통합: 족장 세력의 왕권 복속 ② 중앙 집권적 체제의 정비 : 왕권이 확대됨에 따라 율령의 반포 ③ 정복 활동 전개 :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활동 ④ 불교 수용 : 중앙 집권화를 사상적으로 뒷받침
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의 성립(B.C.37):부여에서 내려온 유이민 집단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 집단이 결합 태조왕:대외적 발전(옥저 정복, 만주지역 확장, 낙랑에 압력), 왕권강화(고씨 왕위세습, 연노부→계루부), 집권적 관료조직 정비 고국천왕:5부 개편, 왕위 부자상속 확립, 족장들의 중앙 귀족화
백제의 성립 백제의 성립(B.C. 18):북방 유이민과 한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고이왕 1) 대내적 : 새로운 관제 마련, 관리 복색 제정, 지배체제 정비, 한강 유역 장악, 중앙 집권국가의 토대 형성 2) 대외적 : 중국의 선진 문물 수용
신라의 성립 유이민 집단과 토착 집단 결합 : 지리적으로 인해 유이민 유입이 적음, 늦게 발달 사로국으로부터의 발전 연맹 왕국 성립:박혁거세(B.C. 57) 박, 석, 김씨 부족이 연맹하여 이사금 선출→6부족 연맹체로 발전 내물왕:진한 지역 차지, 김씨 왕위 계승, 마립간 칭호 사용, 광개토왕의 원조→고구려의 간섭, 고구려를 통한 중국 문물 수용
가야 연맹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 성장 유이민 집단과 토착 세력이 결합 가야 연맹의 성립:2~3세기 경, 김해의 금관가야를 주축으로 발달:농경 문화 발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과 중개무역, 풍부한 철생산 쇠퇴: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축소, 4세기초 백제와 신라의 팽창으로 약화
고구려의 발전 미천왕(313년):낙랑군 축출(남쪽 진출) 고국원왕:전연과 백제의 침략으로 위기 소수림왕:불교수용(372년), 태학설립, 율령반포 광개토왕:영토확장,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 백제 압박 장수왕:국내성→평양 천도, 백제와 신라 압박, 서해안 진출, 백제 수도 한성 함락→한강 이남 진출 중원고구려비(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513)
백제의 발전 근초고왕:마한 전역 정복, 고구려 평양성 공격, 낙동강 유역 가야 지배권 행사, 중국의 요서,산동, 일본의 규수 진출, 왕위 부자 상속 시작 침류왕:불교수용(384) 웅진천도:고구려의 남하, 무역활동 침체 동성왕:나제동맹 강화 무령왕:22담로와 왕족 파견→중흥발판마련 성왕:사비 천도, 국호변경, 중앙 관서와 지방제도 강화, 남조와 교류, 불교진흥, 일본에 불교 전래, 중앙관청 22부로 확대정비,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정비
신라의 발전 눌지왕:나제동맹→고구려의 간섭 배제 지증왕:국호변경(사로국→신라), 왕호 변경(마립간→왕), 수도 행정구역 정리, 지방 州郡 정비, 우산국 복속 법흥왕:율령 반포(관등과 백관의 공복 제정, 골품제 정비), 병부와 상대등 설치, 연호 사용(건원)
신라의 발전 진흥왕 : 영토의 확장(한강, 낙동강 유역, 함경도 지역)→울진 봉평신라비, 단양 적성비, 4개의 순수비, 대가야의 정복 한강유역의 차지:경제기반, 전략 거점 확보, 황해를 통한 중국과 직접 교류→주도권 장악? 화랑도 개편, 불교 교단 정비(사상 통합 도모)
삼국의 통치체제 구분 고구려 백제 신라 수상 대대로(막리지) 상좌평(내신좌평) 상대등 관등 10여 관등 16관등 17관등 귀족회의 제가회의 정사암회의 화백회의 수도행정 5부 6부 지방행정 5부(욕살) 성(도사, 처려근지) 5방(방령) 군(군장) 5주(군주) 군(군수), 현(현령) 특수행정 3경(국내성, 평양성, 한성) 22담로 2소경(중원경, 동원경) 군사조직 평시:성주가 지휘 전시:대모달,말객 중앙:500명 지방:700~1200명 중앙:사자대,시위부 지방:6정, 서당
7세기-전쟁의 시대 동아시아의 정세-隋의 남북조 통일, 돌궐·고구려·백제·왜의 남북 연합↔수·신라의 연합 隋와의 전쟁:수 문제와 양제의 침입살수대첩(612) 唐과의 전쟁:당태종의 침입, 안시성 전투(645) 고구려의 대수당 전쟁:발전?민족수호?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신라의 고구려와의 연합 실패 백제와 고구려의 쇠퇴:정치질서 문란, 지배층의 향락, 백성들의 일체감 상실? 나당 연합군의 사비성 함락→백제 부흥운동(복신, 도침, 흑치상지), 왜의 지원군 실패 나당 연합군의 평양성 함락→고구려 부흥운동 실패
멸망의 원인 : 거점과 영역
흑치상지 묘지명 부군(府君)은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20세가 안되어 가문(家門)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을 받았다.
고대사회의 경제 전쟁:정복지역 토산물 수취, 포로를 노비로, 식읍(토지와 농민) 지급 정복:피정복민을 전쟁에 동원, 가혹한 물자 수취, 신분차별, 경제적 부담 수취제도:재산의 정도에 따라, 지역 특산물 수취 노동력 동원:15세 이상의 남자(丁) 구휼절책:농민경제 안정, 농업 생산력, 賑貸法(고국천왕), 시장설치(경주-東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