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슬람 국가들의 현황
이슬람권을 5개로 구분할 수 있다. 아랍어권 (NAME) 페르시아 언어권 (이란, 아프가니스탄) 투르크 언어권 (터키, 중앙 아시아) 울두, 벵갈 언어권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말레이, 인도네시아 언어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부) 기타 - 아프리카 권
아랍어권
사우디 아라비아
개관 : 면적 - 224만 8000 km2 인구 – 2735만명 (2014년 추정) - 외국인 5,576,076 (인구에 포함) 인구밀도 - 10명 인구 성장 - 2.31% 평균 수명 - 75.64년 인종 - 아랍인 90% / 아프로-아시안 10% 순수한 아랍인이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라비아 반도의 사람들이다. 나머지는 정복되어 개종한 아랍인이라고 한다 (이집트인들). 노동인구 15-64세 중 35%가 외국인.
수도 – 리야드 공용어 – 아랍어 1인당 국민소득 (ppp)- $ 55,300 (2017) 문자 해독률 - 남자 84.7% 여자 70.8% 전 국토 중 농경가능 - 1.67%
역사 : 유사 이래 - 아라비아 반도 남쪽은 고도의 문명을 영위하였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유목생활이 지배적이었다. 7세기부터 19세기 초반 헤지라 이전에는 메카를 중심으로 하는 대상 무역이 중심이었다. 661년 우마이야 왕조 이후 반도는 분할되어서 군웅할거 상태가 16세기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중엽 - 사우드 가(家)가 와하브파 운동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중엽 - 사우드 가(家)가 와하브파 운동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부 네지드 지방의 호족으로서 원시 이슬람 회복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들이 오스만 지배를 물리치고 왕조를 수립하였다. 19세기 초반에는 이집트 군에 정복당하였다.
1902년 - 사우드 가의 압둘 아지즈 2세(이븐 사우드 왕)가 리야드를 탈환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 1927년 영국과의 협정을 통해서 독립 쟁취 1932년 국명을 사우디아라비아로 호칭 1938년 유전 발견 - 국내 개발이 촉진되었다. 1953년 압둘 아지즈 사망 - 큰 아들인 사우드가 왕이 된다. 1964년 파이잘 왕 즉위 - 개혁왕 2005년 압둘라 왕 즉위 2015년 살만 왕 즉위 ---- 아들 모함마드 빈 살만
이슬람 과격파들의 활동으로 어려움을 겪음 - 이슬람 성전(聖戰) 기구 1979. 11. 20. - 소수 부족 중심의 이슬람 과격파가 메카의 하람 대사원을 습격 / 순례자를 인질로 잡고 2주간 점거 1985. 2월 - 리야드 시내에서 폭탄 테러 2016년 이란과의 패권 갈등과 국제 유가 하락으로 어려움
걸프 전쟁에서 사우디의 위치 1990년 8월 걸프 전쟁에서 파하드 국왕이 친미 노선으로 미국이 국내 기지 사용을 승인하였다.
걸프전쟁 이후의 보수파와 민주파의 갈등 민주파는 주로 석유 산업의 실업가들과 지식인들이고 보수파는 율법학자들이다. 파하드 국왕은 이들의 상충되는 요구에 대해서 절묘하게 비껴나가면서 중도 입장을 고수 1992년 3월에 파하드는 사우디 지역에서는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명 1992년 8월에 보수파와 청년 집단이 국정의 실패, 즉 빈부차의 확대와 부패를 비난하며 서구와의 단절을 요구하자 국왕이 명백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대신 성직자 최고 평의회의 멤버들을 대폭 교체하고 종교계에 종교와 관계없는 분야에 끼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정치 : 사우디 내에서의 정치와 종교의 복잡한 관계 정교 혼합정체 - 국왕은 왕인 동시에 종교상의 수장이다. 와하비즘을 건국의 기초 이념으로 하고 있다. 결국 사우디 국왕이 와하비즘의 머리가 된다. 국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절대자이지만 이슬람법과 관습법에 따라 정치를 하도록 의무화 되어있다. 이슬람법은 울라마라고 불리는 이슬람 장로들이 해석, 운용한다. 성문헌법은 없다. 정당이나 노동조합은 없다. 정당, 결사, 언론의 자유가 없다.
