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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3코스 양반문화와 전통 다크호스 백 지연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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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경주향교, 사마소 ※ 경주최부자집 ♥ 양동마을☆ 옥산 서원, 독락당 ♣ 정혜사지☞^^☜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재매정 빠졌어열 양동마을☆ 옥산 서원, 독락당 ♣ 정혜사지☞^^☜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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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향교, 사 마소 향교(鄕校)는, 고려~조선시대의 지방 국립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는데 중앙에 있던 국자감과 함께 지방문화향상과 교육을 위해 향학(鄕學)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가 되어서는 부.목.군.현에 각 한 개소씩 설립되어 지방교육의 중심지가 된다. 경주향교는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지금의 위치는 신라시대에는 신문왕이 설치한 국학(國學)이 있던 자리이고, 고려시대에는 향학이 들어 섰던 곳으로, 신라시대 이후 조선까지 교육적인 장소로 쓰인 곳이다. 우리가 간 향교는 전학, 후묘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성균관은 대부분 전묘, 후학이라고 하였고 대부분 평지에 들어서 있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오다가 얼핏 본 사마소는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조직하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협의기구이었다. 경주 사마소는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기록이 없다. 현재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 탄 것을 1741년에 다시 지은 것이고, 옆에 있는 병촉헌은 1832년 순조때 최기영이 세웠다. 오다가 얼핏 본 월정교에 대해서도 설명이 잠깐 나왔었지만 금방 잊었다 ㅠㅜ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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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부잣집 경주에 “최부잣집”이라는 곳에 갔다.경주 최부잣집은 400년간 부자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터는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지라고 하는데 가옥에 쓰인 주춧돌과 석재도 신라 궁궐에서 쓰던 석조 유물로 짐작된다.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석이었는데 그 중 1천석은 사용하고, 1천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징금 있는 곳간은 접대용 식량을 쌓아놓던 공간이었는데 대략 7~8백 석 정도의 쌀이 들어간다고 하니 최부잣집의 인심을 알 만 하다. 옛날에 “부자는 3대를 못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최부잣집이 존경을 받은 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인 육훈(六訓)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은 가문이었다. 가훈은 대충 이런 내용 이다. 1,과거 시험을 친다. 단, 진사까지만 2,재산은 만석까지만 3,손님을 잘 대해라 4,흉년엔 땅을 사지 말아라 5,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동안 검소하라 6,백리안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그리고 최씨 고택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신라 비주가 있는데, 중요무형문화제 제 86-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동법주를 파는 곳에 가니까 술 냄세가 진동을 했다……. 정말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지독한 냄새..ㅠㅜ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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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매정 사적 제 24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재매정은 신라 김유신 장군 집의 우물이다. 선덕여왕때 김유신은 상장군이 되어 백제 일곱성을 공격해 크게 승리한다. 그러나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군이 매리포성을 침공하자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이를 막으라 했고, 김유신은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출정해 백제군 2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다시 신라로 돌아오는데 백제군이 또 군사를 일으키자 왕은 “공은 수고스럽겠으니 빨리 나가서 이를 방비하라”하므로, 김유신은 또 다시 군사를 이끌고 전선으로 갔다. 이때, 김유신 장군 집 앞을 지나게 됐는데 장군은 집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쳐 우물 물 을 떠오라 했다. 물을 마신 뒤, “우리 집 물맛은 아직도 예산ㄹ 그대로구나!”하니 군사들이 “장군도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어찌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리요.”하며 싸움터로 나갔다.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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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시조) 고려~조선 초에 양동마을 에는 오씨,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하나 확인할 자료가 부족하다.
(사람이름이 너무 많아서 생략할게요,) 이광호가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손자사위인 류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게 되고 손소가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혼인한 후 양동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그래서 외손마을)손소의 둘째 아들이 우재 손중돈, 그 뒤 찬성공 이번이 손소의 딸과 혼인해 양동에 들어와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 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지 이언적 선생이 배출됨녀서 손씨, 이씨 양성에 의한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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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건물) 손종로 정충비각 손종로는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 쌍령전투에 서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한 분으로 시체를 찾지 못해 옷과 관으로 장례를 지내고 1983년 정조는 손중로의 충절을 기리고 위해 왕명으로 비각을 세웠다. II.관가정 손중돈 선생이 1514년 대사간 재직시 잘못된 정책에 대해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해부친으로 붙어 분가하여 지은 집이다. III.향단 이언적 선생이 1540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모친의 병간호를 할 수 있도록 중종 임금이 지어준 집이라 한다.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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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독락당 옥산서원은 1772년 선조때 경주 부윤 이제민과 도내 유림들이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 묘우를 건립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다음해 위패를 안치하고 1574년에는 옥산으로 사액 받아 서원으로 승격 된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여생을 즐기기 위해 지은 집이다.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집의 구조도 외부에 다소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고 높은 지대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형태의 일반적인 양반가옥건축형태와는 달리 집 터를 낮은 지대에 잡았다. 또한 건물의 기단, 마루, 지붕까지 모두 낮게 만들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고있다. 특히 동쪽 계곡을 막고 있는 담장은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구조이지만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살창을 설치해 계곡을 볼 수 있도록 한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옅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한국 건축하의 백미중 하나라고할수있다.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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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지 정혜사지는 옥산서원을 지나 서북쪽으로 약 2KM떨어진 곳이 있다. 정혜사는 신라 때의 사찰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한 창건연대나 폐찰과정을 알 지 못한다. 다만 동경통지에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원년에 백우경이 이 곳 자옥산 아래에 있었는데 그는 좋은 터를 골라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고 선덕왕도 행차한 바가 있다고 적었다. 나는 13층 석탑을 처음 봐서 그런지 신기하게 느껴졌다.괜히 멋있게 느껴졌나?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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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에여 꿈교 팟팅!! 다크호스 백지연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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