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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민족정신 고대사의 미스터리 – 광개토왕릉비문과 임나일본부설 강원대학교 사학과(인문대학 3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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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와 민족정신 고대사의 미스터리 – 광개토왕릉비문과 임나일본부설 강원대학교 사학과(인문대학 3호관)
한국사와 민족정신 고대사의 미스터리 – 광개토왕릉비문과 임나일본부설 강원대학교 사학과(인문대학 3호관)

2 1. 광개토왕릉비문 1)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전성기 •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391~412년) - 백제의 수도인 한성 진격
- 신라를 왜의 침입에서 구하고 복종시킴 - 북위와 후연을 공격, 요동과 요서지역을 모두 차지 - 부여와 말갈 병합,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 • 장수왕(長壽王, 412~491년) - 동몽고 초원 진출 - 427년 평양 천도(遷都) - 남하정책 → 백제ㆍ신라의 나제동맹(羅濟同盟)

3 1. 광개토왕릉비문 2)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어디인가?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호태왕, 영락(永樂)대왕, 광개토대왕 •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 -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압록강 북안 국내성 근교에 건립 (현재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속해 있음) • 광개토경의 범위 - 서북쪽 : 대흥안령의 거란 정복, - 북쪽 :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 복속 - 동쪽 : 동부 만주의 동부여 복속 요하 서쪽 대릉하 유역에 진출, 후연(後燕)을 붕괴시키고, 북연(北燕)을 세움 - 남쪽 : 백제 공격(한강 유역의 58성), 낙동강진출(왜 토벌, 신라, 가야 복속)

4 01 02 03 04 1. 광개토왕릉비문 2)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어디인가? 광개토경의 의미 장수왕의 남진 정책의 배경
- 동몽고 진출 평양천도, 남진정책, 중원고구려비 02 천손의식(天孫意識)을 바탕으로 한 강렬한 민족적 자존의식 03 백제, 동부여, 신라, 가야, 북연 등 여러 나라를 조공(朝貢)을 바치는 신하국으로 복속 통일의지의 구현 「중원고구려비」, “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04 독자적인 영락(永樂)연호 사용 새로운 천하질서의 중심을 천명

5 1. 광개토왕 비문 3) 광개토왕비문의 해석 문제 •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助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 OOO羅以爲臣民
1. 광개토왕 비문 3) 광개토왕비문의 해석 문제 •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助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 OOO羅以爲臣民 •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 의) 속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OO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신묘년조 기사>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로 활용

6 1. 광개토왕 비문 3) 광개토왕비문의 해석 문제 •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助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OOO羅以爲臣民
• 정인보 : 주어를 왜(倭)로 보지 않고 고구려로 봄 백잔(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고 그래서 조공을 해 왔다. 신묘년에 왜가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파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 • 북한 : ① 왜열도 분국설(倭列島 分國說) :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기 왜 열도에 분국을 세워서 그곳에서 전투를 한 것이라는 주장 ② 박시형 :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OOO羅以爲臣民 부분에서   글자를 전혀 알 수 없는 OOO부분을  초왜침(招倭侵)로 보고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서 신라를 침략했다고 해석 - 중국 연변대 박진석교수 : OOO부분을 왕구신[往求新]으로 보고 고구 려가 백제와 왜를 공파,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

7 1. 광개토왕비문 3) 광개토왕비문의 해석 문제 • 비문변조설 ①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가 주장
- 래도해(來渡海)부분에서 해(海)字를 매(每)자의 변조글자로 봄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助貢 而倭以辛卯年來渡 每破 百殘OOO羅以爲臣民 . 백잔(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건너오자  (왕)이 매번(每) 파(破)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② 한국 선문대 이형구 교수 - 倭는 後로,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로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8 1. 광개토왕 비문 3) 광개토왕비문의 해석 문제 • 신묘년조 내용자체가 과장되었으리라는 주장
- 신묘년(391년)조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영락6년(396년)조의 기록, 즉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58성 700촌을 함락시킨 백제 정벌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를 등장시켰다는 설 -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백제침공을 위한 명분용으로 고구려가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 즉 비문 내용자체를 의심 - 기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도 부정, 비문변조설도 부정  ※ 왜가 신라를 침략,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분명한 사실 