최근 형제 세습의 전통을 깨로 살만 현 국왕의 아들 모함마드 빈살만이 형제의 난을 일으키고 있다. 빈살만은 온건주의 이슬람을 지향하는 편이다.
정치 조직 1953년 각료회의가 설치되었지만 왕과 왕족 회의가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왕족 내 신구 세력의 갈등, 신흥 중산 계급의 등장, 이란, 시리아, 리비아 등 아랍 급진 세력의 선동 등이 큰 정치적 과제이다.
석유 자산과 재정 석유 매장량 2617억 배럴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1/4) 1일 생산량 900만 배럴 (792만 배럴 수출) - 필요시 최고 2,800만 배럴 생산 가능 ** 한국석유공사가 10개국 17개 사업장에서 생산량이 하루 3만 배럴이다. 한국이 확보한 전 세계 매장량(가스 포함)은 3억 9000만 배럴이다. 최근 베트남에서 4억 2000만 배럴 발견하였다. 그러나 1년 수입이 약 8억 배럴이다.
사회/문화 파이잘 왕 취임 이후 노예제도 폐지, 주택, 병원 확충 등 근대화로 인한 부의 혜택이 일반 국민에게도 돌아가고 있다. 교육 – 초 중 고등 학교 전액 국고 보조. 1962년 문자 해독율이 2.5%였는데 현재는 70%로 급증했다. 여자 전문학교, 각종 기술 전문학교, 국비 해외유학제도 등을 장려하고 있다. 여성 – 최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 2015년 개정 여성의 자동차, 보트, 비행기 운전이 금지되었다가 최근 인정한다.
방문 - 관광비자가 없다. 메카와 메디나는 무슬림들 만이 들어갈 수 있다.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생활 - 대부분이 유목민. 도시 거주하는 사람들의 도시는 현대화 되어있다. 음주, 돼지고기 등은 절대 금물 - 외국인에게도 엄금 우상 숭배 부정 - 수입되는 인형이나 마테킹도 목이 없는 모습이다.
배외 의식 - 외부 세력을 반대한다. 재외공관들도 수도 리야드에 있지 못하고 홍해 연안의 제다에만 국한되어있다 배외 의식 - 외부 세력을 반대한다. 재외공관들도 수도 리야드에 있지 못하고 홍해 연안의 제다에만 국한되어있다. 외국인의 내륙 자유 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 TV는 우상 예배와 통한다고 거의 없었으나 지금은 종교 프로를 중심으로 방송 외국인의 종교 활동도 엄격하게 금지
현 선교적 상황 이슬람 등장 이전에는 이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이슬람이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로 모두 추방되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미복음화 된 나라이다. 약 5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추정되는데 모두 외국인들이다.
2) 종교 자유와 인권 면에서 최악의 국가이다. 무타와(mutawwa) - 종교경찰에 의한 심한 탄압 외국인도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다. 비밀 집회는 추적되고 발각되면 추방 / 과거 사우디 한인 교회도 폐쇄되었었다. 석유 산업 단지에 일부 외국인들의 예배가 묵인되고 있다. 과거에는 내국인이 개종하면 사형에 처해졌었다. 3) 자유화 요구와 더 엄한 이슬람화를 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
4) 메카에 있는 Muslim World League가 많은 무슬림 선교사를 후원, 주관 이슬람에 우호적 국가들을 후원 - 모스크 건설, 라디오 방송, 문서, 선교사 파송 세계에서 가장 큰 인쇄소를 메카에 두고 매년 2,800만 부의 꾸란을 인쇄 배포
이 집 트
개관 : 면적 - 99만 평방킬로 인구 - 8690만 명 (2014년 추정) 인구밀도 - 70명 인구 성장률 - 1.72% 평균 수명 - 71세 인종 - 아랍인 (이집트인, 베드윈, 버버족) 99% 수도 – 카이로 / 공용어 – 아랍어 1인당 국민소득 – 13,000불 (2017)ppp 문자 해독율 - 남 83% 여 59.4% 전 국토 중 농경 가능 - 2.87%
역사 : 고대에서 19세기까지 - 기원전 3,000년경부터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주전 332년까지 30여개의 고대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 로마 제국 통치 → 맘묵 왕국 → 16세기 오스만 터키 1798 나폴레옹 침공, 3년간 프랑스 통치 1805년 투르크 파견군인인 알바니아인 무하마드 알리 장군이 왕조 수립, 근대화 노력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1876년 국가 재정파탄 상태 도달 → 영국, 프랑스가 관리 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이 식민 통치
