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보고서 장흥안양중학교 3 학년 1 반 17 번 김미리
차 례 조사순서설명 조사내용 조사소감 참고자료
조사지역 : 장흥 조사항목 : 우리고장 장흥의 고인돌 조사방법 : 실내조사, 현지조사 조사일시 : 2008 년 4 월 16 일 조사순서 : 1. 계획단계 2. 조사단계 3. 정리단계 조사 순서 설명
실내조사 고인돌의 의미 : 고인돌이란 거석문 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 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 돌을 덮은 선 사 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지석묘 ( 支石墓 ) 라고도 불리는 고인돌은 한 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아 시아 지역과 영국과 스위스를 비롯 한 지중해 연안의 유럽 지역, 중동지 역, 북아프리카 지역, 인도 남부 지역, 자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동남 아시아 지역 등 전세계적으로 분포 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형태 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받침 돌 위에 덮개 돌이 있는 탁자모양을 띄고 있다.
기능 : 고인돌이 왜 만들어졌 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19 세 기 말 서양인 Allen, Hulbert, Underwood 등과 일본인들은 무덤으로 활용되었다는 분묘 설과 제사를 모시던 곳이었다 는 제단설을 제기하였었다. 이후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현재는 덮개돌의 형태와 하부 구조, 입자와 군집 내에서의 위치, 껴묻거리 등을 통해 무 덤, 제단, 묘표석으로 활용되 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내조사
고인돌은 언제부터 만들어졌 을까 ?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다. 청 동기 시대는 인류가 청동기를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사용 하던 시기를 말한다. 학계에서 는 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한 때를 B. C 10 세기경으 로 보고 있으나, 청동기를 독자 적으로 만든 시기 부터를 청동 기 시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 른 곳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라 도 그것이 사용된 때부터 청동 기 시대로 할 것인가에 따라 더 소급하여 추정하기도 한다. 실내조사
인류가 인위적으로 시신을 묻기 시작한 때는 중기 구석 기시대부터로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무덤 유적들 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인들 은 얕은 구덩이를 파고 시체 를 매장한 뒤 약간의 돌을 모 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 의 움무덤을 만들었다. 본격 적으로 무덤의 형태가 정형 화되고 꾸며지게 된 것은 청 동기 시대부터이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 제로는 고인돌 ( 支石墓 )· 돌무 지무덤 ( 積石총 )· 돌널무덤 ( 石 棺墓 )· 돌덧널무덤 ( 石槨墓 )· 독 무덤 ( 甕棺墓 ) 등이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생업 경제의 형태가 농경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단계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채집으로부터 벗어나 농경에 대한 의존도가 보다 높아지면서 안정적인 농경 단계에 도 달한 청동기인들은 이동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들어서게 되었다. 농경 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히 생업경제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었다. 이는 생활 방식의 변화와 함께 시간과 공간 및 경관 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 다. 고인돌을 포함한 환호취락 등의 청동기 시대 축조물들은 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그것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당시 청 동기인들이 주변 환경을 해석하고 또 그것을 변경시켰다는 것이 다. 다시 말하면 농경사회의 진전에 따라 청동기 시대인들은 시 간과 공간 그리고 경관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의 방식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실천의 능력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진전이 공간과 그를 이용하는 방식뿐 아니라 시간과 역사 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 변화가 고인돌 군을 축조 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실내조사
한반도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을 살펴보면 거대한 공동 묘역이나 단독 묘역으로써 특정한 범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금동 유적의 경우 해발 50m 전후의 등고선을 따라 거대 한 공동 묘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창원 덕천리 고인돌의 경우 단 독이지만 거대한 묘역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 급했다시피 농경민들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경관에 대한 관념은 채집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농경사회의 물질문화 가운데 기념물과 같은 것은 의례를 통해 축조되고 존속함으로써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취락 및 경작지와 함께 일정한 공간적인 단위를 점유하면서 존속했다. 그 공간을 공유하 고 그 공간에 의존하는 구성원들은 농경의 공동작업과 상호교환 에 의해 사회집단화 되고 기념물의 공유를 통해 그 정체성이 재 정의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취락이 소멸하여도 기념물은 그 장 소에 남아서 오래도록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 하였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기념물이 바로 고인돌인 것이다.
