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ation is loading. Please wait.

Presentation is loading. Please wait.

제10강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3).

Similar presentations


Presentation on theme: "제10강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3)."— Presentation transcript:

1 제10강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3)

2 동학혁명과 조선의 외세청병 1894년 동학혁명은 사상 최대의 농민반란사건
동학혁명과 조선의 외세청병 1894년 동학혁명은 사상 최대의 농민반란사건 페인(S.C.M.Paine): “무력진압 자신이 없었던 고종이 민씨 척족 세력과 이홍장의 대리인격인 원세개의 촉구에 따라 청이 군대를 파견할 것을 청하게 된 것” –자진+강요

3 Q) 請兵의 과정: 왜 동학군과 휴전에 합의하고도 청병했을까?
-- 동학지도자들이 청, 일의 군대 파견 움직임 파악; 1894년 6월 1일 외세개입 차단키 위해 정부군과 휴전 합의 --6월 2일 일본은 청이 조선에 군대 파견하면 일본도 조선에 군대 파병하기로 결정 --6월 3일 조선은 청에 군대 출병 요청: 외세 청병 시 청, 일 모두의 군사개입 초래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왜?

4 --6월 7일, 텐진조약에 따라 청은 일본에 조선 출병 통보->청은 서울-아산 중간 지점인 남양에 2천명 군대 파견
->일본도 몇 시간 후 조선에 군대 파견-조선 정부는 뒤늦게 일본에 출병 자제 요구 ->하지만 2천여 일본 군은 이미 서울 진군 ->혁명군과 정부군의 휴전으로 청, 일 양군은 조선에 병력 유지할 근거 상실

5 ->일본은 영사관과 일본인 보호 필요를 명분으로 철병 거부
->청은 서울로 들어오지도 않은 상황. vs 일본은 서울 진주 ->청 축출을 위해 조선 출병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이 철병할 리는…없다

6 청일 전쟁의 전개과정 --1894년 7월 25일 새벽 일본 함대가 아산 근처 풍도(豊島) 앞바다의 청국 함대 공격—청군 병사 수송선 고승호(高陞號) 격침--청 장병 1천명 익사 네 개의 전투가 승패를 결정: --1)1894년 9월 15~16일 평양전투(陸戰): 청군은 동원할 수 있는 최신무기와 장비들로 무장--하지만 군기(軍紀) 미확립—지휘체계와 작전계획 부실—일본은 서해 해상, 육로, 원산에서 평양으로 진격—일본군 대동강 도강 때 청은 요새에 틀어박혀—일본군의 대승리(전사자 2000:180)

7 ->뉴욕타임스,“청군 안에서 한족-만주족 병사들의 치열한 유혈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청일전쟁 패배의 이유: 청조 봉건정치의 부패; 전쟁 준비 부족; 군사조직 실권자인 이홍장의 군사 경시, 외교 중시, 평화적 해결 중시; 조선 내 청군의 자질과 소양 부족(썩을 대로 썩은 군대: 강간, 약탈행위, 겁쟁이) Cf. 일본은 징집제 vs 청은 모병제

8 --2)황해해전(압록강해전: 요동반도 해안 海洋島 근처,1894년 9월 17일)
->증기선 함대들 간에 벌어진 최초의 근대적 해전 ->일본의 압도적 승리로 서해 제해권 일본으로 넘어감 --3) 여순 점령(11월 21): 청 북양 육해군의 근거지—일본군 접근해 오자 싸움도 않고 도주. 단 하루 만에 여순 점령

9 --일본군은 여순 함락 다음날 비전투원, 부녀자, 유아 등 6만여명 학살. 살아 남은 이는 전체 36명에 불과(1894. 11
--일본군은 여순 함락 다음날 비전투원, 부녀자, 유아 등 6만여명 학살. 살아 남은 이는 전체 36명에 불과( ‘뉴욕월드’ 보도) --뉴욕월드, “일본은 야만의 골육을 보유한 괴수다.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본체를 드러냈다” --영국, 더 타임스 기자, “일본군은 포로를 묶은 채로 살해하고 평민, 특히 부인들까지 살해한 것이 사실…각국 특파원과 영국 해군 중장까지 목격”---이 보도로 일본 군국주의의 잔학성이 세계에 전해졌다…

10 --4) 위해위(威海衛) 전투: 산동반도 북쪽 끝 군항, 1895년 1말~2월초 전투.
—>2월 2일 위해위 요새 점령 —>북양함대는 산동반도 유공도(劉公島)에서 최후의 저항 —>제독 정여창(丁汝昌) 자결 =>이홍장이 양무운동을 통해 구축한 북양함대의 최후

11 시모노세키조약과 무술변법 --1895년 3월 20일,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과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1844~97) 평화 협상 시작 --이홍장의 굴욕적인 휴전제의 vs 일본의 냉정한 답변: 휴전조건—1.大沽의 요새와 천진, 산해관과 요새들을 일본군이 점령 2. 중국군은 모든 무기와 군사장비를 일본군에 이양, 3. 천진과 산해관 잇는 철도의 일본 접수, 4. 휴전기간 일본측 군사비용의 중국 부담

