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근현대사 19세기 일본사회와 근대화 우송대
19세기 일본사회 난학이 발전하고 서양서적이 수입되었지만 대외 접촉은 거의 전무 나가사키 무역체제가 유일 북방지역에서 러시아와의 조유 중국으로부터의 소식(아편전쟁) : 일본인의 충격과 위기의식이 증폭 영국은 일본에 크게 관심이 없었음. 일본의 통상개방을 위한 노력은 미국이 주도
페리의 내항 1858년 펜실베니아에서 유전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래기름에 의지 고래 포획을 위해 일본 해변까지 도달 중국으로 가는 도중 증기선의 석탄 공급기지로 일본이 중요 미국 해군은 위험부담이 없으면 일본과 회담을 개시 1853년 페리 원정대는 “선원과 재산 보호, 물자 보급 허가, 일본 내 항구 입항”을 요구
막부의 몰락 1854년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 체결 1860년 막부 사절단이 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 방문 1863년 조정이 존왕양이를 명령하여 조슈번이 미국 상선 포격→시모노세키 전쟁, 영국의 가고시마 포격 1864년 조슈번이 조정 장악 시도 실패, 막부가 조슈 정벌 명령 1865년 조슈번 굴복, 번내 과격파가 다시 일어나자 막부는 2차 정벌 명령 1866년 사쓰마-조슈번 연합세력이 막부에 대항, 쇼군 사망 1867년 요시노부 쇼군 취임, 고메이 천황 사망. 쇼군 사표(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 1868년 왕정복고 대호령 선포, 막부 옹호 세력과 사쓰마-조슈번 신정부군 사이에 전쟁
메이지유신 사쓰마번- 조슈번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유신 실시 내각 제도의 성립, 일본 제국 헌법 공포, 입헌군주제 실시 수도의 명칭을 에도에서 도쿄로 결정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중앙집권을 강화 사농공상의 폐지,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 학제 개정, 지조 개정, 징병령, 양력 사용, 사법제도 정비, 단발령 시행, 육식 보급, 철도의 개통 통화단위 엔의 도입, 국립은행 설치, 우편제도, 전신망 구 막부시대의 불평등 조약의 개정 만국공법의 수용
세이난전쟁(西南戦争) 1877년(메이지 10)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사무라이 무력 반란이 발생 메이지 정부에서 사무라이의 칼을 차는 특권과 녹봉을 지급하는 특권을 박탈 전쟁 이후 사족 계층의 특권은 완전히 부정되고 몰락함 빈부격차 확대를 초래하여 몰락 소작농의 대량 발생 신분보다는 자본이 우월한 사회가 도래→근대화 진행 직업군인의 정부군이 승리함으로써 징병제에 의한 국민개병체제가 정착 징집된 병사에 대한 정신교육을 중시→천황 중심의 군대 양성
메이지국가의 건설 : 재정 마쓰카타의 재정정책 재정담당 대신을 대장경이라고 부름 “재정이 건전화하지 않는 한 경기는 좋게 안된다” 초긴축재정 정책, 쓸데없는 지출 억제, 은 태환 지폐발행 증세 실시 : 주세, 담배세, 지방세 식산흥업 정책 : 대출 장려 + 관영 공장 불하 일본은행 개업, 수출증대를 도모 청일전쟁이 일어나도 전후 경제가 붕괴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짐 세이난전쟁 이후에는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림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 헌법 조슈번의 유력자로 정계 입문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 시찰 정한논쟁에서 시기상조라는 의견 표명→정국을 주도 1878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오쿠보가 암살되자 권력 공백을 틈타 승진하고 권력 장악 이토는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 초안을 작성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총리대신에 오름
메이지헌법의 구조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제국군대 이토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 조슈번 하급 사무라이 아들 이토가 정치 구심점이라면 야마가타는 군대의 구심점 일본이 군대를 편성할 무렵 서양국가도 군대를 개편 미국 남북전쟁,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전쟁, 보불전쟁에서 교훈을 얻음 메이지 지도부도 서양을 시찰하면서 이러한 교훈을 차용 메이지 정부는 초기 프랑스의 용병술을 지침으로 삼암 육군은 프랑스 모델, 해군은 영국 모델을 지침으로 명령 1880년 육군은 독일식 모델로 전환 1878년 참모본부가 신설
모리 아리노리와 메이지 교육 사쓰마번 출신의 초대 미국공사, 초대 문부대신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배울 것을 주장 교육의 자유, 종교로부터의 독립된 교육, 여성평등, 국제공법을 주장 1872년 학제를 공포 : 지방에 난립한 학교를 국가제도 안에서 재정비 일본국민에게 識字 능력을 보급 제국대학령, 사범학교령, 소학교령, 중학교령 = 일본 교육제도의 기틀 1877년 도교대학의 창설, 이후 제국대학으로 명명 소학교의 교육 목적은 학생들에게 국가가 무엇인가를 인식시키고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것
일본제국의 건설 1890년 7월 메이지 헌법 아래 최초의 총선 실시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하는 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짐) – 투표권자는 45만여명 97%의 투표율 당선자 중 191명이 평민, 109명이 구 사무라이 출신으로 신분과 계급이 변화함. 125명의 직업이 농업 일본은 입헌정치와 대의정치에 성공한 최초의 비-대서양권 국가가 되었다.