9 2. 임나일본부설 1) 임나일본부설의 의미 (교과서 내용)
(교과서 내용)  고구려는 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는 야마토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일본 열도 사람들은 전부터 철자원을 찾아 한반도 남부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4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했다.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다. 후일 일본의 역사서에서 여기에 두어졌던 일본의 거점을 임나일본부라 불렀다.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취하였다. 바다를 건넌 야마토 조정의 군대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 4세기말부터 5세기초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반도남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임나를 기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정복은 이루지 못하였다.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일본 새 역사교과서 (후소샤 판)

10 2. 임나일본부설 1) 임나일본부설의 의미 • 일명‘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 -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 -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지배했다는 것 • 19세기말 한국침략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인 연구 -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 - 한입병합 및 일제식민통치를 합리화시키는 역사적 근거로 기능 ※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 ‘4세기말 조선’지도(현재)

11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일본서기(日本書紀)』 - 숭신천황 65년(3세기 중반?) 임나국이
조공한 것을 시작으로 신공 49년(369) 에는 소위 가야 7국을 평정하여 임나 지역을 지배하면서 백제의 내정을 간섭한 것으로 되어 있음 - 532년 경 남가라 등이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야마토정권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562년 잔존 임나제국(任那諸國)이 신라에 완전히 통합됨으로써 임나와의 관계가 끝나 는 것으로 되어 있음

12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일본서기(日本書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세기 중엽 일본에서 천황의 권위가 확립 된 후, 8세기 초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 상당부분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여겨짐 - 백제계 사료나 유력 씨족의 가기(家記)를 기본자료로 함 - 일본이 아닌 백제를 대입하면 훨씬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음 출처 내용 비판 신공기 49년(369) <가라(伽羅) 7국 평정기사> 야마토정권의 명령으로 목라근자가 가라 7국을 평정한 것처럼 되어 있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으로 쓰여 있으며 실제로 ‘木’씨는 일본에는 없고 백제에만 있는 성씨임, 또한 목라근자의 군과, 백제의 근초고왕도 작적을 같이 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가락 7국 평정이 백제에 의한 것임을 시사해 줌

13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광개토왕 비문 •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助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
OOO羅以爲臣民 •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 의) 속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OO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주어 문제, 왜열도 분국설, 해석 문제, 비문변조설. 신묘년 기사의 과장설

14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칠지도(七支刀) - 길이 74.9 cm로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음 -『일본서기(日本書紀)』신공기(神功紀)에 백제가 왜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있음(일본서기를 증명해 줌)

15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칠지도(七支刀) - 명문 [앞면]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豈避百兵 宜供供侯王 □□□□作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 정양에 백련강철의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는 많은 적병을 물리칠 수 있는것이므로 마땅히 제후국의 왕들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僞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로 아직 이 칼이 없었던 바 백제의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일지어다

16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송서 왜인전(宋書 倭人傳)
- 왜왕 武 가 송의 順帝에게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제군사 왜국왕(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諸軍事 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요청 - 백제를 제외한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使持節都督 倭 新羅 任那 伽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이라는 작호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음 - 그러나 임나와 가라는 모두 가야를 지칭하는데 같이 나타난다든가, 진한과 마한이 나타나는 점, 백제가 빠진점으로 미루어 허구적인 명예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와 남송은 외교관계를 이미 맺 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제외한 다른 나라를 요청하고 칭하는 것 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치 않았을 듯

17 2. 임나일본부설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고분 - 1990년대 이후 발견되기 시작
- 일본의 대표적 고분인 전방후원분과 형태와 축조방식이 같음 - 일본에서는 이것을 근거로 한반도의 전라도 지방(백제)까지 일본세력이 진출한 것으로 주장 일본 인덕(仁德)천황릉

18 2. 임나일본부설 5세기 무렵의 한반도 고구려 :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 장수왕의 남하정책,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
백 제 : 4세기부터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 요서지역 진출 고구려에 맞서 나제동맹체결 신 라 : 4세기 후반 고대국가로 발전 나라이름을 신라로 정함(503년) 불교수용(527년, 법흥왕, 이차돈 순교) 고대국가 발전을 이룸 (왕권확립, 관료체제, 율령반포, 불교의 공인) 17