1919년 독립운동가 사아드 자그루그가 와하드당 결속 1922년 독립 쟁취 1951년 영 이집트 동맹 계약 파기 1952년 가말 아브델 나세르 중위의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이잘 국왕을 국외 추방 나기브(1953-56) – 나세르(1956-70) – 사다트(1970-81) - 무바라크(1981-2011) – 무르시(2012-13)-혼동 현재는 군부 출신의 엘시시가 통치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선언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와 수에즈 전쟁 (2차 중동전) 소련의 원조로 아스완 댐 건설 19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 완패 시나이 반도를 잃고 수에즈 운하는 75년 6월까지 폐쇄 당함. 2012년 최초의 선거로 무르시 대통령 2013년 쿠데타로 엘시시가 통치
정치 : 민주적 사회주의 아랍 공화국 이슬람이 국교이다. 그러나 의회와 정당 제도가 있다. 무슬림의 이집트 내 테러 활동 1992년부터 MB의 반정부 테러, 관광객 습격, 폭탄 테러가 발생 1994년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나기브 마흐푸즈가 반 이슬람적이라고 납치, 중상을 입혔다. 정부가 강력 대응하여서 가담자들을 사형 시킴 큰 소리를 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침묵하는 다수, 소수 민족들, 그리고 국제적 비난 가운데 정부가 어려운 상황이다.
대외 관계 - 중동 평화 회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서 아랍 지역의 정치적 수장 위치 수단과는 나쁜 관계이다. 수단이 이슬람 원리주의를 지지한다고 비난한다. 친미적 입장 - 미국은 경제 원조와 융자금 등을 제공 경제 : 선진국의 기술, 자금 도입에 적극적이지만 비효율적인 생산, 실업으로 어렵다. 석유 매장량 27억 배럴, 천연가스 212억 m3, 석유 생산 하루 74만 배럴
사회 및 문화 :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과밀한 나라 중 하나이다. 남녀 격리 습관이 있고 남존여비(男尊女卑) 개념이 있다. 오래된 대학들은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짐. – 알 아즈하르 대학 초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다. 피라미드, 화려한 무덤 등 고대의 유물과 오벨리스크(방첨탑(方尖塔)) 등의 태양 신앙이 원 종교였다.
현 선교적 상황 : 이슬람 94%, 기독교 6% (기독교인들은 20%라고 주장 - 실제 12-13%정도 추정) 640년 이슬람이 점령한 후로도 1,000년이 넘게 기독교인이 다수였던 국가이다. 콥틱 교회는 중동에서 가장 큰 기독교 단체이다. 소수이지만 콥틱 교회 내에서 1930년 이후로 성경에 근거한 영적 갱신 운동이 있다. 2) 이슬람이 국교이지만 최근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다.
3) 1980년대와 90년대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늘어났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차별법, 이슬람의 성장으로 기독교인은 차별과 폭력을 당한다. 교회 파괴 행위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장려금 지급 등으로 압력을 가한다. 특히 북부에서 핍박이 심하다. 매년 12,000 - 15,000 명이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있다. 1998년 이후 그리스도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테러로 국제적 압력을 받게 되자 정부가 손상된 이미지 회복을 위해 노력 중이다.
4) 개신교회는 소수 정교회에서 발생했는데 오랫동안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3년 이후 갱신 운동이 늘어나고 있다. 5) 복음주의 교회 내에 사역자의 부족이 심각하다. 더 많은 신학생이 필요하다. 6) SAT 7의 영향, 라디오 방송 등이 긍정적이다.