외교정책과 조약개정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 문제, 1875년 러시아와 협약에서 쿠릴 열도를 얻고 사할린을 잃음. 1874년 타이완 원주민의 류큐 어부 살해로 타이완 정벌 선동, 1879년 중국으로부터 지배권을 인정받고 오키나와 현으로 통합 조선과의 관계에 차질이 빚어지자 메이지 정부는 우선 서양과의 조약 개정에 착수 관세자주권의 박탈은 일본 산업 발전의 방해 1894년 영국과 새 조약에서 영사재판권 폐지 1899년 관세자주권 회복 1911년 미국과의 무역에서 관세 자주권 회복
청일전쟁 일본정부는 조선문제를 놓고 청나라와 정면 대결 결정 제국의회는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즉시 가결 히로시마에 군영을 설치 1894년 7월 전쟁 발발, 승리 승리 요인은 사회와 군대의 급속한 근대화 대다수 외국인들은 청나라의 승리를 예상 시모노세키 조약 : 영토 할양, 최혜국 대우 보장, 거액의 금전적 보상 러+독+프의 개입으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요동반도 반환→일본의 과제로 남게 됨(분노와 굴욕)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친청 정부는 친러 정부로 전환
제국주의 외교와 러일전쟁 1898년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장악 – 지정학적인 국방의 안보가 강조 국가의 주권선과 이익선을 구분하여 강조하기 시작 조선과 필리핀은 일본과 미국의 이익선 삼국간섭에 참여한 국가들이 중국에 보상을 요구하자 일본이 긴장(프랑스는 광동성, 독일은 산동성 요구, 러시아는 요동에 25년간 조차 요구) 중국에서 의회단 운동이 발생하자 일본은 적극적으로 진압,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 러시아가 조선의 북부를 점령하는 소식이 전해짐 만주는 러시아가 조선은 일본이 우의를 인정한다는 제안이 오고갔으나 일본정부는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함 일본은 결국 영국을 선택 – 1902년 영일동맹 영일동맹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징표
일본내각은 1904년 2월 전쟁을 하기로 결정 최초의 근대적이면서 가장 참혹한 전쟁, 대량 사망 발생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 7만, 러시아군 8만5천명 사망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찬사를 받음 미국은 양국을 초청하여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 : 러시아의 요동반도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양도, 50도 이남의 사할린은 일본 영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 인정 영국에서 애국심과 충성심의 부활을 요구하는 일본 배우기 운동이 일어남
한국 병합 평양전투 이후 고종은 러시아와 관계 단절 일본의 조선 지배 강화에 놀라거나 분노한 외국인은 거의 없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 미국의 묵인 제2차 영일 동맹 체결 :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영국이 인정 미국 목사 앨런 : “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배할 능력이 없다” 군부의 병합 요구와 이토의 한국 능력에 대한 회의 속에서 나온 절충안 : 을사조약 통감 이토는 자신이 지원하는 개혁에 대해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협조하고 순응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안정된 친일체제가 구축되지 않자 이토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 일본의 한국 병합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