12 -->이홍장, 휴전요청 철회->이홍장, 일본인 괴한의 총격 받아 부상->일본은 서둘러 휴전협정 체결(3.30)
-->일본, 청에 총 6개항 강화조건 제시(4.1): 1. 청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 인정 2. 청이 일본에 할양해야 할 영토 명시: 요동반도/대만과 인근 부속도서, 팽호열도 3. 3억 태을의 전쟁배상금 지불 5. 무역과 상업적 특권 보장

13 -->이후 이홍장의 애걸과 이토의 단호함 사이에서 협상 진행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서명 1. 중국의 조선 독립 인정(일본의 조선 독립인정 제외) 2.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 열도 일본에 할양 3. 2억 태을의 배상금 지불(8회에 걸쳐 7년에 완납, 당시 청의 연간 재정수입은 8천 만냥) 4. 배상금 미납시 나 통상장정 비준 교환 전에는 일본군이 위해위에서 철수하지 않음

14 삼국간섭과 요동반도 평화협상 중 청, 일의 치열한 외교전 전개
삼국간섭과 요동반도 평화협상 중 청, 일의 치열한 외교전 전개 러시아와 일본은 각자 영국을 자국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치열한 경쟁 벌임 ->영국은 불간섭 결정: “로스베리 내각이 중립정책을 고수한 것은 내각이 분열되었고 로즈베리 수상이 4월 내내 와병 중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자국과 청과의 무역이 손해를 볼까 우려해서 계속 중립을 지킨 것이 명백하다”(이안 니시, 런던대 명예교수)

15 =>영국은 삼국간섭 불참으로 일본에 호의 보이고, 일본의 요구에는 중립 입장 견지-->결과적으로 일본이 삼국 요구 수용하는 결과
최문형: 영국이 러시아의 간섭 요구 거절한 진정한 이유는 일본이 요동을 차지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세력팽창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으로 판단 미국의 침묵은 일본 지원한 것도 아니고 삼국간섭 지원한 것도 아님.

16 침묵 혹은 불간섭이 정치적으로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중심으로 판단? 의도? --미국은 당시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는 것을 적극 돕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다른 서양열강들의 압박 외교를 지원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누구에게 유리한가? =>결과적으로 9년 후 영미일 연합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 전개

17 조약체결의 후폭풍과 무술변법 ** 청,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반대, 항의 거세
-> 지식인들의 조약 폐기 상서(公車上書) :천도, 조약파기, 변법 실시 주장. 지식인들의 제국주의 저항 최초의 대중운동 ->강유위(康有爲), 양계초( 梁啓超)의 변법자강운동(1898.6~9), 양무운동에 대한 반성서태후의 수구파 쿠데타로 좌절(무술정변: 103일 천하)

18 ->중화제국 해체의 완성인 동시에 중국과 일본의 지위 전복을 의미
->한반도에 대한 일본 견제세력은 청에서 러시아로 대체 ->영, 미, 일을 연합시키는 결과 초래 ->영, 미가 한반도에 대한 일본 지배권 승인하는 것으로 이어져

19 시모노세키 조약과 중화질서의 종언 청과 일본의 세력균형이 급속하게 변동한 계기
중국 영토인 대만과 팽호열도의 일본 식민지화—대만인의 격렬한 저항: 1897~1901까지 일본 대만 총독부는 3473명 살육; 1902년 대토벌에서 539명 사형, 즉결처분 살육 4043명 조선을 속방으로 지키고자 한 淸 vs 조선을 빼앗아 식민지나 영향권으로 만들려 한 日本->조선의 중화질서로부터의 분리->조선의 일본 영향권 편입

20 시모노세키 조약은 대만과 요동반도 할양 강제 명문화 내용 담음—>삼국간섭(1895
시모노세키 조약은 대만과 요동반도 할양 강제 명문화 내용 담음—>삼국간섭(1895.4) vs 일본지지 열강으로 균열 전선 형성—>러시아 vs 영, 미, 일 삼국 제국주의 카르텔의 성립-> 요동반도 반환, 3천만 냥(2억달러) 보상

21 Cf. 1885년 청불전쟁: 인도차이나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 주장 vs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목표 사이의 충돌->프랑스는 대만과 팽호 열도 점령 했으나 목표 달성 후 철수했다는 점에서 청일전쟁과 차이. 청일전쟁의 역사적 의의는 조선을 사이에 둔 청-일간의 영향력 다툼을 넘어, 러-일 갈등, 영-러 갈등이 착종하는 계기

22 청일전쟁= 중화제국의 공식적 해체+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갈등과 연합의 패턴 현재화
->조선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독일, 프랑스) vs 일, 영, 미 가 대립 ->고종의 아관파천은 일, 영, 미와 대립 혹은 외면을 초래할 우려 ->시모노세키 조약을 둘러싼 삼국간섭은 역사의 분수령

23 갑오개혁과 동아시아 국제관계 러시아는 애초 청일전쟁 관망자세에서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적극 개입
-->강화교섭초안(시모노세키조약,1895년 4월 17일)이 요동반도 할양을 통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확장으로 나타나자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독일)으로 제동 ->일본의 요동반도 장악 좌절 ->조선내부에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힘 발휘