리 비 아
개관 면적 - 175만 7000 평방킬로 인구 - 625만명 / 인구 밀도 - 2.8명 인구 성장률 - 2.33% 수도 – 트리폴리 공용어 - 아랍어 (영어와 이태리어가 통용) 문자 해독율 - 82.6% 국민 소득 (ppp)- $9,800 (2017)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그리고 페잔 지역이 연합한 지역 지리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그리고 페잔 지역이 연합한 지역 사하라 사막 지대에는 58°를 기록하기도 했다. 농경지는 1.42%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6.8% 고원지대 트리폴리타니아 리비아 사막 키레나이카 페 잔 사하라 사막 지대
역사 고대부터 유목민인 베르베르인의 지역이다 기원전에는 페니키아, 카르타고, 그리스, 로마의 식민지였다 641년 아랍인들의 서진(西進)으로 정복 16세기에 오스만 터키가 점령 - 19세기까지 지속 1911년 - 이탈리아와 투르크의 전쟁 이탈리아가 장악하고 1912년 트리포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를 합쳐서 리비아로 명칭 1951년 국제연합의 권고로 페잔을 합친 3지방의 연방제로 리비아 연합왕국이 독립
1969년 카다피가 군사 쿠데타로 왕정 폐지하고 공화국 건립 나세르의 후계자로 자처함 반 서방, 반외세 입장 천명 영국에서의 팬암기 폭파 사건의 배후로 리비아가 지목되면서 서구 국가와 대결하였다. 1986.4. 미국이 베를린 미군 디스코 텍 폭파의 배후로 카다피를 지목하여 대통령 궁 폭격 - 이 폭격으로 카다피는 양녀를 잃음1 1992년 UN 리비아 경제 제재 이후 180억 달러의 경제 손실을 입음
정치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 카다피의 쿠데타 이후로 혁명평의회가 장악 의장인 카다피가 국가 원수 겸 군 최고 사령관 전인민회의 (국회 기능) - 카다피가 서기장 -1979년 사임 카다피는 정부조직의 어떤 공식적 직함도 없었다. 그러나 혁명의 지도자로 실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 카다피 특유의 이슬람 이론 인 green book 사상에 따라 헌법이 없고 인민 대중국이 꾸란과 함께 리비아의 법률을 제정
이라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반미 노선에서 일치 카다피의 변화 1999년 혁명 30주년 이후 개방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팬암기 범인을 인도하고 영국에 배상하였다. 프랑스 비행기 폭파에 대해서도 배상하였다. 이전에는 반외세 자주 노선이었으나 국제 제재가 풀린 이후로 개방 노력과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를 서방에 보냈다. 2003년 말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2011년 내전으로 정권 붕괴 – 카다피와 아들 피살 내전 상태로 부족간의 갈등, 테러 집단의 공격
경제 1959년 유전 발견 원유 생산이 국가 생산의 1/3을 차지 석유 매장량 - 380억 배럴 (매장량 세계 4위) 팬암기 폭파(1988)사건으로 1992년 이후로 2000년까지 제제를 받았다. 팬암 폭파범으로 지목된 리비아인 2명의 인도를 거절 92년 UN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금지와 무기 금수 조치를 결정 93년 해외 자산 동결과 원유 관련 장비 금수 조치
한국과는 대수로 공사로 관련이 깊다. 리비아는 현재는 사막 지대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농경지역이었다. 지하 600m에서 거대한 물우물을 발견해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막을 녹화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단계로 동남부 지역에 1,874 km의 수로와 2단계 서남부 지역에 1,730 km 의 수로를 공사 완료. 총 5,524 km의 수로 공사를 시행 중이다.
인종 외국인 노동자가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 아랍인 63.1%, 베르베르인 (9.4%), 아프리카인 (사하라 횡단 노예무역으로 흑인과의 혼혈 - 트리폴리, 페잔에 35,000 명의 흑인이 있다) 유대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은 1969년 카다피 혁명 이후 거의 철수했다. 종교 이슬람 96.5% (순니파), 기독교 1% 이하
사회/문화 리비아에 있는 것 3가지는 석유, 대수로, 카다피이고, 없는 것 3가지는 술, 신호등, 시간 개념이라고 한다.
선교 상황 순니파 이슬람이 국교이지만 세속적인 경향이 강하다. 2) 어떤 형태로든지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외국인 교회도 엄격하게 감시 당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점차 많은 자유가 주어지고 있다. 마지막 선교기지도 1960년에 폐쇄 3) 카다피의 죽음 전에는 10만 명의 기독교인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수천 명으로 줄었다. 4) 위성방송 (50%의 가정이 위성 안테나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