19 2. 임나일본부설 5~6세기 무렵의 일본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움집과 유사한,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주거 문화를 지니고 있었음 4~5세기에 걸쳐 현재의 나라와 오사카 지역의 소국들이 연합하여 좀 더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정치조직을 만듬, ⇒ 야마토 정권의 성립, 호족연합체(연맹체)적인 성격 6세기가 되어야지만 고대국가의 기틀이 잡혀감 - 헌법 제정(쇼토쿠태자), 관위12계제도입 - 불교수용 : 서기 587년 불교의 전래를 둘러싸고 소가씨 등의 숭불파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등의 배불파의 암투가 있었음, 결국 소가씨가 실권을 잡음

20 2. 임나일본부설 5~6세기 무렵의 일본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의 3국, 그 중 백제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한자, 유교, 불교뿐만 아니라 양잠, 건축, 토기제작 기술 등을 흡수, 수나라에도 견당사를 파견하여 대륙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 그 중 불교는 특히 매우 융성하였고, 백제의 영향력이 강한 국제성 짙은 문화를 만들어 냄 ⇒ 아스카 문화 백제에서는 승려 및 전문기술자인‘박사’등을 보내 우수한 문화를 전해줌 당시 일본은 백제를 큰나라, 즉 구다라 (くだら)라고 부르며 경외시 함

21 2. 임나일본부설 5~6세기 무렵의 일본 최초의 한류(韓流) 열풍 : 구다라 (くだら) 열풍 삼국에 대한 일본식 발음
- 고구려(こうくり), 신라(しらぎ), 가야 (から) : 우리 나라식 발음과 비슷 - 백제(百濟) : 백제와 비슷한 발음도 아니고 한자를 읽는 방식도 아님, 즉, 하쿠사이(はくさい)라고 하지도 않음 현재까지도 구다라 (くだら)라고 발음함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 시시하다. 하찮다. 쓸모없다. 구다라(くだら) 유래 :‘큰나라’라는 또는‘곰나루(웅진, 熊津)’ 20

22 2. 임나일본부설 일본 사회의 변화(구다라 열풍) 옷의 신의 된 백제인 백제계 도래인(渡來人, 이주민)이 건너가기 시작
475년 무렵 백제는 일본에 많은 사람들을 파견함 이들은 문화전파를 담당 1098년에 일본지도인 난파팔랑화도를 보면 백제주(百濟州)가 나타남 옷의 신의 된 백제인 쿠레히코신사 : 백제에서 건너간 의류 기술자 두 사람을 모셔둠 베틀부품이 발견됨 염료로 쓰이는 잇꽃씨앗이 발견됨 (일본에는 없던 것임) 원시적인 형태의 주거 문화에서 6~7세기가 되면 백제에서만 발견되는 ‘대벽건물’형의 건물이 발견됨 주로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 부뚜막, 시루가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함 백제 옷이 유행하기 시작 <부상략기> : ‘아스카 땅에 법흥사를 세우면서 찰주를 건립하던 날 소아 대신을 비롯하여 백여명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으며 보는 이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23 2. 임나일본부설 일본 사회의 변화(구다라 열풍) 풍납토성 등에서 사용된 백제의 ‘부엽공법’은 김해의 벽골제 등에서도
사용된 첨단기술 - 흙과 나뭇잎층을 교차로 쌓는 기술로 6~7세기에 지어진 일본 오사카의 협산지(狹山池) 제방에도 사용되어, 한국의 토목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로제시됨 - 협산지와 더불어 지하수로를 만들어 당시의 오사카를 농경지화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갖춘 핵심도시로 부상시킴 오사카 협산지(狭山池)

24 ※ 과제물 안내(20점) 최근 방영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선덕여왕’을 1회분 보고 그에 대한 감상을 쓰시오.(기본 0점)
- 비판 의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0점 – 2.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의 동향에 대하여(기본 5점) - 신탁통치안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및 찬탁, 신탁을 둘러싼 좌,우진영의 대립을 간략히 ※ 10월 31일까지(기간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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