24 ->인아거일책은 민비 세력 추진+주한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를 통한 러시아의 적극적 한반도 개입정책의 결과
->민비 주도 排日정책: 이준용 체포, 대원군 파 제거/김홍집 내각 타도, 박정양 내각 출범/박영효 축출/시위대 편성, 훈련대(일본군이 훈련) 견제/민영준과 이범진 등 척족과 친러파 등용 ->당시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공사가 조선외교권 박탈하며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화 진행 중

25 ->삼국간섭 이전 일본은 주미 조선공사관 폐쇄, 업무를 주미 일본공사관에 이전하는 일 추진
->당시 주한 미국 공사 존 실(John M.B.Sill)이 국무장관 월터 그레셤(Walter Gresham)에게 보낸 편지: “이노우에는 조선 외교권 박탈 기도하고 있는데…고종은 일본의 이런 기도를 미국정부가 막아 줄 수 있는 지 알고 싶어 한다”(당시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그로버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

26 청일전쟁 이후 을미사변까지 국제관계 --미국, 영국, 일, 러시아의 대 조선 정책의 동향
--고종과 민비는 사실상 궁중에 연금 상태 --삼국간섭 이후에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세장악력은 약화되지 않음 --청일 전쟁 중 일본이 조선에서 배타적 이권 독점 하자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외교관 반발, 이노우에에게 집단 항의( )

27 -- 왕권회복과 조선독립 보전 위해 민비가 추진한 배일행동의 핵심; 조선의 자원 개발권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에 분배하는 것
->미국에 운산 금광개발권 넘김: 미국공사 알렌의 반일 행동 가담 유도(베베르의 권유) ->민비의 친러파 중심 국정 운영은 일본의 반발 촉발—>을미사변( ) 촉발 …

28 ->“일본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민비를 제거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자국 권익을 수호하려 한 일본정부의 폭거=민비시해”(최문형)
=>을미사변의 재구성: 양복차림 한 일본인의 현장지휘—일본 정규군의 출입문 봉쇄—일본군 장교, 영사경찰, 일본공사관원이 민비 시해— ‘한성신보’ 사원들도 현장 가담

29 -> “…황후의 시신은 얼마 뒤 궁에 들어온 미우라 공사에 의해 재확인되고 그의 지시에 의해 화장되었다…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 숲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흉도들은 황후의 시신에 능욕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한영우.2001.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0 -> “일본은 ‘흥분한 낭인들의 우연한 살인사건’이었던 것처럼 왜곡하고 있지만…이들 가운데는 하버드 대학 출신자와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자를 비롯한 지성인도 많았고 후일 각료나 외교관으로 출세한 자도 많았다. 이들은 대륙침략을 주창하던 현양사(玄洋社), 흑룡회(黑龍會) 같은 일본 우익 단체 멤버들이었다…이들은 국익이 걸린 이 사건에 이용되었을 뿐이었다.”(최문형 2001)

31 Q) 민비시해사건 그 이후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 일본 공사는 대원군과 조선훈련대의 합작품으로 몰아감 --주한 영국공사, 미국공사, 러시아 공사는 일본군 직접 가담 증언—미우라 고로 지목 --미국, 영국 정부는 일본과 관계 우선 하여 조선 주재 자국 공사에 사건 개입 금지 지시

32 --미국 영국 정부는 일본의 사건 진상규명 방해에 공조—당시 일본 수상은 이토 히로부미
-- 일본 외무성 ‘일본외교사 사전’(1992): 민비시해는 미우라 공사 주도하에 일부 일본인들이 모의하여 실행한 일로 기술. 일본 정부 차원의 개입은 부인. -->군인은 군법회의에서 전원 무죄선고, 미우라 공사 49명은 기소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면소 판결

33 https://youtu.be/lGDw0s4KA08
일본외교사 사전:사건 이듬해인… 년 2월 11일,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김홍집 내각 붕괴 --친러파 내각 –1897년 민비에 명성황후 시호 추서, 11월 21일 국장 =>러일각축의 시대로…

34 Q)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대한 일본 장악 강화 ->1895년 10월 11(시해 3일 후)일 고종 칙령 발표—민비는 공사간에 조정의 기간 문란케 하고 왕실을 위험에 빠뜨렸다—그 민비가 실종—죄가 막중해 폐서인 한다고—헐버트는 고종이 칙령포고에 서명 한적 없다 증언 박정양은 칙령 포고 부당성에 항의, 사직

35 ->친일내각은 사태 무마 위해 1895.11.26. 민비 폐위 칙령 철회—민비 사망 공식 발표
->1895년 12~1896년 1월; 단발령 발표 ->그 무렵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는 미우라 등 무죄판결 --->고종의 선택은?

36 민비에 대한 불편한 진실 Q) 동학농민봉기 때 외세 청병을 요청한 고종과 민비였지 않은가?

37 Q)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기도에 맞서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은 최선의 방책이 아닌가?


Download ppt "제10강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3)."

Similar presentations


Ads by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