덮개돌 : 개석 ( 蓋石 ) · 탱석 ( 탱石 )· 상석 ( 上石 ) 이라고 불리는 덮개 돌은 무덤방 위에 올려진 거대한 돌이다. 덮개돌의 무게는 보통 10 톤 미만이지만 거대한 탁자식 과 기반식의 경우 20 ∼ 40 톤에 이 르며 200 톤 이상의 초대형도 있 다. 실내조사
받침돌 : 덮개돌을 받치 고 있는 돌이다. 지석 ( 支 石 )· 고임돌 · 굄돌 · 족석 ( 足 石 ) 이라고도 한다. 받침 돌은 덮개돌은 지지하고 무덤방을 보호하는 역할 을 한다. 받침돌의 유무 와 크기에 따라 탁자식 · 기반식 · 개석식 등 세 가 지로 고인돌의 형식이 분류된다.
4 월 16 일 장흥선사문화유 적공원에 다녀왔다. 선사시 대 집터와 유물의 사진, 그리 고 고인돌이 전시되어 있었 다. 전시되어 있는 고인돌을 보고 많이 놀랐다. 실내조사 를 하던 중에 처음 알았던 사 실 중의 하나가 바로 장흥에 약 2 만 5 천여개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 만, 우리 장흥군의 고인돌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현지조사
선사문화유적공원은 자 연경관의 변형을 최대한 억 제하고 고인돌 자체가 가지 고 있는 가치를 보여주고자 시설물 설치를 최소화하였 으며, 호남문화재연구원에 보관중인 12 개 유적 지석 묘, 석곽묘, 석실묘 등 총 87 기와 목포대학교박물관 에 보관중인 5 개 유적 총 63 기 지석묘를 이전 복원 하였다고한다.
이 고인돌 군은 유치면 송정리 갈두에 있었던 것으로 2002 년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갈두 고인돌은 모두 3 개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 무리는 모두 하천의 방향과 동일하게 열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집자리가 집단적으로 확인되었다. 무덤칸은 돌덧널형, 돌널형, 혼합형 등 다양하다. 발견된 유물로는 돌화살촉, 돌대패,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가락바퀴 등이다.
이 고인돌군은 총 30 기가 조사되었는데 동지구와 서지구로 구분된다. 동지구는 동서방향으로 3 열을 이루고 있었으며, 서지구는 동서방향으로 2 열을 이루고 있었다. 무덤칸은 판석을 사용하여 2, 3 단으로 쌓아서 축조한 돌덧널형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 받침돌을 두었다. 유물은 검은간토기, 점토띠토기, 돌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이 배바위는 장흥댐 수몰지구 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 무게가 100t 이상으로 추정된다. 규모 는 길이가 970cm, 너비 610cm, 두께 199cm 이다. 송정리 송정 고인돌 가군에서 가장 높은 곳 에 위치하였으며, 장축 방향이 남북으로 주변 덮개돌이 대부 분 동서방향인 것과 구별된다. 평면형태는 장타원형, 단면형 태는 반타원형이다. 원래의 고 인돌을 이전하려고 하였으나, 훼손의 우려가 있어 현지에 보 존해 두었고, 이곳에 있는 것은 우리문화재보존연구소가 복제 하여 복원한 것이다.
우리 장흥에 고인돌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초등 학생 시절 보림사 쪽으로 야영을 갔을 때 고인돌이 발 견되어 개발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 것 같지만, 약 2 만 5 천여 개 씩이나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고인돌 하면 화순, 고창을 떠올렸었는데 우리 고장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고인돌을 보유하고 있다니 … 이번 답사를 통해 장흥 고인돌에 관해 알게 되어 정말 뿌듯하다 년도에 고창 ` 화순 ` 강화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흥의 고인 돌도 개수나 특징면에서 결코 다른 지역이나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작년에 제 10 차 세계거석문화총회가 장흥에서 열려 세계 여러 학 자들이 장흥 고인돌을 살펴보고 갔다고 한다. 이는 장 흥의 고인돌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하루빨리 우리 장흥의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를 장흥군학 생으로써 빌고 또 빌어본다.
참고자료 인터넷 - 네이버 검색 서적 - 국어사전 등 현지 답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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